I am Noble

00469 Endless Raids

“……제니스와 결별하면 어차피 미국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니스는 미국 시장을 잃고 이익이 조금 줄어들 뿐이죠. CIA는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강한 미국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고 끝에 회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인 겁니다.”

긴 설명이 끝났다. 최윤과 장태준은 진지한 얼굴로 묵묵히 듣고 있었다.

“위험한 길을 걷고 계시는군요. 만약 밀월 관계가 알려지게 되면…….”

칠드그린은 괜찮다는 듯이 웃기만 했다. 그 정도쯤이야 감당할 수 있다는 여유가 느껴졌다. 장태준은 괜히 쥐가 고양이를 생각해준 꼴인가 싶었다.

“그런데 전 지구를 감시할 수 있을 정도로 추적시스템을 구축할 이유가 있습니까? XS-3은 어차피 궤도 수정이 쉬워 상관없을 텐데요. 6개 예비대가 필요한 만큼만 매입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칠드그린이 조금 궁금하다는 듯이 툭 던졌다. 장태준은 잠시 말을 아꼈다. 상대가 정보기관의 수뇌부다 보니 아무래도 대답이 조심스러워지게 된다.

그러나 장태준은 곧 결심을 굳혔다. 어차피 유지웅을 통해 칠드그린이 그의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도 한 뒤다. 거리낄 것은 없었다.

“블루 결정체를 얻기 위해서 레드 몹을 잡는 나라는 아직까지는 한국뿐입니다. 제니스에 종종 레드 몹 원정 의뢰가 들어오긴 하지만 결정체 그 자체보다는 생존이나 안전이 주목적이죠.”

원정 의뢰는 거의 다 생존과 안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인구 밀집 지역에 지나치게 가까이 접근해서 서식하는 레드 몹을 제거해 달라든가, 주요 물류 수송로를 갑자기 차지한 레드 몹을 처치해 달라든가, 그런 식이다.

아직 대부분의 국가는, 레드 몹이 먼저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면 굳이 싸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 블루 결정체는 어차피 제니스가 가져가고, 의뢰비용을 따로 지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안전을 목적으로 레드 몹을 잡아달라는 요구만 해도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조만간 안전만이 아닌, 블루 결정체 수급을 목적으로 한 의뢰 수요가 폭증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시장이 억눌려 있을 뿐이지요.”

“그렇군요. 머지않아 많은 나라들이 블루 결정체를 얻기 위해서 레이드 의뢰를 할 시대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현재의 6개 예비대만으로는 운용이 불가능합니다. 필연적으로 몸집을 키워야 합니다. 통합추적시스템 구축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전 지구를 커버 범위에 두려는 겁니다. 그때 가서 준비하면 너무 늦습니다. 어차피 회장님 입장에서는 준비자금은 푼돈에 지나지 않으니, 부담도 없으시고요.”

칠드그린은 짝, 짝, 짝, 박수를 느리게 쳤다. 그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귀하는 야전사령관을 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그릇이군요.”

결정체 관련 부서, 혹은 WCO 같은 곳에서 한 자리를 맡았다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 제니스 전술팀장이라는 지위도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가까운 대단한 자리이지만, 야전사령관보다는 고위행정가를 했으면 레이드계 발전에 더 큰 기여를 했을 것 같다.

“록히드마틴이 지금 보유한 XS-3 대수는 얼마 되지 않을 겁니다. 제니스 단독 운용이 가능할 정도밖에 안 될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제조단가가 너무 비싸서 미 국방부가 구매를 거절하는 바람에 추가 생산이 멈췄지요. 그러니 지금 미리 주문을 해놔야 몇 년 안에 전 지구를 커버 범위에 둘 수 있을 겁니다.”

“CIA 수뇌부가 미스터 장 같은 인물이었으면 그런 수많은 불행도 없었을 텐데요.”

조금 뼈가 느껴지는 말에 최윤은 고개를 들었다. 칠드그린은 다 안다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최윤은 피식거리며 술을 한 모금 삼켰다.

“최 박사님 혼자서 휘버 박사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제가 사람을 붙여 도와드리지요.”

“……알고 있었습니까?”

“오픈형 자기공명추적장치가 제니스 연구단지에서 건조 중인 입자가속기에 꼭 필요한 부품이긴 해도, 최 박사님이 그거 하나 때문에 미국을 올 것 같진 않아서요.”

“그 말씀이 맞습니다.”

최윤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휘버 박사의 연구 자료는 미 정부에서 극비로 지정하고 보관, 연구 중입니다. 하지만 귀하의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을 겁니다.”

“연구 자료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럼?”

“혹시 휘버 박사의 연구를 이어받은 가족이나 후계자 같은 사람은 없습니까? 아마 암살 직후 위협을 느끼고 해외 망명을 했을 것 같은데요.”

칠드그린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가족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평생을 연구에만 매진해온 분이라서요. 정식으로 후계자를 두었다는 것도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웬만한 석학들은 휘버 박사의 눈에 차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군요.”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디서 오는지가 중요한 거죠.

「녹서스,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어디서 오는지가 진짜 중요한 거야.」

「어떻게……. 어디서…….」

「중요한 것은…….」

들어본 적 없는 친구의 목소리. 그리고 레지나의 목소리. 두 음성이 나선처럼 꼬여 머릿속에서 파동을 친다.

‘우연일까?’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레지나가 무심코 흘린 지적은 예사로 볼 수 있을 만큼 가벼운 게 아니었다.

‘물어볼까?’

그런 충동이 들었지만 곧 거부감이 들었다. 칠드그린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가 유지웅의 사람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미국 첩보기관의 수뇌부이기도 했다. 바로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EIS는 CIA와 다르다지만, EIS 또한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 아닌가.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던 최윤은 이윽고 다시 얼굴을 들었다. 차가운 한이 서린 눈빛을, 칠드그린은 물끄러미 주시했다.

“전 CIA 국장인 토미 에슨이 휘버 박사의 암살에 최종 관여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현재 아이오와 주 형무소에서 수감 중입니다.”

얼마 전에 가정 문제로 잠시 형 집행을 중지하고 며칠 풀려나긴 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감옥을 벗어날 수 없는 몸이었다.

“그를 만나볼 수 있습니까?”

* * *

“으악! 안 돼! 히, 힘이 빠진다! 으아악!”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난 남기철은 폐가 터질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옆에서 아내가 놀라서 일어났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악몽이라도 꿨어요?”

“허억, 허억…….”

“어머, 이 땀 좀 봐. 큰일을 할 사람이 이렇게 건강이 허해서야……. 내가 내일 당장 보약이라도 지어와야겠네.”

남기철은 저도 모르게 오른쪽 엉덩이를 만졌다. 꿈에서 칼침이라도 맞은 듯 욱신거린다. 그토록 생생한 꿈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지금은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그냥 개꿈 좀 꿨나 봐. 출근해야겠어. 준비해 줘.”

“벌써요? 아직 날도 다 안 밝았는데…….”

“일찍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그래.”

얼른 일어난 아내는 잠옷을 갈아입고 남기철의 출근 준비를 도왔다.

요즘 들어 악몽을 자주 꾼다. 꿈의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하얀 봉 같은 게 매번 등장하는 것만큼은 생생하다. 회초리인지 막대기인지 모를 하얀 봉은 무슨 귀신이라도 들린 마냥 자신을 쫓아다닌다. 심지어 오늘 꿈에서는 엉덩이에 꽂히기까지 했다.

누가 봉을 던진 것 같긴 한데 그거까지는 도대체 기억이 안 난다. 개꿈도 무슨 이런 개꿈이 있는지, 그냥 헛웃음만 나온다.

WCO 의장인 그는 세종시에 마련된 임시 관사에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아직 중학생인 아이가 문제였는데, 직통 자기부상열차를 이용하면 30분 안에 등교를 할 수 있어 그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의장님, 나오셨습니까.”

출근을 하자 직원들이 급히 일어나서 인사를 한다. 그러지 말라고 매번 하는데도 영 변하는 게 없다.

“밤 바이러스 피해자 보상 건은 어찌 됐습니까?”

“다행스럽게 예정한 대로 오늘까지 모든 절차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다행이군요.”

피해자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다 보니, 정당한 피해자 규명 및 정확한 피해 내역을 확인하느라고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여기 결재 서류입니다.”

최종 서류를 받아보니 지난 몇 달 간 고생을 했던 게 감회가 새록새록 솟았다. 남기철은 천천히, 하지만 정성스럽게 서류에 서명을 했다.

“총 1조 21억 5,300만 달러군요.”

“덕분에 WCO 보유 현금이 전부 바닥이 났습니다. 나머지 자산은 당장 현금화에 시간이 걸리는 현물이나 부동 자산이 대부분입니다.”

WCO의 총 자산은 11조 2,000억 달러. 로스차일드 압류 재산의 일부를 운용 자금으로 쓰라고 유지웅이 떼어준 것이다. 그 중에서 현금의 비중은 약 10% 정도였으며, 세현은행에 기구 계좌를 틀고 예치해두었다. 하지만 밤 바이러스 피해자 보상을 해주느라 현금이 바닥났다.

“피해국들이 달러보다는 원화를 더 선호하는 편이라 대부분 세현은행이 발행한 수표로 지불을 했는데, 이게 오히려 반응이 좋았습니다.”

“이번 보상 건 때문에 원화가 너무 강세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그렇게 중얼거리던 남기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자신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입장이 아니다. 더 이상 한국의 공무원이 아닌, 세계의 공무원이니.

“한국 정부와 기업들이 알아서 잘 처신하지 않겠습니까? 원화 강세는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이어온 추세이자 피해갈 수 없는 흐름입니다. 심지어 미국 피해자들 또한 원화, 특히 세현은행 수표를 선호했습니다. 고액 화폐 시장에서는 세현은행 수표가 현금처럼 쓰인다고 합니다.”

최근 세현은행이 발행한 수표가 급격하게 국제 시장에 풀려나갔다. WCO는 세현은행에 예치한 자금을 운용하기 위해 수표를 이용했다. 현금 전액을 세현은행에 예치한 유지웅도 일본 유물을 매입할 때 세현은행의 수표를 사용했다.

아직 그 유통 물량이 많은 것은 아니나 고액 화폐 시장에서, 특히 레이드 부문에서는 현금 이상의 신뢰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번에 피해자 보상을 해주느라 기구가 보유한 현금이 바닥났으니, 현물 자산 처분을 서둘러야겠습니다. 농담 아니라 당장 직원들 줄 월급이나 소소한 비품 구매까지 제동이 걸릴 지경입니다.”

남아 있는 10조 달러의 자산은 현금이 아니었다. 부동산이나 현물이 대다수였다. 비서실장의 조언에 남기철은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오늘 내가 흑석동을 한 번 방문해서 결재를 받아오지.”

“의장님, 결재라니요…….”

“한두 푼도 아니고 10조 달러나 되는 자산인데 현금화를 하려면 당연히 결재를 받아와야지.”

박주혁 비서실장은 잠시 서글퍼졌다. 그는 원래 남기철이 행정부에서 일하고 있을 때부터 부하 직원이었다. 그 인연이 이어져 WCO 의장 비서실장으로 일하고 있는 영예를 안았으나, 남기철이 저럴 때마다 조금은 답답하기도 하다.

“의장님, 아니 선배님. 제가 진짜 이 말씀 좀 드려야겠습니다.”

“……왜? 박 과장?”

갑작스러운 후배의 박력에 눌린 남기철은 저도 모르게 행정부에서 사용하던 호칭이 튀어나왔다.

“그 자산 다 뭡니까? 회장님과 여러 나라가 합의해서 WCO 독립 자산으로 떼어준 거 아닙니까. 선배님은 WCO 최고 책임자고요. 보유 자산 처분해서 현금화하는 것까지 일일이 결재를 맡으러 다니는 것은 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규모가 너무 커서…….”

“WCO 체신도 생각하셔야지요. 회장님도 그런 거까지 일일이 허락 받으러 오는 거 달갑지 않으실 겁니다.”

“그, 그럴까?”

“그럼요. 그냥 눈 딱 감고 처분 절차 밟으세요. 우리가 WCO 자산 빼돌려서 이상한 데 탕진하는 것도 아니고, 현금이 바닥나서 몇 가지 좀 현금화하는 건데 무슨 그런 걸로 일일이 외부 눈치를 봅니까? 선배님은 이 기구 최고장이라고요, 장!”

남기철은 크게 결심을 굳혔다.

“자네 말이 옳아. 정당한 권한이 있는 업무인데 그런 거까지 일일이 귀찮게 상사의 허락을 받으러 쫓아다니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짓이지. 처분 가능 자산 목록 좀 가져오게.”

“여기 있습니다, 의장님.”

“어디 보자……. 이게 좋겠군. 일단 이거 먼저 처분하게.”

“……그 부동산 시가가 30억 밖에 안 되는 겁니다만? 일단 당장 올해 예산으로 필요한 금액이 600억이니까 이 부동산부터 우선 처분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건 잠깐 좀 더 생각을 해보고…….”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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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대의형제 : 안 되겠어. 쟤부터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