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Noble

A middle-aged hero?

아이오와 주 괴수 난동 사태는 진압되었으나, 화마가 남기고 간 상처는 컸다. 1급 재난 사태가 선포된 덕분에 많은 미국 시민들이 혼란과 패닉을 겪어야 했다. 피난을 위해 해외로 빠져나간 시민이 무려 15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괴수 군단이 진압됨에 따라 다른 지역은 점차적으로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피해에 노출된 아이오와 주는 아직도 혼잡 그 자체였다.

도로, 수도, 철도, 통신 중개소 등 대부분의 기반 시설이 괴수 군단에 의해 파괴되어, 정확한 피해 내역을 집계하는 작업조차 어려웠다. 자그마한 도시 하나도 아니고, 남한 면적의 약 1.5에 달하는 지역 전체가 초토화되었다 보니, 하루 이틀 사이에 처리할 수 있는 행정 업무가 아니었다.

특히 대다수 피난민들이 몰려든, 아이오와 주 유일한 안전지대인 파울러 시티는 지옥을 방불케 했다. 다소 과장해서, 거리마다 사람들이 넘쳐나서 발 디딜 공간조차 없을 정도다.

시티 거주민들은 피난민을 자기 집에 들여놓지 않으려고 총을 움켜쥐고 매일 같이 다투었다. 이웃끼리 연합해서 외부인을 경계하기도 하는 등, 분위기가 갱단을 연상할 정도로 살벌했다.

식량, 식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보니 매일 같이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외부와 원활한 교신 따위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연방 정부, 혹은 인접 주에서는 최소한의 유지를 위한 식량과 식수를 헬기편을 이용해서 보내주는 수준이었다.

괴수 사태가 진압되었으니 아이오와 주 정상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게 이치에 맞다. 문제는 지금 연방 정부가 그럴 정신이 없다는 데 있었다.

서부 지역의 10개 주가 합심해서 연방 탈퇴를 시도하고 있다 보니, 한결 덜 급한 아이오와 주 정상화 계획은 뒷전으로 밀려난 것이다. 파울러 시티가 혼잡하긴 하지만 최소한의 치안은 유지되고 있으니, 당장 급한 건 그게 아니라는 논리. 물론 현상 유지를 위한 식량과 식수만큼은 꼬박꼬박 보급해주고 있었다.

“정상화 기미가 아직도 없답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말을 들어보면 괴수 군단은 제니스가 진압한 거 같은데, 뭐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는지…….”

“무전은 여전히 안 되나요?”

“범위가 짧아서 안 터집니다. 위성망이 망가져서 위성 전화도 안 되고요. 시청에는 분명히 장거리 통신수단이 있을 텐데, 도무지 들여보내 주질 않으니…….”

“괜찮습니다. 일단 괴수가 진압됐으니 느긋하게 구조를 기다리면 되겠죠.”

그레이브스는 최윤에게 매번 죄송스러웠다. 귀빈을 이렇게 누추한 곳에 모셔야 하다니. 제니스 회장이 이 일을 알면 얼마나 크게 화를 낼까?

“곧 배급 시간입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그래요. 매번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응당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인구수용 범위를 아득하게 초월한 탓에 파울러 시티는 혼잡 그 자체였으나, 무정부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일단 무장한 경비 병력이 건재하고, 헬기편을 통해서 식수 및 식량이 공급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혈기를 못 참아서 싸우다가 죽는 사람은 나왔지만 굶어 죽는 사람은 아직까지 안 나왔다.

“연방 정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이오와 정상화부터 서둘러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레이브스는 오리건 주의 연방 탈퇴 선언 때문에 지금 백악관이 정신이 없다는 걸 전혀 몰랐다. 수많은 피난 무리에 섞여 있다 보니 외부 소식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저 비시의 무능함을 원망할 뿐이었다.

“줄 서요, 줄!”

“새치기 하지 마!”

“이봐, 거기! 늦게 왔으면 뒤로 꺼져!”

역시나 오늘도 배급소는 험악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받기 위해 새치기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팔뚝에 문신을 한 남자들이 서로 밀치고 다투며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난동을 피웠다. 보다 못한 무장 경비병이 허공에 총을 난사하며 위협을 했다.

“이봐, 거기! 통제 안 따를 거야?”

“얌전히 줄 서면 재깍재깍 나눠주잖아!”

그레이브스는 뒤에서 그 꼴을 보며 혀를 찼다. 누가 보면 세계가 망한 줄 알겠다. 정상화 작업이 다소 늦어질 뿐, 미국은 여전히 건재한데 왜 저리 나라가 망한 것처럼 다투는지 이해가 안 갔다.

“무식한 것들이 꼭 교육 못 받은 티를 내요.”

그레이브스는 한참 동안 줄을 서서 식량을 배급 받았다. 한 사람은 최대 4인분까지, 사흘치 분량을 배급 받을 수 있었다.

식량을 받고 돌아서는데 배급소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병들이 떠드는 이야기가 언뜻 들렸다. 혹시나 중요한 정보를 얻을까 싶어 그레이브스는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자네, 그거 들었어?”

“뭐?”

“오리건이 무슨 탈퇴 투표를 한다는데?”

“탈퇴 투표? 그게 뭐야?”

“몰라. 연방 탈퇴 투표라나 뭐라나?”

“연방? 그게 뭐야?”

“오리건이 무슨 조직 같은 거라도 가입했나 보지. 암튼 그거 땜에 지금 난리가 났다던데.”

“잘하는 짓이다. 한국놈 하나 죽었다고 온 나라가 덜덜 떠는 거 보면. 비시 놈은 대체 뭐 하는지 몰라.”

그레이브스의 표정이 급변했다. 짧은 대화였지만 명석한 그의 두뇌는 대번에 전체적인 그림을 유추해냈다. 그는 멱살이라도 쥘 듯이 경비병에게 달려들었다.

“이봐요! 방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넌 또 뭐야? 식량 받았으면 저리 꺼져!”

“방금 오리건 주 연방 탈퇴 투표 어쩌고 하지 않았습니까? 한국인 한 명 죽음 때문에 온 나라가 덜덜 떤다는 건 무슨 소립니까? 혹시 최윤 박사를 말하는 겁니까?”

잡아먹을 듯이 달려드는 기세에 경비병들도 순간 움찔했다. 그레이브스의 박력이 남달랐던 것이다. 처음 이야기를 꺼냈던 경비병이 입을 열었다.

“최윤?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튼 이상한 이름인 거 같기는 했는데…….”

“제니스 공격대장 측근이라고 하지 않았어? 이름은 나도 잘 기억이…….”

“어디서? 어디서 들었습니까?”

“라디오에서 나오잖아.”

그레이브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맞다. 그러고 보니 장거리 라디오 수신은 가능했다. 단지 문제는 요즘 라디오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없다는 것. 당연히 그레이브스도 라디오를 소지하고 있지 않았다. 아마 시청 등 공공시설에서는 라디오 청취가 가능한 모양이다.

‘설마 벌써 이리 악화될 줄이야!’

그레이브스는 다급해졌다. 최윤의 신병은 한미 간의 중요한 외교적 분쟁 사유가 된다. 그래서 자신도 어떻게든 상부와 연락을 하기 위해 시청에 들어가려고 한 게 아니었나. 멍청하기 그지없는 경비병들이 한사코 막지만 않았어도, 저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저는 EIS 소속 요원 그레이브스입니다! 현재 당신들이 말한 최윤 박사의 신병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좋으니 저를 시청 관료에게 데려가 주십시오!”

“뭐래?”

“이 자식이 라디오 들은 거 몇 마디 좀 해줬다고 나대는 거 좀 보게. 비시 놈이 사태 진정되면 본격적으로 도시에 구조반 보낸댔으니까 그냥 꺼져 있어!”

“때 되면 어련히 알아서 구조해줄까. 어디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야?”

‘나 전에 잘 나가던 사람이다.’, ‘너희 나 몰라보면 나중에 경을 칠 거다.’, ‘큰일 나기 싫으면 도지사를 불러라.’라는 식으로 뻗대는 허풍쟁이들이 넘쳐나다 보니, 경비병들은 그런 말에는 아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초기에는 혹시나 해서 몇 번 주정부 인사에게 데려갔으나, 죄다 허풍쟁이에 거짓말쟁이라는 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구조 받고 싶은 심리 때문에 그런 거짓말을 해댄 것이다.

그레이브스는 몇 번이나 자기 신분, 신원 코드를 밝히며 자세한 사정을 설명했다. 최윤의 생존을 일 초라도 빨리 알리는 게 국익 및 한미 외교 관계의 악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냉정한 판단과 합리적인 근거를 기반으로 한 주장을 논리적으로 설파했다. 문제는.

“헛소리 말고 저리 꺼져!”

무식한 경비병들이 전혀 이해를 못했다는 점. 그레이브스는 이들이 과연 고등학교는 나왔는지 답답해서 펄쩍 뛸 것 같았다. 미국 교육 수준의 격차가 이리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던가.

‘그래! 라디오!’

결국 떠밀리듯이 쫓겨난 그레이브스는 무릎을 탁 쳤다. 라디오는 구조가 매우 간단하다. 송신기와 마이크만 있으면 방송이 가능할 정도.

“송신기를 구해야 한다! 아니, 못 구하면 만들기라도 해야 해!”

그레이브스는 다급히 뛰었다. 일 분 일 초가 급했다.

* * *

“어머, 오셨어요?”

으리으리한 본채 정문을 들어서자 갓난아기를 안고 달래주던 소녀가 방긋 웃으며 맞이한다. 날씬한 종아리가 드러나는 하얀 원피스, 갈색 빛깔이 감도는 검은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찰랑거리는 모습은 실로 청초하다. 세 아이의 엄마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곱고 앳된 얼굴에 서린 모정이 묘한 간극을 느끼게 한다.

소녀와 유부녀가 섞인다면, 아마 저런 자태가 아닐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모님.”

“그이도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정효주는 아이를 안은 채 토닥이며 직접 남기철을 안으로 안내했다. 응접실에서는 유지웅이 또 다른 아이를 안고 젖병을 물리고 있었다.

“효주야, 큰일 났어.”

“왜?”

“하연이가 트림을 안 해.”

“뭐? 이리 줘!”

놀란 정효주는 안고 있던 아기를 얼른 내려놓고 유지웅이 안고 있던 아기를 건네받았다. 등을 몇 번 쓸어주자 아기가 끅 하며 트림을 했다. 이름을 보니 셋째인 거 같다.

“그럼 편히 말씀 나누세요.”

아이를 트림 시킨 정효주는 안심해서 인사를 하고는, 두 아이를 양팔에 안고 나갔다. 유세현이 폴짝 다가와서 지엄마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며 졸졸 따라간다. 평화롭고 화목해 보이는 모습에 남기철은 왠지 마음이 평안해졌다.

“무슨 일이시죠?”

그제야 남기철에게 눈길을 준 유지웅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의 앞에서 쫄아든다. 특별히 카리스마나 위압감을 주는 것이 아닌데, 그의 뒤에서 비치는 돈의 후광에 자기들이 알아서 움츠리는 것이다.

하지만 남기철이 누군가. 그는 쫄지 않는다.

“자문단 부탁으로 왔습니다.”

“부탁? 무슨 부탁이요?”

“회장님의 진의를 확인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야 정확한 조언을 할 수 있어서요. 음……. 그러니까 베링 해역 금지는 최윤 소장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것 때문에 보복 조치를 하시려는 거 맞죠? 미 연방이 해체되든, 분리되든, 아니면 적당히 배상금 물고 좀 손해 보는 선에서 끝나든 그 외 나머지는 러시아와 한국 정부가 알아서 하게 놔두실 생각이시고요?”

“어?”

“연방 해체든 분리든 그 결과까지는 크게 관심 없으신 거 같고……. 일단 탈옥한 토미 에슨 전 CIA 국장과 그 후원 세력만큼은 끝장날 때까지 베링 해역 금지를 유지하실 생각 맞죠?”

“와, 제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오셨어요?”

“제 생각이 맞군요. 그럼 그렇게 알고 전달하겠습니다.”

“다 읽고 계시면서 뭐 하러 번거롭게 오셨어요?”

오히려 유지웅이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혼자 떠들고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할 거면서, 대체 왜 먼 발걸음을 한 거야?

“독대도 안 하고 제가 말해봐야 자문단 교수들이 그게 정말 회장님 진의라고 쉽게 믿겠습니까? 형식적이나마 결제는 받아야 납득시킬 수 있죠. 직장 문화가 원래 그렇습니다. 아무튼 확인했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러시아, 미국, 한국 정부, 심지어 자문단까지 베링 해역 금지 조치를 ‘최윤의 죽음을 명분으로 한 미국 길들이기’로 오인하고 있다. 보복은 명분이고 실제 목적은 연방 해체든 연방 분리든 미국을 쪼개서 위력을 과시하려 한다는 추정이다.

하지만 남기철이 보기엔 ‘토미 에슨과 그 후원 세력을 때려잡아서 내 앞에 갖다 바쳐.’라는 압박이었다. 목적 자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백악관이 저리 허둥지둥 댈 수밖에.

이래서 원활한 소통이 중요한 것이다.

============================ 작품 후기 ============================

안 되겠어. 그레이브스 저놈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