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Noble

00500 500 Coin Special - Maple Play

가까스로 미국의 분할은 막았지만 서부 지역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동분서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는, 비시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는 측근인 칠드그린 부통령은 어느 날 문자 한 통을 받았다.

「호남평야에서 단풍놀이 겸 고기 파티 함. 시간 되는 분들 다 오셈.ㅋ」

“…….”

가볍다 못해 경박스러울 정도의 문자다. 하지만 문자를 보낸 이의 신분이 범상치 않다. 칠드그린은 잠시 보좌관에게 일정을 확인했다.

“사흘 뒤 일정이 어찌 되나?”

“전미 주지사 만찬에 참석하기로 예정이 되어 있습니다.”

보통 때라면 절대 빠질 수 없는 자리다. 하물며 서부 지역의 분리를 막아낸 영웅인 그라면 더더욱. 그러나…….

“취소하든가, 만찬일을 미루던가 하게.”

“……예?”

“지금 막 다른 약속이 생겼네.”

* * *

“의장님. 왜 핸드폰은 그리 뚫어져라 쳐다보십니까?”

“초청장이 왔네.”

“초청? 어디서요?”

“흑석동.”

“……일정 조절하겠습니다. 날짜가 언제입니까?”

* * *

“장 팀장님. 우리 예비대 사흘 뒤에 헥스톨 잡으러 스웨덴에 가기로 했는데, 총지휘 좀 해주실 수 있나요?”

“죄송합니다. 그날은 안 되겠습니다.”

“아, 다른 예비대가 벌써 선 일정 잡혔나 보네요?”

“그게 아니라 호출이 와서요.”

“……아, 그렇군요.”

* * *

묵빛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욕조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향긋한 꽃이 뿌려진 물에 몸을 담그고 있던 안슐은 문득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얇은 슬립을 입어 건강한 구릿빛 피부가 고스란히 비치는 묘령의 여인이었다. 길고 긴 속눈썹과 곱게 틀어 올린 머리가 잘 어울리는 매혹적인 미인으로, 바로 안슐의 제2부인 카젤리하였다.

“흑석동에서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초청장?”

노곤하게 반신욕을 즐기고 있던 안슐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젊은 친구가 갑자기 웬 초청장일까?

“예. 소수의 친구분들만 초청하셔서, 호남평야에서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겨보자는 내용이었습니다만…….”

“알았네. 지하크, 방한 준비를 해라.”

* * *

“어머, 오셨어요?”

초청을 받은 남기철, 최윤을 맞이한 것은 정효주였다. 농사일을 돕고 있었는지, 그녀는 시골 아가씨처럼 편안한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워낙 미모에서 빛이 나다 보니 여배우가 체험 농장을 하러 온 느낌만 잔뜩 준다.

“회장님께서는……?”

“아, 그이는 지금 잠시 과일 좀 따고 있어요. 심심한가 봐요. 금방 부를게요.”

“아, 아닙니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네?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지요.”

정효주가 더 말릴 새도 없이 두 남자는 알아서 작업복을 찾아서 갈아입고 나왔다. 옷이 날개라고 하더니, 영락없는 시골 농부 아저씨들이 되었다.

“회장님께서는 어디 계시죠?”

“51번 구역에 있을 걸요? 그런데 정말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그이가 잠깐 심심해서 과일 좀 딴다고 그러는 건데…….”

“괜찮습니다. 저희도 이 기회에 농장 일도 체험해보고, 재미난 경험이 되고 좋을 것 같네요.”

“정 그러시다면야…….”

하늘같은 회장님이 자기 농장에서 일일 농부 체험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부하된 입장에서 흉내라도 내야 되지 않겠는가. 뭐 일이 그리 힘든 것도 아니고.

아무튼 두 남자가 먼저 출발하고 난 뒤 얼마 후 하늘에서 굉음이 들렸다.

두두두두두!

대형 헬기가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공터로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이윽고 밀짚모자를 쓴 한 남자가 헬기에서 내렸다. 어울리지 않게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그를 보좌하듯이 뒤따라 내렸다.

안슐의 도착에 정효주는 반가이 맞이하려다 말고 흠칫했다. 그의 옷차림이 조금 독특했다. 밀짚모자는 그렇다 치고, 아랍 왕족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몸빼바지와 헐렁한 녹색티는 도대체……. 아니, 그보다 왜 저런 걸 입고도 후광이 비치는 거지?

“아주버님? 오셨어요? 그런데…….”

“친구가 단풍놀이를 한다고 해서요. 그래서 드레스코드를 특별히 맞춰 왔습니다.”

“……단풍놀이할 때 그런 옷 안 입는데…….”

“아닌가요? 제가 본 바로는 한국의 시골 거주민들은 이런 옷을 주로 입던데요.”

저 복장은 무슨 단풍놀이가 아니라 시골 할머니가 뒷산에 채소 캐러 갈 때 입으면 딱일 것 같은데? 정효주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으나 안슐은 정작 만족하는 듯해서 아무 말 안했다.

“그나저나 친구는 어디 있습니까?”

“51구역에 있어요. 제가 안내해드릴까요?”

“제수씨도 같이 오시는 겁니까? 이런, 그럴 줄 알았으면 제 와이프들도 데리고 오는 건데.”

“아니에요. 그이가 남자들끼리 놀 거라고 해서 전 오늘은 안 끼기로 했어요.”

“그것도 좋군요. 남자들끼리 모여서 자연과 단풍과 술을 즐기는 자리라……. 친구가 제법 운치를 아는군요.”

아무튼 정효주의 안내를 받아 안슐도 51 구역에 도착했다.

호남평야는 구역마다 섹터를 나누어 번호를 붙여 관리한다. 총 50개의 일반 구역과 1개의 특별 구역으로 이뤄져 있다. 51번째 구역이 바로 특별 구역이다.

50개의 일반 구역은 상업용 농작물을 기르는 곳이다. 1구역은 벼, 2구역은 밀, 3구역은 콩, 4구역은 옥수수…… 이렇게 구역마다 나눠서 농작물을 관리하고 있다.

51구역은 그럼 뭐냐고? 유지웅의 여흥을 위해 따로 빼놓은 조그마한 구역으로, 그냥 아무거나 막 기른다. 파인애플, 바나나, 토마토, 등등 술안주나 파티에 어울릴 법한 농작물을 마구마구 기르는 곳이다.

참고로 51구역은 구 논산평야와 바로 붙어 있는 지점에 있다. 축산업지역으로 바뀐 구 논산평야, 즉 ‘호남목장’에서 싱싱한 고기를 즉시즉시 조달하기 위해서다. 호남목장에서는 수산물 빼고 정말이지 없는 고기가 없다.

“어, 안슐 왔어요?”

“여기 있었군. 뭐 하고 있나?”

“우리가 먹을 안주 따고 있어요. 즉석에서 포도주도 빚어서 한 번 먹어볼까…….”

“오, 그거 재미있겠군. 맛은 별로겠지만.”

작업복 차림인 최윤과 남기철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먹을 만한 안주를 찾고 있었다. 가득가득 따 모으는 것을 보면 이 자리에서만 먹는 게 아니라 집에까지 가져가서 먹을 모양이다.

안슐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단풍이 풍성한 먼 산을 배경으로, 온갖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흙을 밟으며 땀을 흘리는 것도 나름 유쾌한 경험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왕자님.”

“편하게 안슐이라 불러요. 나는 그게 더 좋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괜찮습니다. 그런데 최 박사님, 연구는 잘 되어 갑니까?”

“물론입니다. 약간의 시간과 자금만 좀 더 주어진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습니다만…….”

“허허, 이 친구 못 쓰겠군.”

“최, 최 소장님! 제가 다이아 카드도 줬잖아요!”

“…….”

“설마 챌린저 카드를 탐내시는 건 아니죠?”

“제가 어찌 감히 그걸 탐내겠습니다. 그저 경비 계좌의 한도액을 좀 더 늘려주셨으면 할 뿐입니다.”

“……회장님, 저한테 주신 카드 제발 다시 가져가주시면 안 될까요?”

부담이 가득한 남기철의 목소리 따위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받을 땐 마음대로였겠지만 반환할 땐 아니란다.

처음에는 자기들 먹을 안주만 따려고 했는데, 열매를 하나둘씩 종류별로 따다 보니 그게 또 재미있었다. 남자들은 집에 가져가서 사돈의 팔촌까지 나눠주려고 작정을 했는지 바구니가 가득가득해질 때까지 따서 모으고, 다시 또 빈 바구니를 들고 열매를 따기 시작했다.

구슬땀을 흘리며 흙먼지를 뒤집어쓴 모습은 영락없는 시골 농부들이었다. 누가 봐도 이 남자들이 제니스 공격대장, UAE의 왕자, WCO 의장, 한성산업 CEO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제 왔습…….”

두 명의 수행원만 거느리고 뒤늦게 도착한 칠드그린 부통령은 잠시 멈추고 말을 잊었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네 명의 남자들, 바구니마다 가득가득 담겨 있는 과일. 마지막으로 아직도 산더미처럼 열매를 달고 있는 농작물이 가득한 51구역을 훑어보더니, 실로 우아하고 세련된 발걸음으로 한 발짝 물러났다.

“제가 찾는 분들이 여기 안 계시군요. 실례했…….”

“부통령, 빈 바구니는 아직 많소.”

“……육체노동은 제 특기가 아닌 관계로 저는 이곳에서 나가겠…….”

“이리 오시오. 이 자리야말로 세계 평화를 논의하기 위한 화합의 장소요.”

“이, 이 정장 오늘 처음 입어 보는 건데…….”

“그러게 드레스 코드는 왜 안 알아보고 온 거요? 어서 이리 들어오시오.”

결국 칠드그린은 모처럼 쫙 빼입고 온 양복을 흙먼지와 잎사귀로 온통 더럽히고 말았다. 그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돌아가는 즉시 다이아몬드 카드를 한도까지 긁어 주리라 결심했다. 아, 육체노동은 내 취향이 아닌데.

“선배님! 여기도 수확 중인가 봐요!”

“와, 열매가 엄청 많다!”

“근데 쫌 너무하네. 이 넓은 구역을 외국인 노동자들 몇 명한테 다 따라고 시킨 거야?”

와글거리는 소란이 들려 다섯 남자는 잠시 손을 멈췄다. 작업복을 입은 수십 명의 젊은 남녀가 우르르 몰려왔다. 말하는 걸 언뜻 들어보니 서울 모 대학에서 농촌 일손 돕기 활동을 온 모양이었다.

‘외국인 노동자?’

다섯 남자의 시선이 서로를 훑었다. 그러고 보니 안슐은 영락없는 중동인이고 칠드그린은 나무랄 데 없는 백인이다. 그것을 보고 다섯 명을 깡그리 묶어 외국인 노동자라 생각한 모양이다.

다른 세 명은 속으로 아주 조금 억울했다. 우리가 어딜 봐서 외국인처럼 생겼어!

“여기는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유지웅이 나섰다.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여학생이 앞으로 얼른 나섰다. 그래봐야 유지웅보다는 두어 살 어려 보였지만.

“저희는 대학생인데 단체로 농활 왔어요! 저기에서 일손 좀 돕고 있었는데 다 끝나서 옆으로 넘어온 거예요!”

“주의사항을 안…….”

이곳은 51구역으로, 특별구역이라는 말을 하려는 도중 안슐이 끼어들었다.

“좋은 일을 하시는군요.”

“와, 우리 말 엄청 잘하시네요?”

“한국에 머무르려면 필요해서 배웠습니다. 어느 대학에서 나오셨습니까?”

“세일대요!”

세일대면 서울권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명문대학이다. 처음 안슐의 이국적인 외모에 다소 경계했던 여학생들은 유창한 한국 발음과 시원시원한 언변에 흠뻑 빠져들어 경계심을 완전히 누그러뜨렸다.

“안슐, 왜……?”

“생각해보니 남자들끼리만 놀면 재미가 없을 것 같군. 파릇파릇한 귀여운 여대생들이지 않은가? 같이 모여서 놀면 재밌을 거 같지 않나?”

“그럼 효주 부를 걸 그랬어요. 효주도 여자인데…….”

“제수씨는 여자가 아니라 제수씨일 뿐이지.”

대학생들은 여학생이 40, 남학생이 20명 정도 되었다. 보아하니 최윤과 남기철, 칠드그린도 싫지는 않은 눈치다. 대부분 신입생인지라 바라보기만 해도 파릇파릇한 느낌이 묻어났다. 어린 여자들과 끼어서 같이 노는 거 싫은 남자는 없다.

“저희 이제 일손 멈추고 고기파티 할 건데, 여러분들도 같이 노시겠어요? 술이랑 고기 잔뜩 있는데.”

“어머, 이곳 관리인이세요?”

“관리인?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저희는…….”

“알바 오신 것도 아니고 뭐 어때요.”

여차저차해서 그들은 51구역 한쪽 귀퉁이에 있는 벚꽃나무 아래에서 고기 파티를 하게 되었다. 창고에 있는 야외 조리 도구를 꺼내오고, 바로 옆에 있는 호남목장에서 고기를 조달해왔다. 호남목장에서는 호남평야에서 먹을 고기를 달라고 하면 그냥 군말 없이 내준다.

“우와.”

내심 외국인 노동자, 그리고 농부들이라고 속으로 살짝 경원시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던 학생들이지만, 유지웅이 트럭에 싣고 온 고기를 보고는 입을 벌리고 놀랐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오리고기, 거위고기 등 온갖 종류의 고기가 맛있는 부위만 골라 가득히 쌓여 있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호남평야에서 난 과일을 빚어 만든 술이죠. 발효한지는 반 년 밖에 안 됐지만, 어때요?”

“와, 맛있어요!”

“진짜 이게 반 년 밖에 발효 안 된 술이에요?”

“신기하게 여기 땅을 파서 지하에서 숙성하면 짧은 시간 안에 금방 맛있어 지더라고요.”

술과 고기는 자리를 부드럽게 만든다. 경계심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던 일부 여학생과 남학생들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분위기에 취해 술잔을 부딪치고, 고기를 구워 먹었다.

특히 안슐과 칠드그린은 여학생들 사이에서 단연 독보적인 인기를 차지했다. 특유의 경쾌한 언변과 다양한 잡담으로 분위기를 재미있게 이끌어나갔던 것이다.

한편 남기철과 최윤은?

“아, 원래 결정체학 전공하셨던 분들이군요. 그런데 어쩌다가 귀농을 하게 되셨어요?”

“…….”

그렇게 두 남자는 남학생들 사이에서 대화 주도권을 잡(히)고 있었다. 유지웅은 왠지 강의실 갈 때마다 봤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했던 공학과 건물을 보는 기시감을 느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넓은 지역을 관리하시게 된 거예요? 나이도 엄청 젊으신데.”

한 여학생이 배시시 웃으며 말을 걸었다. 보니까 아까 학생들을 대표해서 인사했던 아이다. 3학년으로 이 중에서는 최고 선배라고 했던가?

“저 분들도 외국인 노동자치고 엄청 박식하신 거 같고. 역시 호남평야는 아무나 일꾼으로 쓰지 않는가 봐요?”

“호남평야에 관심 있어요?”

“네. 우리나라를 먹여 살리는 젖줄이잖아요. 저 식량산업에 좀 관심이 있거든요.”

“혹시 전공이?”

“피. 아까 말했는데 그새 까먹으신 거예요? 저희 세일대 생명공학과예요.”

“농작물 교배나 유전자 조작 같은 거요?”

“그건 아주 일부분이죠. 제가 관심 있는 거구요.”

그룹은 셋으로 나뉘었다. 여학생들 대다수를 거느리고 화기애애하게 파티를 즐기는 중동인, 미국인. 남학생들 전부를 데리고, 제3자가 보기에는 칙칙해 보이지만 자기들끼리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부어라 마셔라 하는 두 아저씨. 그리고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잔을 부딪치는 한 여학생과 한 유부남.

‘혹시 제니스 일가 먼 친척이나 친구 집안 사람은 아닐까?’

서영애는 제법 예리했다. 이제 막 대학에 들어와서 사회 경험 없는 후배들이랑은 달랐다.

여기 구역은 다른 구역에 비해 매우 좁긴 하지만 그 생산성은 (호남평야를 제외한) 한국 전 농토보다 월등하다. 아끼는 젊은이에게 먹고 살라고 하나 떼어준 것은 아닐까? 이 구역만 다른 구역과 분위기가 다른 것도 그렇고, 관리인이라면서 느긋하게 고기 파티를 즐기는 것도 그렇고.

한편 안슐은…….

“저런, 아직도 그런 판사가 있단 말입니까?”

“네. 패소 이후 집안이 너무 어려워졌어요. 그래서 저 혼자만 진학하고, 쌍둥이 언니는 지금 취업해서 집안 살림에 보태고 있어요. 언니를 볼 때마다 정말 미안해 죽겠어요.”

“와, 나 이 얘기 처음 듣는다. 재영이, 그런 이야기 왜 지금까지 안 했어? 힘들면 도와줄 수 있었는데.”

“진짜 전관예우 없어져야 돼.”

“아, 다들 걱정하지 말아요. 곧 없어질 겁니다.”

“네?”

술김에 울먹이며 집안 이야기를 꺼냈던 여학생이 의아해서 충혈 된 눈으로 반문했다.

“앞으로 판사나 검사, 변호사 한 번 정하면 다른 건 영구히 못하게 바뀔 겁니다. 선후배랍시고 서로 이끌고 당겨주고 하는 걸 원천차단하겠다는 거죠. 그리고 공직자 윤리도 강화돼서 500만 원 이상 비리에 연루되면 판검사는 영원히 자격 정지 당합니다. 변호사는 물론이고 어떤 공직에도 못 나가요.”

“공직자윤리법이 그리 바뀐 건 들었는데…… 사법계도 그리 바뀐다는 건 첨 들었는데요?”

“아, 며칠 전에 친구가 그렇게 말을 했어요. 그리고 재영씨라고 했나요? 아가씨 이야기는 내가 친구에게 따로 부탁을 하죠.”

“아하하, 아저씨. 외국인 노동자시면서 어떻게 그런 걸 우리보다 더 잘 알아요?”

“아저씨 친구가 누군데요? 부탁한다고 일이 해결돼요?”

여학생들은 안슐이 술김에 그냥 한 농담이라 생각했다. 신세한탄은 스치듯이 지나가고, 다들 잔을 부딪치고 고기를 굽고 과일을 집어먹으며 흥겨운 단풍놀이를 즐겼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고기와 술도 바닥나고 해도 서산으로 거의 기울어갔다. 슬슬 끝나가는 분위기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갑자기 레이드 사고가 터져서 그걸 수습하는 바람에…….”

헐레벌떡 도착한 장태준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멀리서부터 느낀 이 맛있는 냄새란! 모처럼 회장님의 초청을 받았는데 자리가 거의 끝날 때까지 얼굴도 비추지 못하다니!

“앗! 장태준 팀장님이다!”

“뭐? 장태준 팀장님?”

“맞아! 제니스 전술지원팀장님! 바로 그분!”

“아, 제니스의 살아있는 전설! 아니, 그 분이 왜 여기에?”

장태준은 국내에서 이런저런 대외 활동도 많이 하고, 학교 강연도 많이 나갔기에 얼굴이 제법 알려져 있다. 아마 이 자리에 있는 다섯 남자 중에서는 여기 학생들에게 가장 인지도가 높을 것이다.

장태준의 신원을 깨달은 학생들은 순간 술이 확 깨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 가만?”

“장태준 팀장님이 저리 허리를 굽힐 정도면…… 저 분들은 대체?”

가장 먼저 최윤이 일어났다. 그는 학생들이 장태준을 대번에 알아본 것 때문에 심히 삐졌다.

“회장님.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미 씨가 수거한 괴수 연구가 밀려 있어서요.”

“네, 그래요. V-23 불러드릴까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두두두두두!

이윽고 굉음과 함께 V-23 한 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V-23은 가뿐하게 빈 공터에 착륙했다. 학생들은 놀라서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했다.

“저도 하나 구입했거든요.”

“그, 그래요. 조심해서 가요.”

최윤이 먼저 돌아가고 난 후 칠드그린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얼큰하게 취했는지 얼굴이 빨개져 있었지만 기분은 좋아 보였다.

“미스터 제니스, 좋은 자리에 초청해주셔서 기뻤습니다. 아무쪼록 이 자리가 한미 우호 관계를 다지는 초석이 되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부국…… 아니, 부통령님. 갑자기 왜 그렇게 격식을…….”

두두두두!

이번에는 대형 헬기 한 기가 하늘에 모습을 드러냈다. 선명하게 새겨진 커다란 성조기가 학생들의 어깨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그럼 이만. 즐거웠습니다.”

학생들은 그 와중에도 ‘부통령’이라는 말은 똑똑히 들었다. 그때 누군가 무릎을 탁 쳤다.

“맞아! 어디서 본 얼굴이다 했더니, 미국 새 부통령이었어!”

“뭐? 그런 사람이 왜 여기에 있어?”

“부통령이 아니고서는 왜 미군 헬기를 개인적으로 호출할 수 있겠어?”

“맞다! 그러고 보니 부통령 이름이 칠드그린 페이커라고 했어! 저 분, 자기를 페이커라고 불러달라고 했잖아!”

“마, 말도 안 돼!”

“꺄악! 나 그 분이 국제 정세 흐름 이야기한 거 외국인 노동자가 하는 소리라고 죄다 흘려들었는데! 어떡해! 어떡해!”

학생들은 패닉에 빠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젊은 나이에 사업에 실패해서 귀농한 한국 남자와 동유럽에서 대박의 꿈을 찾아 한국으로 온 외국인 노동자로 알고 있던 이들이, 느닷없이 헬기를 호출해서 사라졌다. 게다가 그 중 한 명은 부통령이라고 한다.

그럼 남은 세 명은 대체? 학생들은 놀람과 경악을 지우지 못한 채 유지웅과 안슐을 응시했다. 방금 사라진 사람 중 한 명이 미국 부통령이면, 저 셋은 대체 누구야? 설마?

‘나, 나는……?’

남기철은 학생들이 신흥 국제기구 WCO 의장인 자신을 몰라보는 것보다, 저 둘처럼 냉큼 이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있었다.

“자, 여러분. 슬슬 일어납시다.”

안슐이 가볍게 손뼉을 치자 이번에는 수십 기의 헬기가 하늘에서 날아왔다. 학생들은 놀라운 한편 당혹스러웠다. 설마 혼자 저 많은 걸 타고 갈 셈인가?

“해안가에 작은 낚싯배 한 척을 준비했습니다. 밤낚시도 제법 재미있을 겁니다.”

“안슐, 더 노실 거예요?”

“모처럼 즐거운데 벌써 끝내긴 아쉽군. 자네도 가세. 장 팀장도 같이 갑시다.”

“저, 저야 불러주신다면…….”

“효주한테 혼날 텐데. 에라, 모르겠다. 가요, 가!”

그렇게 학생들은 안슐이 준비한 헬기 편대에 나눠 타고 해안가로 향했다. 서해 바다에는 휘황찬란한 불빛을 자랑하는 초호화 대형 크루즈 선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들은 얼이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 모든 게 꿈인가 싶었다.

그나마 정신을 차린 서영애가 비교적 편안해 보이는 장태준한테 조심스레 물었다. 몇 시간 동안 동네 오빠처럼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눴던 유지웅은 손바닥 뒤집듯이 말 붙이기 어려운 사람이 되고 말았다.

“……저 분은 대체 누구예요?”

“회장님 친구분이시죠.”

“회……장님?”

“유지웅 회장님이요. 설마 모르셨나요?”

“……아.”

서영애는 혼절했다.

============================ 작품 후기 ============================

눈이 있어도 알아보지 못한 가여운 영혼들...

나귀족이 어느덧 500화를 맞이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식물에 물 좀 주세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