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Noble

00535 Take all or everything

퍼플 결정체는 세상에 단 하나 존재한다.

과거 제니스 공격대가 물리친 블랙 몹, 일본 붕괴를 불러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히카리를 잡고 나온 결정체가 있다. 당시 유지웅은 퍼플 결정체를 남몰래 챙겨두었다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쌓은 뒤에는 당당하게 그 존재를 공표했다.

덕분에 세종시 결정체 연구단지는 세계 최고의 석학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높은 임금과 후한 복지, 최고의 연구시설 덕도 있지만, 퍼플 결정체라는 이름이 인재를 끌어모으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다.

‘지구 전체의 안전지대화.’

국가 수반들은 안슐의 제안을 허황된 것으로 여겼다. 지구 전체를 안전지대화하려면 무지막지한 결정 에너지가 필요할 테니까. 오죽하면 독일 수상이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지구 전체를 안전지대로 만들려면 대기권에 존재하는 모든 결정 에너지를 긁어모아야 할 거요. 그게 가능하기나 하겠소?”

국가 수반들은 독일 수상의 말에 저마다 동조하고 나섰다. 그러나 자문역으로 참가한 과학자 중 한 명이 무심코 말했다.

“되는데요.”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과학자는 말실수를 한 것을 깨닫고 표정이 핼쑥해졌다.

비시가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물었다.

“방금 그게 무슨 말인가? 설마 정말로 가능한가?”

“이, 이론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퍼플 결정체가 지닌 항상성, 그리고 에너지 흡수 및 방출 성질을 고려하면……. 자세한 건 가렌 박사님이나 최윤 소장님이 더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최윤! 최윤 소장님 지금 어딨죠?”

유지웅이 다급히 그를 찾았다. 그러고 보니 최윤이 왜 이 자리에 참석을 안 했지? 가장 도움이 될 만한 자문을 해줄 수 있는 게 바로 그인데.

“최윤 소장님 좀 빨리 찾아봐요!”

* * *

최윤은 파랗게 빛나는 결정체를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진주만한 크기의 결정체는 끊임없이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황홀한 광채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가 호흡을 반복하는 것처럼 반짝거린다.

소중한 것을 만지듯이 최윤은 블루 결정체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특수 합금으로 만들어진 금고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게 블랭을 잡고 나온 블루 결정체였죠?”

“……네.”

“무척 소중하게 여기시네요.”

최윤은 씁쓸하게 웃었다. 전투 종료 직후, 그는 유지웅에게 부탁해서 블랭이 소멸하고 남은 블루 결정체를 얻을 수 있었다. 연구를 위해서라고 하자 유지웅은 두말 없이 승낙했다.

“왜 그리 특별하게 여기시죠? 어차피 다 똑같은 에너지 덩어리 아닌가요?”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럴지도 모르죠.”

“그 말씀은, 설마…….”

“아직 이론일 뿐입니다.”

레지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최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위험해요. 블랭이 어떤 존재인지 잊으셨나요?”

“하지만 난 해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세상에 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최윤은 블랭이 남긴 블루 결정체가 담긴 금고를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이 아이는 충분히 인류에게 이로운 존재가 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사소한 결함 하나가 모든 것을 망쳐 버렸죠.”

“결함이요?”

“RPX-1은 태생이 인간을 돕기 위한 수퍼 컴퓨터였어요. 하지만 제가 돌린 보복 시뮬레이션은 그 반대죠. 미국을 짓밟기 위한 저의 공상만이 존재하는, 저열한 파괴욕밖에 없었어요. 아마 그 상극되는 부분이 녀석의 사고회로에 결함을 불러왔다고 생각해요.”

인간을 돕기 위해 균열을 감추고자 하면서, 한편으로는 인간을 해하기 위해 프레온 괴수를 생성한다. 블랭은 모순되는 행위를 멈추지 못하면서도, 거기에 끊임없이 의문을 품었다. 자기 자신의 폐기까지 목적 달성을 위해 계획한 것은, 아마 녀석의 끊임없는 자정 작용의 일부가 아니었나 싶다. 고장을 수복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자가 치유 노력.

“그럼 최 소장님은 블랭을 고쳐서 부활시키려고 하시는 건가요?”

“……네.”

“가능한가요? 이미 파괴된 개체 아닌가요? 남은 것은 블루 결정체뿐이에요.”

결정체를 이용해 괴수를 복원한다? 레지나는 그런 건 들어보지도 못했다.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에게 이야기했다가는 그 무슨 공상 과학이냐고 헛웃음을 칠 것이다. 시체를 되살리는 것과 본질적으로 뭐가 다른가? 말도 안 된다.

“블랭이기 때문이 가능합니다. 다른 괴수들은 안 되죠.”

그제야 레지나는 이해했다.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데이터 괴수라서 그런 거군요.”

“네.”

블랭의 자아는 데이터로 형성되어 있다. 비록 본체는 소멸했지만 그 데이터는 결정체 안에 남아 있다. 데이터를 담을 새로운 그릇을 만들어 주입하면, 이론상 부활이 가능하다.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나요?”

“녀석은 균열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전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균열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커지고 있다. 휘버의 예언대로 언젠가는 에너지 방출 현상이 심해져 지구가 황폐화될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것이 내일이 될 수도 있고, 천년 후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세상에 속죄하는 의미에서라도 균열이 커지는 것을 막겠습니다. 저는 그래야만 합니다.”

“당신 잘못은 없어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레지나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 블랭이 지구에 가져온 참사는 최윤의 책임이 아니다. 그는 블랭을 창조하고자 하는 마음이나 계획조차 없었다. 신이 우연찮게 그를 매개체로 이용해 재해를 내린 것뿐이다. 레지나가 보기엔 그랬다.

“나미 씨는 어때요?”

“격리 돼서 감시 받고 있어요. 그래도 감금이 아닌 게 어디에요. 특별히 적대하지도 않고요.”

“감금이 가능하기나 한가요?”

“불가능하죠. 제니스 공격대가 나서야 할 걸요.”

지금 나미와 제니스는 잠시 휴전 모드에 들어간 상태다. 나미가 특별히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고, 유지웅이 장고 끝에 대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닙니다.’

프레온층이 지구 전체를 덮은 지금, 나미와 불필요한 전투를 벌일 여력이 없었다. 나미의 말대로 블랭을 공격한 것이 최악의 결과로 나타났기에, 그녀가 괴수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물러서기로 한 것이다. 레지나의 보증도 한몫했다.

물론 엄청난 혼란을 불러올 일이라 제니스 외부에는 그 사실이 새어나가지 않았다. 아직 미국은커녕 한국도 나미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유지웅은 완전히 덮어둔 것은 아니다. 당장 나미가 해가 되지 않을 것이기에 접어둔 것이다. 그보다는 프레온층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시급했으니.

“그런데 방법은 찾으셨나요?”

“이론으로는 가능해요.”

“최 소장님이 ‘이론으로는 가능하다’면 실제로도 구현이 가능하다는 거죠.”

최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제니스 연구단지에는 조금 유명한 징크스가 있다. 최윤이 ‘이론으로는 가능’하다고 한 것치고 불가능했던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 인류는 고통받지 않아도 되겠군요.”

“하지만 결과는 저도 몰라요.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을 뿐이죠. 계산을 완벽하게 마칠 때까지는 회장님한테는 일단 비밀로…….”

쾅!

“최 소장님! 최 소장님!”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며 유지웅이 뛰어들어왔다. 수행원들이 그의 뒤를 우르르 따르고 있었다. 최윤과 레지나는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사람처럼 움찔했다.

“그게 사실이에요? 전 지구에 안전지대를 설치하는 게 정말 가능한가요?”

“예?”

최윤은 황당했다. 아니, 그걸 대체 어디서 들었지?

“죄송합니다. 최 소장님. 아직 확실해지기 전까지 말씀드리지 말라고 하셨었는데…….”

뒤에 조용히 따라온 수석 연구원이 말끝을 흐렸다. 아마도 그가 말을 꺼낸 모양이다. 최윤은 살짝 난감해졌다. 완벽해질 때까지는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설명해주세요. 정말 가능한가요?”

“아, 예. 일단 이론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럼 가능하단 거네요!”

“아니, 그건 아닙니다. 이론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과학에서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열어두고 접근하기 위한…….”

“됐어요. 지금까지 최 소장님이 이론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 해놓고 안 된 게 어디 있어요? 다 몇 달 만에 뚝닥 만들어내셨으면서. 그래요, 이번에는 얼마나 걸려요?”

기세에 눌린 최윤은 저도 모르게 대답을 해버렸다.

“……매개체 기기 제작에는 적어도 두 달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예산 늘려 드리면 되죠? 한 달로 해주세요.”

“예? 하지만…….”

“시간과 예산은 반비례한다고 하셨잖아요. 한 달로 해주세요.”

최윤은 결국 얼떨결에 수락하고 말았다.

* * *

“퍼플 결정체는 에너지 총량으로 보면 5,000짜리 블루 결정체 수십 개의 집합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퍼플 결정체는 독특한 성질이 있죠. 바로 대기 중의 결정 에너지를 흡수하는 성질입니다.”

“그렇다 해도, 지구 전체를 안전지대화 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 거요?”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최윤은 수십 명의 국제 정상들이 모인 자리에서 단상에 올라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제일 앞줄에는 유지웅과 안슐, 한국, 미국, 러시아, 독일, 영국 수반이 앉아 있었다. 레지나가 그의 브리핑을 돕는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그러나 엄밀한 한계는 존재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안전지대는 기존의 안전지대와는 출력 면에서 월등한 차이가 있습니다.”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시오.”

“기존 안전지대에서는 옐로 몹은 소멸하고 레드 몹은 약화되는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안전지대는 범위가 거대한 대신 그만큼 파워가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아마 옐로 몹에도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겁니다.”

“그런 게 효과가 있소?”

“프레온 괴수는 기체형 괴수이기 때문에 현저하게 약합니다. 대신에 끊임없이 증식하고 있어 박멸이 불가능하죠. 하지만 그렇기에 이 방식이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과연!”

그제야 국제 정상들은 개요를 완전히 이해했다.

쉽게 말해 안전지대의 농도를 묽게 만들고 대신 그 적용 범위를 무제한으로 한다는 것이다. 옐로 몹, 심지어 곤충형 괴수인 카직스에도 거의 효과를 주지 못하는 미약한 안전지대지만, 마찬가지로 수는 많고 생명력은 미미하기 그지없는 기체형 괴수를 박멸하는데는 효과적이다. 증식 자체를 못하도록 아예 1개체도 남기지 않고 박멸을 해버리기 때문이다.

여전히 우려를 표하는 정상도 있었다.

“논지는 이해했소. 하지만 정말로 지구 전체를 뒤덮는 게 가능한 거요? 인간의 힘으로?”

“한때 인간은 지구 전체를 불길로 뒤덮을 무기도 보유했습니다. 안전지대로 덮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뼈가 있는 말에 정상들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특히 비시 대통령과 키틴 대통령의 표정이 볼만했다.

“단 실행 조건이 있습니다. 퍼플 결정체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퍼플 결정체가 아니면 불가능한 계획이라는 소리군?”

“그렇습니다.”

“그 뒤에 퍼플 결정체는 어떻게 되는 거요?”

“……소멸합니다.”

최윤은 머뭇거렸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정상들의 눈길이 유지웅에게 쏠렸다.

퍼플 결정체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보물이다. 그 연구 가치, 성질도 무궁무진하거니와, 앞으로 다시 인간이 손에 넣을 수 없는 물질이기 때문이다. 최윤이 융합 이론을 통해 그린 결정체를 블루 결정체로 합성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퍼플 결정체 합성은 아직도 한참이나 멀었다.

유지웅은 사실 이 사태를 해결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질 만큼 가졌기에, 빙하기가 온다 해도 작정하고 자기만 잘 살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 아니, 그라면 빙하기에서도 한국 전체를 책임질 수 있으리라.

그런데 세상을 위해서, 퍼플 결정체 소멸을 감수하면서까지 그가 과연 선뜻 내놓을지 불안했던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몰린 가운데, 유지웅이 입을 열었다.

“작은 수집욕 때문에 얼어붙은 지구를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유지웅은 간결하게 선언했다.

“하겠습니다.”

* * *

“아깝다…….”

애지중지 여겼던 퍼플 결정체를 들여다보며 정효주가 짐짓 그렇게 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안다. 그냥 해본 말이라는 것을. 유지웅은 피식거리며 그녀의 뺨을 토닥였다.

“이거 하나만 내놓으면 원래대로 돌릴 수 있대잖아. 그니까 기분 좋게 내놓자.”

“그래도 아직 우리 몸에 생긴 비밀도 못 풀었는데.”

둘은 퍼플 결정체를 각기 나눠서 몸에 보유하고 있다. 아직 그 점에 대한 비밀은 해명되지 않은 게 더 많았다. 퍼플 결정체는 그 비밀을 푸는데 열쇠가 되어줄 물건이었다. 그래서 둘에게는 더 귀중한 것이었다.

“이거 없이도 해결할 수 있을 거야.”

그래도 아까운 마음을 완전히 지울 수 없는 건, 자신도 사람이기 때문인가 보다. 유지웅은 장갑 낀 손으로 마지막으로 퍼플 결정체를 쓰다듬고는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최윤과 가렌, 레지나에게 내밀었다.

“부탁할게요. 세 분 박사님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삼주 안에 할 수 있겠죠?”

“저, 두 달을 한 달로 줄이신 것으로도 모자라…….”

“얼마면 되나요?”

“……이미 한 달로 줄이는데도 추가 예산이 오백억은 더 필요합니다.”

“천억 늘려줄게요. 삼주 안에 부탁드려요.”

“저기, 그건…….”

최윤이 막 입을 열려고 하자 가렌이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는 대신 나섰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회장님.”

“세 분만 믿어요.”

그렇게 세 과학자는 퍼플 결정체를 챙겨서 신 연구시설로 향했다. 가렌은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시간을 더 달라고 부탁하려는 최윤을 질질 끌다시피 해서 나왔다.

“가렌 박사님. 삼주는 도저히 불가능해요.”

“최 소장, 연구 예산은 준다고 할 때 받아둬야 하오. 아직 뭘 모르는군, 이 사람.”

============================ 작품 후기 ============================

한두 편이면 이번 파트가 완전히 끝날 듯합니다.

모든 독자를 만족시킬 순 없습니다. 저의 능력은 턱없이 모자랍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잡은 방향을 지키고, 흔들리지 않는 것뿐입니다. 흔들리는 순간 글은 붕괴합니다.

연재가 참 오래 되었습니다. 고인 물이 되는 게 싫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계관에, 그리고 전개에 있어 큰 변화를 주고 싶었습니다. 블랭 파트는 즉흥적인 발상이 아닌 그런 의도에서 진지하게 구상했습니다. 일부 분들에게는 저의 그런 시도가 불편했던 모양입니다만, 그래도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레이드물 겸 시트콤이라는 본질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귀족의 정체성이니까요. 다만 가볍고 경쾌한 분위기는 때로는 어두운 그늘 위에 자리잡았을 때 더 강조되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늘은 빛을 더욱 밝게 보이게 해주는 것이니까요.

감사합니다.

PS : 완결 아닙니다.. 아직 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