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Noble

00544 Pre-season - Couple

조 편성이 바뀌었나?

유지웅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문을 열어주었다. 엘리베이터를 고려하면 아직 시간이 좀 있다. 그래서 1층 거실에서 노트북과 책을 잔뜩 펼쳐놓고 쑥덕거리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효주가 여기 온대. 지금 올라오고 있어.”

“효주? 정효주?”

의외로 남자애들 둘이 반기며 나섰다. 유지웅은 순간 오지 못하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애들은 살짝 경계하는 태도로 물었다.

“효주가 여길 왜 와?”

“조 편성이 바뀌었나 봐. 한 명이 남아서 우리 조로 넣었대.”

“근데 왜 하필 우리…….”

민지가 뭐라 말을 하려 하자 성지원이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쿡 찔러 말을 멈추게 했다. 그녀는 곧 환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잘 됐네. 신입생 1등이랑 같은 조 되면 공부하기도 편하고,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 거야. 지금 온대?”

“응. 엘리베이터 탔대.”

“용케 잘 알고 찾아왔네. 여기 혼자서 찾아오기는 좀 힘들 거 같던데.”

원래 매일 온다고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둘의 약혼은 아직까지 외부에는 비밀이었다. 유지웅은 주변의 이목을 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조용히, 그리고 소박하게 ‘약혼녀’와 학창 생활을 즐기고 싶을 뿐이다.

이윽고 초인종이 울리자 유지웅이 문을 열어주었다. 급우들이 뒤에서 반은 경계하듯, 반은 환대하듯이 반겼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손을 작게 흔들었다.

“안녕? 늦었지?”

“어서 와. 들었어. 같은 조 됐다며?”

“응. 한 명이 남아서 선생님이 여기 조로 넣어주셨어.”

“잘해 보자.”

“얼마나 했니?”

“거의 다 해가. 금방 끝날 거 같아.”

성지원의 말에 유지웅은 의아했다. 무슨 소리야? 이제 막 시작했는데 뭘 거의 다 해가?

“그래? 그럼 나 무임 승차 하면 되는 거니?”

“편히 있다 가면 돼. 특별히 수고할 건 없을 거야.”

무언가 이상한데? 분명히 여자애들과 정효주가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싸늘한 듯 만 듯한 이 공기는 대체? 그리고 남자애들은 왜 갑자기 뒤로 멀찍이 떨어진 거야?

“밥은 먹었어? 뭐라도 시켜줄까?”

“괜찮아. 요즘 다이어트 중이거든.”

“그게 무슨…….”

고기라면 아주 환장을 하는 걸 하늘이 알고 땅이 다 아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말하려는데 그녀가 보이지 않게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면서 눈을 살짝 흘긴다. 마치 ‘그 이상 말하면 죽여 버릴 거야!’라고 투정을 부리듯이.

아무튼 정효주까지 합류해서 7명으로 조별 과제를 계속 진행했다. 과제는 지금까지 한 것처럼 성지원이 주도를 하려 했다. 하지만…….

“이거 자료 틀렸어. 내가 다시 조사해볼게.”

“이게 어디가 틀렸는데? 내가 인터넷에서 제대로 가져온 자료란 말이야.”

“사료 고증은 포털 QnA 같은 곳에서 가져오면 안 돼. 신빙성이 없어. 내가 여기 학술 논문 사이트 정회원 아이디가 있으니까 여기서 찾아볼래?”

“……너 그런 데도 들어가니?”

“국사 과제인데 이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니?”

두 여자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보이지 않는 불꽃이 마구 튀어오른다.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났다. 성지원, 신입생 학력평가시험에서 전교 9등을 했다던가? 그럼 전교 1등과 전교 9등을 지금 한 조로 몰아넣은 거야?

‘담임 참 생각 없네.’

나중에 진짜 세상으로 돌아가면 제니스 사학 재단에 한 마디 해줘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이런 비효율적인 수학 지도는 자제하라고 지시해야지.

“근데 좀 덥지 않니?”

“더워?”

“응. 재킷이라도 벗을까 봐.”

성지원은 정말 더운지 손부채질을 하다가 교복 재킷을 벗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얇고 하얀 블라우스가 드러났다. 안에 받쳐 입은 블라우스가 등에서 비쳐 보였다. 남자애 둘이 침을 꿀꺽 삼켰다.

“나도 좀 덥네.”

다른 애들과 달리 사복 차림이었던 정효주는 겉에 걸치고 있던 갈색 가디건을 벗었다. 유지웅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게!’

이 여편네가 지금 제정신이야!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정효주는 가디건 안에 흰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문제는 그 티셔츠의 넥이 너무 넓어서 한쪽 어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얀 어깨에 걸린 녹색 속옷 끈이 보이자 남자애들의 눈도 덩달아 커졌다.

“어머, 옷이 꽤 과감하다? 아직 날씨 덜 풀렸는데.”

“괜찮아. 하나도 안 춥던 걸.”

“학교에서 바로 안 오고 집에 들렀다 온 거니? 뭐 하러 그리 번거롭게?”

“집에서 자료 좀 찾을 게 있었거든.”

“그래도 여유 있었나 봐? 교복까지 갈아입고 올 정도면?”

“하루 종일 교복만 입고 있으면 불편하잖아. 세탁도 해야 하고.”

“……세탁?”

세탁이라는 말에 성지원의 표정이 아주 살짝 일그러졌다. 정효주는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나 하루에 한 번씩 교복 세탁하거든. 어머, 혹시 주말에만 세탁하는 거니?”

“뭐, 뭐가! 나도 여벌은 있어! 이틀에 한 번은 세탁한다고!”

“그래도 매일 세탁하는 게 깔끔하지 않니?”

“네가 좀 유난떠는 건 아니니? 여름도 아닌데 무슨 교복을 매일 세탁을 해.”

어느새 남자애들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애 둘도 멀찌감치 물러나 있었다.

* * *

다음 날.

“어머, 지웅아. 왔어?”

교실을 들어서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성지원이 방긋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어. 안녕.”

“아침은 먹었니? 혼자 살면 누가 챙겨주지도 않을 텐데.”

“아침도 배달 돼.”

“어머, 정말? 역시 대박이다.”

대수롭지 않게 짧은 안부를 나누고 자리에 앉는데 뭔가 기류가 이상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왜 그리 쳐다 봐?”

유지웅이 대놓고 말을 하자, 몰래 그를 쳐다보던 여학생들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자기들끼리 조용히 꺅꺅거리는 게 왠지 거슬렸다. 갑자기 분위기가 왜 이래?

여학생들은 유지웅 몰래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진짜? 집이 그렇게 좋아?”

“말도 마. 200평짜리 복층 펜트하우스인데, 내가 검색해봤더니 매매가만 600억이래!”

“꺅!”

“게다가 식탁 하나에 오백이 넘어가고!”

“와, 오백이래!”

“엘리베이터 버튼 안 눌러도 자동 인식해서 딱 꼭대기로 올려다 준다니까!”

“와!”

어느덧 여학생들 사이에 소문이 쫙 났다. 어찌 보면 이건 유지웅의 실수 아닌 실수였다. 그냥 ‘좀 사는 집’으로 보일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일반인이랑 돈 감각이 내핵과 명왕성만큼 차이가 나다 보니…….

유지웅이 자리에 앉자 성지원이 얼른 달려와서 그를 올려다보듯이 책상 옆에 쪼그려 앉았다.

“저기 있지, 어제 과제한 거 이어서 할 건데 혹시 오늘도 너희 집에 모여도 돼?”

“뭐, 그러던가.”

다소 매정해 보일 수 있는 대답인데 전혀 상관없는지 성지원은 싱긋 웃고는 친구들에게 쪼르르 돌아갔다.

“…….”

한쪽에서, 정효주가 말 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했던가. 유지웅에 관한 소문이 어느새 학년 전체에 쫙 났다. 정작 본인만 어느 정도까지 소문이 났는지 모를 뿐이다. 정확히는 무관심했다.

“저거 봐, 포브스 코리아 읽고 있어. 세계를 이끄는 경제인? 와, 저런 거 읽는구나.”

“그러게. 다른 남자애들은 만화책 읽기 바쁜데.”

“국제 신문도 많이 보는 거 같더라. 패드로 보면 항상 그런 거 읽고 있던데. 특히 외국 꺼.”

“정말 다르긴 다르구나.”

“그런데 왜 저런 애가 이런 학교에 왔지? 여기 학군은 진짜 평범한데?”

“어느 집안일까?”

“남자애 혼자 그런 펜트하우스에 살게 할 정도면 집안 진짜 엄청 부자지 않을까? 못해도 재벌은 되야 할 텐데.”

공부에 흥미가 없는 유지웅은 수업 시간 내내 딴짓을 했다. 경제 잡지를 읽거나 패드 컴퓨터로 국제 기사를 찾아보곤 했다.

그는 휘버 박사 이야기, 결정체 사회의 발전 과정 같은 ‘피부에 와 닿은’ 주제를 주로 찾아보았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역시 안슐은 대단하네.”

소녀들은 무슨 경제 과학 잡지 읽는 고교생한테 로망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런 거 아니다. 그는 단지 친구와 지인들의 리즈 시절을 기사에서 꼼꼼이 찾아보는 재미에 푹 빠졌을 뿐이다.

안슐이 IACP로 아시아의 결정체 유통 패권을 장악한 일이라던가, 남기철이 승진을 한 이야기라던가, 장태준이 비상 상황에서 임시로 지휘권을 맡아 침착하게 피해 없이 괴수를 물리쳤다던가, 빌클런이 연임에 성공한 이야기라던가…….

틈틈이 그들 이야기를 신문이나 여러 매체에서 찾아보고 있으니 뭔가 감회가 새롭다. 특히 안슐은 이 시기에도 이미 유명한 국제 인사여도 관련 기사를 찾아보기 쉬웠다. 역시 아랍의 패기란 시대를 불문하는 것 같다.

‘찾아가도 모르겠지?’

문득 지금 안슐을 찾아가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상상이 들었다. 한 번 찾아가 보고 싶다. 그런데 만날 수나 있으려나? 안슐은 지금의 자신을 전혀 모를 텐데?

핸드폰이 울렸다.

「잠깐 나 좀 봐.」

정효주가 보낸 문자였다. 유지웅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를 확인했다. 그녀는 새침한 표정으로, 문자 같은 거 보낸 적 없다는 듯이 책만 보고 있었다. 옆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긴 자태가 참 예쁘다.

그는 먼저 일어나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정효주가 옥상으로 올라왔다.

“꼭 너희 집에서 과제해야 돼?”

“그게 편하지 않아? 우리끼리 할 수 있잖아.”

정효주는 뭔가 불만인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런 모습이 유지웅에게는 신선했다. 새침한 모습이 참 귀여운데, ‘와이프’는 그런 모습을 어디 통 보여줬어야 말이지.

‘설마 질투하나?’

충분히 그럴 수 있겠는데? 귀엽다는 생각이 든 유지웅은 일단 그녀를 달래주기로 했다.

“근데 왜 그게 너희 집이야? 나 혼자 사나?”

“……그럼?”

“그게 우리 집이지 왜 나 혼자 집이야. 니가 싫으면 모임 장소 바꾸자.”

정효주의 얼굴이 환해졌다.

============================ 작품 후기 ============================

유부남의 여유, 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