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Noble

To win 00628?

눈이 마주치자 소녀는 애처롭게 몸을 떨었다. 얼핏 보기에는 갓 고교에 입학한 나이로 보인다. 아마 이 소녀에게는 나이란 의미가 없을 테지만.

우유처럼 깨끗하고 흰 피부에, 허리까지 찰랑거리는 황금빛 금발은 탐스러운 미색을 자랑했다. 푸르고 시원한 눈동자는 더러움을 모르듯이 깨끗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은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균형을 이뤄, 황홀하기 그지없는 굴곡을 자랑하고 있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요.”

어느새 사뿐히 다가온 나미가 중얼거렸다. 혀를 차는 듯한 시선으로 내려다본다.

“무슨 뜻이에요?”

“아무리 제가 인간 모습을 얻어서 패널티를 얻었다 해도, 같은 화이트급인데 방어력이 너무 강하다 했어요. 본신을 강화하는 걸 포기하고 집 만드는데 모든 힘을 다 쏟은 거예요.”

“예?”

“볼래요?”

나미는 가볍게 손을 뻗었다. 하얀 손가락이 냉정하게 다가갔다. 소녀는 겁에 질린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나미가 가볍게 목을 쥐는데도, 반항조차 제대로 못하고 켁켁거렸다.

소녀의 목을 놓은 나미가 이것 보라는 듯이 말했다.

“몸은 진짜 약해요.”

“그래도 레드 결정체가 있잖아요?”

“그 힘을 전투 능력에 쏟지 않고, 집을 만드는데 할애한 거예요. 이걸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나미는 적절한 비유가 뭐가 있나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제가 전사라면, 이 아이는 전투 도구를 만드는 기술자? 그렇게 보시면 돼요.”

“아하.”

그제야 유지웅은 이해가 갔다.

즉 나미는 결정체의 힘을 본신의 능력 강화에 투자했다. 그래서 몸뚱이 하나로 막강한 파워를 낼 수 있다.

반면 노틸러스는 전투 강화가 아닌 ‘제작’에 결정체의 힘을 투여한 케이스다. 시간을 들여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집(이라고 해두자)을 짓고, 그 집 안에서 안락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나미가 직접 칼을 들고 용맹하게 싸우는 타입이라면, 노틸러스는 탱크를 만들어서 안전하게 타고 다니는 타입? 어쩐지 공격력과 방어력이 무시무시하게 강하다 싶었다.

“그럼 저 외장갑이 노틸러스가 만든 전투 도구이자 집이라는 소리군요?”

“그렇죠.”

“이거 없이 노틸러스 혼자서는 그냥 옐로 몹 하나만도 못하고요?”

“아마도요. 꼭 화이트가 아니라 레드나 블랙 중에서도 이런 타입은 적지 않게 있어요. 그 와중에 용케 화이트 급으로 진화를 한 케이스 같네요. 이런 타입은 힘을 쌓는데 시간이 엄청 걸리지만 대신 조건만 갖춰지면 더 강한 힘을 내거든요.”

역시 태평양의 지배자답게 심해 괴수에 관해서는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유지웅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그리고 정효주를 돌아봤다. 그녀는 난감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노틸러스가 죽인 사람 숫자가 몇 명이지?”

“죽인 사람? 그건 아직 없지 않아?”

정효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알기로는 사망자는 아직 없는데?”

“그치? 나도 그렇게 알고 있거든.”

“……자기, 설마?”

“이거 사육 안 할래?”

정효주는 대단히 냉정한 얼굴로 딱 잘라 말했다.

“안 돼.”

“왜 안 돼?”

“너무 위험해. 모습만 인간이지 나미 씨처럼 우리에게 우호적이라는 보장도 없고. 만약 땅에 들여놨는데 난동을 부리면 어떻게 되겠니?”

“본체는 엄청 약하다잖아. 이것 봐.”

“아무튼 난 반대야.”

위험? 사실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소녀가 인간 탱커 뺨치게 예쁘다는 점. 와이프 된 입장에서 저런 걸 사육하면서 맘을 졸이고 싶지는 않았다. 이건 뭐 적당히 이뻐야지.

게다가 인간이 아닌 괴수이니 애완용 동물 대하듯이 예뻐해 줬다 뭐 그런 핑계도 당당하게 나올 수 있는 거 아닌가? 신랑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불안함은 애초에 싹을 잘라야 한다.

“그럼 어떡해? 죽여?”

“괴수잖니.”

좀 독하다 싶지만, 정효주는 어쩔 수 없다 생각했다. 핵공격에 버금가는 무시무시한 포격을 쾅쾅 해대는 녀석이다. 나미 말을 들어보니 적당히 시간을 주면 또 거대 앵무조개 외장갑을 만들어낼 것 같은데, 이런 걸 위험해서 어떻게 관리해?

유지웅은 입맛을 다셨다. 말로 잘 설명은 못하겠는데, 이거 사육해서 데리고 있으면 대박일 거 같았다. 말이라도 좀 통하면 충성을 맹세 받고 그 핑계로 어떻게 설득을 할 것 같…….

“……살려주세요.”

“마, 말했어!”

“자,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이제 안 그럴게요.”

“봐봐! 말했어! 애가 말했어!”

정효주는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 되었다. 나미도 신기한 눈으로 소녀를 살폈다.

소녀는 와들와들 떨면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서 싹싹 빌었다.

“시, 신기한 게 너무 많아서 호기심에 그랬어요. 예쁜 것도 많았구요. 그래서 또 없나 해서 올라와봤어요. 죄송해요.”

“신기한 거?”

유지웅은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생각했다. 정효주가 낭패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설마, 얼마 전에 집어삼킨 수송선에 있던 거 말하는 거야?”

소녀는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정신없이 끄덕였다. 저러고 있으니 애처롭기가 하늘같았다. 유지웅은 자꾸만 마음이 약해졌다. 가여운 미소녀에게 동정을 느끼는 건 남자로서 피할 수 없는 슬픈 숙명이었다.

“잠깐, 그럼 설마 결정체 폭탄 그것도……?”

그제야 유지웅은 기억해냈다. 맞다! 그 선박에는 결정체 핵융합로 제작을 위한 설비가 실려 있었지?

* * *

노틸러스는 본래 바닷속을 누비는 거대 앵무조개 괴수였다. 물론 크기는 지금보다 훨씬 작았다. 한 직경 30미터 정도?

촉수를 빼고는 특별히 강한 공격기가 없어 천적의 공격에는 취약했다. 그러나 단단한 외장갑이 있었다. 몇 번 집적거리는 천적들이 있었지만, 이빨 하나 안 들어가는 외장갑 때문에 모두 번번이 포기했다.

노틸러스는 바닷속을 누비며 자신보다 작고 약한 괴수들을 잡아먹으면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깨달았다. 언젠가 한 번 스치듯이 보았던, 태평양의 지배자와 비슷한 모습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또한 지적 사고에도 눈을 떠, 그전에는 할 수 없던 논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감정에도 시야가 트였다.

노틸러스는 직감적으로 불안함에 떨었다. 만약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태평양의 지배자가 알게 되면,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올 것이라고.

그래서 노틸러스는 인도양으로 도망쳤다. 열심히 산호초와 암석, 기타 잡물질을 주워 모아 집을 만들었다. 태평양의 지배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단단한 집이었다.

마침내 오랜 시간을 들여 커다란 집을 만들었다. 노틸러스는 비로소 안심했다. 비록 몸은 연약하기 그지없지만, 이 단단하고 큰 집이 있으면 태평양의 지배자도 자신을 어쩌지 못할 것이라 자신했다.

예상은 들어맞았다. 한 차례 조우했을 때, 태평양의 지배자는 외장갑을 뚫지 못하고 결국 후퇴했다. 비록 너무 큰 몸집 때문에 기동력이 떨어져 쫓아가진 못했지만, 노틸러스는 더 이상 자신을 위협할 천적이 없다는 것에 안심했다.

그렇게 유유자적하게 바닷속에서 열심히 집을 꾸미며 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이게 뭐지?’

노틸러스는 요상한 물건들을 주웠다. 이상한 그림, 기호가 새겨진 잡동사니들이었다. 노틸러스는 그것들을 주워다 안락한 집에서 열심히 분석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고래의 초음파와 같은, 어떤 의사소통의 수단을 기호화한 하나의 약속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번개가 뇌리를 강타하는 듯한 충격이었다. 노틸러스는 그것들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익히고, 공부했다. 그리하여 세상 바깥에는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것은 인간들이 버린 쓰레기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노틸러스는 인간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아무리 바닷속을 뒤져봐도 인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태평양의 지배자가 있는 옆바다까지 나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대신에 쓰레기는 많았다. 바다를 돌아다니다 보면 인간들이 버린 쓰레기를 많이 건질 수 있었다. 노틸러스는 그것들을 열심히 주워 모았다.

그러던 어느 날, 노틸러스는 수면에 일렁거리는 그림자 하나를 발견했다. 꽤 큰 크기인 것으로 보아 같은 바다 괴수 같았지만, 아무런 힘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래서 노틸러스는 그것을 덮쳤다. 이것이 책에서 보던 선박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신이 난 노틸러스는 선박을 잡아끌고 집 안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감동했다. 선박에 실려 있던 무수히 많은, 부서지지 않은 깨끗한 잡동사니에.

특히 노틸러스는 가장 깊숙한 곳에 보관된, 신기하게 생긴 물체에 호기심이 끌렸다. 인간은 대체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강하게 일었다.

무제한으로 지식을 흡수한 노틸러스는 곧 그 신기하게 생긴 물체의 사용법을 알았다. 약간의 결정 에너지를 주입하기만 해도 물체는 강력한 폭탄을 만들어냈다. 노틸러스는 자신의 집에 가장 부족했던, 강력한 원거리 공격 수단이 생긴 것이 기뻤다.

이제 천적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이제 웅크리고 얻어맞기만 하는 일은 없을 거야!

한편 노틸러스는 궁금해졌다. 선박에는 참으로 예쁜 것도 많이 있었다. 이것들은 뭐에 쓰이는 것일까? 인간들은 이런 것들을 갖고 노는 걸까? 어떻게 이런 것들을 구했을까? 만들었을까?

더, 더 알고 싶어. 더 예쁜 것들을 보고 싶어.

그래서 노틸러스는 결심했다. 인간들이 가진 예쁜 것들, 얻으러 가야지. 근데 공짜로는 안 주겠지? 그럼 뭘 선물로 주면 될까? 난 줄 게 없는데? 진주라도 만들어서 줄까?

하여튼 노틸러스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뭍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매우 강력한 인간을 만났다.

* * *

“아하, 그러니까 인간들 물건에 호기심이 생겨서 나왔다, 이거지?”

끄덕끄덕.

“그럼 왜 우리를 공격했어?”

설레설레.

“아, 맞다. 하긴, 먼저 공격한 건 우리네. 그래도 네가 배 공격만 안 했어도 그럴 일은 없었어. 안 그래?”

“……잘못했어요오.”

“잘못했다고, 말로만? 그렇게 세상이 편한 게 아니야, 조개 아가씨. 인간들 세상에는 기브 앤 테이크란 말이 있어. 이게 뭐냐면, 잘못을 저질렀으면 백만 배로 갚아야 한다는 뜻이야.”

“……백만 배는 어디서 튀어나온 말이야.”

정효주가 어이없다는 듯이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소녀는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좋아. 특별히 네가 인간과 교역하는 것을 허가한다.”

“정말요?”

“당연하지. 난 그럴 힘이 있어.”

“당신이 그럼 인간의 왕인가요?”

“왕? 뭐 그렇다 쳐.”

“대단해요. 영광이에요.”

왕은 아니지만 국제 사회에서 그만한 힘은 낼 수 있으니까 그렇다 쳐도 상관없겠지?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소녀는 생각 이상으로 크게 감명을 받은 듯했다. 동화책에 왕이 대체 어떻게 서술되어 있던 거야?

유지웅은 해안에 나동그라진, 1km에 달하는 앵무조개 외장갑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녀가 살고 있던 집이다.

“저기 네 집 말인데, 부서진 건 아니지? 아직 쓸 만하지?”

“네! 멀쩡해요!”

“좋아. 그럼 네 조개 나 줘. 그것으로 네가 우리에게 저지른 모든 죄를 사하고, 교역을 허가하마.”

“네, 드릴게요. 가지세요.”

============================ 작품 후기 ============================

워워, 여러분들 머릿속에 음란마귀가 씌었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