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Noble

Chairman 00633 is on a mission.

화석 연료 시절, 핵발전소는 비싼 화석 연료를 대신해 대량의 전기를 싸고 안정적으로 공급해주는 도구였다. 물론 싸다는 것은 에너지 생산 단가 측면에서만 본 것이고, 사고 위험성과 핵폐기물 처리 등의 무형적 단가까지 포함했을 때 정말로 저렴한지는 여러 면에서 논란이 많았다.

결정체를 이용하면서부터 핵발전소는 순차적으로 폐기되었다. 생산 단가에서는 여전히 핵발전소가 유리했지만, 위험성과 폐기물 보관 문제로 항의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낮은 에너지 생산 단가 때문에 결정체가 등장하고 나서도 한동안 다수의 나라가 핵발전소를 운영해왔다. 그리고 그 폐기물은 지구 곳곳에 상당수 축적돼 있었다.

“노틸러스의 원소분리기능은 어디까지나 입자를 분류하는 거 아닙니까? 원소 붕괴 반응에는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높은 에너지를 가진 원소는 안정적인 원소로 붕괴하는 과정에서 많은 에너지, 방사선을 방출한다. 원소를 단순히 골라내는 기능이 그런 붕괴 반응에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지, 가렌은 회의적이었다.

‘관련 이론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진 않지만……. 그건 너무 희박해.’

“너도 늙긴 늙었구나.”

“예?”

십대 소년이 육십대 노인에게 늙었다고 하는 꼴이 우습긴 하지만, 둘의 실 나이 차이를 생각해 보자.

“늙더니 애가 보수적으로 변했어. 쯧쯧, 내가 늘 말하지 않았더냐? 과학자는 패기를 가져야 한다고.”

“교수님.”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없는 건 아니지. 이미 몇 가지 이론 모델도 세워 놨다. 도전해볼 가치는 충분해.”

“교수님.”

“됐다. 군말 없이 돕기나 해라.”

가렌은 순간적으로 연구 일정을 떠올렸다. 그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결정체를 이용한 상온 핵융합 연구와, 핵물리학과 결정체학의 통합을 위한 이론 모델 제작, 이 두 가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잡아먹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 그 중 하나는 이미 니트로가 혼자서 끝냈던가?

“전 통합 이론 모델을 만들어야 하는데요.”

“같이 하면 되잖아. 한참이나 젊은 놈이.”

“아까는 늙었다고 하셨으면서.”

“무슨 어린 놈이 패기가 그리 없어! 내가 항상 패기와 야망을 품으라고 가르치지 않았더냐! 패기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 못 이룰 일은 없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변명은 죄악이라는 걸 알고 있겠지!”

니트로는 진지하게 그의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너도 나이 먹고 지위 좀 올랐다고 변했냐?”

“…….”

가렌은 조금 창피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반박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니트로의 말대로, 자신은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연구보다는 당장 많은 시간과 예산을 들여 해야 할 통합 이론 제작 연구에 더 많은 신경을 할애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휘하의 많은 제자들을 이끌어야 하는 스승으로서, 그리고 막대한 프로젝트를 짊어진 책임자로서,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방향이었다.

그러나 ‘나이 먹더니 변했냐?’하며 쳐다보는, 옛 스승의 눈길 앞에서는 아무런 변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부끄러운 감정이 가슴을 맴돌았을 뿐이다.

“그럼 그리 알고 준비해라.”

“……예.”

“결정체 핵융합 이론 정리도 마쳤고, 오랜만에 같이 매달릴 재미있는 테마가 생겼군. 기쁘구나.”

가렌은 한편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스승이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또 모르지.’

늙은 가슴이 조금 뛴다. 혹시 아는가? 청춘을 되찾은 이 스승이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할지?

* * *

“아아. 죽겠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유지웅은 침대에 몸을 던졌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움직이기 싫은 듯이 꼼짝도 않았다. 정효주가 어르고 달래느라 나섰다.

“피곤해?”

“몰라. 다리가 비명을 질러.”

“얼마나 돌아다닌 거니?”

“돌아다닌 것도 돌아다닌 건데, 애 둘이 정신이 없어서…….”

호기심 많은 나디아는 인간 사회를 구경하고 싶어 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유지웅과 직접 돌아다니기를 바랐다.

그녀에게 원하는 게 많은 유지웅은 기꺼이 데리고 다니면서 서울 곳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수족관도 가고, 미술관도 가고, 동네 옷가게 시장도 들렀다. 덕분에 나디아는 L백화점 본점이 동네 옷가게 시장이라는 잘못된 편견을 가지게 됐지만, 사소한 문제니 이건 그냥 넘어가자.

문제는 피즈도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면서 발생했다. 유지웅은 할 수 없이 피즈도 데리고 셋이서 외출했는데, 나디아를 질투한 피즈가 한 시도 놓지 않고 매달리는 통에 여러 모로 피곤했다.

‘아이 돌보는 건 역시 안 맞아.’

언제 한 번 아이를 돌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놀기 바쁜 젊은 아빠라서 육아는 와이프와 아랫사람들에게 떠넘기고, 가끔 짓궂은 장난을 치고 아이들을 괴롭히면서 아빠라는 걸 상기시켜주는 게 전부였다.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니 피곤했다. 운전대까지 직접 잡아서 그런지 더 힘들었다.

“일어나. 옷 벗고 씻어야지, 응?”

정효주가 살살 달래자 그는 끙 하며 몸을 일으켰다. 대강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에 들어갔다. 욕조에 받아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나른해지며 피로가 풀렸다.

씻고 일어난 유지웅은 머리의 물기를 털며 나왔다. 가벼운 레이스 잠옷으로 갈아입은 정효주가 주스를 가져왔다.

“애들은?”

“자고 있지.”

“나디아는?”

“수영장에 있던데? 거기서 자려나 봐.”

유지웅은 창가로 가서 흘끔 내려다봤다. 적당한 조명이 비치는 수영장에 커다란 앵무조개가 둥둥 떠 있었다.

“잠깐 나디아 좀 보고 올게.”

“피. 나보다 나디아가 더 중요해?”

“에이. 그건 아니지. 어쨌든 손님이잖아.”

정효주는 피식 웃었다. 유지웅은 몸을 일으키며 잠옷 위에 대강 옷을 걸쳤다. 그녀가 지나가듯이 슬쩍 말했다.

“나, 이번에도 자기 믿어도 되지?”

“믿다니? 뭘 믿어?”

“아냐, 됐어. 잘 자라고 인사하고 와.”

“야, 정효주. 내가 설마 괴수랑 바람을 피겠어? 응?”

“아이, 그래. 내가 잘못했어.”

어깨를 당겨 와락 안은 그가 나무라듯 말하자 정효주는 애교 부리듯이 가볍게 가슴을 치며 밀어냈다.

유지웅은 본채를 나섰다. 야외 수영장과 본채는 불과 6미터 정도였다.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앵무조개 중간층이 갈라지면서 상층부가 활짝 열렸다. 몸을 내민 나디아는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었다.

“저 보러 오신 거예요?”

“어. 너도 이제 자려고?”

“아니요. 공부하려고요.”

“그럼 잠은 안 자?”

“많이 안 자요.”

조개를 수영장 가장자리에 갖다 댄 나디아는 영차 하고 일어나서 난간에 앉았다. 유지웅도 슬쩍 웃음을 짓고는 그녀 옆에 나란히 앉았다.

“피즈가 따님이셨군요. 역시 대단해요.”

“……대단하다니, 뭐가?”

“태평양의 지배자를 후궁으로 두고 계신 줄은 몰랐거든요! 저도 나름 고전했던 상대인데, 역시 폐하는 대단하세요!”

“……아, 그게 말이지.”

사실 딸 같은 거 아닌데, 자초지종을 설명하려고 하는데 흥분한 나디아는 좀처럼 틈을 주지 않았다.

“서울은 참 대단한 도시 같아요. 직접 보고 저 많이 놀랐어요! 바닷속과는 비교도 안 되게 멋지고 아름다워요! 저 평생 이곳에서 살고 싶어요.”

“인간이랑 어울려 살 거면, 그 조개에서 생활하는 버릇을 고쳐야 할 거 같은데.”

“몸이 약해서 안 돼요.”

나디아의 체력은 옐로 몹보다 못한 수준이라고 한다. 결정 에너지의 힘을 대부분 육체적 전투가 아닌 생산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말이 쉬워 옐로 몹보다 못한 수준이지, 어쩌면 보통 인간 수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나디아는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앵무조개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아까 외출을 할 때에도 앵무조개를 타고 돌아다니려 해서 그가 기겁을 했을 정도다.

“조개 벗어나면 그렇게 불안해?”

“예. 거북이가 등껍질을 빠져 나와서 돌아다니는 기분이에요.”

“……한 방에 이해했다.”

나디아는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아스라하게 내려앉는 달빛이 하얗게 부서졌다. 아이처럼 웃는 얼굴이 참 예쁘다고 유지웅은 문득 생각했다.

미모라면 나디아는 나미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나미가 여려 보이지만 사실 단단한 느낌을 가진 여자라면, 나디아는 정말 보이는 그대로 만지면 부서질 듯이 여린 느낌을 준다.

나디아는 두 다리를 뻗어 수영장 물에 담갔다. 장난을 치듯이 물을 첨벙거리기 시작했다. 투명한 물방울을 튀기는 두 다리는 곱고 가늘었다. 꿈에 취한 듯 몽롱한 눈빛으로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는 옆모습은 그림 속의 풍경 같았다.

“오늘 낮에 봤던 그 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이 전부 폐하의 백성들이라는 거지요?”

“……그건 아니고.”

“아니에요? 하지만 폐하는 인류의 왕이라면서요?”

“그러니까 왕 같은 힘을 갖고 있다는 거지, 왕 그 자체는 아니거든?”

“폐하를 알아본 백성들은 엄청 황송해하던걸요?”

돌아다니던 도중 간혹 유지웅을 알아본 시민들이 있었다. 주로 중장년층으로, 그들은 왕이라도 만난 듯이 황송해하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친밀하게 다가가고 싶으면서도 어려움을 품은 그 태도가 나디아에게는 그리 비쳤던 모양이다.

“그거야…….”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한 유지웅은 머쓱해서 웃기만 했다. 자기 입으로 자기 자랑을 하려니 이거 영 쑥스러웠다.

갑자기 나디아가 그를 돌아봤다.

“폐하, 소녀가 청이 있어요.”

도저히 적응 안 될 것 같은 고풍스러운 극존칭도, 마스크가 워낙 훌륭하니 위화감이 안 생긴다.

나디아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소녀도 피즈같은 공주님을 갖고 싶어요. 성은을 내려 주세요.”

“쿨럭! 쿨럭!”

============================ 작품 후기 ============================

태평양의 지배자에게 경쟁심을 품은 인도양의 지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