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Noble

00666 Thunder Lord

비시는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 상황만 고려해도 다음 대선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 했다. 아니, 대선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LA가 날아가며 400만 여 명의 인명이 목숨을 잃었고, 워싱턴 주, 오리건 주, 네바다 주 등 서부 지역은 방사능 피해로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되었다.

지금 시점에서 북극곰을 잡는다 해도 미국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다.

“아직도 연락이 안 되나?”

“예! 해당 지역에 강한 자기장이 형성되어 있어 전파 통신이 불가능합니다!”

“위성 추적이라도 해 봐!”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일단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황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 수가 없으니 행정부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무력해도 너무 무력했다. 미합중국 대통령이 되어서 할 수 있는 건, 고작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뿐이었다.

* * *

최정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자세를 낮춘 그는 소리를 최대한 죽인 채 뒤를 돌아보았다. 대원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끼.’

일반 대원들이 맡은 임무였다. 탱커 둘, 힐러와 딜러 각각 한 명, 이렇게 4인 1조로 움직이며 북극곰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었다. 두 탱커는 각각 힐러와 딜러를 안은 채 빠르게 이동하며 북극곰의 시선을 교란해야 했다.

‘어디 있지?’

그러기 위해서 먼저 북극곰의 위치를 파악해야 했다. 최정원은 살 떨리는 심정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움푹 파인 모퉁이를 돌던 순간이었다.

‘허억!’

네 발로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북극곰을 발견했다.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자신들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회색빛 털에서 간헐적으로 번쩍거리는 스파크가 사뭇 위압적이었다.

최정원은 곧바로 동료에게 신호를 보냈다. 원거리 딜러가 긴장한 얼굴로 끄덕이고, 두 손을 모으고 정신을 집중했다.

화악 하고 빛이 일어났다. 날카로운 빛의 화살은 재빠르게 북극곰을 향해 날았다. 버프를 받은 궁극기도, 일반 궁극기도 아닌 그냥 통상 공격이었다.

북극곰에 직격한 빛이 폭발하며 굉음을 일으켰다. 북극곰은 곧바로 고개를 들어 최정원 팀이 있는 방향을 노려보았다. 두 탱커는 곧바로 힐러와 딜러를 들쳐 업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가소로운 것들!」

북극곰이 쫓아오기 시작했다. 두 탱커는 정말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저만치 멀리 커다란 바위가 보였다. 약속한 중계지점이었다. 코너를 도는 순간, 반대 방향에서 또 다시 몇 줄기 빛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이놈들!」

북극곰은 포효했다. 간지럽지도 않은 얄팍한 공격이었으나 조그만 애송이들이 거슬렸다. 북극곰은 먼저 쫓던 최정원 팀을 놔두고, 방금 자신을 공격한 대원들을 쫓았다.

“여기다! 여기야!”

거의 다 잡았다 느낄 무렵, 또 다시 등 뒤에서 기습 공격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통상 공격이 아니라 궁극기, 그것도 다섯 명이 한꺼번에 쏜 것이었다.

원거리 딜러의 범위 타격 궁극기가 넓은 지역에 폭발 섬광을 만들어내며 시야를 가렸다. 그 바람에 북극곰은 거의 다 잡은 녀석들을 놓치고 말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가만 두지 않겠다!」

몹시 화가 난 듯이 북극곰의 온몸을 맴돌고 있던 전기 기류가 한층 거세어졌다. 북극곰은 맹수의 울부짖음을 터트리며, 뒷발로 힘껏 땅을 굴렀다. 아니, 구르려고 했다.

그 순간 사방 가득 번쩍이는 광채가 일어났다. 북극곰이 딛고 선 지역을 중심으로 원반처럼 조여진 빛의 원반이 빠른 속도로 응축하기 시작했다. 급작스러운 중력의 힘에 중심을 잃은 북극곰은, 빛의 원반이 수축하는 중심으로 끌려가듯이 당겨지고 말았다.

「크윽! 무슨 수작이냐!」

거대한 빛의 원반이 가한 데미지는 형편없이 약했다. 그러나 빛의 원반의 진정한 위력은 데미지 그 자체가 아니라 상대를 중심으로 빨아들여 고정시키는 중력에 있었다. 북극곰은 안간힘을 쓰며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마치 자석에 달라붙은 쇠처럼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충격파 시전. 중력장 형성 완료. 목표의 위치 고정에 성공. 총출력의 53%를 소모했습니다.」

“좋았어! 가자, 효주야!”

「남은 47%의 출력을 사용자의 결정체 에너지를 전자기파로 변환시키는데 사용합니다. 작업 완료 이후 36시간 동안 저는 무방비 상태가 됩니다.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오리나는 그 와중에도 침착하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멀리 거리를 두고, 보이지 않는 곳에 산개해 은신한 대원들은 손에 땀을 쥐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오리나가 미리 준비해둔 함정으로 목숨을 걸고 북극곰을 꾀어냈다. 이제 할 일은 성공을 기원하며 지켜보는 것뿐이다.

북극곰은 자신을 고정시킨 충격파 중력장으로부터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온몸이 늪에 빠진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북극곰을 옭아매듯이 수축한 빛의 원반은 한층 더 강한 빛의 밀도를 보이고 있었다.

유지웅과 정효주는 서로 손을 꼭 잡았다. 둘의 몸은 새하얀 빛에 감싸여 있었다. 빛은 마치 오리나와 공명하듯이 서로 이어진 채 파장의 떨림을 맞췄다.

허공에 뜬 오리나는 두 손을 앞으로 내민 채, 구체의 움직임에 모든 센서를 집중했다. 구체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회전하며 맹렬히 에너지를 흡수했다.

‘이상해…….’

정효주는 온몸을 갉아먹는 듯한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세포 하나하나를 깃털로 간지럽히는 것만 같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몸이 뜨겁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신랑을 보았다.

이 순간, 그녀는 확신했다. 그도 자신과 흡사한 감각을 느끼고 있음을. 이것은 몸과 마음을 나눌 때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짜릿한 희열이자 쾌감이었다. 두 개로 나누어진 결정체가 강제로 완전한 하나로 이어지는 감각, 겪어보지 않은 자는 그 강렬함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전자기파 변환 완료. 목표의 레드 결정체를 직접 공격, 폭주 반응을 유도합니다.」

오리나는 유지웅 커플의 레드 결정체에서 강제로 에너지를 뽑아내 특수한 파장으로 전환시켰다. 파리 하나도 죽이지 못하는 무력한 파장이지만 결정체에는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다.

‘제발! 제발!’

모두가 간절한 마음으로 빌었다. 그때였다. 마치 그들의 기도에 답하기라도 하듯이, 북극곰의 온몸에서 기이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온몸의 피부가 갈라지듯이 벌어지며 그 틈으로 무수한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건 마치, 내면에 일어난 폭발 섬광이 강제로 껍질을 뚫고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크아아아아악!」

북극곰은 온몸을 비틀었다. 중력장에 붙잡힌 채 꼼짝도 못하며 고통스러워했다. 그 어떤 공격도 막아내는 단단한 방어막도, 내부의 결정체가 폭주하며 터져 나오는 힘 앞에서는 얇은 달걀 껍데기만큼도 못했다.

「폭주까지 앞으로 3분. 모든 대원들은 본대로 집결하기 바랍니다.」

오리나가 고글을 통해 지시를 내리자, 여차 하면 북극곰을 공격하려고 포위해 있던 대원들은 재빨리 뛰었다. 죽을힘을 다해 유지웅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유지웅은 한 명도 빠짐없이 전원 모이자 주저 없이 광역 보호막을 쳤다. 광역 버프로 강화하는 것은 물론이요, 충전 장비에 저장한 비거까지 총동원해서, 그야말로 모든 힘을 쥐어짜냈다.

그 순간 북극곰을 중심으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 * *

“각하! 위험 지역에서 커다란 폭발을 감지했습니다. 10메가톤급 전략핵에 달하는 엄청난 폭발입니다. 방사능 오염은 전혀 없습니다.”

대폭발이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던 비시는 의외로 폭발 규모가 작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어떻게 된 건가? 북극곰이 제니스를 공격한 건가?”

“아마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는 건 제니스가 아직 건재하다는 뜻입니다.”

칠드그린이 곁에서 거들었다.

“10메가톤급 폭발이라면 광역 보호막만 잘 치면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에너지입니다. 제니스는 아직 싸우고 있습니다.”

행정부는 누구 한 명 퇴근하지 못한 채 뜬눈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대략적인 전황만이라도 알면 좋을 텐데, 귀 먹은 장님 신세가 다름없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행정부는 이어지는 보고를 기다렸으나 무려 두 시간이 넘도록 아무런 보고가 없었다. 그 점이 비시는 물론이고 각료들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아까의 대폭발이 전투가 진행 중인 증거라면, 왜 그 뒤로는 아무 반응이 없는가? 설마 그 대폭발이 전투가 종결되었다는 신호탄이었을까? 그렇다면 누가 이기고, 누가 졌을까?

제니스가 이겼다면 진작 소식이 와야 할 텐데, 아무런 연락도 없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미합중국 전 국민이 나라를 버리고 해외로 튀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빨리 결정해야 하는데.

“장태준 전술팀장한테라도 연락을 좀 해보게!”

“알겠습니다.”

보좌관은 급히 연락을 취했다가 이내 당황해서 보고했다.

“가, 각하. 장태준 팀장이 대형 전세기 한 기를 빌렸다고 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어리둥절한 백악관은 급히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라고 지시를 내렸다.

“각하! 제니스 대원들이 전세기에 탑승 중입니다! 금방 한국으로 떠날 모양입니다! 유지웅 회장의 모습도 확인했습니다!”

“뭐라고?”

잠깐, 그렇다면 이겼다는 거야? 비시는 기쁨이 차오르면서도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동시에 섭섭했다. 아니, 이겼으면 이겼다고 말이라도 해주던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면 어떡해? 이쪽이 감사를 표할 시간은 줘야지.

“대원들이 너무 피곤하고 지쳐 있어서 먼저 보냈습니다. 대원들부터 챙기는 게 먼저라서요. 이해하시겠죠?”

“물론입니다. 무릇 리더라면 자기 부하들을 먼저 챙겨야 옳지요. 올바른 덕목이십니다.”

유지웅은 대원들을 비행기에 태워 한국으로 보낸 뒤 정효주와 함께 백악관으로 찾아왔다.

“북극곰은 섬멸했습니다.”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그런데 대폭발 때문에 결정체를 분실했습니다. 결정체 수색 작업에 미국측 인력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염려 마십시오.”

북극곰을 물리쳤다! 더 이상 나라가 멸망할 걱정도, 전 국민이 집단으로 피난을 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기쁨에 찬 비시는 바로 대통령 성명 발표를 열고, 북극곰을 물리쳤으며 미국은 위기에서 벗어났음을 강조했다. 초상집처럼 얼어붙어 있던 미국 전역은 곧바로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레드 결정체래, 레드 결정체. 와, 진짜 얼마나 할까?”

“그걸 왜 파니.”

“아니, 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얼마짜리인지는 궁금하잖아. 한 번 경매에 올려볼까? 얼마나 부르는지만이라도 알아보게.”

“그럼 못 써. 팔지도 않을 거면서 왜 그래.”

* * *

「크르르…….」

형편없이 망가진 북극곰은 시체처럼 늘어져 있었다. 온몸이 찢어지듯이 아팠던 것도 아까의 일이었다. 점차적으로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죽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 힘을, 다시 한 번…….」

북극곰은 쥐어짜내듯이 힘을 모았다. 그러나 온몸 가득 충만한 힘을 주었던 근원은 더 이상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북극곰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 힘! 마치 다른 차원과 연결된 듯한 문에서 흘러나왔던 그 힘! 아주 잠깐 쬐었던 것만으로도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줬던 그 힘만 있으면, 이까짓 부상쯤 치료할 수 있다.

북극곰은 온몸의 힘을 집중했다.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의지가 하늘에 닿았는지, 마침내 몸 속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는 힘이 느껴졌다. 인간들이 레드 결정체라 부르는 것, 그 ‘열쇠’가 마침내 손에 잡혔다. 무거운 손으로 열쇠를 잡은 북극곰은 ‘문’을 열었다.

화아아악.

눈앞의 허공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물결이 출렁거리듯 시공간이 응축하며, 공간이 서서히 찢어졌다. 찢어진 공간 너머로 보이는 것은 순수한 암흑뿐이었다. 그 암흑이 머금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에너지가 문을 열고 뛰쳐나오려고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북극곰으로서는 만 분의 일도 미처 소화하지 못한 거대한 힘이다. 그 힘의 아주 작은 파편만 주워도, 이까짓 부상쯤 치료하고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때였다.

싹둑!

날카롭게 빛나는 거대한 빛의 칼이 북극곰의 몸을 세로로 베었다. 고개를 떨어뜨린 북극곰은 감기려는 눈을 필사적으로 뜨려 애썼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가 자신을 공격했는지 죽을힘을 짜내어 살폈다.

그것은 괴물이었다. 온몸이 단단한 푸른 근육으로 뒤덮인 거대한 그림자였다. 두 발로 땅을 밟고 선 괴물의 한쪽 팔에는 푸른 빛으로 빛나는 칼이 쥐어져 있었다.

괴물이 입을 열었다.

「균열의 안정, 그 힘의 균형은 유지되어야 한다. 균열의 힘을 탐내는 자, 제거될 것이다.」

저건 괴물? 유령? 귀신? 아니, 뭐지?

북극곰은 자신의 몸에서 빠르게 생명력이 소모되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몇 초만 지나면 자신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북극곰은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네놈은…… 누구냐?」

등을 돌리던 괴물은 잠시 멈칫 했다. 그것은 괴물에게는 허락되지도, 어울리지도 않는 망설임이었다. 그 모순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마 세상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리라. 심지어 괴물 그 자신조차도.

「나는…… 공허를 떠도는 방랑자다.」

============================ 작품 후기 ============================

원래는 3편 정도 전투 하이라이트 장면을 구상했는데 여기서 끝냅니다.

오늘은 나귀족 2주년입니다. 지금까지 소리없이 응원하며 함께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2주년... 기념 이벤트로 뭘할까 생각하다가 독자 참여 에피소드를 써보자고 결정을 했습니다.

주인공이 이런 (트롤)짓을 하는 걸 한 번쯤 보고 싶었다... 라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1~3편 내외의 에피소드 분량으로 써보겠습니다. 예를 들면 피사의 사탑을 사서 자기 집 앞마당에 놓는다는지, 게임하다가 욕하는 애들이랑 현피를 뜬다든지, 뭐 그런 간단한 내용이면 괜찮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유지해온 글의 컨셉을 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당한 제안이 없으시면 그냥 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