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Noble

Defend the Seed 00727

“니트로 교수님, 어디 가셨어요?”

“어? 금방까지 있었는데, 어디 가셨지? 이봐, 니트로 교수님 못 봤나?”

“이상하다? 조금 전까지 분명 여기서 시뮬레이션 모델 검토 중이셨던 것…….”

정혜주는 허리에 손을 얹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이 남자가 진짜.’

또 도망갔다. 아주 그냥 미꾸라지처럼 잡힐 듯 말 듯 하면서 요리조리 잘도 빠져 나간다.

“좋아. 제대로 밀당 해보자 이거지?”

“예? 뭐라고 말씀하셨…….”

“아니, 됐어요. 니트로 교수님 보이면 당장 제 사무실로 오라고 전해주세요. 알겠죠?”

“예. 알겠습니다.”

정혜주는 등을 돌리다 말고 홱 돌아섰다. 그녀의 눈은 구석에 있는 캐비닛을 향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연구실에 없던 물건인데?

캐비닛은 보안 관계상 항상 잠금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물건을 넣었다 뺐다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언제나 잠가둬야 한다. 그런데 저 캐비닛은 지금 잠금장치가 걸려 있지 않았다.

그녀는 쌍심지가 올라갔다. 팔짱을 낀 그녀는 화를 참으며, 캐비닛을 똑바로 노려보고는 말을 이었다.

“이번 분기 예산안 기각되고 싶지 않으면, 무조건 제 사무실로 오라고 해주세요. 아셨죠?”

“예? 예. 알겠습니다.”

연구원들은 쭈뼛거리며 정혜주의 눈치를 살폈다. 정혜주는 문을 쾅 닫고 연구실을 나갔다. 그제야 한 연구원이 서둘러 구석에 있는 캐비닛으로 달려가 노크를 했다.

“교수님. 가셨습니다.”

캐비닛 안에서 자그마한 소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짜 갔냐?”

“예, 교수님.”

그제야 삐걱거리며 캐비닛 문이 열리고 안에 숨어 있던 니트로가 나왔다. 그는 목이 조이는지 칼라를 잠시 정돈하고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아슬아슬했네.”

“……언제까지 이리 피해 다니실 겁니까?”

“낸들 아냐.”

“정 이사님 단단히 작정하신 거 같던데. 이러다가 연구소 사람들 죄다 아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소식통에 한참 늦은 연구원의 말에 니트로는 가볍게 이마를 찡그렸다. 시간문제는 무슨. 벌써 세종시 연구단지 사람들은 죄다 알고 있는데.

‘가렌, 내 그 놈을 그냥.’

스승을 부잣집 데릴사위로 팔아넘기려고 작정한 가렌은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내고 다녔다. ‘자네만 알고 있으라고.’하며 들려준 스캔들에 연구원들은 바짝 긴장해서 경청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렌이 ‘자네만 알고 있으라고.’하면서 귀띔을 해준 사람이 수백 명이 넘는다는 것에는 다들 허탈해했다.

아무튼 ‘정 이사가 니트로 교수를 쫓아다닌다.’라는 소문이 쫙 퍼졌다. 아직 울타리를 벗어나진 않고 있지만 어쨌든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심지어 정혜주까지도 그런 소문은 상관없다는 듯이, 아니 오히려 소문이 더 퍼지기를 바라는 듯이 니트로가 있는 곳에 갑작스럽게 나타나곤 했다.

“정 이사님이 니트로 교수님 좋아한대.”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던데? 아주 그냥 지극정성으로 따라다니더라.”

“니트로 교수님 참 좋지. 잘생겼지, 어리지, 똑똑하지, 머리도 좋지. 뭐 하나 빠질 게 없지.”

“정 이사님도 예쁘잖아. 돈도 많고.”

“정 이사님 입장에서 돈 많은 남자가 눈에나 차겠어?”

“하긴, 정 이사님 정도면 남자 볼 때 돈 같은 건 오히려 전혀 고려 안 할 것 같다.”

“냉정히 따져 보면 정 이사님이 안달 날 만도 한데? 니트로 교수님도 돈 부족한 것 없겠다, 나이도 어리겠다, 잘 생기고 머리도 좋겠다.”

“나이 어린 게 제일 깡패지. 정 이사님이 안절부절 못하는 게 이해도 돼.”

알 만한 사람은 이제 둘 사이를 죄다 안다. 울타리 밖을 벗어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제니스 연구원들은 은연중에 유지웅을 존경하고 두려워했다. 지금 근무하는 최고의 환경이 깨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울타리 밖으로는 한 마디도 옮기지 않았다.

정혜주와 니트로의 연애사는 울타리 안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일화지만, 울타리 밖에서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극비가 된 것이다.

“가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왜?”

“예산 가지고 협박하시던걸요.”

“……끄응. 아프리카에서 돌아오자마자 이게 무슨 난리야.”

차라리 아프리카에 있을 때가 좋았다. 스팟 필드 조성 및 사후 관찰을 핑계로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프리카에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는 법, 그는 귀국길에 올라야 했고 보다시피 고달프게 정혜주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고 있는 중이다. 그나마도 이제 코너에 몰렸다.

안 나타나면? 예산을 정말로 잘라버릴 위인이다. 원래 사랑에 빠진 여자의 집념은 무섭다고 하지 않았던가.

“로열티만 들어왔어도…….”

“그거 아직 멀었습니다.”

니트로는 스팟 필드에 일정한 로열티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스팟 필드는 방사능 제거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역장이다. 이 역장을 고안하는데는 니트로가 발표한 핵-결정체 에너지 융합이론이 프레임이 되어 주었다.

당연히 막대한 로열티가 들어온다. 하지만 분기별 정산을 하기 때문에 아프리카 로열티는 아직 들어오려면 멀었다. 미국 로열티도 다음 달은 되어야 들어온다.

“이번에 예산 브레이크 걸리면 추진하던 프로젝트에 심각한 지장이 있어요.”

“알고 있어.”

정혜주도 아마 그 점을 노리고 이번에 제대로 칼을 빼든 것이리라. 이 타이밍을 놓치면 예산으로 니트로를 협박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테니까.

‘예산이 문제가 아냐.’

예산은 정혜주가 휘두를 수 있는 무기 중 하나일 뿐이다. 그 무기가 무력화되면 아마 다른 무기를 꺼내들겠지. 형부라는 지구 최대의 전략병기를.

* * *

“아빠!”

다다다다, 하고 피즈가 원피스를 휘날리며 달려왔다. 앙증맞은 하얀 원피스 수영복 치맛자락이 앙증맞게 휘날린다. 피즈는 그대로 높이 점프 해 유지웅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유지웅은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 안 돼!’

그는 급히 보호막을 엷게 쳤다. 피즈가 품에 안기면서 쿵 하고 보호막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아무리 약한 보호막이라지만 포옹 한 번에 깨져나가다니, 이건 흉기다.

“피즈야. 힘 조절하랬지?”

옆에서 지켜보던 나미가 한 마디 하며 나무랐다. 피즈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응! 알았어! 조심할게!”

“매번 말만 그러고, 자꾸 그러면 너 바다로 데려간다?”

“히잉.”

“지금 당장 끌고 갈까?”

썬베드에 앉아 있던 나미가 벌떡 일어나 허리에 손을 올리자 유지웅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늘씬하게 빠진 다리와, 붉은 원피스 수영복 밖으로 드러난 하얀 피부가 무더운 태양빛 아래서 광채를 뿜는다. 작고 갸름하게 뻗은 얼굴선을 따라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은 실로 숨이 막힐 정도로 고혹적이다.

“어딜 보니?”

옆에서 정효주가 옆구리를 살짝 꼬집었다. 그녀는 아슬아슬한 녹색 비키니를 입고 있었다. 튜브탑을 터트릴 듯이 탱탱하게 부푼 가슴이 어떻게 저 좁고 가는 어깨 사이에 매달려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어, 응. 아, 아무 것도 안 봤어.”

“애가 몇인데. 바람피우면 안 돼.”

“내가 언제 한눈파는 거 봤어? 니 남편을 뭐로 보고!”

“됐어. 앉아. 마실 거 가져왔어.”

유지웅은 돗자리에 앉았다. 옆에서 피즈가 칭얼거리며 달라붙는다. 유세현은 함께 물에 들어가서 놀자고 피즈의 팔을 잡아당기고 있지만, 피즈는 돌아보지도 않는다. 결국 유세현은 아빠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빠, 수영해요. 수영, 수영.”

“아빠 피곤해. 여기 있을 거야.”

“아빠가 여기 있으니까 피즈도 여기 있잖아요. 같이 수영해요, 네?”

“같이 물놀이 해줘. 세현이가 놀고 싶대잖니.”

“으으, 귀찮은데…….”

투덜대면서도 유지웅은 고무공을 끼고 일어섰다. 피즈와 유세현은 신이 나서 양옆에 달라붙었다. 그는 머리를 몇 번 긁적이고, 공을 허공에 튕기면서 해변으로 걸어갔다.

“섬 수색을 모두 마쳤습니다. 수상한 사람이 잠입한 흔적은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반바지에 슬리퍼, 흰 박스티를 입은 테레사가 어느덧 옆에 정중히 서서 보고했다.

시키지도 않은 수색 작전이라니. 드레스 코드를 미리 지정해주지 않았으면 아마 경호원 복장을 하고 왔을지도 모른다.

“쿤겐,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아닙니다. 아무리 이 섬이 공격대장님 소유라 해도 불순분자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공격대장님과 가족분의 안전을 위해서는 수색 작업에 한 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마침 미소 띤 얼굴로 언니한테 다가오던 정혜주는 그 말을 듣고 삐질삐질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안전? 누구 안전?’

이곳은 유지웅이 소유한 섬 휴양지다. 사유지라서 당연히 허가받지 않은 외부인은 들어오지 못한다. 모처럼 기분전환을 위해 유지웅은 흑석동 저택에 거주하는 이들을 모두 데리고 집단 휴가를 왔다.

고용인들은 저택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2조로 나누어서 교대로 휴가를 온다. 그리고 북부에서 노는 유지웅 일가와 달리 그들은 멀리 남부에서 논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서로 맘 편히 놀 수 있는 것이다.

북부에 있는 일가 면면을 보면 참으로 화려하다. 탱커 정효주, 탱커 테레사, 화이트 괴수 나미, 피즈 등등…….

여기 모인 인원만으로도 웬만한 나라는 그냥 찜 쪄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이다. 그런데 안전을 위해 한 치의 소홀함도 있어선 안 된다 하니, 뭔가 웃긴다.

“가끔 이렇게 다 같이 놀러오니까 좋네. 기분 전환도 되고 말이야.”

“동쪽으로 안 가?”

“동쪽? 내가 거긴 왜 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면서도 정혜주는 가볍게 떨었다. 정효주는 다 안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연구소 직원들 거기 있잖아.”

“그, 그러니까 내가 거길 왜.”

“너, 요즘 연하남 쫓아다닌다면서?”

“…….”

올 것이 왔구나. 정혜주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언니가 모르고 있을 거라 여기진 않았다. 다만 아직 언니와 그 이야기를 나눌 마음의 준비가 덜 됐을 뿐이다.

“좀 신경 쓰이게 하는 남자애가 하나 있어. 두고 봐. 조만간 내가 꽉 쥐어 잡을 테니까.”

‘남자애……?’

니트로의 비밀을 아는 정효주는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심정이 되었다.

동생의 성격을 잘 알기에, 어떤 마음으로 동생이 니트로를 쫓아다니는지도 이해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난 조건만 따지면 니트로와 정혜주는 나무랄 데가 없다. 정효주 자신부터 나서서 둘을 적극 엮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니트로는 나이가 너무 많다. 유감스럽게도.

이걸 말해줘야 돼? 말아야 돼?

============================ 작품 후기 ============================

가렌의 활약

"김 실장."

(바짝) "넷! 가렌 박사님!"

"김 실장만 알고 있으라고. 사실 말이야..."

"박 교수."

"넷, 가렌 박사님!"

"박 교수만 알고 있어. 혹시 그거 아나? 요즘 정 이사가..."

"정 팀장."

"예, 가렌 박사님. 무슨 일이시죠?"

"그거 들었나? 니트로 교수 이야기."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모르나 보군. 자네만 알고 있게. 니트로 교수가 글쎄..."

너만 알고 있어.

넌 입 다물어.

내가 나 혼자서 다 퍼트릴 꺼야

으헤헤헤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