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Noble

Defend the plant 00730

독사 앞의 개구리가 된 심정이 이럴까.

니트로는 그야말로 숨 한 모금 내쉬지 못한 채 얼어붙어 있었다. 손끝은 경련을 일으키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시베리아의 찬바람을 뒤집어쓴 것처럼, 그는 온몸이 굳어 있었다.

“…….”

정혜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기만 했다. 언제 울음을 터트려도 이상하지 않을 눈빛은 무수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서운함, 실망, 분노, 애증, 미움, 원망……. 니트로는 헤아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저, 정 이사님. 여기는 언제…….”

온몸을 휘감은 한기를 겨우 이겨내고, 니트로는 더듬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어린 울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그 색채 변화에 니트로는 가슴 한 구석이 저렸다.

“…….”

그녀는 조용히 등을 돌렸다. 아무 말도 없이 왔던 방향 그대로 멀어져 갔다. 힘없는 뒷모습이 무거운 중량감으로 그의 망막에 남았다.

“어떡하죠? 처제가 많이 화난 거 같은데.”

“……그렇겠죠.”

니트로는 씁쓸하게 말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됐습니다. 아무렴 정 이사님 같은 분이 저 같은 늙은이와 가당키나 합니까. 가능한 새 삶을 살고 싶었지만, 이렇게 발각될 운명이었다면 받아들일 수밖에요.”

“예? 저기요, 교수님. 혹시 그거 때문에 화가 난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아닙니까?”

유지웅은 멍했다. 이 사람, 대체 연애 세포가 어떻게 돌연변이를 일으킨 거지?

‘그, 그 반대인 거 같은데…….’

유부남 생활 5년의 매서운 경험으로 볼 때, 정혜주는 자신이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고 니트로가 일침을 놓은 것으로 받아들인 게 분명하다. 그러니 저렇게 울먹울먹하면서도 아무 말 않고 돌아선 거 아닌가.

객관적으로 정혜주는 황실 일원으로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딱 하나, 니트로에 비해 꿇리는 게 있다. 바로 7살 연상이라는 나이 차이다. 대외적으로 니트로는 16세로 알려져 있으니.

“차라리 잘 됐습니다. 저도 새파랗게 어린놈들 앞에서 애 취급 받는 게 불편했거든요. 이참에 다 내려놓고…….”

“아니, 교수님. 제 생각에는 그게 아니라…….”

“심려 끼쳐 드려서 죄송했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연구 과제가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뭐라 참견할 시간도 안 주고 니트로는 휙 떠나버렸다. 살짝 비틀거리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생긴 건 참 잘 생겼는데…….”

젊음의 비약은 젊어지게 하는 것이지, 잘 생기게 만들어주는 게 아니다. 즉 니트로의 저 모습은 본래 그가 타고난 것이다.

그런데 백 년 넘게 살면서 결혼을 한 번도 못 해봤다고 한다. 아무리 당시 핵물리학이 비인기 분야였다지만, 나름대로 미국 최고 대학의 전임 교수 자리에 젊은 나이에 올라간 인물 아닌가.

“모솔인 건 이유가 있구나.”

유지웅은 납득했다.

저 사람 연애세포, 뭔가 이상해. 태어날 때부터 암에 침윤당한 건 아냐?

* * *

“확실히 뭔가 이상해.”

오리나가 분석한 결과를 보고 니트로는 가볍게 신음을 흘렸다. 가렌도 팔짱을 낀 채 진중한 눈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두 사제는 벌써 사흘째 데이터 분석 결과를 놓고 씨름 중이었다.

“음영 밀도 확산 수치가 지나치게 높습니다. 중심 포인트를 주변으로 뒤틀린 반원을 그리고 있어요. 너무 미세한 변화라서 아직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지만요.”

“원래라면 매끄러운 원을 그려야 정상인데 반원, 그것도 곡선이 뒤틀려 있다는 건 내부 공간에서 에너지 밀도가 심하게 뒤틀려 있다는 이야기야. 균일한 확산을 이루지 못하고 에너지가 점점이 뭉쳐 있다는 거지.”

“에너지가 뭉쳐 있다는 것은…….”

“레드 몹이 다수 있다는 뜻인데, ZMD망에는 따로 잡힌 게 없냐?”

“없습니다.”

“희한한 일이야. 정말 희한해.”

니트로는 턱을 쓰다듬었다. 길게 기른 수염을 어루만지던 습관이 나온 것이다. 수염 한 올 없이 매끈한 턱에 대고 그러고 있으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

제니스 연구단지에서는 각종 광역 센서를 설치하여 스팟 필드의 에너지 변화 및 흐름을 상시 관찰한다. 미국 레이드 부서와 협조 하에 진행하는 연구조사지만, 모든 데이터를 공유하지는 않는다.

“에너지 흐름 패턴 분석으로는 레드 몹이 다수 있어야 정상인데, ZMD망에는 잡히지 않는다? 이상해, 이상해.”

“블랭처럼 규소기반괴수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ZMD망은 규소기반괴수도 잡아내는 거 아니었냐?”

“최윤 박사가 설계한 거라 저도 잘 모르지만, 일단 그렇다고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규소기반 괴수라면 어떤 노이즈를 통해 탐지망을 혼란시킬 가능성도 있죠.”

“적어도 열 개체는 잡혀야 정상인데, 그 열 개체가 모두 의도적으로 탐지망을 교란하고 있다?”

“썩 좋은 시나리오는 아니군요.”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지. 10% 미만의 미약한 가능성.”

“10% 미만이라 해도 낮은 건 아니죠.”

두 사제는 서로 눈을 마주보며 고심했다. 그러나 이미 결론은 나와 있었다.

“보고하고 정식 조사 착수해야겠다. 브라우니도 스팟 필드에 보내서 대기해야겠고.”

“예비대도 두어 개 팀 더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겠지. 정말로 규소기반형 레드 몹이 다수 은닉해 있는 상태라면 위험해.”

“부디 아니었으면 좋겠군요. 어디 눈먼 결정체 몇 개가 굴러다니는 거면 좋겠어요.”

결론을 맺은 사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렌은 옷을 챙겨 입는 니트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물었다.

“정 이사는 뭐 연락 없습니까?”

“없지. 나 같아도 안 하겠다.”

“왜요?”

“동년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백 살 넘은 할아버지라는데, 너 같으면 마음이 동하겠냐?”

“16살이랑 23살이 왜 동년배입니까…….”

“너도 오래 살아 봐라. 일곱 살은 거기서 거기다.”

가렌은 더 말이 없었다.

니트로는 가렌과 헤어져서 이륙장으로 향했다. 연구소에서 운용하는 V-23편을 이용하면 서울까지는 금방이다. 항공교통편이 잘 되어 있으니, 서울 소재 연주대학교 교수로 근무하면서 연구소를 방문하는 게 매우 편했다.

「도착했습니다.」

잠깐 눈 좀 붙이고 나니 어느덧 서울이었다. 니트로는 학교 근처에 구한 자신의 아파트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린 순간이었다.

‘허억!’

그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질 뻔했다. 아파트 현관문 앞에 정혜주가 서 있었던 것이다.

흰 나시티에 노란색 가디건을 걸치고, 스키니진 청바지를 입은 모습이 산뜻해 보였다. 어슴푸레한 조명이 머리카락을 비추며 매력적인 음영을 만들어낸다. 어둠 속에서 고요히 바라보는 눈빛이 묘한 압박으로 다가온다.

“정 이사님…….”

“생각을 해봤어요. 지난 며칠 간.”

“…….”

그녀가 입을 뗀 순간 니트로는 말문이 닫혔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짓누르는 힘이 있었다. 기에 눌렸다고 할까. 니트로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자신의 온몸을 억누르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니트로는 뒤로 물러서고 싶었다. 하지만 뱀 앞에 개구리라도 된 것처럼 다리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서웠다.

“그래요. 나, 나이 많아요.”

“…….”

“칠 년이나 먼저 태어나서 미안해요. 근데 그건 내 잘못이 아니잖아? 안 그래?”

“…….”

“내가 너 어리다구 좋아한 줄 아니? 웃기지 마. 나도 나 좋다는 어린애들 엄청 널렸거든? 나 좋다는 동갑들, 오빠들 엄청 많거든? 근데 내가 왜 너 좋아하는 줄 알아? 응?”

“…….”

“그냥 니가 좋아서 좋은 거야. 아, 뭐야. 말이 진짜 이상해지는데, 그냥 니가 좋으니까 좋은 거라고. 근데 뭐? 나이가 너무 많아서 싫다고? 그래, 미안하다. 칠 년이나 일찍 태어나서 미안하다. 내 탓도 아닌데 좀 봐주면 안 돼?”

한을 품고 차가웠던 목소리는 어느덧 울음기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니트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상했다. 분명 애처로운 모습인데 왜 안 됐다는 마음을 느끼기보다는 기가 눌리고 있는 것인가.

“칠 년 일찍 태어났으니까 십 년 더 어려질게. 팩도 매일 하구 동안 마사지도 꾸준히 받을게. 미백도 하고 스킨 케어도 안 빼먹고 할게. 트리플토닝도 받구 영양 공급 마사지도 할 거야. IPL도 하고 스킨 필링이랑 리프팅도 할게…….”

니트로는 눈만 겨우 끔뻑거렸다. 이건 대체 어느 나라 말이더냐?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녀가 어느덧 손을 뻗어 뺨을 쥐었다.

“그래도 안 돼? 내가 이만큼 노력하겠다는 데도?”

“그, 그게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너 진짜 못 됐다.”

차가운 눈물을 머금은 눈동자가 지그시 쏘아본다. 붉은 입술이 천천히 원망을 토해냈다.

“늦게 태어난 게 그리 잘났니? 어리다고 지금 유세 떠는 거야?”

============================ 작품 후기 ============================

700화에서 저를 기혼의 중년남으로 아셨다는 어느 독자분의 코멘에 당시 멘붕이 좀 왔는데요.

아니, 제가 대체 어디가요ㅜㅜ

나귀족 연재 시작할 때 아직 전 파릇파릇한 이십대였는데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