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Noble

00737 Raid of the Void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대답해 줘요.”

레지나가 진지하게 자신을 붙잡고 그렇게 말했을 때, 최윤은 차마 눈을 마주 할 용기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나한테 숨기는 거 있죠?”

“…….”

“있군요.”

레지나는 한숨처럼 무겁게 읊조렸다. 최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어떻게 알았어요?”

“어제 연구실에 혼자 남았을 때 당신 표정이 좋지 않았어요. 뭔가 알아냈다는 걸 직감했죠. 결정적인 건…….”

레지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미국에 같이 가겠다고 회장님께 요청한 것 때문이에요.”

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지나는 조용히 일어나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무슨 일이에요? 왜 당신 혼자만 짊어지려고 해요? 우리,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둘은 오래 전에 약속했다. 균열, 휘버의 유산, 그 모든 무게를 함께 나누어 짊어지자고.

균열의 존재는 이 세상에서 둘 밖에 알지 못하는 비밀이다. 최윤은 유지웅에게도 선뜻 그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균열을 통제할 수단이 없다는 점, 균열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점, 마지막으로 수십 년 후에도 유지웅이 지금처럼 한결같은 태도를 유지할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만약 유지웅이 균열의 존재를 알게 되면? 설령 그가 살아생전 변하지 않더라도, 균열의 존재를 안 제니스가(家)가 대를 이어 가는 동안 타락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최윤과 레지나는 지금까지 덮어두고만 있었던 것이다.

최윤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검은 돌의 중심부 패턴을 확인했어요.”

“뭔가 알아냈군요?”

“북극곰 결정체와 거의 흡사했어요. 동일하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죠.”

그 말에는 레지나도 흠칫 놀랐다. 그녀는 최윤을 끌어안고 있던 손을 놓았다. 가볍게 비틀거리던 그녀는 의자에 앉으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 물었다.

“그 검은 돌도 열쇠인가요?”

최윤과 레지나는 북극곰 결정체가 균열로 향하는 열쇠라는 가설을 세우고 있었다. 과거 북극곰 괴수가 최후의 순간 보여준 변화를 토대로 추론한 것이다.

숙성을 마친 레드 결정체, 즉 북극곰 결정체는 균열에 접촉할 수 있는 성질을 갖추고 있다. 북극곰 괴수는 아마 마지막 순간 그 힘을 끌어내서 썼을 것이다. 그러나 최윤은 아직 어떻게 그 성질을 끌어내는지 단서조차 잡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열쇠 같지는 않아요.”

“그럼요?”

“그걸 모르니까 미국으로 가려는 거예요. 가서 직접 확인해야겠어요. 그리고…….”

최윤은 잠시 머뭇거렸다. 레지나는 드디어 그가 결심이 섰음을 알아차렸다.

“이제 회장님께 말씀을 드려야겠어요.”

“괜찮은 거지요?”

“더 이상 나 혼자 묻어둘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 검은 돌은 열쇠는 아니지만, 적어도 균열에서 온 것만큼은 거의 확실하니까요.”

균열로 향하는 열쇠는 아니다. 그러나 열쇠와 연관된 곳에서 온 것만큼은 틀림없다. 그 사실 때문에 최윤은 오랫동안 해온 번뇌를 끝내고 결심을 굳힌 것이다.

레지나는 미소 지으며 그의 두 손을 잡았다.

“걱정하지 마요. 잘 될 거예요.”

* * *

“엄마, 엄마. 어디 가?”

돌이 좀 지난 쌍둥이는 한창 재미있게 뒹굴며 놀다가 엄마가 문득 부산한 것을 발견했다. 아직 한참 어리고 아무 것도 모를 텐데도, 여행용 가방에 옷을 개여 넣는 모습에서 어떤 예감을 받은 모양이다. 그게 기특해서 정효주는 잠시 멈추고 두 딸을 안아줬다.

“엄마 잠시 일하러 갔다 올게.”

“일? 일 뭐?”

“우리 하연이, 하원이 까까 사주려면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야 되거든. 까까 먹고 싶지?”

“까까! 까까! 먹구 싶어!”

“나두! 나두! 까까!”

“엄마 일 열심히 해서 까까 많이 사올 테니까, 그동안 할머니랑 이모, 오빠 말 잘 듣고 있어. 알았지?”

“응!”

짐을 다 정리한 정효주는 쌍둥이를 안고 침실을 나섰다. 5층 아이 방에 쌍둥이를 내려놓자 유세현이 기웃거리며 들어섰다.

“엄마, 오늘 미국 가요?”

“응. 우리 세현이 동생들이랑 잘 놀아줄 수 있지?”

“네. 걱정하지 마세요.”

유세현은 제법 의젓하게 대답했다.

쌍둥이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재울 때 말고는 3층 부부 침실에 데리고 들어오기도 한다. 그러나 유세현은 이제 다 컸기 때문에 침실에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어린 아이 교육에 무척 안 좋기 때문이다.

그때 유지웅이 아이방에 들어왔다.

“준비 다 됐어?”

“응. 애들이랑 인사하고 있어. 자기도 인사해.”

“어, 그래야겠다. 애들아, 엄마랑 아빠 잠시 다녀올게. 할머니랑 이모 말 잘 듣고 있어.”

“응!”

유지웅은 쌍둥이를 차례로 안아주고는 무릎을 낮춰 유세현과 눈높이를 맞췄다.

“세현아. 오빠 노릇 잘 할 수 있지?”

“예! 걱정 마세요!”

“동생들 잘 돌보고 있어. 아빠가 올 때 재밌는 게임 사올게. 지월드를 싹 쓸어버릴 테니까 기대하고 있어.”

“와, 저도 가고 싶어요! 지월드!”

“위험해서 안 돼. 다음에 데려가줄게.”

“약속하는 거예요?”

“응응. 자, 약속.”

두 부자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굳게 약속했다.

쌍둥이가 잠들자 유지웅 커플은 유세현을 데리고 아이방을 나섰다. 1층에는 호남에서 막 올라온 어머니가 있었다.

“그럼 어머니, 저희 없는 동안 아이들 좀 잘 부탁드려요.”

“그래, 걱정하지 말거라. 근데 정말 위험하지 않은 거지?”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혹시나 해서 대기하러 가는 거니까요.”

테레사도 없는데 고용인들에게만 아이들을 맡기기 뭐하다. 그래서 정효주는 시댁에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시어머니는 흔쾌히 호남에서 V-23을 타고 날아왔다.

유지웅 커플이 저택 내 이착륙소에 들어섰을 때였다.

“아빠!”

다다다다, 하며 피즈가 달려왔다. 피즈는 그대로 있는 힘껏 점프해서 유지웅에게 안기려고 달려들었다. 유지웅은 기겁을 해서 보호막을 치려고 했고, 다행히 정효주가 잽싸게 낚아챘다. 피즈는 정효주에게 한 손으로 잡힌 채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왜 이래! 이거 놔!”

“내가 힘 빼라고 했잖아. 너 그렇게 달려들면 보통 사람은 죽는다고 했니, 안 했니?”

“힘 안 줬거든!”

일단 한숨 돌린 유지웅은 그제야 팔짱을 끼고 구경하고 있는 나미를 발견했다.

“나미 씨? 무슨 일이에요?”

“우리도 가려고요.”

“네? 나미 씨가요?”

유지웅은 의아했다. 나미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아서요. 그래서 미국에 가볼까 해요.”

“나미 씨가 와준다면 저도 마음이 든든하겠지만…….”

힐끔, 유지웅은 눈을 돌렸다. 언제 왔는지 나디아가 열린 조개 안에서 다소곳하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나디아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소녀도 따라가고 싶사옵니다, 폐하.”

“나디아, 너는 왜?”

“폐하와 황후마마만 위험한 곳으로 보낼 수는 없사옵니다. 소녀도 따라가서 보필하겠나이다.”

“……따라오는 건 상관없는데 그 조개껍질은 V-23에는 못 싣는데…….”

“껍질을 접으면 되옵니다. 염려하지 마시지요.”

화이트 등급인 나미와 피즈, 나디아까지 온다? 이것이야말로 과잉 전력 아닐까 싶다.

여차여차해서 유지웅 커플, 나디아, 나미 모녀는 신형 A3에 올랐다. 객실에는 조개껍질을 둘 공간이 없어 나디아는 화물칸에 머물러야 했다. 조금 안 됐다.

의외인 것은 최윤이 A3 동승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유지웅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요청을 수락했다.

“이게 신형 A3로군요. 정말 잘 꾸며놓았습니다.”

“그렇죠? 돈 좀 썼어요.”

A3는 복층으로 되어 있다. 2층은 유지웅 전용 공간이다. 그는 2층의 절반 이상을 게임룸으로 갖춰놓았다. 마치 지휘 센터 상황실을 방불케 하는 설비였다.

최윤은 지금 자신이 전용기 게임룸에 와 있는 건지, 대통령 전용기 상황보고실에 와 있는 건지 헷갈렸다. 미 대통령 전용기 상황보고실도 이보다 더 화려하게 꾸며놓지는 못했을 것이다.

“최 소장님도 같이 롤 한 판?”

이런 설비를 꾸며놓고 기껏 한다는 게 PC 게임이란다. 아마 모 국제기구 의장이 들었다가는 기가 막혀서 졸도했을지도 모른다.

“아, 아닙니다. 전 게임 잘 못합니다.”

“아쉽네요. 남 의장님이라도 모셔올 걸 그랬나…….”

“그 분도 요즘 한창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

“알아요, 알아. 그래서 폐 될까 봐 안 불렀어요.”

유지웅과 최윤은 간단한 근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윤은 이런저런 가벼운 이야기를 이어나가기만 할 뿐, 좀처럼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무슨 일이시지?’

한편 유지웅은 의아했다. 지금 시기에 최윤이 미국을 함께 간다는 게 이상했다. 스팟 필드를 현장에서 연구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겠으나, 더 급한 것은 전갈 괴수를 처치하고 얻은 검은 돌을 분석하는 것 아닌가?

니트로와 가렌, 레지나의 역량을 못 믿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위해서는 검은 돌 분석이 더 시급하다. 최윤처럼 중요한 인물이 한가하게 미국에 올 게 아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최윤이 목청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유지웅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말씀하세요.”

“휘버 박사가 남긴 유산에 관한 것입니다.”

“……휘버 박사의 유산이요?”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에 유지웅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최윤의 낯빛이 평소와 달랐다. 적어도 지월드(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 게임 발표 행사)에서 공개할 게임 타이틀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크게 호흡을 고르고, 최윤은 말을 이었다.

“휘버 박사는 결정 에너지가 어디에서 오는지…….”

그때였다. 요란하게 벨이 울렸다. 유지웅을 찾는 다급한 호출이었다.

“잠시만요.”

유지웅은 양해를 구하고 인터폰을 받았다. 몇 마디 주고받던 그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최윤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회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미국 스팟 필드가 소멸하고 있대요.”

============================ 작품 후기 ============================

"그렇죠? 돈 좀 썼어요."

자, 이 대사를 토대로 게임 전용 신형 A3 전용기의 스펙을 추론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