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Noble

00798 %3C Pre-Season Dealer %3E Terrorist? No, I'm not.

따가운 감각이 가볍게 흐른다. 그윽하게 바라보는 커다란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보란 듯이 일부러 품은 약간의 장난기만 읽을 수 있을 뿐이다.

“그, 그게 무슨 소리죠?”

적지 않게 당황한 유지웅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전생이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세상에, 우리 회장님이 말을 더듬게 한 이성이 나타났다! 라고, 뭐 그렇게.

“그대가 가고자 하는 정상이 어디쯤인지 대강 알 것 같다. 아마 필요 없겠지만, IACP의 협력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라.”

“저기, 그보다 왕녀님. 아까 하신 말씀은…….”

“친구끼리 그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못을 박듯이 말을 자른다. 확고한 눈빛, 흑단처럼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검은 천에 감싸인 요염한 몸매……. 그녀를 구성한 모든 존재감은 마치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착각마저 심는다.

유지웅은 저도 모르게 말을 삼켰다. 당당하고 멋진 왕족이었던 그는 사소한 몸짓 하나까지도 닮고 싶을 만큼 대단한 남성이었다. 그리고 당당하고 멋진 눈앞의 왕녀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쳐다볼 만큼 눈이 부셨다.

태양……. 그래, 마치 태양이 눈앞까지 성큼 다가왔다면 그게 바로 이런 기분일까.

어느새 그녀가 성큼 일어섰다.

“하지만 당분간은 친구로 참아주겠다.”

유지웅이 무슨 말인지 다시금 당혹스러움을 느낄 때, 보이지 않는 벽 뒤에서 훔쳐보며 입을 틀어막는 누군가가 있었다.

* * *

―시집 올 준비는 잘하고 있어?

―나 너한테 장가 들 건데?

―왜, 너 좋아한다는 게 그리 이상해?

―나랑 결혼하기 싫어?

원거리 딜러는 제 앞가림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다. 초보라면 특히 더욱 그렇다. 그래서 어렵사리 인맥을 동원해 첫 레이드에 꽂아줬더니, 괴수 눈깔을 치는 큼직한 사고를 쳐버렸다.

한숨도 나오고 답답하고 앞으로 어떻게 케어해야 하나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자리에서 떨치고 일어난 소꿉친구는 단숨에 세상에 위명을 떨치는 존재가 되었다.

무적 근딜.

레드 몹조차 한 방이면 때려잡는 불가사의한 존재.

그렇게 유지웅을 둘러싼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뀌었고, 정효주는 매일 곁에 머무르며 달라진 공기를 호흡할 수 있었다.

“너, 옷이 그게 뭐야?”

“……내 옷이 뭐 어때서?”

“조금 칙칙한 것 같아. 내 마음이 안 좋잖아.”

어느 날 그렇게 핀잔을 들었다. 정효주는 살짝 마음이 안 좋아지려고 했다. 그녀도 사실 잘 버는 편이다. 입고 있는 옷도 명품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백화점 브랜드에서 산 것들인데.

“안 되겠다. 우리 쇼핑하러 가자.”

그렇게 유지웅은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차에 태웠다.

“진짜 이놈의 똥차는 왜 이렇게 힘이 없냐. 비실비실해서 못 타고 다니겠네.”

유지웅이 운전을 하다 말고 투덜거리자 정효주는 황당해서 입을 손으로 가렸다. 아니, 근 1억에 가까운 고급 외제차가 무슨 똥차야? 사고 경험한 중고차도 아니고 완전 쌩쌩한 새 차인데?

아무튼 둘은 명품 매장만 모여 있다는 유명 백화점 본점을 찾았다. 그리고…….

“무, 무슨 핸드백 하나가 이천만 원이 넘어! 이런 걸 어떻게 사!”

“내가 사준대잖아.”

“싫어! 부담스러워! 이런 거 나 못 들고 다녀!”

“어허, 들고 다니라면 들고 다녀.”

그날 하루만 온갖 매장을 돌아다니며 족히 10억은 지른 것 같다. 그러니까 가방, 구두, 옷, 막 이런 것들에만 말이다. 정효주로서는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수십 평짜리 아파트 한 채를 몸에 감고 다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 백화점 대표이사 김주원이라고 합니다. 저희 백화점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 인사를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아하, 김주원 사장님? 문 여사님은 잘 지내신가요?”

“……저희 어머님을 아시나요?”

“개인적인 친분은 없는데 소식은 자주 들어요.”

결국 물건 많이 사줘서 고맙다고, 이왕 온 김에 VIP 카드도 좀 만들고 가라고 백화점 사장까지 나왔다. 정효주는 진짜 사장의 행차 같은 것은 드라마에서나 봤다. 얼마를 써야 대체 백화점 사장을 나오게 할 수 있는지 오늘 피부로 느꼈다.

헌데 이상하다. 사장까지 나왔는데 유지웅은 그게 뭐 대수냐는 듯한 태도다. 오히려 사장이 그의 앞에서 위축돼서 다소 쩔쩔매는 듯하다. 저렇게 젊고 힘 있어 보이는 사람인데…….

“다름이 아니라 저희 백화점에서는 VVIP 고객님들을 위한 특별 우대 카드 발급 절차를 지원해드리고 있습니다. 우대 카드는…….”

“나중에 두 장 보내요.”

“시원시원하시군요. 호쾌하십니다.”

“어차피 될 거, 빨리 빨리 가는 게 편하고 좋지 않아요? 난 아랫사람들 일하는 거 보면 답답해 죽겠던데.”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둘은 어느새 말이 잘 통해서 하하 히히 웃으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돌아다녔다. 김주원 사장은 직접 백화점 매장을 안내하며 유지웅의 쇼핑을 도왔다. 덕분에 임원진은 일도 못하고 우르르 따라다녀야 했다.

정효주는 김주원 사장과 유쾌하게 떠드는 유지웅을 신기한 듯이 흘끔거렸다.

‘정말 이상해…….’

사람이 죽다 살아나면 완전히 바뀐다고는 한다. 하지만 어떻게 저렇게까지 바뀔 수 있을까?

“저희 백화점은 아시아 최고의 규모를 자랑합니다. 최고라는 명품 브랜드 매장은 앞을 다투어 입점해 있지요. 충분히 만족하실 수 있을 겁니다.”

“파텍필립은 어딨죠?”

“예? 파텍필립이요?”

김주원은 살짝 당황했다. 세계 3대 시계 브랜드를 그가 모를 리가 없다. 그가 당황한 이유는 하필 그 매장들은 입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맞다. 이 시기에는 여기 입점 안 했었지, 참. 하여튼 걔네들은 쓸데없이 자부심이 너무 세다니까.”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김주원은 정중히 사과했다.

“죄송하지만 그런 세계 탑클래스 명품 브랜드는 국내 백화점에는 잘 들어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쯧쯧, 그래봐야 다 똑같은 시계인 것을.”

유지웅은 허망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이쯤 되자 김주원은 유지웅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

‘대체 어느 집안 자제분이시지?’

원래 한국 상류층은 첨예하게 연결되어 있어 누가 누군지 보면 대강 안다. 하지만 이 청년은 도대체 짐작이 안 간다.(아직 무적 딜러로 위명을 떨친지 얼마 안 된 시기임)

가난한 여자친구를 데려와서 10억이 넘는 옷과 가방을 펑펑 사주고 다니는 젊은 고객이 나타났다는 말에, 김주원은 모든 업무를 중지하고 얼른 내려왔다. 그런 고객이라면 당연히 최상위층 집안의 자제일 것이다. 응당 자신이 직접 접대해야 했다.

헌데 벌써 1시간 넘게 안내하고, 이야기를 나눴음에도 누군지 전혀 짐작이 안 간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이 사람은 돈 수십억, 수백억쯤은 중요치 않게 여긴다는 것을.

결코 근거 없는 허세가 아니다.

꼭 돈을 펑펑 쓴다는 이유만으로 그리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몸에 배여 있는 자연스러움은 거짓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주원도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입장에서 그 당당함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여자친구분이 대단한 미인이시군요. 혹 대학생이시라면 제가 어울릴 만한 선물을 하나 해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여자친구 아니에요.”

“예? 그럼…….”

김주원은 혹시 가까운 지인이거나 친척인가 하고 당황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실례를 한 셈이 된다. 그러나…….

“와이프예요. 아직 혼인신고는 안 했지만.”

“아하, 그러시군요.”

김주원의 얼굴에는 화색이, 정효주의 얼굴에는 창피함이, 유지웅의 얼굴에는 당당함이 떠올랐다. 정효주는 김주원이 보지 못하게 그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가만히 있어. 이런 자리에서 나 망신 줄 건 아니지?”

“…….”

그 말에 정효주는 속사포처럼 튀어나오려던 말이 그만 입안으로 쏙 들어갔다.

―시집 올 준비는 잘하고 있어?

―나 너한테 장가 들 건데?

―왜, 너 좋아한다는 게 그리 이상해?

―나랑 결혼하기 싫어?

그간 그가 했던 말들이 메아리처럼 울린다. 지금까지는 그게 다 장난인 줄 알았다. 잘해주고, 비싼 것도 사주고 하는 게 소꿉친구의 정 때문에 그러는 줄 알았다.

헌데 그게 장난이 아니라는 걸, 그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어떻게 그날 쇼핑을 끝냈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났다. 그저 그가 시키는 대로, 그가 요구하는 대로 온갖 사치스러운 옷들을 입어보고, 가방을 메어 보고, 구두를 신어 보았다.

그렇게 꿈결 같은 하루가 끝났다.

“저희 백화점을 방문해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어떻게 마음에 드셨는지 냉정하신 평가가 궁금합니다.”

“음……. 겨우 30억으로 옷을 살 수 있다니, 서민들의 삶은 참 굉장한 것 같아요.”

내내 침착한 표정이던 김 사장도 그 말에는 석상처럼 굳어져 버렸던 것 같다.

해가 떠오르고, 지고, 다시 떠오르고 지고를 반복했다. 정효주는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유지웅의 색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다.

「8조 원이다. 인생을 건 배팅인데, 남자라면 해봐야지?」

8조 원어치의 블루 결정체를 과감히 내놓는 배포에 기절할 뻔했고.

「모두 당신 꺼야. 김범석 씨.」

말 한 마디로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통솔력에 두근거렸고.

「우리 밀당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한편으로는 아이같은 천진함에 살짝 안심이 되었고.

「내 이 타락한 왼손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얘는 나도 못 이기거든.」

……아. 이건 솔직히 찍다가 캠코더 떨어뜨릴 뻔했다. 찰나였지만 손발이 사라졌었거든.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소꿉친구가 정말 자신을 여자로서 좋아한다는 확신이 깊어지고 있었으니까.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그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다.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가 벌어져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래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부자들의 삶이 어떤 것인가 공부도 했고, 재벌과 결혼한 평범한 아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하는 것도 열심히 알아봤다.

그가 말한 대로, 정말 신부 수업을 한다는 생각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다.

그런데…….

“친구로 남기기엔…… 너무 아까운 인물이군. 그대는.”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반할 것 같은, 태양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멋진 여자가 나타났다. 어떻게 물리쳐야 할지 눈앞이 그저 캄캄하기만 한 경쟁자로서.

============================ 작품 후기 ============================

원래 하이틴 로맨스 재벌1세 이야기에는 삼각 관계가 빠질 수 없는 법이죠.

실탄의 ㅅ는 삼각의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