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각인은 최면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최면 상태에 들어갈 필요가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약물이다. 기초 약초학 수업이 마법과 1학년의 필수과목으로 들어가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자신의 체질을 알고, 자신의 몸에 맞는, 자신만의 약을 배합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기초 약초학 수업의 목표다. 페이는 이제 약물 배합에 자주 쓰이는 약초를 배우고 자신의 체질을 조금씩 알아가는 단계다.

육체의 체질이 아닌 뇌의 체질, 무의식의 유형과 최면 감수성을 보는 과정이기에 단법의 경지는 도움은 될지언정 정답이 되어주지는 못해 페이도 다른 학생들처럼 차근차근 배워가는 입장이다.

“첫 마법이요? 전 아직 체질 분석도 덜 끝났습니다.”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가면 몇 달은 걸리는 작업이다. 페이의 재능이라면 그 시간을 줄일 수도 있지만, 당장은 그럴 여유가 나지 않았다.

“자신의 체질을 알아가는 과정은 신중해야 한다. 약초의 배합에 실수해 잘못된 약물을 복용하면 그것만으로 죽을 수 있다.”

“마법이 발전하며 그런 경우는 비약적으로 줄었죠. 다 배운 내용인데요.”

기초 약초학 수업에서 배운 내용이고, 밀레스 사가에서도 언급되는 말이다.

뇌 일부분을 강제로 활성화하고 뇌의 기능 이상의 정보를 강제로 각인한다. 작은 실수 하나로 치명적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위험한 과정이다. 단법사에게 주화입마의 위험이 있다면 마법사들에게는 각인에 따라오는 위험과 부작용이 있다.

체질 분석과 약초 배합은 그만큼 신중해야 하는 작업이다.

“나라면 몇 달은 걸릴 그 과정을 5일로 줄일 수 있다.”

드란이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인단이라면 며칠 밤을 새는 정도로는 꿈쩍도 안 하겠지?”

“그렇긴 합니다만........”

11살 때 호기심 삼아 시험해본 적이 있는데 사흘 정도는 자지 않아도 크게 피곤하지는 않았다. 쪽잠이라도 자면 일주일 정도야. 페이는 가볍게 생각했다.

“매일 밤 연구실로 와라. 5일간 체질 분석을 한 다음 6일째에 각인을 한다. 그러면 당일 바로 써먹을 수 있겠지.”

드란의 계획은 그가 잘하는 폭언에 가까운 발언이었다. 5일 만에 체질 분석을 끝내고 약물을 만든 다음 마법의 각인까지 끝낸다.

문외한이 들으면 마법사가 일주일 만에 될 수 있는 쉬운 직업으로 생각될 것이다. 페이는 일단 그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마도사를 앞둔 대마법사. 그가 가능하다면 가능한 것이다. 페이는 대신 다른 물음을 입에 담았다.

“일주일 안에 그게 가능하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익힐 마법은 뭡니까?”

“이거다.”

드란이 손짓하자 허공에 붉은 안개가 생겨났다. 아니, 저건 혼이다. 허공에 있는 혼이 가시화되었다.

“마법학개론 때의?”

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정 밀도 이상의 혼을 가시화해주는 마법. 내 오리지날이다.”

“이게 있다면 루리리를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페이는 회의적으로 물었다.

“못 미더운 모양이군.”

당연했다. 저 마법은 공격, 방어 어디에도 쓸 수 없다. 그냥 패턴을 나타낼 뿐인....... 아니지, 아니야. 마법이란 패턴이다. 천을 짜듯 혼을 짜는 작업.

저 마법이면 혼이 어떻게 짜이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완성된 천을 훼손하려면 천을 자르거나 찢어야 한다. 그러나 완성되기 전의 천이라면....... 실밥 하나를 당기기만 해도 천은 망가진다.

“알아챈 모양이군.”

드란이 일그러진 입매는 모든 것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마법을 사용하고 적의 마법에 간섭한다. 마법사끼리의 싸움에서 이 조건을 만족하려면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하다. 그러나 단법사가 이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마법사에게 접근해서 마법을 쓴 다음. 펼쳐지는 마법을 모두 무력화한다.”

“인단이라면 혼의 발출과 간섭도 할 수 있겠지?”

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인단이 아니더라도 단법에 능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간단한 간섭은 가능하다. 짜여지는 천을 망가뜨리는 것이 가능하다. 이 마법이 대중화 되면.......

“내가 그런 생각도 안 해봤을 것 같으냐?”

드란이 페이의 생각을 끊었다.

“이 마법의 범위는 좁다. 쓰려면 그만큼 접근해야 하는데 마법사가 마법사에게 접근하면 그 시점에서 이미 상황은 막장이다. 비슷한 생각을 한 놈들이 몇 명이나 내 연구실에 찾아왔었지. 내가 그 정도 생각도 못 했으리라 생각했나 봐.”

드란이 자존심 상한다는 얼굴로 흥, 코웃음쳤다. 그리고는 가볍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응용 가능성을 눈치챘다는 점에서 제법 똘똘한 것들이었다. 에밀도 그중 하나였고.”

“에밀도요?”

“제국 군부나 왕실에 팔아먹자고 하더군.”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군요.”

마법의 패러다임을 바꿀지도 모르는 마법을 가지고 한다는 생각이 비싸게 쳐줄 상대에게 팔아먹는 짓이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드란도 그때를 생각하고는 어이없는지 피식 웃었다.

“어쨌든, 접근해서 이 마법을 쓰기만 하면 네 승리는 보장된다.”

“루리리는 단법도 익히고 있을 건데요?”

“진담으로 하는 말인가?”

“농담입니다.”

영단법의 수준을 낮춰 인단 이하처럼 보이도록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인단이 되지 못한 사람이 인단에게 이길 수 있다는 건 아니다. 단법의 활용과 무술의 수준까지 많은 차이가 있다.

페이는 단의 크기가 지금의 반이 되더라도 인단이 아닌 단법사 정도는 쉽게 죽일 수 있었다.

“그럼 바로 시작하지.”

드란은 책상을 가득 메우고 있던 연구 기구들을 치우고 옆에 있던 책장으로 가 책을 몇 권 빼냈다.

“조금 힘든 작업이 될 거야.”

키득키득 웃는 드란을 보며 페이는 어쩐지 잘못 걸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

드란의 실험실을 찾고 다음 날. 페이는 시간을 내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속이 들여다보이는 커다란 천막이 세워져 있었고, 그 뒤로는 커다란 패널이 세워져 있었다.

두 개로 나눠진 패널에는 각각 루리리와 페이의 이름이 있었고, 그 아래의 수치가 실시간으로 변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 도박 베팅 현황이었다.

웃기게도 카메론 학원을 학생, 교수들 간의 도박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아무 도박이나 되는 건 아니고, 루리리와 페이의 결투처럼 공개된 결투에 한해서 말이다.

돈 많고 오락을 원할 나이의 젊은 것들을 모아두면 어차피 불법적인 도박이 생긴다. 그렇다면 차라리 합법으로 만들어 버리자. 그런 의도가 엿보이는 행정이다.

소문과 서적(밀레스 사가)에 따르면 이래놔도 매년 도박으로 문제를 일으켜 퇴학당하는 학생이 한두 명씩 생기는 모양이니 음지로 가게 놔뒀다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배팅은 카메론 학원 관계자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으므로 학생뿐만 아니라 심심풀이로 나온 교수나 잡무 담당자들도 있었다.

페이가 천막으로 다가가자 사람들이 슬금슬금 물러나며 길이 생겼다. 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페이의 귀에 또렷이 들려왔다. 호기심이 반, 악담이 반. 마법과 학생이 아닌 다른 학생도 많다 보니 그렇게 적의를 가진 사람이 많이 보이진 않았다.

대신 그 적의의 크기는 배팅액으로 나타나겠지. 페이는 배당금 현황을 보고 피식 웃었다.

페일, 4배.

페이가 카메론 학원에서 가지는 위치는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힘내라, 페일! 너한테 걸었다고!”

“단법과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

그동안 했던 이미지 관리가 효과가 있었는지 단법과 동급생과 상급생들, 그 밖에 페이에게 돈을 건 것으로 보이는 몇 명이 페이를 응원해주었다.

“후회는 안 하실 겁니다.”

페이는 자신 있는 미소를 보여주고는 베팅소로 걸어갔다.

“화제의 주인공을 이렇게 만나는군요. 배팅은 당연히 자신에게?”

배당을 맡고 있는 남자는 서글서글한 웃음이 인상적인 미남이었다. 페이는 책상 위에 적당한 금액의 돈을 올려두었다. 적당하다고 해도 귀족 도련님들과 부잣집 자제들이 바글바글 하는 게 카메론 학원 기준이다.

배당대로 돈이 들어오면 작은 금액은 아니다.

“꽤 크게 거시는군요. 용병이라고 들었는데.”

페이가 건 돈을 확인한 남자가 살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입학금이 굳어서.”

“배당은 역시 자신에게? 이건 확실하게 말해두셔야 합니다. 애매하게 말했다가 나중에 우기는 사람도 나오거든요.”

“페일에게 전액.”

“확실히 받았습니다.”

남자는 돈을 갈무리해 뒤로 보냈고, 뒤에서 정산한 금액이 패널에 실시간으로 배당금 현황이 되어 나타났다.

페일. 3.5배.

0.5배가 한 번에 줄었다. 페이는 은근히 놀랐다. 더 줄어들 줄 알았는데?

“신입이셨죠? 돈이 썩어나는, 한 방을 노리는 부자들도 이 학원에는 의외로 많답니다. 이른바 역배팅이라는 거죠.”

“돈이 줄어 아쉽네요.”

“하하. 너무 욕심내면 벌 받습니다.”

그걸 끝으로 페이는 천막을 나왔고, 3시간 후에 루리리가 자신에게 거금을 배팅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역시 14살. 자존심 강할 나이다.

***

결투의 날이 밝았다. 마법과의 영역을 지나는 페이는 평소와는 다른 시선을 느꼈다. 적의 보다는 호기심의 비율이 높았다.

“안색이 안 좋은데 괜찮아?”

신위연이 페이에게 물었다. 페이는 얼굴이 퀭한 게 컨디션이 나쁜 게 눈에 보였다. 처음 결투 일정이 잡힌 날을 시작으로 매일 밤 어딜 나가더니 하루가 다르게 안색이 나빠지고 있었다.

“괜찮아. 싸우는 데는 문제없어.”

말과는 달리 어조에는 힘이 없었다. 페이는 작게 이를 갈았다. 드란이 괴짜라고 불리는 이유를 충분히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빙산의 일각이었다. 수면 아래를 보니 그곳은 아귀들의 서식처였다.

“그 찾는다던 수단은 어떻게 됐어?”

“불과 수 시간 전에 겨우 손에 넣었지.”

페이가 씨익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보였다. 빙산 아래에는 아귀뿐만 아니라 보석들도 숨겨져 있었다. 드란은 자신이 한 말을 지켰다.

페이는 새벽까지 약물을 배합해 각인을 마친 후 마법의 시험까지 해보고 오는 길이었다.

“뭔데?”

“비밀.”

쉿. 하고 페이는 입술에 검지를 댔다. 신위연은 기대를 기대로 남겨두기로 했다. 어차피 몇 시간 후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페이는 분명 자신은 있는데 수단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수단을 손에 넣어 왔다. 대체 뭘 준비했을까? 상상하는 것도 자그마한 즐거움이었다.

점심 전의 마지막 수업은 마법학개론이었다. 늘 그렇듯 오늘은 맨몸으로 나온 드론 교수는 한 시간이나 일찍 수업을 마무리 지으며 말했다.

“큰 판이 벌어졌다고 들었다. 그 주인공이 여기 있으니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한다. 컨디션 조절 잘해서 결투에 임하도록.”

자못 유쾌하게 말하고 강단을 내려가려는 드란에게 학생 하나가 손을 들고 당돌하게 물었다.

“교수님은 어디에 거셨습니까!”

“나? 나는 저놈.”

드란이 페이를 턱짓하고는 그대로 강의실을 나가버렸다. 강의실이 술렁였다. 주로 잘못 걸었다느니, 망했다느니 등의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누구한테 걸었어?”

페이가 신위연에게 물었다.

“당연히 너한테. 이길 거잖아?”

“그래, 내가 이겨.”

점심을 먹고 두 사람은 대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에는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대련장이 솟아나 있었다. 카메론에 마법사가 몇 명인데, 이 정도는 놀랄 일도 아니었다.

대련장 주위는 발 디딜 틈도 없이 구경꾼이 모여 있었다.

“빨리 올라와!”

이미 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루리리가 페이를 발견하고는 재촉했다. 구경꾼들이 옆으로 퍼져 길을 열어 주었고, 페이는 어기적거리며 무대에 올랐다.

“겁먹어서 잠이라도 설쳤어?”

루리리가 가슴을 펴고 거만을 떨며 말했다.

“아니, 과제를 하느라 밤을 샜거든. 빨리 들어가서 자고 싶으니까 바로 시작하자.”

“이익! 들어가서 자는 게 아니라 여기서 잠들 게 해줄게! 일주일 정도 의식불명으로 말이야!”

심판도 없는 결투, 결투는 두 사람이 무대에 올라선 순간부터 이미 시작했다. 루리리가 만든 워터볼들이 페이를 덮쳤다.

페이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유귀보법. 떠다니는 귀신의 발걸음.

루리리가 깨달았을 때 이미 페이는 루리리의 지척에 있었다.

58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