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born as a Son of Villain

< -- Devil's Tree. -->

처음에는 물건들 자체에 주목했던 루리리였지만, 두 사람처럼 금방 책들의 가치를 알고 눈이 반짝였다.

와닿는 감정 자체는 두 사람보다 루리리에게 더 극적이었다. 유적과 미궁에서 나오는 물건들은 지금도 마법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세계가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는 전쟁답게 당시의 기술로 만들어진 아티팩트들도 굉장했다.

“페이, 페이, 이거 어떻게 할 거야?”

루리리가 호들갑을 떨며 페이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태초의 전쟁 때의 서적. 따지자면 밀레스 대륙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것들.

물질적, 문화적 가치를 계산하기 어려웠다.

“이걸 팔면, 누가 값을 쳐줘? 카니아가 아니라 북극성 상회 회주가 와도 이 물건에 값은 못 매길걸?”

“그럼 어디 써?”

그렇게 묻던 루리리가 돌연 입을 벌리더니 두 걸음 물러났다.

“싫어, 난 안 해!”

페이가 루리리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누가 너한테 시킨대? 그리고 이름으로 부르지 마.”

제대로 된 마법사가 없다 보니 아무래도 자기에게 해석시킬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물론, 페이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루리리, 그리고 아텐도 여기서 실전 경험을 해봐야 한다.

드란도 마찬가지. 방학 때는 없을 거니 찾아오지 말라던 그 괴짜 교수가 갈 곳이라면 뻔하다. 아래쪽 미궁을 뒤지며 페이가 말한 방을 찾고 있을 그 사람에게 부탁할 수도 없다.

“그럼 드란 교수님?”

“그 사람은 할 일이 있어.”

“그럼 이 책은 썩혀둘 거야?”

루리리는 진심으로 아깝다는 얼굴이었다. 페이는 루리리의 이마를 한 대 더 쥐어박았다.

“왜에?”

루리리가 뺨을 부풀렸다.

“누가 썩혀둔대? 써먹을 데가 다 있어. 이걸 들고 마법과 학장을 찾아가 볼까?”

직위는 마법과 학장이지만 실상 이 학원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아!”

루리리는 페이가 뭘 말하려는지 알았다. 보잘것없는 저 책들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다.

“그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탐낼 수밖에 없지.”

“그만큼 사람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는 것도 알지?”

설마 그럴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용진운이 페이에게 물었다. 이런 건 한 번의 방심이 치명적인 실수가 되어 돌아오는 법이다.

페이는 뭘 그런 걸 다 묻냐는 태도로 대답했다.

“알아. 잘못하면 훅 가겠지.”

이 책들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으나 그만큼 위험한 것 또한 사실이다. 생각 없이 말했다가 책의 정보가 퍼지기라도 하면 페이는 매일 밤 암살자에게 시달릴 것이다.

밸론에서 상대했던 그런 놈들이 아닌 진짜배기 검은 형제단 같은 진짜배기들을.

“교섭할 사람은 똑바로 있어.”

“누구?”

“북극성.”

“북극성?”

“그쪽이 그나마 깨끗해.”

대상회라 불리는 탐욕스러운 것들 중에서 그나마 양심적인 상회가 바로 북극성 상회다. 거기 회주 다니엘 포라는 최소한의 도덕은 지키는 사람이다.

“일단 나가자. 이걸 얻었으니 1층에서 얻을 건 다 얻었다고 봐도 돼.”

다른 것도 찾으면 나오겠지만, 그러기엔 방학이 너무 아깝다. 2층, 3층을 돌아다녀도 시간이 아까울 판에 페이가 1층을 헤맨 건 전적으로 여길 찾기 위함이었다.

이 책 중에는 미궁의 정보를 기록한 것 또한 있다. 이 방의 마지막 주인이 남긴 수기 형식이지만, 도움이 되는 것 또한 분명하다. 밀레스 사가의 아텐이 학원 재학 중 몇 개나 되는 기연을 미궁에서 건진 건 1층에서 이 장소를 찾은 것이 컸다.

그때는 미궁 관계자 중 한 명인 교수가 아텐을 도와 이 서적들을 해석해주고 했었다. 떠올려보면 그 교수와의 만남도 미궁 안이었고, 그것도 아텐에게 기연이었다. 이 넓은 미궁에서 말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운이 만만찮게 좋아.’

미궁에서 처음 만난 놈들에게 이 방까지 안내받을 줄이야. 행운이다.

“나가자. 칙칙한 미궁을 벗어나 태양을 보자고.”

“아자!”

루리리가 환호를 내질렀다.

2주 만에 보는 태양에 감격한 루리리가 한 방울 눈물을 흘렸고, 멀쩡한 척해도 페이도 감회가 새로웠다. 태양이라는 놈이 이렇게나 반가웠던 적이 없었다.

“페일. 카페에 가자! 달콤한 게 먹고 싶어!”

“미궁 안에서도 실컷 먹었잖아?”

기본적인 음식은 용진운이 모두 챙겼음에도, 루리리는 따로 케이크나 빵 등을 챙겨와 미궁에서 간식으로 먹기도 했다.

“칙칙한 장소에서 먹는 거랑 태양 아래서 먹은 건 달라. 그걸 깨달았어.”

세상 진지한 말에 숨겨진 세상의 진리를 설파하는 현자와 같은 태도다. 페이도 조금은 동감했다. 지금은 벽곡단을 먹어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좋아, 일이 바쁘지도 않고 간식 하나 먹는 데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니까.

“같이 가자. 늘 가던 거기지?”

“응!”

“나는 2주 동안 있었던 일을 조금 알아보고 올 테니까. 둘이서 잘 놀다와.”

용진운이 곧장 은신술을 사용해 사라졌고, 페이는 루리리의 손에 끌려 학원 밖으로 향했다.

***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페이였지만, 그래도 2주 만의 바깥 구경에 케이크를 3조각이나 먹어치웠다. 바깥에 마련된 식탁에서 따스한 햇볕을 쬐며 간식을 먹노라면 축 늘어지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난 일하러 간다.”

“카니아?”

“걔랑은 진짜 아무관계 아니라니까.”

연애 소설을 좋아하지만, 그것 말고는 돈밖에 관심이 없는 여자다. 어떤 의미 자기 아비랑 똑 닮았다 할까. 페이와 카니아가 남녀 관계로 발전하는 일이 있다면 딱 하나 돈 때문이다. 그건 이미 남녀관계가 아닌 거래 관계다.

“나도 갈래.”

“이번에는 안 돼.”

힘든 싸움. 거래가 될 것이다. 이런 일에 익숙지 않은 루리리를 데려갈 자리가 아니다. 쓸모없다고 말하기엔 루리리에게 미안하지만, 그런 자리에 쓸모없는 사람을 데려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페이의 말에서 안 된다는 의지를 읽은 루리리는 아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기숙사에 가 있을 게.”

“며칠 쉬고, 다시 들어가자.”

“응.”

루리리와 헤어진 페이는 바로 붉은 지붕의 집을 찾았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노파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늘은 좀 기다려!”

“다른 손님?”

노파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차라도 내올 테니까!”

그리 말하고 노파는 옆으로 부엌으로 사라졌다. 페이는 탁자에 있는 다른 의자에 앉았다.

노파는 금방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내왔다.

“마셔!”

탁 소리 나게 차를 내놓은 노파는 자신도 자리에 앉아 차를 홀짝였다. 한 손으로 터프하게 마셨다. 입안을 강철로 만든 건가? 늙어서 미각이 촉각이 맛이 간 건지도 모르겠다. 페이도 호호 불어가면서 차를 마셨다.

조용한 시간, 돌연 노파가 입을 열었다.

“꼬맹이. 너는 누구냐?”

쇠 긁는 목소리가 음습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페이는 편안하게 차를 홀짝였다.

“많이 천재적인 12살입니다.”

“그래도 겸손은 안 떠는군!”

“당신은 누구입니까?”

페이는 항상 궁금하던 질문을 입에 담았다. 단법사의 상징인 혼압은 느껴지지 않는다. 마법사 특유의 강렬한 눈빛도 아니다. 정령사라고 보기에도 정령의 낌새가 없다. 린다의 경우에는 항상 주변에 정령이 몰려 있었고, 대부분의 정령사는 그렇다.

“아가씨의 보모!”

“카니아의?”

“그래, 이 노친네가 늙은 몸으로 이런 곳에서 시간이나 죽이고 있는 이유가 달리 뭐가 있겠어!”

말끝마다 소리를 질러대니 페이는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위압감을 위해 소리치는 건 줄 알았는데, 원래 목소리가 큰 건가.

목소리는 됐고, 카니아의 보모라. 그럼 그거군. 일이 쉽게 됐다.

“이것 좀 봐주실 수 있습니까?”

페이는 미궁에서 얻은 책을 한 권 꺼내 내밀었다.

“왜 이걸 나한테 보여주는 거냐?”

노파가 페이에게 못마땅한 눈빛을 보냈다. 페이는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보모라면 카니아의 교육도 맡았을 거 아닙니까?”

가만히 페이를 바라보던 노파는 여전히 김이 나는 차를 그대로 들이켜고는, 다시 차를 컵에 따라 들이켰다.

노파의 째진 눈이 페이를 응시했다. 페이는 그냥 한 마디 덧붙였다.

“상인 교육도요.”

“천재라고 자화자찬 할만 해.”

주름진 노파의 손이 페이가 꺼낸 책을 향했다. 책을 만지고 바라보는 노파는 가볍게 말을 걸기 힘든 분위기를 풍겼다.

책을 살피던 노파의 눈이 점점 크게 뜨였다.

‘고어를 읽을 정도인가?’

놀란 건 페이도 마찬가지. 책만 보면 그냥 오래된 책이다. 저 책의 진가를 이해하려면 고어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남방 언어들은 크게 한 줄기에서 나왔고, 그게 바로 고어다. 고어를 읽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쉽지도 않다. 문자가 비슷해도 어휘가 다르고 문장이 다르고, 단어가 의미하던 것들이 다르다.

감자라는 식재료가 과거에는 살인 병기의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이, 꼬마. 이걸 꺼낸 이유가 뭐냐?”

또 꼬마냐. 빨리 크던지 해야지. 페이는 불평하면서도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주도권이 넘어왔다.

“회주를 보고 싶습니다만.”

“대상회, 북극성 상회의 회주가 보고 싶다면 볼 수 있는 그런 인간인 줄 아느냐?”

“만날 수 있겠죠. 이 정도면.”

페이가 책 몇 권을 더 꺼냈고, 노파가 말이 없어졌다. 책을 노려보던 노파가 툭 던졌다.

“미궁이냐?”

“알아봐 주시니 다행입니다.”

뜨거운 차를 식혀 마신다. 은은한 단맛이 입에 퍼진다. 비싼 차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안쪽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곧 사람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는 얼굴. 오늘 미궁에서 봤던 그놈 중 하나다.

저놈들도 여기 고객인가. 상관이 더 있는 걸로 보였는데. 그쪽도 궁금하다.

집을 나가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페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앞에 있는 책으로 눈을 돌렸다. 얼굴이 알려졌다. 다음에 만나면 높은 확률로 서로 죽이게 될 것 같다.

‘뭐, 좋은가.’

경쟁자가 줄면 이쪽만 좋지.

“다른 거래는?”

“늘 팔던 것들을 조금.”

“그럼 들어가 봐!”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치는 노파. 페이는 제안이 받아들여졌음을 알고 책상 위의 책을 거둬 안쪽으로 들어갔다.

북극성 상회 회주 다니엘 포라. 만날 수 있다면 꽤 괜찮은 거래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카니아는 드물게 탁자에 앉아 페이를 맞이했다. 페이가 본 건 대부분 침대에서 뒹구는 모습이었다.

“갑자기 궁금해지는데. 그렇게 얼굴 팔고 다니면 습격당하고 하지 않아?”

진지한 모습이라도 보이면 몰라. 카니아는 물건에 가격을 매길 때를 제외하면 항상 어딘가 노는 듯한 분위기였다. 질 나쁜 놈들이라면 얕잡아보고 수작을 부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도 그 정도 구분은 하거든? 사람 보는 눈은 아빠보다 좋다고 인정받을 정도니까.”

그녀는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탁자에서 일어나 옆에 있는 침대에 털썩 엎드렸다. 분홍색 벽지에 분홍색 이불이 깔린 이 소녀틱한 방이 비밀스런 거래가 이루어지는 방이라고 생각하면 아직도 적응이 잘 안 됐다.

페이는 항상 하던 것처럼 물건을 바닥에 꺼내놓았다.

“그건 없네?”

물건을 훑어본 카니아가 엎드린 상태로 고개만 돌려 페이를 보았다.

“뭐가?”

“악마의 나무.”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정황 증거가 그렇게 확실한데 발뺌할 거야?”

카니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페이를 바라봤다. 페이는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심증만으로 모든 일이 돌아가면 참 편하겠어? 안 그래?”

“재수 없는 놈. 여기 2천 골드.”

카니아는 옆에 있는 책에서 수표 하나를 꺼내더니 페이에게 던졌다. 종이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페이의 손에 안착했다.

가보려는 페이의 등에 대고 카니아가 말했다.

“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나 빼고도 네가 나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있어. 노려보지는 마. 말했잖아. 난 고객의 정보를 팔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고. 누구보다 빠르게 지도를 구매한 사람이 있다. 이 정도 소문이야.”

“충고 고마워. 아주 재수 없을 것 같네.”

“너는 고생 좀 해 봐야 돼. 재수 없어서.”

킥킥 웃는 카니아를 뒤로 하고 페이는 붉은 지붕의 집을 나왔다. 이번 방학은, 여러 가지로 폭풍이 몰아칠 것 같다.

========== 작품 후기 ==========

여름 방학에는 가문 하나를 말아먹고, 겨울 방학 시작과 동시에 학교를 거의 말아먹을 뻔하더니 이번에는.......

90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