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born as a Son of Villain

< -- Blooming from cliffs. -->

페이는 그날부터 절벽에 붙박여서 떠나지 않았다. 절벽에 난 무술의 흔적을 하나하나 관찰하며 그저 그런 것은 넘기고 취할 만한 것은 취했다.

여러 무술을 막 익히는 건 독이 되는 행위지만, 페이에게는 감각도가 있었다. 경험이 곧 강함이 되는 무술. 수준 높은 무술을 간접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감각도는 발전했다.

불의 정령을 끼고 무의 절벽을 배회하는 페이의 모습은 절벽에 모인 단법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무의 절벽은 단법사를 위한 장소. 정령사가 올 자리가 아니었다.

“정령사가 여기서 뭘 하는 거냐? 봐도 얻을 것도 없을 건데? 여긴 단법사의 공간이다.”

한 용병이 그렇게 물어왔다. 호기심 반. 비아냥 반이었다.

“정말 얻는 게 없는지. 시험해도 좋은데?”

페이는 용병을 도발했다. 감정적인 도발은 아니었다.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었고, 딱 좋은 타이밍에 시비를 걸어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러면 이용해주는 것이 도리.

“좋아. 후회하지 마라.”

페이와 용병이 거리를 벌리고 섰다. 절벽을 보던 사람들끼리 싸우는 일이야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쪽이 불의 정령을 다루는 정령사라는 것이 달랐다. 사람들이 구경을 위해 모였다.

“너무 많은데.......”

페이도 절벽 앞에서 단법사들이 싸우는 걸 몇 번 구경했다. 흔적만 새겨진 무술을 분석하느라 지끈거리는 머리를 쉬게 하는 데는 그만한 것도 없었다. 그래도 이건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무의 절벽에 정령사가 와 있다. 척 봐도 재미있어 보이는 구경거리를 놓칠 사람이 있을까.”

용병이 즐거운 기색으로 말했다. 아까 그 시비는 고의였던 모양이다. 페삼말고 페일의 신분으로 왔어야 했나? 페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될 일이다.

페일의 이름은 유명세가 지나쳤다. 카메론에서 한참 떨어진 자리에서도 가끔 페이는 자신의 소문을 들었다. 마법과 교수를 마법으로 싸워 이겨버린 천재 학생. 이 정도가 기본이었고, 과장되어 이미 단법은 인단에 마법은 대마법사라던지, 악룡을 사냥한 용 사냥꾼이라는 소문까지 따라다녔다.

용 사냥꾼은 아니지만 용을 꼬시긴 했다. 드라이크와 루리리를.

대마법사는 아니지만 인단의 단법사이기도 하고, 소문도 가끔 진실을 말할 때가 있었다.

“다쳐도 모른다?”

“하, 정령사에게 근접 대련으로 질까!”

“진심으로 하는 소린데.”

진심이 전달되지 않는 세상이다. 조금은 남을 믿어도 좋을 텐데. 무시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닌가.

전쟁터에서 정령사는 마법사와 같은 후방 화력 지원으로 분류되니까.

페이는 기수식도 잡지 않고 똑바로 서서 정면에 있는 용병을 보며 품에서 동전 하나를 꺼냈다.

“이게 떨어지면 시작으로.”

용병이 대답하기도 전에 페이가 동전을 높이 던졌고, 용병은 대답도 않고 기수식을 잡았다. 꽤 높이 올라간 동전이 햇빛을 반사하며 떨어졌다.

“기절 정도로 끝내줄게.”

용병이 말했다. 페이는 용병의 수준을 가늠했다. 인단의 벽에 막혀있다. 어딜 가도 심심찮게 대접받을 수준이다. 그런데도 여기 왔다는 소리는 그 너머. 영단이 되길 원한다는 거겠지.

처음 비꼬며 시비 건 것만 빼면 성격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여기까지 판단 끝.

새로운 기술을 선보일 상대로 나쁘지 않다.

“그건 내가 할 말인데. 화상 조심해.”

페이의 말이 끝났다. 동전이 떨어졌고, 용병이 돌격해 들어왔다. 페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믿음직한 파트너가 이미 준비를 끝마치고 있다.

“썅!”

짜증스럽게 말을 뱉은 용병은 자신과 페이의 사이를 가로막은 불의 벽을 향해 무기인 도끼를 휘둘렀다.

도끼에서 나온 풍압이 불길을 갈랐다. 용병은 불벽 너머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재차 도끼를 휘둘렀다. 후웅! 불꽃의 검이 도끼 앞에서 흩어졌고, 용병이 페이에게 한 번에 접근했다.

“끝이.......”

“끝.”

도끼를 옆으로 들고, 널찍한 부분으로 페이의 머리를 내리치려 하는 용병의 말을 페이가 끊었다. 용병의 도끼보다 벨의 불꽃이 빨랐다.

그것은 검술이었다. 검과 같은 모양으로 검술의 궤적을 그리며 다가온 불꽃은 아지랑이처럼 찰나 흔들리더니 다섯 개로 분리되어 용병의 몸을 갈랐다.

“흐억!”

용병은 도끼를 놓치고 뒤로 물러나 자신의 몸을 여기저기 만져댔다. 불꽃이 몸을 지나갔고, 그건 검에 베이는 느낌이었다. 느낌은 있었는데 상처는 어디에도 없었다.

“항복?”

그런 용병의 목에 어느새 다가온 페이가 불로 된 검을 겨누고 있었다. 불을 들고 있음에도 페이는 전혀 뜨거운 기색이 아니었다.

“하, 항복.”

턱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용병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이 빠진 용병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환성을 뱉었다.

페이가 용병에게 한 공격은 단순한 정령술이 아니었다. 분명 검술이었다. 수준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걸 알아봤다.

정령술로 펼치는 무술. 듣도 보도 못한 기술이다.

“나랑도 한 판 하자!”

“나도! 돈 낼 테니까!”

보통 정령사가 아니다. 색다른 기술을 두고 사람들이 눈을 빛냈다. 그들 모두 깨달음과 무술의 증진을 위해 여기 온 사람들이고, 새로운 경험은 그 모두에 도움이 되었다.

페이는 대련을 청하는 사람들을 향해 한 마디 해주었다.

“대신 다치면 포션 값은 알아서 낼 것.”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

한 번 대련을 시작한 후로, 페이의 일과에 변화가 생겼다. 하루 3시간. 절벽 중앙(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장소)에 가서 대련을 펼쳤다.

사용하는 것은 정령술 하나. 정령술을 사용한 무술이었다.

페이는 자신의 상대를 바라봤다.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 무의 절벽에 온 사람이 모두 그렇듯 단법사이며, 수준은 놀랍게도 인단이다. 인단 초입. 나이를 생각하면 저 정도도 대단했다.

“가, 갈게요.”

소심하게 말한 것과 달리 여자의 걸음은 쾌속했다. 빠르게 접근해 가차 없이 휘두르는 일격을 페이는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 뒤로 물러나는 것으로 피했다. 불의 정령과 계약했다고 불꽃만 쓰는 게 아니다.

정령사가 정령술을 쓰는 방법은 두 개. 정령과 계약하거나. 자연에 있는 정령의 힘을 빌리거나.

직접 계약한 것에 비하면 효율은 떨어져도 다른 속성의 정령을 쓰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혼과 교감하는 능력이 특히 뛰어난 페이는 비교적 쉽게 계약하지 않은 정령에게서도 힘을 빌릴 수 있었다. 만능정령 벨라에몽이 있기에 그동안 쓸 일이 없었을 뿐이다.

여자는 뒤로 도망치는 페이를 추적하려 했지만, 날아오는 불꽃이 그것을 막았다. 흉내 내는 것은 절벽에서 봤던 권법의 하나. 주먹 모양의 불꽃이 날아가 여자를 노렸다.

여자는 불꽃을 쳐내는 대신 피하는 것을 선택했다. 여러 사람이 대련하는 것을 봤다. 저 불꽃은 순수한 불꽃처럼 타오르기도 하며, 망치와 같은 질량을 가지고 사람을 후려치기도 한다. 섣불리 맞대응하려 하면 피를 본다.

그러나 맞대응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 정도로 벨이 펼치는 권법이 녹록하지는 않았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냐는데?”

페이의 어깨에 앉아 여유롭게 불꽃을 조종하는 벨. 페이는 벨의 말을 대신 전해주었다. 소녀의 모습만 해도 눈에 띈다. 페이는 벨이 말하는 것만이라도 숨기기로 하고, 벨의 의사는 페이가 대신 전해주게 되었다.

“익!”

분한 듯 검을 휘둘러 불꽃을 떨쳐내고 달려오는 여자. 그러나 다시 앞쪽에 생겨난 불로 된 주먹에 행동이 막혔다.

여자를 놔두고 벨과 페이는 다른 대화를 하고 있었다.

-파트너. 저 여자. 어둠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데?

페이는 간신히 침착을 유지했다. 표정을 관리하며 되물었다.

-어둠의 씨앗?

-아직 발아하지도 않았어. 어떻게 씨앗을 얻었는지는 물어도 소용없을 거고.

이때까지의 일에 비추어 보면 그럴 확률이 높았다. 한 명은 말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다른 하나는 자기 몸에 씨앗이 있는지도 몰랐다.

-어떻게 할까? 뺏어? 지금이라면 본인도 모르게 뺏을 수 있는데.

언뜻 상식적으로 보이는 발언. 그러나 페이는 벨과 영혼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연결로 벨이 뭘 원하는지 읽었다. 페이도 그것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

-아니. 놔두자.

페이가 본 씨앗의 형태는 두 개. 라란체에서 싸운 남자가 가지고 있던 것과 슈겔메이른에서 본 미치광이가 가지고 있던 것이다. 전자는 발아하지 않고 실랑 후작이 고용한 마법사에게 힘을 보태는 데에 사용되었다.

미치광이가 가지고 있던 씨앗은 이미 발아해 광기를 낳은 후였다.

순수한 어둠의 씨앗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할 수 있다면 변화를 관찰하고 싶었다.

-회수는 바로 가능하지?

전에 벨이 미치광이에게서 순식간에 힘을 빼앗을 걸 떠올리며 물었다.

-씨앗이 영혼과 깊이 동화 하지 않는다면, 접촉하는 즉시 할 수 있어.

-반대로 말하면 영혼과 동화한 씨앗은 꺼내기 어렵다는 거네?

-정답. 그런데 바로 그렇게 될 일은 없어.

벨에게서 심상이 전해졌다. 씨앗이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는 그림. 싹이 나무가 되면 뿌리 뽑기 어렵지만, 새싹인 상태라면 손가락만으로도 뽑을 수 있다. 그런 차이다.

페이와 벨은 일단 두고 본다는 것으로 방향을 결정했다.

두 사람은 떠드는 동안에도 대련을 대충하지 않았다. 수세에 몰린 여자가 조금씩 힘을 올리고 있었다.

“끝.”

페이는 돌연 끝을 고했고, 동시에 암기 모양을 한 십여 개의 불꽃이 여자의 몸을 통과해 지나갔다.

검이 몸을 지나가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여자가 털썩 무릎 꿇었다. 구경꾼들이 응원의 말을 보내주었다.

대련에서 페이를 이긴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심심해서, 또는 무언가 얻기 위해 무의 절벽을 찾은 영단이나 인단에서도 벽을 바라보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정령사로서는 미숙하나 무술을 쓰며, 단법사처럼 싸운다. 상대도 단법사들이다. 우위는 페이에게 있었다.

페이는 주저앉은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아, 네.......”

여자는 수줍은 듯 시선을 내리며 페이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페이는 여자를 일으켰다.

“힘이 너무 들어간 것 같은데, 조금만 힘을 빼 봐요.”

“가, 감사합니다.”

여자는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잰걸음으로 멀어졌다.

구경하던 용병이 다가와 페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처음 페이에게 대련을 신청했던 용병으로, 랄손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뭐야, 관심 있어?”

그리고 은근히 물었다. 페이는 그의 손을 쳐내며 대꾸했다.

“조금은. 아는 사람이야?”

랄손은 무의 절벽에 온 지 1년이 됐다고 했다. 밝은 성격 때문에 두루두루 아는 사람이 많았다.

“21살에 인단. 여기서도 유명하지. 얼굴도 얼굴이고, 몸매도 잘빠졌잖아?”

손으로 항아리 모양을 그리며 음흉하게 웃는 랄손. 페이가 여자의 몸매를 떠올려 보았다.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움직일 때마다 그 안에 감춰진 탄탄한 몸매가 언뜻언뜻 보였다. 얼굴도 충분히 미인이라 해줄 만하고.

“이름은 장소홍. 들리는 말로는 2년째 여기 있다더라.”

“2년... 꽤 긴데.”

무의 절벽에서 무언가를 얻는 사람은 극소수고, 페이가 보고 들은 바로는 보통 일주일. 길어야 한 달이면 절벽을 떠났다. 1년 이상 남아 있는 사람들은 진득한 끈기가 있거나, 절벽에 남겨진 것들을 보고 무언가를 깨달을 정도로 수준 높은 사람들이다.

장소홍은 아마 둘 모두에 해당할 것이다.

“그나저나 친구. 내가 요즘 막힌 부분이 있는데 말이야.......”

친근하게 굴던 랄손이 뒤로 한발 물러나더니 손을 모으고 굽실거렸다. 페이는 피식 웃었다. 무술을 연습하다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이렇게 페이에게 비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숲으로 가자. 알려줄게.”

“좋았어! 역시 너밖에 없다니까! 넌 정말 이름만 빼면 완벽한 친구야.”

페이는 랄손의 손을 잡고 비틀어 꺾었다. 불의 정령의 힘을 빌려 뜨끈하게 손을 데워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잠깐, 잠깐! 이거 진짜 뜨겁다고! 화상은 포션 써야 낫는단 말이야! 나 돈 없어!”

“남의 이름 가지고 놀리면 안 되지. 어차피 자연치유로도 2주면 되잖아?”

“그 2주간 수련을 쉬라는 말이냐!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응? 나 저금 다 떨어져 간다고.”

랄손은 끝에 가선 눈물까지 보이며 애원했고, 남정네가 질질 짜며 애원하는 모습에 기가 질린 페이가 손을 놔줬다.

118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