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ron Blood Earl Riccianne

Chapter 3. Outlook (4)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 라울은 말 그대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어쨌든 둘 중 하나는 선택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라울의 선택은 뻔했다.

“그래도 작위를 계승하신 후에 시작한 일 중 가장 먼저 마무리가 된 일입니다. 그런 기념비적인 보고를 늦출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프리엘라가 무서워도 리카이엔은 평생 보아야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리카이엔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프리엘라를 향해 말했다.

“미안하지만 잠시 자리 좀 비워 줬으면 좋겠는데?”

프리엘라는 뻔뻔한 리카이엔의 얼굴을 보며 이마에 핏대가 솟는 것을 느꼈지만, 여기서 뻗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알았어요. 하지만 저녁에는 꼭 얘기를 마무리 지어야 할 거예요.”

“음… 뭐, 시간이 된다면 그러면 좋겠지. 그런데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군.”

프리엘라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밤에 잠을 좀 줄이면 되죠.”

“내일이 출정인데 잠은 푹 자야지.”

“호호, 침대에서 저를 보게 될지도 몰라요.”

“쿨럭쿨럭, 케켁!”

옆에서 듣고 있던 라울이 저도 모르게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리카이엔이 프리엘라를 향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일단은 보고를 받은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자고.”

“알았어요!”

찬바람이 쌩쌩 부는 싸늘한 표정으로 대답한 프리엘라가 곧장 집무실을 나섰다.

프리엘라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리카이엔이 라울을 향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아~ 수고했다.”

“네…….”

“그래, 일은?”

“예, 일단 처음의 목표대로 대부분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지원을 통해 이루어진 개간이 현재…….”

“아아, 됐어.”

“네?”

“어쨌든 잘 마무리됐다는 거잖아. 알아서 잘 했겠지.”

리카이엔의 말에 라울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의 일들은?”

“대부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만, 이번 전쟁으로 조금 진척이 느려지고 있습니다.”

“불안해하는 모양이군.”

아무래도 전쟁이 벌어지면 민심이 동요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번 분쟁이 있었던 루오 왕국이 아니라 델로스 왕국이 쳐들어온 탓인 것 같습니다.”

“델로스 왕국이 쳐들어오면 루오 왕국도 조만간 쳐들어올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영지민들 사이에서, 일단 병력들이 서부로 몰리게 되면 상대적으로 남부의 방어가 약화될 거라는 소문이 퍼지는 탓에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뭐, 그건 어쩔 수 없지. 당분간 조금 천천히 진행하라고. 그리고… 클레우스의 물건들을 처분하는 건 얼마나 진척이 있냐?”

“예, 현재까지 처분한 물건들의 금액은 1억 아르겐 정도입니다.”

“흐음, 꽤 분투한 모양이네?”

“그래도 아직 처분할 것들이 꽤 많습니다.”

리카이엔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이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처분을 서둘러라.”

“그렇지 않아도 이번 전쟁의 여파 때문에 서둘러 처리를 할 생각입니다.”

지금의 전쟁은 리카이엔이 속한 브렌 왕국과 델로스 왕국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평화롭던 대륙의 정세에 갑자기 터져 나온 전쟁의 여파는 그리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었다.

리카이엔의 예상대로라면 이 첫 번째 전쟁으로 인해 조만간 대륙 전체에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가 오게 되면 이런 물건들을 처분하기가 어려워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리카이엔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예상보다 너무 일찍 전쟁이 벌어졌어.”

아직 적어도 1년은 시간이 있다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리카이엔의 그런 판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전쟁이 발발했다.

리카이엔은 그 원인에 대해 확신에 가까운 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놈들…….”

바이론인으로만 구성된 의문의 길드. 최고의 정보 길드라는 아트룸 길드의 눈길조차 속이는 그들의 농간이 분명했다.

브렌 왕국 국왕의 움직임이나 델로스 왕국에 대한 예상 등등. 누군가 일을 꾸미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목적이지?”

사람들을 납치해 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아직까지 아는 것이 너무 적은 집단이었다. 그리고 아는 것이 적을수록 상대하는 것은 까다롭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리카이엔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더 이상 숨지는 못할 것이다.’

어두운 숲의 그림자 속에 숨어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일단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아무리 어두운 숲이라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제부터가 그들과의 진짜 싸움인 셈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리카이엔이 라울을 향해 말했다.

“그런데 말이다.”

“예, 백작님.”

“프리엘라한테 돈 주지 마라.”

“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라울이 당황하는 사이 리카이엔이 말을 덧붙였다.

“프리엘라한테는 니가 알아서 할 거라고 전해 놓을 거다.”

“헉! 배, 백작님, 설마…….”

지금까지는 그래도 리카이엔이 공식적으로 라울에게 그 일을 떠넘기지는 않았었다. 다만, 라울이 클레우스의 물건들에 대해 알고 있고 그것의 처분을 맡고 있기에 프리엘라가 그를 괴롭혔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공식적으로 ‘그 일’을 맡게 된다면.

“제, 제발…….”

라울이 우는 얼굴로 리카이엔을 보았다. 하지만 리카이엔의 입에서 나온 말은 라울에게 절망만을 던져 줄 뿐이었다.

“한 푼이라도 나가면 죽는다.”

Chapter 4. 출정 아침 (1)

“폐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홀로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켈리어스 국왕이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흠칫 놀라며 주변을 훑었다. 그 순간, 그랜드 홀의 구석진 곳에서 한 인영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후드를 깊이 눌러쓴 작은 체구의 사내였다.

국왕이 후드의 사내를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보르반?”

“그렇습니다, 폐하.”

“내가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 말라고 이미 한 번 경고를 하지 않았던가?”

“죄송합니다. 하지만 급히 전해야 할 말이 있기에…….”

보르반이라 불린 사내의 말에 국왕이 조심스레 그랜드 홀의 입구를 살폈다.

이미 깊은 밤, 왕궁 안에 남아 있는 사람은 근위 기사들과 왕실부의 관리들밖에 없었다. 그중 국왕이 부르기 전에 그랜드 홀로 들어올 사람도 없다.

“말하라.”

국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보르반은 천천히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 넘겼다. 그리고 드러난 얼굴은 다름 아닌 바이론인의 얼굴이었다.

리카이엔이 그렇게 찾고자 하는 비밀 세력. 바이론인으로 구성되어 은밀하게 ‘어떤 일’을 진행시키고 있는 단체 써클루스. 보르반은 그 써클루스의 일원이었다.

“델로스 왕실에서 서부 세르오넨 요새 쪽으로 병력을 추가 파견했다고 합니다.”

“뭣이? 벌써 증원을 했다고?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이르지 않느냐? 너희도 개전 후 보름 정도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렇기는 합니다만… 델로스 국왕의 성격이 꽤 변덕스럽더군요.”

보르반의 대답에 국왕이 언짢은 목소리로 물었다.

“증원 병력은 얼마나 되더냐?”

“네 개 사단 규모, 총 4만의 병력을 증원했다고 합니다.”

“지금 세르오넨 요새를 공격하고 있는 선발 병력이 3만이니 합이 7만이군.”

제국을 제외한 대부분 왕국들의 국력은 비슷한 수준으로, 그 왕국들이 상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거의 15만 내외였다. 그 중 7만이라면 절반의 병력을 투입했다는 뜻. 절대 적은 병력이 아니었다.

델로스 왕국의 원래 계획은, 지금 공격을 하고 있는 선발 병력 3만이 요새를 먼저 점령한 후, 추가 증원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급해진 델로스의 국왕이 예정보다 빨리 4만의 병력을 더 투입한 것이었다. 그리고 델로스 왕국 내부적으로는 추가로 병력을 파견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브렌의 켈리어스 국왕 역시 그에 못지않은 준비를 했다. 서부 변경백의 변방군 1만, 왕국 서부군 2개 사단 2만, 중부군 2개 사단 2만, 그리고 서부의 영지군이 1만. 총 6만의 병력이었다.

문제는 그 병력들이 아직 집결이 끝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아직 이동 중에 있는 중부군 2개 사단은 도착을 하더라도 긴 행군의 피로를 푼 후에야 무언가를 하더라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당초의 계획을 수정해야 되겠구나.”

“그래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국왕이 넌지시 물었다.

“흐음,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것이냐?”

국왕의 물음에 보르반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의 방법 보다는, 폐하의 생각이 더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말씀하시는 표정을 보니 따로 생각이 있으신 모양입니다만?”

“그들이 우리의 예상보다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면, 우리는 기존의 계획을 늦춰야지. 카일렌 총사령관에게 일단은 기다리라고 해야겠군.”

병력이 적더라도 세르오넨 요새에 의지해 지키기만 한다면 어지간한 공격은 모두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기다렸다가 적의 7만의 병력을 먼저 친 후에 진군한다면, 델로스 왕국군이 받을 피해를 훨씬 더 키울 수도 있었다.

“역시 폐하의 식견은 훌륭하십니다.”

“뭐, 정황을 안다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 어쨌든 네가 미리 알려 주지 않았다면 역으로 우리가 낭패를 볼 수도 있었던 일이다. 너희들의 수고에 대해서는 이번 전쟁이 끝난 후 크게 보상을 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해라.”

“예, 폐하.”

깊이 허리를 숙인 보르반이 천천히 뒷걸음질을 쳐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방의 그림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갑자기 인기척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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