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ron Blood Earl Riccianne
Chapter 4. The Art of Death (5)
“아직 기다려. 올 사람이 한 명 남았다.”
“응?”
세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여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때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세이나가 갑자기 반색을 하며 외쳤다.
“언니!”
게일의 일 때문에 알아볼 것이 있어 함께 수도에 가기로 한 프리엘라였다. 그녀도 세이나를 알아보고는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응? 세이나도 같이 가는 거야?”
리카이엔의 성격상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리가 없을 테니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아, 뭐 볼일이 좀 있어서요. 아무튼 언니도 같이 가면 심심하지는 않겠어요. 남자들만 있어서 좀 따분할 것 같았거든요.”
“응? 언제는 오빠만 있으면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좋다더니?”
프리엘라가 농담처럼 던지는 말에 세이나가 볼멘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
“평생 오빠만 바라보고 살 것도 아닌데요, 뭐.”
“응?”
이해를 못한 프리엘라가 다시 물어보려고 했지만 리카이엔이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
“수다는 나중에 떨고. 자, 어서 출발하자. 폴덴바인 백작가를 거쳐 수도로 간다.”
리카이엔이 준비해 놓은 말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고, 그 뒤로 프리엘라와 세이나, 루딜, 그리고 헐리와 조원들이 차례대로 움직였다.
Chapter 5. 페르그란데 (1)
“아직도 처리하지 못했단 말이냐?”
“그, 그것이…….”
“멍청한 놈! 마스터께서 자리에 안 계실 때, 이런 문제 하나 제대로 처리를 못한다면 내 얼굴이 뭐가 되느냔 말이다!”
카루안의 호통에 마주 서 있던 바이론인 사내가 황급히 부복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카루안의 표정은 오히려 싸늘하게 식어 갈 뿐이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은 사내가 뭐라고 말을 잇기도 전에 카루안의 손이 움직였다.
퍼엉!
손에서 무언가가 일렁이는 순간, 사방으로 피가 터졌다. 동시에 썩은 고목처럼 옆으로 툭 쓰러지는 사내. 그런 사내의 어깨 위에는 원래 자리해야 할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찢겨진 듯 거칠게 잘린 목 위에 진득한 피와 허연 뇌수만이 흥건할 뿐이었다.
“아무도 없느냐!”
“예!”
카루안의 외침이 들리자마자 등에 시미터를 멘 두 명의 사내가 황급히 뛰어들어 왔다. 그리고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카루안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머리가 없는 시체를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카루안은 아직 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는 피 웅덩이를 응시하며 한층 더 표정을 굳혔다.
‘어디서 온 어중이떠중이들이…….’
페르그란세 산맥 깊은 곳에 자리한 이곳은, 그동안 써클루스가 힘을 키워 온 아주 중요한 장소였다. 100여 년 전의 그 사건으로 인해 그 힘이 급격하게 줄어든 교단이 자리를 옮긴 곳이 바로 여기다. 교단은 이곳에서 상처를 치유하고, 오랜 세월 절치부심 힘을 키운 끝에 지금의 성세를 이룰 수 있었다. 흔히 성지라 불리는 곳. 그런 곳을 정체도 알 수 없는 것들이 들쑤시고 다니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로반!”
카루안의 부름에 바닥에 고여 있는 피 웅덩이 위에 갑자기 아지랑이가 일렁이는가 싶더니 이내 한 명의 바이론인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 카루안 님.”
“네가 이 일을 맡아 줘야겠다.”
로반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저에게 맡기셔도 괜찮겠습니까? 크로한 님께서 돌아오시면 크게 역정을 내실 텐데요?”
“그건 내가 책임지겠다. 깨끗하게 처리하도록! 대신, 한두 놈 정도는 산 채로 잡아 오도록 해라.”
“물론입니다. 흔적 자체를 지워 버리도록 하지요.”
대답이 끝나자마자 로반 주위에 또 한 번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그리고 나타날 때처럼 소리 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
거대한 눈사태가 넓은 산비탈을 휩쓸고 지나갔다.
“푸하아!”
두껍게 쌓인 눈을 뚫고 튀어 올라온 톰이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켁, 케켁!”
뒤이어 튀어나온 잭이 힘겹게 기침을 토하는 사이, 하나둘 기사들이 쌓인 눈바닥에서 튀어 올랐다.
하나같이 낭패를 당한 모습으로 눈 쌓인 벌판을 뒹구는 모양새가 평소와는 아주 다른 모습들이었다.
페르온은 그 기사들 사이에서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상한데?’
페르그란데 산맥으로 들어온 지 한 달이 넘었다. 그동안 여러 번 눈사태를 만났고, 그때마다 페르온은 눈사태를 미리 감지하고는 대비를 해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예감 같은 것이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는 그 뛰어난 감각 덕분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에서부터 소리, 발바닥을 타고 오르는 감각 등을 통해 눈사태를 예견했다.
하지만 이번 산사태는 그러지 못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눈사태가 일어난 직후 그 소리를 들은 페르온이 신속하게 반응을 한 덕분이었다.
‘아무런 징후도 없었다니…….’
지진이나 해일, 태풍 등의 재해가 일어나기 전 벌레들이나 짐승들이 먼저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감각으로 그 징후를 미리 파악하기 때문이다.
페르온이 눈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느낄 때 가장 많이 쓰는 감각은 청각이었다. 마치 물이 흐르는 듯한 미약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소리가 점점 커지고, 마침내 다른 기사들의 귀에 뿌드득, 뿌드득 하는 소리가 들리게 되면 어김없이 산더미 같은 눈이 산비탈 위에서 몰아쳐 왔다.
그 소리가 꼭 누군가 우는 소리 같다는 생각에 페르온은 눈이 운다고 말을 하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그 눈이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아주 갑작스럽게 눈이 몰아쳐 내려왔다. 그 탓에 대비하지 못한 페르온과 기사들은 눈 더미에 파묻힐 수밖에 없었다. 만일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면, 눈에 깔려 압사하거나 숨이 막혀 질식사했을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도 모든 기사들이 리카이엔 때문에 무식할 정도로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었던 덕분에 모두 눈을 파헤치고 밖으로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아무런 징후도 없이 눈사태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에 위화감이 느껴진다는 말은, 곧 인위적이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자신들을 노리고 일부러 만들어 낸 눈사태.
‘다시 나온 모양이군!’
페르온의 두 눈에 형형한 안광이 떠올랐다.
며칠 전, 눈사태에 깔려 죽은 두 명의 바이론인을 발견한 후 그 흔적을 쫓아 움직였다.
페르온의 그 선택이 옳았는지, 다음 날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인들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그것도 바이론인들이 쓴다던 마법과 비슷한 클리머스를 사용하는 자들이었다.
그동안 페르그란데 산맥을 헤매고 다닌 것이 적어도 헛수고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놈들을 만났다는 것이 꼭 근거지가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페르온으로서는 그것을 확인해야 했고, 그때부터 공격해 오는 놈들과의 치열한 싸움이 며칠 동안이나 이어졌다.
하지만 서로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놈들의 공격은 크게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선에서 행해졌고, 그 탓에 페르온과 기사들은 공격을 수월하게 막는 대신 놈들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그런데 그러던 것도 요 이틀간 뚝 끊어졌다. 놈들을 잡아야만 제대로 된 확인이 가능한데 그러지를 못하니 공격이 없어서 안타까운 상황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페르온은 포기하지 않았다. 처음 찾았던 흔적이 가리켰던 방향을 가늠해 지금 이곳까지 왔다. 그리고 방금의 눈사태로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기사들은 아까부터 페르온이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에 숨죽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페르온의 손이 움직였다. 미리 만들어 놓은 수신호. 아주 간단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복잡한 내용까지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겔드론이 3조 기사들을 데리고 왼쪽으로 움직이고, 잭이 5조 기사들과 함께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톰의 4조는 페르온과 함께 산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뿌드득, 뿌드득!
눈 밟는 소리가 신중하게 산비탈 타고 위쪽으로 올라갔다.
‘어디냐?’
페르온이 오감을 완전히 개방한 채 사방을 살폈다.
작은 숨소리, 미세한 마나의 움직임, 발에 밟힌 눈이 천천히 녹아내리는 소리. 그 어떤 것도 페르온의 감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약 50여 미터를 올라갔을 때쯤이었다.
“모두 피해!”
페르온의 일갈이 터져 나오는 시점에서 이미 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동시에 폭음과 함께, 조금 전까지만 해도 페르온과 4조의 기사들이 있던 자리가 완전히 터져 나갔다. 그리고 멀찍이 피한 페르온이 큰소리로 외쳤다.
“겔드론! 정면 10미터!”
파바바박!
쌓인 눈이 헤쳐지는 소리가 급격하게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겔드론을 선두로 한 십여 명의 기사들 비탈의 정면을 향해 뛰어오르고 있었다.
“흐아아아앗!”
우렁찬 기합과 함께 붕 뛰어오른 겔드론이 철창을 겨누며 온몸으로 떨어져 내렸다.
3조 기사들 역시 순식간에 흩어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반원의 대형을 만들어 겔드론과 함께 한 지점을 향해 쇄도했다.
콰콰콱, 파아악!
우악스러운 소리가 퍼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단단하게 쌓인 새하얀 눈바닥에서 시뻘건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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