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ron Blood Earl Riccianne

Chapter 4. Return of the Emperor (3)

“크흑, 큭!”

제국군이 물러나는 동시에 베르무크의 공격도 멈췄다. 하지만 테하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마법진을 풀지 않았다. 군대가 퇴각을 한다 해도, 베르무크의 공격이 날아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휘이이이!

가센 바람 소리와 함께 데론데스 요새를 중심으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제국군은 모두 후퇴했고, 베르무크의 추가 공격도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마이스터 테하스!”

테하스에게 인사를 건넨 사람은, 황혼의 기사단 단장인 파벤투스였다.

“마이스터 테하스와 술사들, 그리고 이 성벽이 없었다면 절대 놈들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데론데스 요새가 자리 잡은 곳은 흔히 하는 말로, 혼자서도 능히 백 명의 적을 맞이할 수 있을 정도의 지리적 조건이 좋은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요새라는 것은 그 실질적 역할 만큼, 존재 자체가 가지는 의미도 크다.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적의 발걸음을 한 번 늦출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성벽이라는 것이 존재했기에, 적의 공격을 해가 뜨면서부터 해가 지는 순간까지의 긴 시간 동안 막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일을 한 것은 역시나 테하스와 프리엘라, 그리고 백여 명의 술사들이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베르무크의 공격을 막아 내지 못했다면 요새는 이미 그 존재 자체가 세상에서 지워졌을 것이다.

“아니오. 병사들이 잘 버텨 주었…….”

“스, 스승님!”

“마이스터!”

테하스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고, 프리엘라와 파벤투스가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힘겹게 웃으며 이야기를 하던 테하스가 그대로 쓰러져 버린 탓이었다.

“휴우, 단순히 기절하신 것뿐이오.”

넘어지는 테하스를 받아 든 파벤투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프리엘라가 얼른 다가가 테하스를 부축하는 사이, 파벤투스가 저 멀리 보이는 제국군의 모습을 살피며 말했다.

“미리 계획했던 대로 오늘 밤에 요새를 버리고 후퇴합니다. 프리엘라 마법사는 마이스터 테하스와 술사들을 데리고 먼저 빠져나가시오.”

“네, 감사합니다.”

“흐음!”

리카이엔은 산보라도 나온 듯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느긋하게 걸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말을 타고 질주해도 좋을 정도로 넓고, 바닥을 평평하게 잘 닦여진 긴 통로였다. 빛이 들어오는 곳은 없었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벽에 걸려 있는 벽 등이 어두운 사각을 만들지 않는다. 다만, 일직선이 아니라 거의 5미터 간격으로 이리저리 휘어져 있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랄까.

“돈 많구나?”

단순한 칭찬인지 이죽거리는 건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애매한 뉘앙스로 말하는 리카이엔을 보며 황제는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누릴 수 있는 건 누리면서 사는 법이다.”

“뭐, 그렇기는 하지. 그래도 이건 좀 과하지 않냐?”

긴 통로를 따라 걷고 있는 이들은 선두의 리카이엔과 황제를 필두로 카이스, 조엘, 그리고 복면을 뒤집어쓴 아트룸 길드의 길드원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들이 걷고 있는 통로는, 그로니스 제국의 황궁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였다.

과거 리카이엔이 황제를 만나러 황궁으로 숨어 들어갔던 방법을 다시 이용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용하는 비밀 통로는 이전과는 달랐다. 지금의 통로는, 황족도 아닌 오직 황제만이 알고 있는 비밀 통로였다.

“그나저나 아무리 비밀 통로라도 이렇게 아무런 장치도 없으면 좀 허술한 것 아닌가?”

“훗, 그런 걱정은 말아라. 조금 있으면 알게 될 테니.”

“응?”

“이제 보이는군.”

황제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황제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던진 리카이엔이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호오, 이거 아예 미로를 만든 거냐?”

“그렇지.”

조금 앞쪽의 길이 네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리카이엔이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런 갈림길이 몇 개나 있냐?”

“백여 곳 정도 있지.”

“모든 갈림길이?”

“그래.”

“허!

“흐음, 그래서 길이 수시로 휘어져 있었던 거구만.”

밖이 보이지 않는 통로로 들어가 계속해서 이리저리 휘어진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결국 방향감을 상실하게 된다. 그렇게 방향감이 상실된 상태에서 이런 갈림길을 만나게 되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기가 막힌 방향감각을 가지고 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눈에 보이는 갈림길들 역시 이리저리 구부러져 있을 테니, 어느 길이 어느 쪽으로 이어질지 예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황제가 살짝 턱을 치켜들며 자랑하듯 말했다.

“기계로 만든 장치 같은 것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 녹이 슬거나 고장이 날 위험이 있지. 언제 사용하게 될지 알 수 없는 비밀 통로에 그런 불확실한 것을 놓을 수는 없지. 하지만, 이렇게 해 놓으면 아무리 긴 시간이 지나도 염려가 없지. 혹시 침입자가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모든 갈림길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따로 가기도 하면서 얽히고설켜서 절대 길을 찾을 수 없거든.”

“그래도 가장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으로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크고 복잡한 미로라 해도, 한쪽 벽면에 손을 대고 그 손을 절대 놓지 않고 무작정 걷기만 하면 결국은 출구를 찾을 수 있다. 다만 시간이 걸리는 것이 문제일 뿐.

하지만 황제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과연 그럴까?”

“응?”

“이 미로는, 아래와 위로 수직으로 뚫린 통로도 있거든. 아래로 내려가거나 위로 올라가면 자신이 붙들고 있는 벽의 방향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큭! 위아래로도 갈림길이 있다는 말이냐?”

“물론이지.”

“이런 미친!”

리카이엔이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꽤나 확실한 방법이다. 수직으로 뚫린 통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거나 올라간다면, 자신이 손을 대고 있던 벽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어쩐지 들어가는 입구가 황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싶었다. 완성하는데 몇 년이나 걸린 거냐?”

“모른다.”

“도대체 몇 사람이나 투입된 거냐?”

“내가 알 수는 없지.”

“이런 비밀 통로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을 살려 두지는 않았을 텐데?”

“뭐, 죄다 사형수들이었으니 상관없지.”

결국 리카이엔이 졌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번 일 끝나면, 이 통로는 폐쇄되고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야겠네?”

“그렇겠지.”

이미 한 번 알려진 비밀 통로를 그대로 두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있을 수 없었다.

“뭐, 니 마음대로 해라.”

더 말할 기운도 없다는 듯 리카이엔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일행들은 쉴 새 없이 갈림길을 만났고, 황제는 아무런 고민도 없이 방향을 잡았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중, 리카이엔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넌 이 길을 어떻게 찾는 거냐?”

“외웠지.”

“뭐?”

“황태자로 책봉되면, 황제는 황태자가 길을 완벽하게 외워서 절대 잊어버릴 수 없을 때까지 이곳으로 데리고 온다. 그리고 황제가 된 후에도 종종 내려와 기억을 확인하지. 번거롭기는 하지만 절대 누설되지 않을 확실한 방법이다.”

지도가 존재하거나 길을 찾는 법칙이 있다면 언젠가는 뚫릴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오직 머릿속에만 남겨 두게 되면 그만큼 안전했다.

잠시 기억을 더듬던 리카이엔이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제국의 역사에서 폐위된 황태자들 중, 살아남은 자가 없는 이유가 이거였군.”

“이 길을 알아야 할 사람은 오직 황제밖에 없으니까.”

“무서운 족속들.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게 이어져 내려온 게 신기한 일이구만.”

역대 황제 중 한 명이라도 이곳의 길을 잃어버렸거나, 제대로 알려 주지 못하고 급사했다면 이 비밀 통로의 존재는 영원히 묻혀졌을 것이다.

그 말에는 황제 역시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해도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그렇게 비밀을 지켜 왔기 때문에 이곳이 아직까지도 건재한 거다.”

“그렇기는 하네.”

리카이엔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일행들은 쉬지 않고 걸었다. 황제는 왼쪽 갈림길, 오른쪽 갈림길을 수도 없이 오가며 길을 찾았다. 어떤 길은 내리막도 있었고 오르막도 있었으며, 황제가 말한 대로 수직으로 뚫려 있는 길도 있었다.

“후우, 징그럽군.”

한참을 말없이 걷던 리카이엔이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 미로는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는 리카이엔도 질리게 만들 정도로 대단하기는 했다.

황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만 투덜거려라. 이제 다 왔다.”

“음?”

그러고 보니 주변의 통로들이 그냥 흙이나 돌을 파서 만든 것이 아니라, 상하좌우 모두가 벽돌로 되어 있었다. 즉, 인공의 건축물 안으로 들어섰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인공의 건축물은 다름 아닌 황궁.

황제가 위쪽으로 뚫린 길의 사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올라가서 문을 열면 내 침대 밑이 나온다.”

“호오, 그래? 크크크, 원래 애들이 숨을 때 침대 밑으로 숨는 법인데.”

리카이엔이 씨익 웃는 사이, 황제가 천천히 롱소드를 뽑아 들었다.

리카이엔이 등에 빗겨 맨 철창을 툭툭 친 후 사다리를 붙잡았다.

“자, 그럼 가 볼까?”

콰앙!

“크아아아악!”

철창이 한 번 호선을 그릴 때마다 비명과 피가 난무한다.

“막아라!”

황실 근위대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새하얀 아지랑이가 맺힌 롱소드를 들고 우르르 달려온다. 하지만 리카이엔의 표정에는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타앗!”

가벼운 기합과 함께 땅을 박찬 리카이엔의 철창이, 쏘아 낸 화살처럼 일직선으로 공간을 갈랐다. 한 호흡으로 거리를 일축한 리카이엔의 철창은 어느새 기사들의 갑옷을 갈라내고 살점을 베었다.

또 다시 비명이 난무하고 사방으로 피가 튄다.

“젠장, 황궁 공사를 다시 해야 하나?”

황제가 들으라는 듯 투덜거렸다. 그들이 걸어온 복도 바닥 곳곳에 리카이엔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탓이었다. 모두, 리카이엔이 진각을 밟으며 만들어 낸 자국이다.

“뭐, 이것도 기념인데 그냥 놔두시지?”

어느 순간부터인지 모르지만, 카이스도 황제를 향해 반말을 하고 있었다. 리카이엔 때문에 면역이 됐는지 황제는 그런 반말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림없는 소리. 황궁의 복도에 저런 놈의 발자국을 남겨 놓을 수는 없지.”

“크크큭!”

“그나저나…… 크흠!”

뭔가 말을 하려던 황제가 흠칫하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저런 놈을 잡으려고 했다는 사실에, 놀란 마음이 저도 모르게 밖으로 나올 뻔한 것이다.

그사이 복도에는 앞을 막던 기사들의 시체가 복도 좌우에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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