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ron Blood Earl Riccianne

Chapter 5. Time Limit (2)

콰드드득, 콰르르르!

잔해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크고 작은 바윗덩이들이 하나둘 구덩이로 굴러 들어가며, 그 거대한 구멍을 메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점점 짙어지는 흙먼지에 숨쉬기가 힘들다고 느낀 병사들이 급히 뒤로 물러서려는 찰나.

휘이이잉!

등 뒤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이 짙게 피어오른 흙먼지를 날려 버렸다. 그리고 병사들의 눈앞에 드러난 광경.

모두들 말을 잇지 못했다. 그 거대한 요새의 잔해를 조금도 남김없이 거대한 구덩이 안으로 쓸어 넣은 것이었다. 덕분에 땅에 생긴 구덩이는 절반 이상 메워졌고, 성병의 잔해는 말끔하게 치워졌다.

그래도 여전히 문제는 있었다. 구덩이를 메우기는 했어도, 잔해들을 쓸어 담은 것이기 때문에 깨진 바윗덩이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수레가 지나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베르무크의 행동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저, 저기!”

한 병사가 갑자기 하늘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하늘 위로 향했고, 그런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하면서도 네모반듯한 덩어리.

베르무크가 만들어 낸 검은 안개로 만들어진 덩어리였다.

그 검은 안개의 덩어리가 갑자기 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휘이이잉, 쾅!

검은 안개의 덩어리는, 마치 망치로 내려치듯 구덩이를 메우고 있는 잔해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쾅, 콰앙!

쉴 새 없이 울리는 굉음에 병사들이 참지 못하고 황급히 귀를 막을 때 쯤, 베르무크가 들어 올렸던 손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방금까지 구덩이를 두드려 대던 검은 덩어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후우~”

긴 한숨과 함께 뒤로 돌아선 베르무크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세피테론 공작을 향해 말했다.

“길을 만들어라.”

“네? 아! 알겠습니다!”

구덩이를 메우고 있던 거대한 잔해들을, 베르무크가 두드려 어느 정도 평탄한 상태까지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여전히 수레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흙을 퍼 담아 울퉁불퉁한 곳을 완전히 메워 평탄하게 만들고, 구덩이의 가장자리를 깎아 경사를 완만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 작업이 끝나면 거대했던 구덩이는 내리막이었다가 다시 오르막으로 바뀌는 길이 되는 것이다.

병장기를 내려놓은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간을 벌겠다는 수작인가?”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온 베르무크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진군이 늦춰지는 동안, 놈들은 전열을 가다듬고 제대로 전투를 치를 준비를 할 것이다.

“오냐, 제대로 한 번 붙어 봐야겠…….”

그때였다.

“마스터!”

천막 밖에서 바록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또 무슨 일이냐!”

베르무크가 신경질적으로 외치는 순간, 천막 안으로 뛰어 들어온 바록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황제가 황궁을 탈환했다고 합니다!”

“뭣이!”

두두두두!

2기의 인마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고 있었다. 리카이엔과 카이스였다.

“지금쯤이면 대충 시작됐겠는데?”

카이스의 물음에 리카이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갈등하고 있을 거다.”

“그렇겠지. 그러니까 이제 말해 봐라.”

“뭘?”

“왜 그랬는지.”

카이스의 물음에 리카이엔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모르냐?”

“이 자식, 지가 안 가르쳐 줘 놓고서는!”

“안 가르쳐 줘도 알 줄 알았지.”

“귀찮아서 생각 안 해 봤다. 그러니 이제 말해 봐.”

카이스가 말하는 것은 베르무크에 관한 것이었다. 정확하게는 베르무크를 상대할 계획에 대한 부분.

카이스는 지금 데론데스 요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런 귀찮은 일을 할 필요가 있었는지 아직도 의문이었다.

리카이엔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말해 주마. 그래 뭐가 그렇게 궁금하냐?”

“베르무크가 제국에서 황제를 찾는 동안, 우리는 브렌 왕국에서의 일을 끝내려고 한다는 건 알겠다. 그리고 병력을 효율적으로 쓰려고 하는 것도 알겠다.”

리카이엔과 폴덴바인 백작, 그리고 황제의 병력을 모두 모으면 15만 정도였다. 그리고 써클루스에 포섭된 병력들이 제국과 브렌 왕국을 합쳐서 25만이었다.

1만 5천 대 2만 5천도 아니고, 15만 대 25만이면 엄청난 병력 차이였다. 억세게 운이 좋거나, 전술의 천재가 아니라면 어지간해서는 뒤집지 못할 정도의 차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리카이엔은 자신들의 병력을 모아, 나뉘어 있는 적의 병력을 따로 상대하려고 한 것이었다.

써클루스에 포섭된 이들 중 브렌 왕국에 있는 영주들의 병력이 10만 정도. 리카이엔 측의 15만 병력을 모으고, 그 안에서 기습적으로 각개격파를 한다면 적은 손실로도 끝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것을 위해 리카이엔은 황제를 움직이고 데론데스 요새를 무너트리는 등의 작업을 했던 것이었다. 요새를 무너트려 적의 진입을 늦추고 그사이에 브렌 왕국을 정리할 계획인 것이다.

카이스는 분명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 정도면 다 아는 건데? 더 궁금할 게 있냐?”

리카이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있지.”

“뭐냐?”

“그러니까 방금 말한 건 다 알겠는데 말이다……. 굳이 그렇게 번거로운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느냔 말이다.”

“뭐 대단한 게 있는 건 아니고…… 음, 이건 저쪽 입장으로 한 번 생각해 봐라.”

“어떻게?”

“니가 베르무크 입장이 되어 봐. 브렌 왕국 안에서는 리카이엔이라는 놈이 자기 병력들을 죽이고 있는데 데론데스 요새가 무너지는 바람에 길이 막혔어. 길을 복구시키는 건 가능하지만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어. 마음이 좀 조급하겠지?”

카이스가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리카이엔은 이야기를 이었다.

“그런 때에 하필이면 소식을 들었어. 황제가 황궁을 탈환했다는 거야. 그러면 당연히 두 일을 비교하겠지? 브렌 왕국에 있는 리카이엔을 치러 갈 것인가, 황궁에 있는 황제를 잡으러 갈 것인가?”

병력을 잃는 것은 분명 심각한 일이다. 하지만 그 병력을 구하는 것보다는 황제를 제거하는 것이 베르무크에게는 더 이익이었다. 제국 내에서 자신에게 반항하는 자들의 구심점이 황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역으로 생각하면, 황제가 없다면 적들을 구심점을 잃게 되고, 베르무크는 훨씬 더 수월하게 계획을 진행시킬 수 있다는 뜻이었다.

카이스가 갑갑한 표정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야 당연히 황제를 잡으러 가지. 지금 묻는 건 그게 아니잖아.”

“그럼?”

“둘 중 한 가지만 해도 될 걸, 왜 번거롭게 둘 다 진행시키느냔 말이다. 데론데스 요새를 무너트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다. 데론데스 요새 다음에는 세르오넨 요새가 있으니까. 적어도 열흘에서 보름은 시간을 벌겠지. 그리고 브렌 왕국 내에서는 이미 놈들을 각개격파 하고 있으니 그 정도면 충분한 시간이야. 황제도 마찬가지지. 황제는 자리를 뜰 것이고, 베르무크는 쫓아다닐 거다. 도망치고 쫓기면서 버는 시간도 우리가 브렌 왕국을 정리하는데 충분해. 그러냐 안 그러냐?”

“그렇겠지.”

“그런데 왜 둘 다한 거냐?”

카이스는 리카이엔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항상 좀 더 뒤의 일을 생각하고, 신중하게 일을 준비하는 성격이기는 하지만, 일단 일이 터지고 나면 신중하고 느리게 움직이기 보다는 조금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빠르게 처리하는 편이었다. 이번처럼 신중을 기하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카이스의 물음에 리카이엔이 아까 했던 말을 되뇌었다.

“그러니까 그놈들 입장으로 생각해 봐라. 데론데스 요새 때문에 막힌 길을 뚫는 데는 대략 넉넉하게 잡아도 열흘 정도다. 그 시간이면 황제를 잡는 것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 거야. 그렇지?”

“그래.”

“그러니 열흘 안에 황제를 잡아서 브렌 왕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시간 안에 황제가 안 잡히면?”

“뭐, 마음이 급해지겠지. 흐음, 그러니까 베르무크 그놈의 평정심을 흔들어 놓으려는 생각이냐?”

리카이엔이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또 있어.”

“또?”

“브렌 왕국에 있는 놈들 입장에서는 어떻겠냐? 자기들을 도우러 올 베르무크가 길이 막혀서 못 오고 있어. 그래도 한 열흘이면 길이 뚫릴 거라는 희망은 남아 있지. 그런데 정작 열흘이 지나 길이 뚫렸는데도, 베르무크가 황제를 잡겠다고 오지 않으면?”

카이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놈들도 마음이 급하고 불안해지겠지. 흐음, 그러니까 적들의 심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던 거냐?”

“원래는 있을 리가 없는 제한 시간을 만들어 놓는 거지. 사람이라는 게 이상하게도, 언제까지 뭔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괜히 마음이 조급해지고, 그 시간 안에 못하면 불안해지거든.”

카이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많이 위험한 모양이구나.”

“뭐가?”

“니가 그렇게 번거로운 일까지 하면서 놈들을 뒤흔들려는 건, 그만큼 확실하게 이기고 싶다는 뜻이잖아. 이건 베르무크라는 놈이 아주 위험하고 무서운 놈이라는 반증이지.”

리카이엔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할망구가 하는 말 못 들었냐?”

“들었지. 흠, 놈이 가지고 있다는 그 힘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군.”

카이스가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말하자, 리카이엔이 또 한 번 피식 웃어 보였다.

“그 할망구 어지간해서는 그런 소리 잘 안 하거든.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왜? 방법이라도 있냐?”

“크크, 이 형님이 계시잖냐? 내가 다 처리해 주마.”

“이게 어디서 안 하던 허풍이야?”

“늦군.”

베르무크의 얼굴에 답답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가 황도 크벤티움으로 들어온 것은 어제였다. 하지만 데론데스 요새에서 급하게 돌아온 베르무크를 맞이한 것은, 사람이라고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썰렁하기 짝이 없는 텅 빈 황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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