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aac

Unexpected (3)

“혹시 작위 포기 절차를 아십니까?”

“응? 그냥 안 한다고 하면 되는 거 아냐?”

아이작의 물음에 칼덴은 한숨을 푹 내쉬곤 말했다.

“계승 귀족의 정당한 서열 1위 후계자가 작위 계승을 포기할 경우, 당사자는 가벨린 귀족원에 백작급 이상 귀족이 세 명 이상 모인 자리에서 정식으로 작위 포기 선언을 하고 계승 포기 각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가기 싫은데 대리인을 쓴다든가 하면 되는 거 아냐?”

“작위를 차지하기 위해 워낙 지저분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서요. 계승 귀족의 수가 줄어든 이유 중에 하나죠. 그래서 타의가 아닌 본의로 포기했다는 걸 입증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깟 작위 하나가 뭐 중요하다고 그렇게들 목숨 걸고 싸우는지, 원…….”

무지몽매한 자들을 바라보는 고결한 현자처럼 혀를 차는 아이작의 태도에, 사람들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 뭔가 울컥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포기 각서 작성이 끝나면 영지로 가서 작위 계승식에 참석해야 합니다.”

“뭐야! 포기만 하면 됐지, 왜 가야 한다는 거야!”

“마지막 기회죠. 정통 작위 계승식은 당사자는 물론이고 귀빈으로 한 단계 높은 작위의 귀족과 센트럴 요원, 군 사령관급이 필수로 참석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반대나 번복을 하지 않는 이상 계승권은 완전히 넘어갑니다. 그리고 계승식이 끝난 뒤에 센트럴 요원이 협박이나 타의가 아닌 완전한 자의로 작위를 포기했는지 다시 한 번 묻습니다.”

“그런데 협박당하고 있음 센트럴 요원한테도 거짓말할 수밖에 없는 거 아냐?”

“협박에 의한 결정이라고 하면 즉시 센트럴 요원들이 움직입니다. 아니라고 해도 차후 협박, 즉 타의에 의한 포기였다는 게 밝혀지면 해당 가문 자체가 지워져 버립니다. 작위 계승식에 참석했던 귀족들과 군사령관의 가문을 속이고 모욕한 게 되니까 가만있을 리 없죠. 거기에 센트럴이 손들어 주면 공작가라도 못 버팁니다. 아, 펜들턴 공작가는 빼고요.”

“나름 치밀하군.”

“그만큼 작위 계승식은 민감한 문제입니다. 해결될 때까지 계속 괴롭힐걸요?”

“그냥 안 간다고 버티면?”

“귀족원이 관여하는 사항입니다. 친절하게 끌고 가겠죠.”

명예에 목숨 거는 귀족들이 모인 단체다. 작위 계승 문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발 걸치는 귀족원이니, 작위 포기 선언만 한 채 안 나타나는 사태는 귀족원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다. 가만두고 볼 리 없다.

“아, 젠장. 그쪽 놈들은 얼굴도 보기 싫은데…….”

“좋게 생각하면 더 이상 밀로스 백작가나 론다트 남작가가 귀찮게 할 일은 없다는 겁니다.”

“생각해 보니 그렇군.”

칼덴의 말에 피식 미소 지은 아이작은 새 담배를 입에 물곤 불을 붙인 뒤 한 모금 연기를 깊게 빨았다가 내뱉었다.

‘우연으로 봐야 하나?’

현재 아이작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는 뉴포트시다. 이곳에만 딱 붙어 있으면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다. 임기가 끝난 뒤가 문제였지만 나름 대비도 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문제가 터져 나왔다. 그것도 무조건 뉴포트시를 벗어나야만 하는 상황. 과연 이걸 우연으로만 봐야 할까?

‘이걸로 확실해졌군.’

광산에서 벗어난 뒤부터 풀리지 않던 의문. 그저 가설 중 하나였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확실한 거 같았다. 여전히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뭐, 이렇게까지 초대를 하는데 갈 수밖에 없지. 준비해.”

아이작이 수긍하는 듯하자 칼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 빠른 시일 내에 호위대 구성을 완료하겠습니다.”

“호위대라니?”

“예? 당연히 호위대가 있어야죠. 설마 혼자 가려고 그러셨던 겁니까?”

“굳이 호위대까지 필요 있을까?”

“……그건 그러네요.”

반박할 수가 없다. 아이작이 착용한 돈지랄 방어구의 성능은 광산 매몰 사건으로 여실히 증명됐다. 무너진 광산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게 방어구 덕분이란 소문이 돌면서 한때 같은 걸 구입할 수 없냐는 문의가 폭증했고, 성능과 제작 단가가 알려지자 돈지랄한 게 아까워 죽지도 못한다란 소리가 퍼질 정도였다.

“그래서 호위가 더 필요할 겁니다. 선배님이 걸친 코트의 가격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 혼자 돌아다닌다면 일단 지르고 보는 놈들이 많을 걸요?”

아이작은 걸어 다니는 보물 창고다. 완벽한 졸부 패션이라 이목을 숨길 수도 없다. 눈앞에 거금이 돌아다니면 파리가 꼬인다. 불속에 뛰어드는 불나방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에이, 그래도 설마 컬리지 출신을 건들 미친놈이 있을까? 여기서도 못 건드렸는데?”

아이작의 말에 구역장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구역장들이 아이작을 건드리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컬리지 출신이라는 점이었으니까. 그때부터 인생이 꼬인 거다.

“그러고 보니 컬리지 선배님들이 나 인정 못 한다고 그러지 않았냐? 그건 어떻게 결정 났지?”

아이작은 문득 영지전이 걸렸을 때 추가타로 들어왔던 문제를 떠올리고 묻자 다들 뜬금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냥 흐지부지 끝났습니다. 아무리 컬리지 분들이 일치단결했다 해도 황제 폐하께서 직접 황명을 내리신 일을 수행하는데, 더 이상 말 꺼낼 수 없으니까 조용히 묻혔죠.”

“그럼 아직까진 난 컬리지 출신이란 거 아냐? 그런데도 나를 건들 놈이 있으려나?”

아이작의 말에 사람들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작을 보호하는 가장 큰 방패는 컬리지다. 아이작에게 악의만 드러내도 센트럴이 끼어들 수 있다.

방어구라도 없으면 미친 척하고 건들인 뒤 모른 척하면 되지만 아직 컬리지란 방패가 있으니 센트럴이 무서워서라도 아이작을 건드리진 못한다.

“그나저나 상황이 좀 애매한데? 크네트랑 레이샤는 컬리지에 갔고 리즐리는 노스베어족 데리고 고향에 갔으니까 남는 게 없군. 귀찮은 일을 대신해 줄 사람은 필요할 거 같은데, 누가 따라갈래?”

“엘프족에서 차출하는 게…….”

“엘프를 데려가라고? 나랑 엘프가 같이 여행하면 참 재미있겠다. 그치?”

“…….”

할 말이 없다. 크네트와 레이샤는 어차피 제외 대상이고 노스베어족이야 이미 부재중이니까 어쩔 수 없다 해도, 엘프는 데려갈 수 있어도 데려가선 안 된다. 안 그래도 온갖 사고를 쳐 대는 종족인데 거기에 아이작이 끼어서 부채질해 버리면 가벨린까지 가는 데만 해도 무슨 전설이 펼쳐질지 몰랐다. 아니, 그 전에 가벨린까지 중간에 안 새고 무사히 갈 수만 있어도 기적인 거다.

결국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한 명이 나서야 한다는 건데…….

부르르!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다들 한차례 몸을 떨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단둘이 그 오랜 기간 여행을 해야 하다니…… 꿈에 나올까 두려운 상상이 현실로 눈앞에 다가왔다.

“그나저나 누굴 데려간다…….”

사람들의 반응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던 아이작이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자 다들 시선을 피하기 급급했다.

“네가 갈래?”

아이작의 제의에 칼덴은 기겁을 하며 손사래 쳤다.

“제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서 그러십니까!”

“그럼 코드넬 너는?”

“제가 가면 돈 관리는 누가 하고요!”

칼덴과 코드넬 말고도 아이작과 시선이 마주치는 실무진들이 전부 변명을 늘어놓으며 은근슬쩍 뒤로 물러났다.

“혼자 가면 심심한데…….”

반응이 괘씸해 놀렸을 뿐이지, 실제로 수행원을 데려갈 생각은 없었다. 다들 업무가 산더미처럼 많은 것도 이유 중 하나지만, 재수 없이 옆에 있었단 이유만으로 죽어 나갈 수 있으니까. 그때 트랜터가 못 먹을 거라도 주워 먹은 듯 오만상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왔다.

“응? 뭐야? 네가 가려고?”

신기하단 시선으로 바라보니 트랜터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죠. 누구 한 명은 따라가야 하니, 저도 이참에 가족들 얼굴이나 한번 봐야겠습니다.”

“너, 가벨린 출신이었냐?”

아이작의 물음에 트랜터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노려보며 말했다.

“제 이력서 안 읽으셨습니까?”

“이력서도 있었어?”

“……전 다넨트시 출신입니다.”

“거기가 어딘데?”

“아, 진짜! 적어도 자기 고향의 도시쯤은 알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오! 너 론다트 남작령 출신이었냐?”

벌컥 성을 내는 트랜터를 향해 되레 신기하다는 듯 말하는 아이작을 보더니 화낼 힘도 없는지 트랜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 트랜터를 바라보는 아이작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설마 했는데 이렇게 딱딱 알맞게 튀어나와 주시니 확신할 수밖에 없다.

“그럼 다들 일 보고 트랜터는 출발한 준비해.”

아이작의 말에 사람들은 살았다는 듯 우르르 옥상 아래로 내려갔다.

더 있어 봤자 재수 없으면 같이 끌려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언제쯤 출발하실 겁니까?”

“리블리아 그 아가씨가 가벨린에서 돌아오려면 며칠 정도 걸리지?”

“이미 복귀 중이니 한 사흘 정도 걸리실 겁니다.”

“그럼 그 아가씨가 도착하는 대로 바로 출발하자고. 도시에 행정관이랑 시장이 전부 부재중일 수는 없잖아.”

“절 마중 나온 건 아닐 테고, 바로 출발하시는 건가요?”

“나도 가기는 싫은데 절차라는 게 상당히 복잡하더라고.”

뉴포트시에 도착한 대운하를 관통하는 정기 운행 편에서 내린 리블리아는 이미 연락을 받았는지, 자신이 내린 배에 타기 위해 실무진들과 함께 우르르 선착장에 몰려 있는 아이작의 몰골을 보고 머리가 아픈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데 설마 그 꼴을 하고 가벨린에 가려는 건가요?”

“이게 뭐 어때서?”

아이작은 아는 사람이라도 감히 곁에 다가가는 걸 거부하게 만드는 돈질로 무장한 졸부 패션을 뻔뻔하게 뽐냈다. 아이작은 배에 탑승하기 위해 리블리아를 지나쳐 걸어가며 말했다.

“그럼 여기서 이별이군.”

“마치 다시는 못 볼 거처럼 말하는군요.”

“나름 대비는 했지만 상대가 워낙 만만치 않아서 말이야.”

“계승을 포기하러 가는데 밀로스 백작가나 론다트 남작가가 당신에게 위해를 가할 이유는 없을 텐데요?”

“뭐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럼 도시 말아먹지 말고 잘 지켜.”

“누, 누가 말아먹는다는 거예요!”

벌컥 성을 내는 리블리아를 뒤로하고 아이작은 낄낄거리며 실무진들의 배웅 속에 트랜터와 함께 배에 올랐고, 배는 곧 출발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블리아는 냉정하게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배 안으로 사라진 아이작을 노려보듯 배를 노려보았다.

생각해 보니 정말 괘씸하기는 했다. 계승 귀족의 작위는 큰 특권이면서 굴레이기도 했다. 뭘 하건 계승 귀족이란 신분이 따라붙는다. 잘하면 계승 귀족인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못하면 계승 귀족이니 그 정도만 해도 상관없겠지 등등. 그 소리 듣기 싫어 피나는 노력을 거듭해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했을 정도다. 그런데 아이작은 누구나 원하며 시샘하는 특권이자 굴레를 스스로 걷어찼다.

“이 인간 혹시 캠퍼스에서 말했던 것처럼 내 가신이 되는 게 싫어서 작위 포기한 거 아냐?”

리블리아가 중얼거리다 말도 안 된다는 듯 피식 웃었지만, 진실을 알고 있는 실무진들은 속으로 움찔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