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aac

Surrender (5)

“대체 어떻게 하면 리즐리 씨가 자리를 비운 지 딱 사흘 만에 이렇게 될 수 있는 거지?”

아이작을 찾아 옥상에 올라온 리블리아는 눈앞의 참상에 혈압이 솟구쳐 올랐다.

깨진 집기들이 주방 한쪽에 산처럼 쌓여 있고 다른 쪽은 거뭇한 그을음이 생긴 게 뭘 잔뜩 태워먹은 모양새다.

거기에 아이작의 침대 주변은 과자 부스러기와 먹다 흘린 꿀들이 뭉쳐 찐득한 게 눈에 보일 정도고, 널브러진 수십 병의 빈 술병을 친구 삼아 뻗어 있는 레이샤와 크네트, 에어 볼에 들어간 채 잠든 줄리아와 침대가 아닌 소파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아이작의 모습에 잔소리가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빨리 치우고 청소 시작해! 어서!”

깐깐한 기숙사 사감처럼 숙취에 골골거리는 레이샤를 깨우고 좀 더 잔다고 칭얼거리는 크네트와 줄리아를 다그치며 리블리아는 옥상 청소를 시키기 시작했다.

와장창창!

“크네트, 그걸 밑으로 던져 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하지 마, 레이샤!”

한곳에 모아 놓은 쓰레기를 가지고 내려가기 귀찮은지 크네트는 건물 아래로 던져 버렸고 레이샤가 그걸 따라 한다고 빈 병들을 던지려다 리블리아에게 제지당했다.

소란스러움에 슬그머니 일어나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던 아이작은 레이샤를 혼내던 리블리아의 살벌한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저도 모르게 냉큼 눈을 감고 도로 누우며 자는 척했다.

“……지금 장난합니까?”

깊은 빡 침이 느껴지는 리블리아의 목소리에 아이작은 방금 잠에서 깬 것처럼 기지개를 펴며 몸을 일으켰다.

“아함. 잘 잤다. 음? 언제 왔냐?”

“이익! ……후. 청소만 끝나면 차라도 한잔 가져오겠습니다. 그동안 좀 씻으세요.”

아이작의 뻔뻔함에 한바탕 쏟아 낼 것만 같던 리블리아는 한숨과 함께 털어 내고는 다시 화살을 크네트와 레이샤에게로 돌렸다.

“와! 너무해! 어째서 선배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예요!”

“아이작도 청소해야 해!”

크네트와 레이샤가 억울함을 가득 담아 항의하자 리블리아는 살벌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찍어 눌렀다.

“억울하면 니들도 내 상관 하든가.”

“…….”

깨갱. 단번에 크네트와 레이샤의 반발을 잠재운 리블리아는 두 사람에게 청소를 시키곤 줄리아를 씻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쩐 일이냐?”

아이작의 물음에 리블리아른 힐긋 아이작을 노려본 후 줄리아를 세수시키며 말했다.

“후작가가 항복했습니다.”

“그래? 오래 걸렸군.”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아이작의 태도에 리블리아의 시선이 날카로워졌고 따끔따끔한 리블리아의 눈초리에 아이작은 한숨을 내쉬며 귀찮다는 듯 바라보았다.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아이작의 물음에 줄리아의 얼굴을 수선으로 닦이고 엉덩이를 툭 쳐 청소하는 시늉을 하며 깨작거리는 크네트와 레이샤에게로 보낸 리블리아가 말했다.

“용병단원들의 죽음. 국장님께서 지시하신 일입니까?”

그 물음에 아이작은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가서 죽으라고 시킨 건 아니지만, 따지고 보면 내가 지시한 게 되겠지. 용병단장보고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으니까.”

“하아, 그걸 순순히 따랐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음? 반응이 이상하다. 막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도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등등 따져야 하는 거 아냐?”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자 아이작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 모습에 리블리아가 오히려 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검을 쥔다는 건 죽음과 함께하는 걸 각오했다는 뜻입니다. 제가 놀라는 건 명예나 긍지보단 금전을 택한 용병이 그런 식으로 죽었다는 겁니다.”

“그런가? 뭐 그 돈 때문에 죽었으니 진짜 용병이라 할 만하지.”

“돈 때문에요?”

“일단 내 도시의 시민들이니까. 가족들은 내가 돌봐주기로 했어. 론다트 남작가의 공신 대우로 매달 1천 기가의 보조금 지급하고 자손 삼 대까지 학비와 의료비 무료면 적당하겠지? 거기에 돈을 노리고 접근하는 잡것들도 처리해 주고 범죄를 저지를 경우에도 정상 참작을 해 주기로 했지.”

“…….”

요즘 형편이 좀 나아졌다지만 아직까진 빈민들의 비율이 압도적인 뉴포트 시다. 그런데 자기 한 목숨 사라지면 남은 가족들이 평생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다면?

거기다 꼬여드는 파리까지 알아서 차단해 주고 귀족 가문의 공신 대우면 주변에서 건드릴 자들도 없으니 서로 죽겠다고 아우성 쳐도 당연한 일이다.

“참고로 말하지만 난 진짜 죽으라고 한 적 없다. 용병단장인 그 뭐더라? 이름이 기억 안 나는군. 아무튼 그 단장 놈이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고 큰소리 뻥뻥 치기에 한번 맡겨 봤는데 말한 대로 간단하게 해결한 것뿐이야.”

애써 변명하는 아이작의 말에 리블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가 신경 쓸 일이 아닌 것 같군요. 그보다 국장님의 전용 비행선이 완성됐다고 합니다.”

“벌써? 하긴, 완성 단계에 있는 물건이라고 했었으니까. 타이밍이 좋은데. 비행선은 신년 행사 때 공개하는 걸로 하지.”

“그런데 전용선은 언제 주문한 겁니까?”

“그냥 제작 중단된 황제 전용 비행선을 내가 사기로 했어.”

“설마 그 전대 황제 폐하께서 만들다 중지시킨 그 비행선을 말하는 겁니까?”

“음? 알고 있어?”

“…….”

알다마다, 센트럴 요원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본 도시 전설 급 이야기다.

작전국과 감시국의 마찰이 심해져 황제와 최고위원회 이종족 간의 감정싸움으로 번지자 뿔이 난 황제가 삐뚤어질 거라 선언하곤 폭군 놀이를 한다며 제작을 지시한 물건들 중 하나.

오직 화려함과 극상의 사치만을 목적으로 제작된 물건들. 보안 유지를 위해 공개가 금지되어 있어 누구 하나 보여 줄 사람도 없는데 황제의 위엄을 보여야 한다며 제국의 예산과 황실 자금은 물론 작전국의 예산마저 쏟아부었다.

최고위원회에서 저러다 말겠지 하고 콧방귀를 뀌다 진짜 막나가는 황제의 태도에 제국이 파산할 지경에 이르자 당황해 어르고 달랜다고 몇 가지 이권과 기술 공개를 허가하고서야 겨우 진정을 시킬 수 있었다.

두 번 다시 이딴 일은 벌리지 않겠다는 계약서에 사인함과 동시에 다른 물건들은 전부 재활용에 들어갔지만 비행선만은 딱히 재활용할 만한 거리도 없어 지금껏 창고 한구석에 처박혀 있다는 것이 도시 전설의 골자였다.

그런 비행선이 떡하니 아이작의 손에 굴러떨어졌단다. 당시 제국 최고의 장인들이 총동원되고 제국이 휘청거릴 정도의 예산이 들어간 비행선이 말이다.

조각내 가져다 팔아도 운용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라 제국의 비상금이라 불리며 가격을 매길 수도 없는 물건이 아이작에게 팔렸다고 생각하니, 리블리아는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코드넬 씨가 울겠네요.”

“걱정하지 마, 할부로 샀으니까.”

태연한 아이작의 대꾸에 리블리아가 속으로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하고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쉴 때 칼덴이 바쁜 발걸음으로 나타났다.

“아! 마침 계셨군요.”

“무슨 일이냐?”

“방금 중앙 행정청의 동기랑 통신하고 오는 길인데요, 행정청 내에서 묘한 얘기가 도는 모양입니다.”

“묘한 얘기?

“예. 볼프강이 아닌 아이작 님이 공작 위를 노리는 게 아닌가 하는 소문이 퍼지고 있답니다.”

“뭔 개소리냐?”

칼덴의 말에 아이작은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고 리블리아도 피식 웃을 정도였다. 하지만 칼덴은 제법 진지했다.

“그게 웃고 넘길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도 처음엔 똑같이 반응했는데 듣고 보니 그럴싸해서요.”

“자세하게 풀어 봐.”

“별거 없습니다, 그냥 아이작 님은 볼프강을 도와주는 척하며 이용만 할 뿐이고 진정한 목적은 스스로가 공작 위에 오르려 한다는 겁니다.”

“공작 위가 국장보다 높은 것도 아닌데 내가 왜 해?”

“세상 사람들은 그걸 모르죠. 거기다 끼워 맞추는 게 아주 예술 급입니다.”

끼어들 이유가 없는 볼프강 백작가와 리히텐 후작가의 전쟁에 개입해 도와주는 척하며 뒤로는 양 가문의 권리들을 하나씩 챙겨 먹으며 쌍방의 피해를 극대화시켰다.

그러다 공멸이란 최악의 형태로 전쟁이 끝나자마자 냉큼 백작가의 유일한 후계자들을 확보했고 후작가의 후계자에겐 변제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채무를 안겼다.

채무를 빌미로 후작가 영지 전체를 꿀꺽 삼키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인지라 심한 반발이 예상되어 어린아이들만 남은 백작가를 노렸으나 리블리아 펜들턴이 개입해 음모를 봉쇄하며 사정을 공개하자, 거센 여론의 성화에 부딪친 아이작은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며 기회를 노리던 아이작에게 예정됐던 작위가 수여되고 후작가의 전 후계자가 난동을 부린 걸 빌미로 영지전을 선포, 전쟁 여력이 없는 후작가와 가신들은 아이작이 제안한 재산을 보존한 채의 이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잠깐만.”

그렇게 후작가의 영지를 소유하는 데 성공했으니 남은 건 백작가의 영지뿐이다까지 설명하던 칼덴은 아이작이 손을 들며 제지하자 입을 다물었고 아이작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게 뭐가 그럴듯하다는 거야? 내가 일부러 후작가 영지를 먹으려고 했다고? 뭐 맞기는 하지만 내가 가지려고 그런 건 아니잖아.”

“그래서 사람들이 믿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어떤 미친놈이 피 한 방울 안 섞인 타인을 위해 그 정도까지 해 줄 수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 미친놈이 나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니까요.”

칼덴의 태연한 대꾸에 아이작은 구시렁거리며 물고 있던 담배를 이빨로 잘근잘근 씹었다.

그런 아이작의 눈치를 살피며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칼덴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부터 몇 놈이 떠들던 음모론이었을 뿐인데 요 근래 점점 힘을 얻고 있답니다.”

“어째서? 작전국 놈들이 또 나 가지고 장난치는 건가?”

“거기까진 모르겠고 들어 보니까 영주님 때문이던데요?”

“나?”

“예. 후작가는 영지전에 패배했습니다.”

“그게 왜 문제가 된다는 거지?”

아이작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고 리블리아와 크네트, 레이샤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볼프강이 아닌 영주님에게 항복했기 때문이죠.”

“상관있나? 어차피 볼프강한테 넘길 건데?”

“그게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뭐? 왜?”

칼덴의 말에 아이작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후작가는 영주님에게 항복했습니다. 하지만 볼프강 백작가와는 계속 전쟁 중이었죠.”

“전쟁 중? 무슨 헛소리냐?”

“영지법상 영지전을 치른 후 1년간은 영지전에서 제외됩니다. 전쟁으로 힘 빠진 영지를 공격하는 비겁한 행위를 금지시키기 위해서죠. 그래서 영주님이 영지전을 신청했을 때 행정청에선 거부하려고 했는데, 이게 알고 보니 거부할 수가 없는 겁니다.”

“왜?”

“그 백작성에서의 마지막 전투 이후 다들 전쟁이 끝날 걸로 알고 있지만, 사실 정전이나 휴전을 위한 협상 한 번 없었습니다. 즉 행정상으론 아직 전쟁 중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