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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yss Trip

10년 전의 어비스는 틀림없는 신격의 전장이었다. 특히 신격들이 들어 온 초기에는, 다들 인과율의 후폭풍은 경계하지도 않고 서로 죽일 듯이 싸워댔다.

그 중에서도 몇몇 신격들은 이상하리만치 많은 싸움을 벌였다. 마룡왕, 템페스트, 혈사자, 재생의 뱀이 그런 군주였다. 반대로 몇몇 신격들은 이상하리만치 싸움을 벌이지 않으며 다른 목적에 충실했다. 아이언메이드, 퓨어세인트, 흑장미여왕이 그런 군주였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싸움을 거의 벌이지 않았던 흑장미여왕은, 무령을 두 번이나 공격했었다 .

전대의 무령은 신격으로서 그리 강력하진 않았고, 그 덕에 10년 전의 어비스는 무령에게 있어서 굉장히 가혹한 전장이었다.

그럼에도 무령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신격다운 자존심을 내세우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성역을 활용하며 도주하는 식의 싸움을 한 것과. 인과율의 폭풍을 경계한 신격들이 필요이상으로 과격한 싸움은 자중한 덕분이었다.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연히 위기는 많았다. 소멸의 위기는 몇 번이고 있었다. 흑장미여왕이 가한 두 번의 공격, 그 전부가 무령을 소멸시킬 뻔 했던 위기였다.

덕분에 흑장미여왕이라는 이름은 당대의 무령인 연리운에게 있어 가히 트라우마라 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당시의 연리운은 철혈궁의 호법신장으로서 전장의 최전선에서 싸웠고, 흑장미여왕과도 맞서본 기억이 있었다.

“갑자기 그 군주는 왜...?”

“좀 궁금해서.”

“말해주기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떠올리는 것이 고역이군.”

무령은 파리해 진 얼굴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죽은 내 아버지. 전대의 무령은 그리 강한 신격이 아니었다. 덕분에 10년 전의 어비스에서도 노리는 적이 많았지. 평가야 상대적일 수밖에 없지만, 내가 겪은 적 중에서 가장 끔찍했던 것은 둘이다.”

마룡왕과 흑장미여왕.

그 둘을 언급하는 말에, 백현은 눈을 끔벅거렸다. 마룡왕이 강력하다는 것이야 워낙 많이 들어서 놀랄 일이 아니었지만, 무령의 말은 꼭 흑장미여왕이 마룡왕과 동급이라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건 아니다. 신격으로서의 강함은 마룡왕이 독보적이었지. 흑장미여왕도 강력하긴 했지만, 마룡왕과 비교하면 몇 수 처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 왜 끔찍했다는 거야?”

“처절함.”

무령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앞서 말한 것처럼, 떠올리는 것조차 고역이라는 듯이.

“흑장미여왕은 철혈궁을... 아니, 전대의 무령인 아버지를 죽이는 것에 집착했다. 분명 신격으로서 우위에 있는 것은 흑장미여왕이었는데, 나는 그녀에게서 처절함을 느꼈다. 특히 그 눈. 원독에 가득 찬 눈은 처절함을 품고 있었지.”

아프라스의 기록에 따르면, 흑장미여왕은 다른 군주와의 싸움을 그리 즐기지 않았다고 했다. 예외적으로 그녀가 먼저 습격한 것이 무령. 그것도 두 번이나.

“뭐 잘못이라도 한 것 아냐?”

“잘못... 이라. 이유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잘못이라고 해야 할까.”

무령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내 아버지는 본래 신격을 취할 그릇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신격을 얻을 수 있던 것은, 내 아버지가 무도武道가 아닌 사술을 통해 마魔에 천마신교의 수십만 교도들을 제물로 바친 덕이지.”

“그게 흑장미여왕과 상관이 있는 거야?”

“흑장미여왕은 마왕이다. 진짜 마왕인 그녀가 보기에는, 마에 제물을 바쳐 신격을 얻은 아버지가 얼마나 우스워 보이겠나? 사실 이것도 확실하지는 않다. 흑장미여왕에게 이유를 묻진 않았으니.”

선계의 명공에게서 흑장미여왕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본래 대마계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강력한 정복군주였던 그녀는, 마신에 도전하여 패배한 뒤 가진 영토와 대부분의 권속을 잃고서 어비스로 떠났다고.

무령에게 신격을 부여한 ‘마魔’라는 존재는 마신인가? 그렇다면 흑장미여왕이 무령을 두 번이나 습격한 이유가 마신에 대한 복수심 때문인가?

“그래도 죽지는 않았잖아.”

“...퓨어세인트 덕분이다. 두 번 모두 그녀가 전투에 개입하여 흑장미여왕을 막아주었고, 우리는 그 사이에 후퇴할 수 있었다.”

무령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공간이 크게 출렁거렸다.

무령의 기억이 공간에 투영되었다. 10년 전에 그가 겪었던 전장이 재현되었다. 아비규환. 보이는 시체들은 모두가 철혈궁의 괴인들이었다. 그들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있지는 않았다. 죄다 몸이 시커먼 가시에 관통되어, 높은 하늘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익숙한 얼굴들도 보였다. 백현이 싸워보았던 철혈궁의 사신장들. 금강신장 유기, 금위신장 제종, 마라신장 유마. 그 셋은 사지가 가시에 관통되어 하늘에 떠서 피를 게워내고 있었다.

연리운은 아직 싸우고 있었다. 그를 상대하고 있는 것은 시커먼 갑옷을 입은 거구의 사내였다. 연리운은 악을 쓰며 천마신공을 난사했지만, 갑옷의 사내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휘두르는 거대한 헬버드가 천마신공의 강기를 찢어발기고 연리운을 위협했다.

“흑장미여왕의 권속은 당시 어비스의 신격들 중에서 제일 수가 적었다.”

무령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나, 흑장미여왕의 권속 중에서 내가 압도할 수 있는 상대는 하나도 없었다. 자화자찬처럼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군주의 권속 중에서도 제일이란 평을 듣던 몸이다.”

사내와 연리운 사이의 그림자 속에서 거대한 주둥이가 튀어나왔다. 연리운은 다급히 뒤로 물러섰지만 쩍 벌어진 아가리가 끝내 연리운의 몸을 물어뜯었다. 완전히 튀어나온 놈은 거대한 늑대였다.

“흑장미여왕의 권속은 셋이다. 기사, 번견, 하녀.”

콰득.

끄어어억.

처참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쪽을 바라보니 전대의 무령이 공중에서 버둥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가슴을 관통한 가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써댔다. 퍽, 퍽!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튀어나온 가시들이 무령의 몸을 다양한 각도에서 관통했다.

그것을 올려보는 것은 새카만 털옷을 걸친 여자였다. 마왕이라 하기에 뿔을 상상했지만, 의외로 뿔은 없었다. 대신에 가시넝쿨 같은 것이 팔다리를 휘감고 있었다.

훅.

보이던 것들이 사라지고,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악몽 같은 기억이다. 사실 철혈궁은 저때 몰살당할 뻔 했지. 저번 이후 두 번째 습격에서는 아예 맞서는 것을 포기하고 도망쳤고. 본래 오만무도했던 아버지는... 흑장미여왕을 겪은 후로 분수란 것을 알게 되었다.”

무령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어비스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길 수 없으면 도망치는 것이 상책임을 확실하게 알았으니 말이야.”

“공격당한 것은 두 번이라고 했지? 그 이후로 공격당한 적은 없나?”

“없다. 다만...”

무령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가, 말을 이었다.

“언젠가, 내가 아버지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흑장미여왕이 또 습격해 오면 위험하지 않겠느냐고. 그러자 아버지는 걱정하지 않는다는 투로 대답했었지. 흑장미여왕이 더 이상 철혈궁을 공격할 일은 없다고 말이야.”

“뭐야 그게? 너 모르는 사이에 화해라도 했다는 건가?”

“아니. 흑장미여왕과 개인적으로 회담을 나눈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버님은 퓨어세인트에게 빚을 졌다는 식으로 말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퓨어세인트를 비롯한 다른 군주들과 어울렸다.”

뭔지 알겠다.

백현은 퓨어세인트와 하이로드가 마룡왕을 포함한 군주들과 회동을 가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마룡왕, 검무희, 천존, 월드이터, 헌드레드, 유계의 방랑자, 키마이라, 무령. 그 여덟 군주들은 하이로드와 퓨어세인트와 손을 잡고서 연합을 결성했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렇다 할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회동을 가졌던 장소에서 하필 혼돈이 폭주해 버렸다. 무령은 운이 좋게도 거기서 도주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혼돈의 침식에 온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회동 이전에 무령과 퓨어세인트 사이에 뭔가가 있었던 거야.’

정황을 보건데, 퓨어세인트는 무령이 타락해 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퓨어세인트가 백현에게 무령에 관한 정보를 주고, 무령과 싸우게끔 유도한 것 또한 그녀가 바라는 무언가를 위한 노림수라는 것이다.

‘대체 뭘 하려는 거야?’

백현이 대면했던 퓨어세인트는 아름다운 꽃밭 한가운데에서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마시던 성녀의 모습이었다.

그건 퓨어세인트의 진짜 모습이 아니었다. 퓨어세인트가 그런 모습을 취하고 있는 이유는 지극히 단순했다. ‘고결하고 신성해 보여서.’ 그녀는 자신을 믿는 신자들에게 우상으로 여겨지기 위해 그런 모습을 취하고 있을 뿐이라고, 백현에게 직접 말해주었다.

그렇다면 퓨어세인트의 진짜 모습은 대체 무얼까.

백현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가 여태까지 들으면서 정립한 ‘퓨어세인트’라는 신격에게는, 그런 모습조차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넌 사도 안 만드냐?”

“그다지 마음에 드는 녀석이 없어서.”

무령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손깍지를 꼈다.

“나는 이미 혼돈의 근원 같은 것은 포기했다. 지금 와서 욕심내어 사도를 만들어봤자, 먼저 만들어진 사도들과 경쟁이 되지 않아. 그렇다면 차라리, 근원 탐색은 포기하고 투자할 만한 권속을 추리는 편이 낫지. 그리고...”

무령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대신 그의 눈에 알 수 없는 신기神氣가 어렸다. 그건 심안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힘이었다.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갑자기 뭐야?”

“나는 무령이라는 신명처럼 무武의 신은 아니다만, 그래도 긴 시간을 무를 수련했다.”

그의 말이 진지하다는 것을 깨닫고서, 백현도 슬쩍 자세를 바꿔 앉았다.

“전대 무령인 아버지는 마와 계약하여 자신과 철혈궁 전원에 무의 금제를 가했다. 그건 당연한 저주였다. 아버지는 자신이 무의 총애를 받았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끝내 무를 통해 신이 되지 못하였지. 인신공양으로 얻은 신격의 대가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불완전한 신격. 그리고 영원한 무도武道의 방황이었다.”

“그래서?”

“나라고 해서 처음부터 그러한 처지를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다. 나는... 완전한 금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영원한 무도의 방황? 나 자신이 정진한다면 길을 찾아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지. 허나 무리였다. 인간이 초월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필멸의 굴레를 벗어야 하고, 더 상위 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탈각을 이뤄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이미 신격의 권속이 되어 그 어느 것도 불가능했다.”

무령의 손이 백현을 가리켰다.

“너는 나와 경우가 다르다. 오히려 더 지독할 지도 모르지. 내 신안神眼은 네가 얼마나 대단한 경지에 도달하였는지를 볼 수 있다. 너는 이미... 진즉에 필멸의 굴레를 벗어 초월자가 됐어야 해. 어쩌면 탈각까지도.”

“...그게 무슨 말이냐?”

“넌 너무 강하다.”

무령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넌 인간으로 남아 있다. 이미 네 무武는 인간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해 있음에도 말이다.”

“아직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자격?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나 역시 천존을 죽였을 때의 네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았다. 그때 너는 이미 어지간한 초월자와 정면에서 대적할 정도였다.”

“내가 되고 싶은 건 고작 초월자 수준이 아니야.”

백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무령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 백현을 올려보았다.

“신격이 되고 싶다는 거냐.”

“...그것도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싶은데.”

백현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 오만무도한 말에 무령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쯤 되면 농담으로도 안 들리는 군.”

“당연하지.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니까.”

백현은 언제나 진심이었다.

적어도 무도에 관해서는.

철혈궁을 나오면서, 백현은 마지막으로 흑장미여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무령이 보여주었던 흑장미여왕의 모습. 명공에게 들었던 이야기들. 아프라스의 기록. 관리국의 헌터기록.

‘타락은 아니야.’

아직 속단은 이르지만, 백현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만약 그녀가 역천자처럼 타락했다면, 튜토리얼에 다른 군주들처럼 개입할 수는 있겠지. 그리고 역천자처럼 영지를 떠나 어비스를 활보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악몽의 결정자를 통해서 백현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다.

마룡왕처럼 타락했다는 것은 신격의 상실. 허나 그 경우에도 어비스를 활보할 수는 있다. 대신에 튜토리얼에 개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퓨어세인트...’

연관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흑장미여왕이 무령을 습격했을 때 두 번이나 막아선 것도 그렇고. 둘 사이에 어떠한 인연이 있나? 그렇다고 퓨어세인트를 찾아 가 확인하는 것은 위험성이 너무 크다. 드레이브를 걷어찼던 일 때문보다는, 백현이 퓨어세인트의 어두운 면을 너무 많이 알게 되었다.

‘뭐, 천천히 가보면 되겠지.’

너무 서두르지는 말고.

백현은 고개를 돌려, 어비스의 중심인 판데모니엄 쪽을 보았다.

“오랜만에 어비스 여행을 하게 생겼네.”

마침 방향이 겹친다. 악몽의 결정자에게 들은 흑장미여왕의 영지도. 전태수에게 들었던, 정수아가 마지막으로 연락이 되었던 거주지역도.

그리고 백현은 알지 못했지만.

마룡왕의 용곡도 그쪽 방향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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