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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t's unusual.

“그냥 보낼 줄은 몰랐어.”

검무희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다시 방으로 들어 온 헌드레드가 역천자에게 말을 걸었다. 가면을 어루만지고 있던 역천자가 웃는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그럼 무엇을 상상한 겐가?”

“난 영락없이 당신이 검무희에게 뭔가를 한 줄 알았거든.”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기는 했지만, 검무희가 이곳을 찾아 온 건 내 의도가 아니었네. 나는 정말로 그녀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대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야.”

그 대답에 헌드레드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헌드레드도 잘 알고 있었다. 검무희 외에 누구도 방문한 적이 없는 장소기는 하지만, 헌드레드가 문지기의 역할을 맡은 것은 그 자신이 원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가 역천자를 따라오고, 그의 수족이 되고자 한 것도 자신이 직접 그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하는데... 마룡왕도 함께 있지 않았고.”

헌드레드는 진심으로 아쉬움을 느꼈다. 검무희가 대적하기 무척이나 까다로운 신격이기는 하지만, 이 장소에서 역천자의 도움을 받는다면 검무희를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다.

“검무희의 ‘눈’을 얻는다면 큰 도움이 될 텐데 말이야.”

“하지만 무조건 필요한 것도 아니잖나. 게다가 너무 과격한 방법이지.”

“뭐 그렇기는 하지만, 내 생각에 검무희나 마룡왕이 당신처럼 혼돈을 추종하게 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당장은 그럴지 모르지만, 상황이 어찌 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 아니겠나? 그대처럼 말이야.”

헌드레드는 히죽 웃었다. 역천자는 그의 웃음을 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그대가 무조건적인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님은 알지만.”

“글쎄... 당신이 왜 혼돈을 추종하는지는 알겠어. 신격조차 집어삼킨다는 힘은 매료되기에 충분하지. 그래도 말이야, 나는 기왕이면 추종자가 아니라 추종 받는 쪽이 되고 싶거든.”

느물거리며 한 대답은, 스스로를 혼돈의 사도라 칭하고 심연의 왕좌를 추앙하는 역천자와 정면에서 반하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역천자는 헌드레드의 말에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즐겁다는 듯 웃었다.

“뜻대로 하시게. 나로서는 그대가 당장 협력해 주는 것으로 족하니 말이야. 그래서... 하는 일은 잘 되고 있나?”

“아직은 처음이니까.”

헌드레드는 그렇게 말하며 뒤로 물러섰다.

“으스댈 만한 성과는 아직 없지만. 조금 더 지켜보면 알 수 있을 거야.”

“너무 부담은 갖지 말게.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니 말이야. 자네가 하는 일은 일종의 실험에 가까운 것이야.”

그래.

단순한 실험일 뿐이다. 역천자는 시선을 내려 미동도 없는 촛불들을 쳐다보았다.

*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지?”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벌써 몇 번째 듣는 질문이고, 그때마다 똑같은 대답을 해 주었다. 하지만 사라는 영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백현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아무 일도 없을 수가 있어? 밤에, 아무도 모르게 혼자 나가서 한참 있다가 온 거잖아.”

“그럼 대체 무슨 일이 있어야 하는데?”

“바람 피고 온 것 아니야?”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야, 그리고 사실 바람이라 할 만한 일은 아니지. 까놓고 내가 너랑 사귀는 사이도...”

사라의 눈이 부릅 뜨였다. 쌍심지를 켜고서 타오르는 눈동자를 보며 백현은 순간 말을 멈추었다.

“...아니기는 하지만. 어. 그렇다고 해서 뭐 이상한 일을 하고 온 건 아니니까.”

“수상해.”

“아프라스에 기록 된 기억들도 보여줬잖아. 대체 뭐가 문제야?”

“보기는 했는데, 여자 만나고 온 건 사실이잖아. 안 그래?”

“잘못 했으면 죽을 상황이었는데, 여자가 중요하냐?”

“센 여자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말문이 막혔다.

천공성으로 돌아오며 핑계거리를 생각하기는 했지만, 굳이 그렇게 궁상맞게 굴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따져대는 사라에게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라이 룽에게 빚을 갚으러 갔고, 그러면서 마룡왕과 싸웠다고. 거기서 더 꼬치꼬치 캐묻기에, 하나씩 대답해 주는 것도 귀찮아서 아프라스에 기억을 저장해 사라에게 공유해 주었다.

숨기는 것은 없었다. 기록된 영상은 모두가 팩트였다. 조작 하나 없다. 만나고, 싸우고, 조금 이야기하다가 헤어지고.

그걸 보여주면 깔끔하게 정리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사라는 그 이후로도 틈만 나면 그 일에 대해 묻고 있었다.

“...그게 여기서 왜 나와?”

“왜 나오기는, 이 개새끼야. 마룡왕이 너보다 훨씬 세니가 그러지!”

사라는 여전히 쌍심지를 킨 눈으로, 꽉 쥔 주먹을 붕붕 휘둘렀다.

“방금 머뭇거린 게 존나 수상해. 너, 나한테 안 보여준 것 있지? 응? 마룡왕이랑 그냥 이야기만 하고 온 거 아니지?”

“안 보여 준거 없어. 다, 다 보여줬어. 다!”

“웃기지 마. 너 보는 시선에서 아주 꿀이 떨어지더만! 너 설마...”

“설마 뭐.”

답답해 되묻자, 사라는 금방 대답하지 못하고 잠깐 머뭇거렸다. 백현은 빨갛게 달아오른 사라의 얼굴을 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여태까지의 경험을 미루어 보건데, 사라가 저런 얼굴을 하고서 말을 머뭇거릴 때에 이어지는 패턴은 뻔했다.

“너 또 뭔 개소리를 하려...”

“해... 했냐?”

그냥 닥치라고 할 걸 그랬다. 주어가 생략 된 ‘했냐?’라는 질문.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백현은 억울함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안 했어.”

“정말 안 했어?”

“어.”

이럴 줄 알았으면 궁상맞을지라도 거짓말을 늘어놓을 것을 그랬다. 백현은 뒤늦은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었다.

“일주일이야. 일주일이라고! 대체 언제까지 그거 붙잡고 사람을 갈굴 생각이야?”

“누가 혼자 휙 가버리래?”

“말했잖아, 너 걱정해서 그런 거라고. 나야 팔다리 날아가고 그래도 안 죽지만, 너는 다르잖아.”

이번에 말문이 막힌 것은 사라 쪽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침묵했다. 하지만 영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백현이 걱정해 준 것은 이해하지만...

“너도 죽을 뻔 했잖아.”

“안 죽었으면 됐지.”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너 죽으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내가 너보다 죽을 확률이 훨씬 적어.”

“...그래도 싫어.”

웅얼거리는 말이었다. 백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사라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그 손짓에 사라는 움찔 몸을 떨었지만, 백현의 손을 쳐내지는 않았다. 그녀는 얌전히 어깨를 늘어트리고서 백현의 손길을 느꼈다.

‘뭔가 센 한 방이 필요해.’

그러면서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함께 지낸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백현과 사라의 관계는 그녀가 만족할 만큼의 진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감정을 고백한 후로 나름 적극적인 공세를 퍼 붓고는 있지만, 백현이 치는 철벽은 너무나도 굳건했다. 정말 고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사라는 백현이 고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프라스의 스캔 결과를 통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육탄공세는 어떻습니까?]

연애 시뮬레이터로 전락한 아프라스가 의견을 냈다.

‘여태까지 몇 번이나 해봤잖아. 그거론 안 돼.’

[그렇다면 수위를 높이는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백현님은 이런 방면에서 눈치가 없다시피 하니, 은근한 것보다는 아예 대놓고 하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그 말에 사라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여태가지의 육탄공세. 보란 듯이 속옷을 걸어두고, 은근한 노출을 보이고. 사실 거기가 사라가 할 수 있는 공격의 마지노선이었다.

[침대로 들어가십시오.]

“미쳤어?”

무덤덤한 어조였지만, 아프라스의 조언은 훅 들어왔다. 덕분에 사라는 기겁하여 목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미치긴 뭐가 미쳐?”

“...너 때문에 내가 미친다고.”

백현은 의아해 하며 물었지만, 사라는 그렇게 둘러댔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입니다.]

‘아직 사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할 필요는...’

[꼭 사귄다는 관계가 전제가 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일을 치르고 난 뒤에 관계를 재정립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라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위대한 상상력은, 사라가 평생 해 본 적 없는 음양의 조화를 아주 디테일한 포르노 한 편으로 가꾸어 머릿속에 재생시켰다. 그래, 포르노다. 관람등급은 당연히 19금이었고 모자이크 하나 없는. 주인공은...

철썩.

옆에서 들린 소리에 백현은 고개를 돌렸다. 사라가 제 뺨을 미친 듯이 때려대고 있었다. 대체 뭔 짓을 하는가 싶었지만, 말리는 것도 지쳤다.

[사라님은 백현님을 독점하고 싶은 겁니까?]

백현이 의도적으로 사라를 무시하는 동안, 아프라스는 연애시뮬레이터로서 사라와 쭉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게 좋기는 하지만, 저 새끼가 너무 잘났잖아.’

[그러면?]

‘날 버리지만 않으면 돼.’

[그거로 만족하십니까?]

‘기왕이면 날 가장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그렇다면 더욱 침대로 들어가야 합니다.]

‘파, 파렴치한...’

[퍼스트에는 확실한 의미가 있는 법입니다. 확인한 결과 백현님도 동정이니, 서로가 퍼스트를 교환한다면 그로 인한...]

‘대체 왜 저거만 퍼스트라고 말하는 거야?’

[동정으로 정정하겠습니다.]

뺨 때리는 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백현은 다리를 꼬고 앉아 차게 식은 커피를 내려 보았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일찍 온 덕에 조금 기다리게 되었다. 원래는 혼자 올 생각이었는데. 사라가 또 어떤 년을 만나러 가는 것이냐며 따져대기에 그냥 때놓지 않고 데리고 왔다.

“죄송합니다.”

문이 열렸다. 급하게 들어 온 전태수는 소파에 앉은 백현과 사라를 본 즉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설마 이렇게 빨리 와주실 지는 몰랐습니다.”

“마침 어비스를 나와 있었거든요. 최근 너무 어비스에만 있기도 해서.”

“이해합니다. 지금 동쪽으로 가고 계신다 했지요? 샤나크님은 잘 지내십니까?”

“지금 뭐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침까지는 잘 지내고 있었어요.”

전태수는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백현과 사라의 맞은편에 앉았다. 온갖 기행을 일삼는 샤나크지만, 한국에 온 뒤로는 난감할 만한 기행을 전혀 벌이지 않고 있었다. 초월적 존재인 사도를 대체 무슨 수로 통제하는 지가 궁금했지만, 그 방법을 안다고 해서 똑같이 할 자신이 없었기에 굳이 묻지는 않았다.

“사라님은...?”

“같이 오겠다고 해서요. 괜찮아요?”

“당연히 괜찮습니다.”

지금부터 나눌 이야기는 사라가 들으면 안 될 일에 속하는 것도 아니었다. 전태수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태블릿 PC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슬슬 서민식 씨가 귀국할 날이 되는군요.”

“일주일 뒤에 온다고 했어요. 얌전히 입국할 테니까 마중 나오라고 하던 걸요.”

“그 사이에 만난 적은 없으십니까?”

“네.”

어비스에서라도 볼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서민식은 일본에 간 후로 한 번도 어비스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 호른 지하에서 보여준 ‘힘’이 여러모로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오라고 부른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나 보죠?”

의욕적으로 묻는 말에, 태블릿PC를 조작하던 전태수가 시선을 올렸다.

“꽤 흥미가 생기신 모양입니다?”

지난 번에 이 일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않았었다. 하지만 정수아에게 고스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일이 단순하게 고스트들 사이에 있는 알력다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일에는 대부분의 고스트들과 계약한 ‘암막의 주인’이 아닌 전혀 다른 신격이 개입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역시 속단하기는 이를 테지만. 백현은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바라였다.

“기왕 할 일이니까. 열심히 하고 빨리 끝내려고요.”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전태수와 계약한 하이로드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전태수라는 사람은 호인好人에 속한다 생각하지만, 그와 계약한 군주는 다를 것이다. 당장 하이로드와 계약한 진 웨이만 해도 그랬고.

“아마 이 이야기를 들으면 더 흥미가 생기실 겁니다.”

그럴 만한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전태수는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며 빙긋이 웃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의 눈앞에 앉은 백현은 사도 이상의 힘을 보유한, 인간이면서 군주에 한없이 가까운 존재였다.

“몇 달 동안 저희 쪽 정보부가 알아낸 것들입니다. 뒷세계의 브로커들까지 들쑤셔 가면서요.”

책상 위에 있는 태블릿PC가 백현이 보기 쉽도록 회전했다.

“몇 달 전, 세 개의 대형 고스트 길드를 습격한 고스트. 그들은 자신을 ‘팔로워’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SNS 팔로워 같은?”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이지만, 예... 그 스펠링이 맞습니다. 아직 그 규모까지는 특정해 내지 못했지만, 보인 행보를 보건데 최소 수백 단위의 고스트들로 구성되어 있을 겁니다.”

전태수의 손이 태블릿PC의 액정을 두드렸다. 그가 켠 것은 조악한 화질의 영상이었다.

“힘들게 구한 영상입니다. 이걸 보시면, 왜 제가 흥미가 생길거라고 했는지 이해하실 겁니다.”

영상이 재생되었다.

그런 풍경은 아니었지만, 어비스가 아닌 현실에서 촬영 된 영상 같았다. 영화에서나 들을 법한 총소리가 칙칙거리는 전자 잡음과 섞여 BGM처럼 깔려 있었다.

통일되지 않은 군복을 입은 헌터들이 총화기로 무장한 사람들을 학살해대고 있었다. 그걸 본 사라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허.”

백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영상을 보았다.

“이 새끼들. 권능이 참 특이하네요.”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학살을 벌이는 헌터들은, 무공과 흡사한 체술을 펼치며 뭔지 모를 마법까지 써대고 있었다.

그것도 개개인이 전부.

ⓒ 목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