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 Me Be Reborn

790. I can grind a face.40

***

“어쩔래? 지금 그냥 따로 방 잡을까?”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다.

어리고 예쁜 여자가 먼저 나서서 방을 잡자고 한다.

하지만 쉽사리 승낙할 순 없다.

상대는 아무리 어리다 해도 화류계에서 날고 긴다는 텐 프로. 남자 가지고 노는 덴 도가 튼 여자다.

‘젠장, 속마음만 읽을 수 있어도 이렇게 고민하진 않을텐데.’

[중수 이상부터 제공되는 미션이 괜히 어려운 게 아니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건 도박이야. 신중히 따져봐야 해.’

여름은 나를 오늘 처음 봤다.

남자라면 모를까 여자가 남자를 보고 대뜸 자자고 한다?

얼굴이 빨개지긴 했지만 술에 취한 건 아니다.

맨정신의 여자가 저럴 수 있나?

상대는 화대를 받는 프로.

내가 지금껏 그녀에게 한 것이라곤, 높은 콧대를 살짝 눌러준 것뿐이다. 분명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고 나에게 앙심을 품고 있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지금의 제안은 낚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거른다.

“에이,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얼른 술이나 사가자.”

“진심? 마지막으로 묻는 거야. 확실하게 대답해.”

교활한 여름이 나를 쥐고 흔들었다.

어쩌면 나는 그릇된 판단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자 타임의 나라면 조금 달랐을까?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건 너무 뜬금없다.

상식을 벗어나는 제안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아직까진 솔이 누나 쪽이 더 끌려. 미안한데, 방금 제안은 못 들은 거로 할게.”

여름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구겨졌다.

다친 자존심에 소금을 뿌린 격이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이건 좀 섬뜩했다.

여기서 한 번 더 튕겼다간 탄성한계를 벗어난 고무줄이 내 마빡을 후려칠 것이다.

거절은 늘 여지를 남겨야 한다.

“에이, 당연히 후회하겠지!”

“···응?”

“너처럼 예쁜 애랑 하면 당연히 나도 좋지!”

“뭐야, 대체? 근데 왜 거절한 건데? 솔이 누나가 그렇게 좋아?”

“말이 그렇다는 거야. 야, 나도 남자라고.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아. 그치만 탁이형 부탁도 있고, 먼저 방 잡고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민폐잖아. 이러면 괜히 너까지 욕먹어.”

한 번은 맥이고, 한 번은 띄운다.

이 순서가 바뀌면 곤란하다.

나쁜 남자는 늘 마지막에만 잘해줘야 한다.

내 변명을 들은 여름이 만족했는지 어깨를 으쓱했다.

“···재밌네, 너.”

“뭐?”

“설마 거절할 줄은 몰랐는데.”

“진짜?”

“당연하지. 내가 먼저 자자고 하는데 싫다고 하는 남자가 어딨어? 유부남이라도 흔들릴걸?”

“그거야 당연하지. 근데 진짜로 줄 생각이었어?”

여름이 씩 웃었다.

“아니? 당연히 떠본 거지.”

와, 소름.

저건 진심이다.

하마터면 완벽히 낚일 뻔 했다.

등에 식은땀을 흘리는데 여름이 말했다.

“근데 뭐, 너 생각보다 더 괜찮네. 갑자기 윤솔 언니한테 승부욕이 돋는데?”

“뭐래.”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편의점 앞이었다.

그런데 왠지 주변이 익숙하다. 어디에나 있는 프렌차이즈 편의점인데 왜 이렇게···.

[충돌 경보! 어장 관리 어플에서 충돌 경보 입니다!]

‘뭐, 뭐라고? 누군데? 설마 편의점에 아는 여자가 있는 거야? 이 새벽에?’

[기억 안 나십니까? 이 편의점? 주인님이 1학기 시작 전에 알바하던 곳이잖습니까.]

‘억!’

그제야 왜 이렇게 편의점 주변이 익숙했는지 깨달았다.

우리가 잡은 모텔이 편의점 뒤쪽 골목에 있었고, 평소에 대로변으로만 다니다 보니 순간적으로 같은 동네라는 걸 의식하지 못한 것이다.

“뭐해? 안 들어가고?”

문 앞에 얼음땡이 된 나를 여름이 떠밀었다.

“아, 아니 우리 다른 편의점 가자.”

“왜? 주변에 보이지도 않고만. 얼른 들어가.”

“아, 아니 그게. 그럼 너 먼저 들어가서 사고 있을래? 나 담배 좀 피우다 갈게.”

“웃겨. 필거면 같이 피면 되지.”

우리 편의점 앞에 세워진 파라솔 벤치에 앉아 담배를 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끊임없이 로시와 대화 중이었다.

‘충돌 대상이 누군데? 설마 허영자?’

[아닙니다.]

‘그럼? 설마···.’

그때 편의점 문이 열리더니 흰 반팔티에 편의점 조끼를 입은 아르바이트 여학생이 나왔다. 손에 키를 든 걸 보니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잠시 나온 것 같았다.

“어? 혹시 들어가실 거에요? 저 화장실 좀 다녀오려구요.”

‘바, 박하린.’

니가 여기서 왜 나와?

***

박하린.

도훈이 한때 알바했던 편의점주 허영자의 딸.

지방 교대를 다니는 그녀는 이따금 서울로 올라와 어머니의 일을 도왔다. 특히 이번 주는 갑작스럽게 야간 알바가 그만두면서 주말 간 긴급 투입된 상황.

예전 같으면 하린이 새벽 타임에 들어갈 일이 없었지만, 근 3일째 알바가 안 구해지는 바람에 밤샘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알바를 자청한 것이었다.

“뭐야? 아는 사람이야? 왜 그렇게 당황해?”

여름은 뭔가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생긴 것처럼 도훈과 하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 아니. 그냥.”

도훈은 당황했지만, 얼굴이 빻은 자신을 하린이 못 알아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린 역시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아해할 뿐이었다.

‘휴, 천만다행이다. 빻은 얼굴 덕분에 하린이 아직 나를 눈치 못 챈 거 같아.’

“다녀오세요. 저흰 담배 좀 피우고 있을게요.”

“네, 감사합니다.”

여름의 대답에 하린이 후다닥 건물 밖 화장실로 향했다.

도훈이 화장실로 뛰어가는 하린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여름이 이상하게 여겼다.

“뭔데? 진짜 아는 사람 아냐?”

“아니, 예전에 만났던 사람하고 너무 비슷하게 생겨서. 순간 착각했어.”

“예전이면 전 여자친구?”

“아니야.”

“웃기시네. 근데 저런 애가 네 취향이었구나?”

“저런 애라니?”

“딱 보니까 알겠던데? 가슴 큰 여자.”

하린은 엄마인 허영자를 닮아 가슴이 무척 컸다.

조끼를 입고 있어도 티가 날 만큼 글래머였다.

여름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항, 그래서였네. 네가 왜 솔이 언니한테 그렇게 매달렸던 건지.”

“아니라니까 그래.”

“나도 작진 않을걸?”

“뭐래, 진짜.”

도훈과 여름이 옥신각신하는데 그 사이 화장실을 다녀온 하린이 다시 돌아왔다.

“죄송해요. 이 시간에 가게에 혼자밖에 없어서. 들어오세요.”

하린이 문을 열자 여름이 앞장서서 들어갔다.

“뭐해? 자꾸 밍기적 대고. 빨리 와.”

“알았어.”

편의점에 들어온 도훈은 계속 카운터 있는 하린을 힐끔거렸다. 간만에 봐서 그런지 얼굴이 더 예뻐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대학물을 먹다 보니 점점 꾸밀 줄 아는 여자가 되고 있었다. 풋풋한 재수생 시절과 비교하니 정말 환골탈태 수준이었다.

‘아직도 그때 그 남친이랑 만나려나?’

바구니에 맥주캔을 담던 여름은 자꾸 알바를 쳐다보는 도훈이 못 마땅했다.

‘뭐야. 쟤는? 진짜 사람 열 받게. 이제 아주 대놓고 보네.’

하린이 나름 예뻐졌다고 해도 여름에 비하면 객관적으로 한 수 아래였다. 그녀는 가슴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알바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도훈의 모습에 골이 났다.

‘하여간 가슴 큰 여자만 보면 눈을 못 때는구나.’

“정우야.”

“으,응?”

“우리 모텔 가는 데 콘돔 좀 사갈까?”

“무,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둘밖에 없는 손님이 큰 소리로 콘돔 이야기를 꺼내자 카운터에 있던 하린이 귀를 쫑긋 세웠다.

‘뭐지, 저 커플? 창피하지도 않나?’

콘돔을 사가는 젊은 커플들은 많이 보았지만, 저렇게 대놓고 떠드는 손님은 처음이었다. 하린은 술을 고르는 여자 쪽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무지 예쁘네. 무슨 연예인처럼. 근데 차림이 조금 야한데. 학생은 아닌 것 같고.’

이어서 뻘쭘하게 서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여자에 비하면 남자가 너무 못 생겼다. 키는 좀 크지만.’

하린은 문득 그의 뒷모습이 도훈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와, 근데 도훈 오빠랑 엄청 닮았네? 오빠도 딱 저만 했던 것 같은데.’

키 큰 남자 손님을 보자 도훈과 우연히 재회한 이후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게 생각났다.

‘치. 아무리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도 그렇지. 그 뒤로 연락도 없고.’

새벽에 혼자 가게를 보는 게 심심했던 하린은 문득 도훈에게 연락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 올 때 연락하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이번 주는 가게 알바 때문에 못 만나지만···. 그래도 말이나 걸어볼까?’

하린은 한참 안주를 고르는 두 커플을 두고 도훈에게 톡을 남겼다.

박하린 : 오빠, 혹시 주무세요?

띠링

안주를 고르던 도훈은 무심결에 핸드폰을 확인하다 발신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바, 박하린이 갑자기 왜? 설마 내 빻은 얼굴을 알아 본 건가?’

[설마요? 아직 풀릴 시간이 아닙니다. 여전히 빻으셨습니다.]

도훈이 문자를 보니 단순한 안부 문자였다.

‘휴. 다행이다. 코앞에 두고도 모르다니.’

도훈은 여름의 눈치를 보며 답장을 보냈다.

이도훈 : 아니 아직. 근데 웬일이야? 먼저 연락을 다 하고.

박하린 : 아, 이번 주 서울 올라왔거든요. 그래서 한 번 연락해 봤어요.

이도훈 : 진짜? 언제? 왜 근데 이제 연락했어?

박하린 : 아, 실은 야간 알바가 안 구해져서, 요 며칠 엄마 혼자 계속 날 새셨거든요. 주말이라도 도와 드리려고 온 거예요.

이도훈 : 그럼 지금 편의점?

박하린 : 네. 혼자 있어요.

이도훈 : 심심하겠다.

박하린 : 놀러오셔도 되구요. ㅎㅎ 집 가깝지 않아요?

도훈은 하린의 수작에 피식 웃으며 답장을 남겼다.

이도훈 : 미안. 내가 지금 서울이 아니라서.

박하린 : 어? 어딘데요?

이도훈 : 나 배구부 하는 거 알지? 하필 이번주에 강원도로 전지훈련 왔어.

박하린 : 아, 그랬구나.

이도훈 : 아쉽네. 서울에 있었으면 너 보러 갈 텐데.

박하린 : 정말요?

이도훈 : 당연하지. 서울 오면 가끔 보기로 했잖아.

박하린 : 저 다음 달 방학하면 계속 서울 있을 거예요.

이도훈 : 진짜로? 남자친구는 어떡하고?

박하린 : 남친도 자기 고향 가겠죠. 요샌 지방교대도 은근 전국구거든요. 남친 고향은 제주도라서 방학 내내 못 볼 것 같아요.

이도훈 : 그렇구나.

박하린 : 서울 오면 심심할 것 같으니까 오빠가 자주 놀아주셔야 돼요. 알았죠?

이도훈 : 그래.

박하린 : 오랜만에 연락하니까 보고 싶네요.

이도훈 : 날 새느라 심심해서 얘기할 사람 찾은 건 아니고?

박하린 : 오빠랑 얘기만 하고 싶겠어요?

이도훈 : 그럼?

“박하린이 누군데?”

여름이 너무 큰 소리로 말했기에 카운터에 있던 하린도 똑똑히 들었다.

“뭐, 뭐야? 왜 남의 폰을 보는데?”

“안주 고르라니까 아까부터 계속 톡만 하고 있더만. 여친 있는 거 맞구나?”

“아, 아니야.”

‘누구지? 갑자기 왜 내 이름이···.’

하린은 갑자기 자기 이름이 거론되자 의아했지만, 설마 하니 얼굴이 빻은 남자가 도훈일 거라곤 꿈에도 예상 못 했다. 그저 동명이인이라고만 여겼다.

“그럼 보여줘.”

“뭘?”

“톡 내용 보면 알 거 아니야? 여친인지 아닌지.”

“아니라니까 그래.”

“아니긴 무슨. 너 같으면, 토요일 새벽 1시에 톡하는 여자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그냥 여사친 일수도 있지.”

“여사친 같은 소리하네. 야, 있으면 있는 거지 뭘 그렇게 숨겨? 내가 있다고 뭐라고 해?”

“없으니까 하는 소리잖아.”

“웃겨 진짜? 과자나 이리 줘. 계산하게.”

“니가 이걸 왜 계산해?”

카운터로 물건을 들고 온 도훈이 지갑을 꺼내려 하자 여름이 자기 카드를 먼저 내밀었다.

“제 걸로 계산해 주세요.”

“내가 산다니까.”

“됐거든? 나중에 나보다 더 잘 벌면 그때 얻어 먹을 게.”

“그게 무슨.”

“얼른 계산 좀요.”

하린이 결제를 마치자 여름이 갑자기 도훈에게 팔짱을 끼었다. 가슴이 뭉클 닿을 정도로 진한 스킨십이었다.

“왜 이래, 갑자기?”

“어차피 모텔 들어갈 사인데. 뭐 어때서? 얼른 가자.”

여름은 도훈이 호감을 보인 여자 앞에서 일부러 그를 끌어안은 것이었다. 하린은 참 희한한 커플이라고 생각하며 꾸벅 인사했다.

“안녕히가세요.”

밖으로 나온 여름이 도훈에게 말했다.

“전 여친 닮은 여자 보니까 기분 싱숭생숭했니?”

“전 여친이라니?”

“딱 보면 알겠더만 뭘. 첨 봤을 때 깜짝 놀란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그런 거 아니야.”

도훈이 부정했지만 여름은 막무가내였다.

“근데 나도 안 작아. 겉보기랑은 다를걸?”

“뭐가?”

“뭐긴 뭐야. 이거지.”

여름이 더욱 밀착하면서 도훈의 팔꿈치에 가슴을 비벼왔다.

뭉클하고 말랑말랑한 느낌에 도훈이 자기도 모르게 발기했다.

그녀 말대로 생각외로 큰 가슴이었다.

팔꿈치에 닿는 면적이 상당했다.

“으으, 좀 빼.”

“좋으면서 튕기기는.”

“사람들 보니까 그렇지.”

“모텔 들어갈 사이에 팔짱 좀 끼면 어때서?”

도훈은 여름이 팔짱을 풀어주지 않자, 그냥 체념하고 물었다.

“근데 먼저 들어간 사람들 방 번호 물어봐야 되는 거 아냐?”

“아까 너 톡할 때 연락했어. 802호래. 우린 그 옆방으로 잡을 거야.”

< 790. 빻은 얼굴도 할 수 있어.4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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