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nce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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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중혁은 웃고 떠드는 부원들을 보았다. 마루가 나가기 전에 던지고 간 말 때문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도란도란 어제와 그제 그리고 며칠 전에 있었던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꺼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틈에 중혁도 껴있다. 영화를 봤느니, 새로 나온 과자를 먹었냐느니,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말들을 그냥 내뱉고 있었다. 누구하나 이 분위기가 잘 못되었다고 말하는 이가 없었다.

아기자기한 동아리. 중혁은 오늘따라 5층 강당이 더없이 넓게 느껴졌다. 미소가 처음 온 날 그녀는 앞으로 이 강당이 좁아보일 정도로 활동량을 늘릴 것이라고 말했고, 그 말은 사실이 되어 지난 세 달간 단 한순간도 이 강당이 넓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연극제가 탈락하고 난 뒤의 한달. 강당은 운동장만큼이나 드넓어 보였다. 언제 우리가 이곳을 좁게 느꼈지?

‘말해야 하나.’

리딩 한 번. 그리고 잡담. 그 외 연습 없음.

머릿속에는 ‘아늘한 식탁’의 대본과 동선이 그대로 남아있다. 지금 당장 일어서서 연기를 해보라고 해도 무리없이 할 수 있다. 그정도의 자신감은 있었다.

하지만 이 자신감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어쩌면 이미…….’

실력이 뒷받침 되는 여유는 자신감이라 하지만 그러지 못 할 경우 자만심이라고 한다. 우리는 지금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만심에 물들어 있는 것일까.

말하는 도중에 1학년 후배들과 눈이 마주쳤다. 말수가 적은 유림이다. 핸드폰을 항상 쥐고 있는 아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그 아이는 약간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단번에 의미가 전달되었다. 그녀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대로 괜찮나요?

그 옆으로 고개를 돌려 이슬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비슷한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그 외도 몇 명은 화목한 분위기가 아슬아슬한 줄타기임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어쩌면 전부다 알고 있을 지도.’

중혁은 윤정을 보았다. 가장 크게 웃으며 자신이 어젯밤 꾸었던 꿈 얘기를 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오버하며 말하는 그녀지만 오늘은 유독 심하다. 옆에 앉은 단미의 어깨를 때리면서 “내말 맞지?” 라고 어울려주길 바라고 있다.

그녀 역시 위태로운 빙판길을 걷는 기분으로 웃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 * *

“그래서 말이야.”

‘뭐하는 거지.’

“진짜 너무 웃겼는데.”

‘이게 아니잖아.’

“진짜라니까.”

‘이게 아니라고.’

윤정은 한바탕 웃고 난 뒤에 입을 꾹 다물었다. 말과 생각이 일치되지 않았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아닌데, 이러고 가만히 있는 때가 아닌데.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무수히 많이 하고 있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연극과 전혀 관계없는 것들이었다.

윤정은 불안했다. 어느 순간부터 대화사이에 건조한 침묵이 끼어들었고 그게 한 달 동안이나 지속되고 있었다. 리딩이 끝나고 사적인 얘기를 하는 순간이 찾아오면 윤정은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그 침묵의 간격이 점점 더 길어질까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한달 전부터 아무 말 없이 그저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는 순간이 종종 찾아왔고 그 때마다 윤정은 숨이 막혔다. 그래서 더 크게 떠들었다. 그 누구도 침묵을 인식하지 못 하도록, 이 연극부는 언제나 화목하고 활기 넘치는 곳으로 남을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에 달한 것 같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겠다. 어제 먹은 음식 얘기에 왜 그렇게 목매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윤정에게 연극부는 소중한 곳이다. 1학년 시절, 2학년과 3학년의 불화로 어렵게 준비한 연극을 올려보지도 못 하고 연극제를 마쳐야 했지만 그래도 그 과정은 너무나도 즐거웠다. 함께 웃고 함께 운다는 것만으로도 윤정은 행복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그 즐거운 공간에서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숨이 막힐지도 모르겠다. 수업만 끝나면, 아니 쉬는 시간에도 부실을 찾아 동기들과 떠들던 윤정이었지만 최근에는 토요일에만 부실을 찾았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윤정은 이 공간이 점점 삭막해져 가는 것이 너무나도 슬펐다.

* * *

‘음.’

조용해 졌다. 조금 전까지 신나게 떠들던 윤정 선배가 입을 다물고나서부터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는다. 익숙함에서 오는 휴식과 비슷한 침묵이 아닌 어색하고도 불편한 그런 침묵이 11명 중앙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 침묵은 부피가 점점 커져서 이제는 슬금슬금 뭉쳐있던 11명을 바깥으로 밀어내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이슬은 옆을 보았다. 디자인과 3인방이 슬쩍 떨어져 앉는 것이 보인다.

유림은 근석에게 뭐라 작게 말하고 있고 소연은 그게 못 마땅하는 듯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태준은 방실방실 웃고 있지만 그냥 습관처럼 보였다. 별 의미 없는 웃음만큼 건조해보이는 것도 없다. 단미와 민성 선배는 둘이서 작게 얘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종종 표정이 굳는 것으로 보아 현 상황에 대해 나름의 얘기를 나누는 중이리라.

그리고 중혁 선배.

아까부터 입술을 씰룩이며 이사람 저사람을 훑어보고 있다. 뭔가 할 말이 가득해 보이는데 정작 말은 하고 있지 않았다. 이슬은 중혁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중혁이 씁쓸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았다.

‘음. 말은 해야할 것 같은데 내가 꺼내기는 좀 그렇고.’

이슬은 연극에 큰 관심이 있어 연극부에 지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색다른 자극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이슬의 꿈은 확고했다. 부모님의 뒤를 잇는 것이다. 30년째 이어오는 국밥집. 이슬은 사골 우려내는 냄새를 맡으며 자랐다. 머릿고기 써는 아빠 옆에서, 깍두기를 담구는 엄마 옆에서 크며 이슬은 자연스럽게 이 다음은 내가 해야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사골 끓을 때 나는 구수하면서도 비린 냄새가, 각종 고기를 삶을 때 올라오는 누린내가, 아삭아삭한 깍두기에 매콤한 냄새가 이슬은 좋았다. 그렇기에 가게를 이어가는 것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그 때문에 대학교도 생각해둔 것이 없었다. 졸업과 동시에 가게 일을 돕기로 스스로 약속했다. 이미 부모님하고도 대화가 다 끝난 상황. 고3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엄마, 아빠와 같은 흐름 속으로 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확실하게 그려지는 미래의 삶. 그때문일까. 이슬은 고등학교 생활만큼은 화려하게 보내보자고 생각했고, 그 대답으로 연극부를 택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근육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미소 강사에게 강도높은 훈련을 받아도 나오는 건 웃음이었다. 미묘하게 억양이 다른 대사를 외우면서도 머리에 쥐가 나기 보다는 즐거움에 흥이 났다. 입을 의상을 손 볼 때는 어릴적 해본 인형놀이가 생각나 좋았고, 세트를 만들 때는 마치 목수가 된 기분이라 유쾌했다.

하나하나가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극부에 들어온 건 탁월한 선택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믿음에 금이 가고 있었다.

따분한 리딩.

친구들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잡담.

그리고 과자와 음료.

‘따분한데.’

이게 뭐지 싶었다. 총천연색으로 빛나던 오층 강당이 온통 회색빛이다. 말들이 가끔 오가곤 하지만 다들 죽은 말이다. 생기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는 건 힘들려나.’

이슬은 근석을 보았다. 주인공이었고 그 누구보다 자신만의 빛깔을 내던 애가 지금은 참 밋밋하게 변했다. 아니, 어쩌면 처음 가지고 있던 빛깔도 사실 위장이었을 지도 모른다.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을 보면 근석은 자기방어에 목숨을 건 애처럼 보였으니까.

‘주인공이 저래서야.’

연극부는 끝났다는 생각뿐이 안 든다.

무엇보다 미소 강사가 오질 않는다. 그 사람이 있고 없고에 따라 이렇게나 차이가 나다니. 여기 모여있는 사람들끼리 으쌰으쌰 해서 예전처럼 돌아가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해 보인다.

‘나 역시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말을 던지기는 쉽다. 홍근석! 찌질하게 굴지마! 그리고 우리 연습해요! 이렇게 말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그렇게 해서 억지로 시작하는 연극이 과연 재미있을까? 무엇보다 지금 그 말들을 해버리면 근석이 아예 나가버릴 게 뻔해 보였다. 주인공 없는 연극. 정말 죽도 밥도 안 된다.

‘다른 부나 찾아봐야지.’

여긴 이제 끝났어.

이슬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도진은…….

‘오늘은 어디로 사냥가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 * *

마루가 강당 문을 열었다. 나갈 때까지만 해도 이것저것 얘기하느라 꽤나 시끄러웠던 강당이 지금은 조용하다. 둥글게 앉아있던 11명은 어느새 조금씩 떨어져 앉아있다. 어설픈 원형 모양.

“왔네, 왔어!”

도진이 싱글벙글 웃으며 과자와 음료를 반겼다. 다른 애들 속은 잘 모르겠지만 도진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잔걱정 없이 살 놈.’

마루가 과자를 가운데 놓자 다들 한 마디씩 꺼내기 시작했다. 은근슬쩍 다시 시작되는 대화다. 여전히 별 의미는 없지만.

“센스 좋은데?”

윤정이 과자를 들면서 말했다. 마루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과자, 윤정이 퍽퍽해서 싫다고 말했던 과자다. 그런데 지금은 좋다고 한다.

“시간 잘 가네. 벌서 3시야. 그치? 얘들아?”

윤정이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몇몇은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몇몇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윤정은 그러한 반응들에 다시 혼자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까와 똑같은 풍경이다.

이게 두 시간 정도 반복되면 오늘 연극부 활등은 끝난다. 그러면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설 것이다.

마루는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한발만 걸치고 있던 입장에서 말을 꺼내려고 하니 민망하긴 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 부탁받은 일은 처리함이 옳다.

“연습하죠.”

마루가 꺼낸 한 마다에 시선이 집중된다. 다들 의아한 눈빛이다. 네가 왜 그런 말을? 제스쳐만으로도 그들의 뜻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딱 두시간 남았네요. 힘내서 연습 한 번 하고 마무리 짓죠.”

다들 서로를 바라본다. 그러자 윤정이 좋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본을 잡았다. 윤정이 행동하니 나머지들도 느릿하지만 대본을 잡았다.

“그럼 리딩 시작하자. 마루 말이 맞네. 연습도 좀 해야지.”

윤정이 그렇게 말하면서 마루에게 눈짓을 주었다. 리딩 때에는 마루가 지시문과 효과음을 입으로 대신 내주었다.

마루가 “TV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라고 말하면 리딩이 시작되는 것이다.

“리딩 말고요.”

“응?”

“연습이요. 제대로 된 연습.”

마루는 대본을 옆으로 던지고 11명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제대로 된 연습이라니?"

반문을 한 건 윤정이었다.

"동선까지 맞추면서 해요. 제가 정면에서 볼게요."

"뭐?"

"한 달째 리딩만 했잖아요. 그러니 동선 연습도 해 봐야죠. 까먹기 전에."

마루는 11명을 쓱 훑어보았다. 마땅찮다는 눈빛을 이쪽으로 쏘아보내고 있었다. 당연할 것이다. 그런 말을 해도 어울리는 사람은 선배, 혹은 미소 정도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소는 연습을 하자고 말했다.

"연습은 충분해."

윤정이 말했다. 그녀는 대본을 움켜쥐고 있었다. 눈빛이 떨린다. 마루는 그녀를 진득하게 쳐다보았다.

[이게 아닌데. 마루가 한 말이 맞는데.]

사람은 관성의 동물이다. 한 번 관성에 몸을 맡기면 어지간해서는 그 관성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지난 한 달간 연극부는 잡담의 관성, 다화회의 관성, 리딩의 관성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거기서 빠져 나오는 것.

그건 곧 변화를 뜻하고 동시에 균열을 뜻하기도 한다.

마루는 대다수의 부정적인 눈빛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아이들은 바보가 아니다. 다들 알고 있다. 뭐가 잘 못 되었는지, 뭐가 이상한지. 알고 있지만 실행하지 못하는 것 뿐이다.

분명 문제가 생길게 뻔하니까.

그리고 그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현상유지가 나은 게 아닐까?

관성.

이들은 그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루는 눈썹을 살짝 긁으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연습하죠. 이 이상 엉망이 되기 전에."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

밖에 빙판길이... 와...

자전거 끌고 다가다 요단강 언저리 찍고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