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nce Again!

Act 00340 13

* **

눈이 어둠에 적응했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바닥에 붙어있는 야광테이프였다. 첫 번째 테이프는 옷걸이, 두 번째 테이프는 책상. 나머지는 동선을 표시하는 테이프들이다.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무대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인다. 반대편 사이드커튼 뒤에 서있는 대명의 모습을 확인한 후 걸음을 옮겼다.

왁스를 머금은 무대 바닥을 밟으며 철창 안으로 들어섰다. 도욱과 지윤, 방주가 각자의 위치를 확인하고 자리에 앉았다. 일단 시작준비는 끝났다. 마루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방주에게 신호를 주었다.

“알았으니까 좀 조용히 좀 합시다!”

우렁찬 외침과 함께 불이 켜진다. 넌덜머리난다는 듯이 혀를 차며 책상 앞에 선 대명이 입고 있던 검은 점퍼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거기 서있지 말고 빨리 와요.”

사이드커튼 쪽으로 소리치는 대명이다. 대기하고 있던 아람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게 보인다. 긴장하지 말고 천천히 해라.

마루는 넋 놓고 대명 쪽을 보고 있는 지윤을 살짝 건드렸다. 극은 이미 시작 됐다. 말하고 있는 사람만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사가 없을 때 더욱 신경 써서 연기를 해야 한다.

지윤이 얼른 표정을 고치며 관객 쪽을 바라본다. 다른 애들도 예정된 동작을 하며 철창 안 분위기를 조성해갔다.

“내가 누군 줄 알아요?”

“잘 모르겠으니까 일단 들어가세요. 내일 오전에 사건관계자들 오면 자세히 얘기들어보면 되니까.”

“죄 없는 사람을 이렇게 유치장에 넣어도 되는 거예요?”

“저기요, 죄가 있으니까 우리가 구금할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정말 죄가 없다면 48시간 이후에 나갈 수 있을 테니까 걱정 마시고요.”

“아니…….”

울상을 지으며 철창 안으로 들어오는 아람이다. 무대의 시작을 알리는 연기라 긴장이 많이 됐을 텐데, 아람은 실수 없이 잘 해냈다. 마루는 맞은편에 앉는 아람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었다. 아주 살짝 웃은 다음 표정을 다잡는 아람이었다. 마루는 바닥을 집고 있는 아람의 왼팔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저런 상태로 용케 대사에 힘을 주었네. 멋진 후배다.

* * *

“조금 긴장한 것 같지?”

“어. 그래도 아직까지는 괜찮네. 큰 실수도 없고. 하지만 보고 있으면 살짝 불안하긴 해. 1학년들이 잘해주고 있지만 아슬아슬하다는 느낌이 계속 드니까. 지금은 봐줄만 하지만 저런 느낌이 계속된다면 보는 사람들도 불편해질 거야. 그럼 채점에도 영향이 갈걸, 분명.”

무대를 분석하고 있는 유진이었다. 그녀도 그 말에 공감했다. 다들 잘 해주고 있는 건 사실이다. 연극이 시작되고 5분. 대사의 막힘도 없고 동선이 번잡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유진의 말처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듯 극이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왜 그런 것일까.

“거 좀 조용히 좀 합시다! 유치장 안에서 까지 소란 피웁니까?”

“누가 소란을 피워요.”

대명과 아람이 말을 주고받는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그녀는 이 무대가 왜 빙판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위태한지 알게 됐다.

“갭이 좀 크네.”

그녀는 작게 말했다. 대명은 경찰에 녹아들어 있다. 가무잡잡한 수염을 가진, 성질 급한 사십대 경찰이 되어있다. 말투며 행동, 배를 의도적으로 내미는 버릇까지 많은 연구와 연습을 했다는 걸 알게 해준다.

1학년도 분명 잘하고 있다. 하지만 대명에 비하면 아직 어설픈 티가 난다. 따로 놓고 보면 신경 쓰이지 않을 차이지만, 붙여놓으면 차가 확 벌어져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것이다.

뭔가 안 맞는데, 예민한 관객들은 분명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연기하는 1학년들이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괜히 대명과 좀 더 호흡을 맞춰보겠다고 무리를 하는 순간 잡혀있던 균형이 깨지고 어그러질 것이다.

전문가가 아닌 자신이 느낄 정도면 채점하고 있는 심사위원들은 분명 알아차리고 그 점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다.

“한 번씩 돌아가면서 말하는 거 보니 슬슬 마루 차례네.”

유진이 턱을 끌어당기며 무대에 집중했다. 그녀도 입을 다물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 * *

움찔하는 몸짓에 필현도 놀라 잠에서 깼다. 옆을 보니 극단대표가 어설프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다. 사나운 꿈을 꾼 모양이다.

무안한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기에 괜히 펜을 쥐며 채점지를 들여다보았다. 무대구성은 어떠했는가, 주제의식은 확실했는가, 표현력은 좋았는가 등등, 각 항목에 해당하는 부분에 1에서 5점까지 점수를 줄 수 있다. 그 점수가 본선진출을 결정짓는다. 물론 경연이 끝나고 나면 세 명이서 모여 어떤 팀을 본선으로 올려 보낼지 얘기는 나눈다. 하지만 대동소이한 평가가 대부분이라 결국 채점지 점수로 기준점을 정하게 되는 것이다.

슬쩍 옆을 보니 연영과 여교수도 따분한 얼굴로 앞을 보고 있었다. 어제 여덟 팀. 오늘도 여덟 팀. 체력은 이미 어제 방전 되었다.

‘이제 세 번째니까 앞으로 다섯 팀 남았네.’

약 여섯 시간 정도를 붙들려 있어야 한다. 은근히 체력싸움이다. 몸을 뒤척이며 결리는 곳을 풀었다. 앉아서 글을 쓰는 게 생업이다 보니 허리가 상당히 안 좋다. 쿡쿡 쑤시는 허리를 앉은 자리에서 꼼지락거려 피고 있을 때였다.

귀에 호쾌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연극 초반에 들었던 목소리다. 시작과 동시에 졸았기 때문에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목소리는 좋다. 무대세트를 살피니 경찰서인 것 같다. 좀 통통한 남자애가 앞에서 연신 떠들고 있다. 경찰인가? 발성도 좋고 발음도 정확해 귀에 착착 감긴다.

앞서 나왔던 학교 애들 보다는 잘한다. 그렇다고 해서 집중해 볼 마음이 생긴 건 아니다.

약간 잠을 잔 덕분일까. 머리가 맑아졌다. 이 맑아진 머리를 꼬맹이들 재롱잔치를 보느라 썩힐 수는 없는 법.

채점지 위에 종이를 깔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상들을 적어 내려갔다. 마인드맵이다. 막힌 시나리오를 풀어내기 위해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해갈 때였다.

“요즘 애들은 고생이란 걸 모르지. 나 때만해도 저러지는 안았는데.”

거칠게 소리를 지르던 애가 잠잠해지는 순간 들려온 목소리였다. 펜대를 움직이며 글귀를 적어나가던 필현이 순간 펜을 멈추었다. 담백한 목소리였다. 힘을 주지도, 그렇다고 맥이 없는 것도 아닌 차분한 음성이었다.

단지 그뿐이었다면 필현은 고개를 들지 않았을 것이다. 음성이 실려 있는 무게감이 달랐다. 경찰 역을 맡은 애의 연기는 나쁘지 않았다. 잠깐 봤지만 거슬리는 게 없었다. 고교급에서 그 정도 연기면 칭찬해줄 만하다. 하지만 거기까지. 연극인이 갖추어야할 개성이 그 아이에게는 부족했다. 당연한 일이다. 생업도 아닌 그저 동아리에서 친구들끼리 연극하는 애한테 개성이 생겨날 리가 없다. 마냥 남과 다르다고 해서 그걸 개성이라 평하지 않는다. 연륜, 혹은 특별한 재능으로 남과 차별을 두었을 때 비로소 개성이라 부른다.

방금 그 목소리.

필현은 좁은 무대를 바라보며 눈동자를 굴렸다. 한 마디였지만 질이 달랐다. 캐스터네츠를 치며 즐거워하는 유치원 재롱잔치 속에서 누구 하나가 갑자기 바이올린을 켠 느낌이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철창 안에 있었다. 양복을 갖춰 입은 친구다. 그레이톤 정장을 고등학생이 입고 있는데 어색하지가 않다. 네이비톤의 캐쥬얼한 정장이 아닌, 중년남성이 입을 법한 그레이톤이 어울리는 학생이라니. 거기다 연극소품으로 가져온 정장은 대부분이 어른들 것을 가져오기 때문에 몸에 안 맞는 경향이 있는데, 저 친구의 정장은 맞춤정장처럼 기장이 깔끔했다. 오랫동안 입어왔던 것처럼 이질적이지가 않다.

철창 쪽에 기대앉은 그 애가 반대편에 있는 여자애와 대화를 나눈다. 또렷한 정신으로 처음으로 극에 집중했다. 여자애는 극 내에서 사기로 잡혀들어 온 상황인 듯했다. 그리고 정장 입은 애는 대기업 간부 쯤으로 보인다.

“보는 눈이 그렇게 없어서야. 그보다 대양그룹 누구랑 아는지 좀 불어봐.”

느긋하게 턱을 괴며 여자애에게 말한다. 그 천연덕스러움에 필현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몸에서 오만함이 묻어난다. 사람을 밟고 올라선 사람들이 자주 보여주는 특유의 거만한 눈빛을 그 아이는 하고 있었다. 저런 눈빛을 어디서 봤을까. TV에서? 아니면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연기력은 결국 경험한 양에 비례할 수밖에 없다. 고등학생. 좁디좁은 세상에서 이제 막 사회라는 곳을 알아가는 시기다. 말로는 사회가 얼마나 힘들고, 더럽고, 치사한 곳인지 지겹도록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괜히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있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고등학생이 사회의 엄정함을, 냉혹함을 맛보았겠는가. 시험 성적이 떨어지면 자괴감이 들고 혼이 나겠지만 내쳐지지는 않는다. 결국은 보호받는 입장이다. 그 상황에서 겪는 문제들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사회에서 받는 고충에 비교하면 새 발의 피다.

그렇기에 고등학생 연기자들이 사회문제를 토로하는 연기를 할 때 어설퍼 보이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연기하려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근데 저 아이는 마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다. 대사가 대사로 들리지 않고 생생한 말로 전해져 온다.

“이게 참 웃긴 일이야. 때린 놈은 난데 맞은 놈이 죄송하다고 이렇게 선물까지 주고 말이야.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들 아쇼?”

비릿하게 웃으며 일어선 남자애가 관객들을 한 번 쓸어본다. 부자연스러움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연기는 감각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본능적으로 펼쳐보이는 듯한 연기 뒤에는 수십, 수백 번 반복되어온 철저한 계산이 깔려있다.

저 조소를 머금기 위해 저 꼬마는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을 것인가.

필현은 펜을 놓았다. 머리가 말했다. 이 연극은 볼만한 가치가 있는 연극이라고.

양옆에 앉은 사람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꾸벅꾸벅 졸기만 했던 극단대표가 깍지 낀 손으로 턱을 받치고 굉장히 매서운 눈으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다. 정확히는 저 소년이리라.

옆에 있는 교수도 마찬가지. 꼰 다리를 펴고 허리를 곧추세운 상태에서 무대를 보고 있다. 언제나 옆으로 미뤄둔 채점지가 그녀 손에 들려있다. 기록하고자 하는 의지가 여기까지 전해져온다.

그때 다시 소년의 입이 벌어졌다.

* * *

치고 나갈 수도 있었다. 보다 과장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좀 더 신나는 연극이 되었겠지만 조화가 깨졌을 것이다.

마루는 대사를 치면서도 주변을 살폈다. 아차 싶은 순간이 아직까지는 오지 않았다. 다들 무대에 적응한 것이다. 이 흐름을 이끌고 가야한다.

“참 웃긴 일이야. 그 부하직원은 옳은 말을 했어. 직언을 한 거지. 옛 말에 이런 말이 있잖아? 쓴말, 직언을 하는 부하는 곁에 두라고. 그가 바로 충신이고 피와 살이 될 거라고. 근데 말이야, 써도 너무 써야지. 좀 달달하게 말하면 어디가 덧나나? 어? 지가 뭔데 상사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세상은 말이야, 이빨로 사는 게 아니야. 세상은 권력이야. 그리고 힘. 마지막으로 정치. 적당히 손도 비빌줄 알고 입에 침 바르면서 아양도 떨어야 이 밀림 같은 회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건데. 젊은 놈들이 패기만 있어. 정의만 따진다고! 정의가 밥 먹여 주나?”

호흡을 정확하게 나누어 대사를 쳤다. 몇 번이나 점검하며 호흡선을 파악했다. 긴 대사는 생각 없이 치면 안 된다. 어디서 쉴 것인지, 어디서 시선을 돌릴 것인지, 모든 것을 정해두고 시작해야한다.

감정 역시 마찬가지. 혼자서만 격해지면 죽도 밥도 안 된다. 마음 같아서는 과격하게 몰아치고 싶지만, 받아주는 후배와의 호흡이 어긋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끝장이다.

리듬을 후배들 쪽에 맞춰야한다. 그 리듬이 망가지지 않는 선에서 차분한 연기를 이어간다면 극은 안정적으로 끝마칠 수 있을 것이다.

지윤의 눈을 들여다보며 대사를 쳤다. 그토록 연습해왔던 농염한 미소는 보여주지 못 했지만, 어쨌든 대사 실수는 하지 않는 지윤이었다. 연습한 모든 것을 무대 위에서 펼쳐보일 수 있다면 그건 프로일 것이다. 오늘은 이정도도 감지덕지다.

그때였다. 다음 순번인 아람이 일어서는 순간에 비틀거렸다. 아람 잘 못이 아니었다. 신발 굽이 떨어지는 바람에 중심을 못 잡은 것이었다. 치명적인 실수는 아니나 타이밍을 한 번 놓친 아람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위험하다. 대사를 한 번 놓치면 다음 대사가 순간적으로 떠오르지 않게 된다. 연상작용이 막히는 것이다. 멜로디에 잡음이 끼면 다음 멜로디가 잘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대명은 거리가 멀다. 게다가 정면을 보고 있어서 이쪽 상황을 전혀 모른다. 옆에 있는 도욱 역시 어안이 벙벙하다. 실수가 있을 것이라고 누차 얘기했지만, 직면한 실수 앞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란 힘든 법이다.

지윤은? 케어해 주기에는 부족하다. 방주는 다음 대사를 쳐야한다.

순식간에 생각을 마친 마루가 앞으로 나섰다. 대본에는 없는 행동이다. 아람 앞으로 다가가 어깨를 꽉 잡았다.

“사기꾼 아가씨. 정신 좀 차리시지.”

정신 차려요, 아람이 원래 했어야할 대사다. 자신의 역은 거만한 기업간부. 이정도 행동은 개연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힌트를 받은 아람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진다. 역시 기본적으로 똑똑한 애다. 금방 페이스를 찾고 대사를 이어간다. 마루는 돌아서면서 관객들이 보이지 않도록 엄지를 추켜세웠다. 아람이 옅게 웃으며 앉는다.

============================ 작품 후기 ============================

전.

전!

배가 불뚝 나온 것 같습니다.

다들 몸무게가 느셨겠죠?

...살찌는 추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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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언제나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쿠폰, 고맙습니다.

완결작 :

인두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