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nce Again!

Act 00341 13

그때의 연기는 기억을 반추한 것 뿐이었다.

작년, 강환에게 연기를 배울 당시 짧은 기간 동안 무대에 섰던 적이 있다. 5분에서 10분정도 길이의 단막극을 본 공연 전에 한 것이다. 그때 했던 역은 버스기사였다. 역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 그건 실제로 자신이 했었던 일이었다. 배우의 가면을 쓸 필요도 없었다. 덤덤하게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며 객석에 앉아있는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해왔던 것을 풀어낸 것에 불과하니까.

무대 뒤에서 칭찬을 들었을 때 솔직하게 좋아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게 연기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배우는 모방에서 시작하지만 궁극적으로 창조해내야만 하는 직업이다. 답습은 불안함이 없지만 발전도 없다.

마루는 생각했다. 과거의 자신을 잊을 수는 없는 법이다. 버릴 수도 없다.

환생하기 전 한마루와 마흔 다섯을 먹은 한마루는 엉킬 대로 엉킨 실타래처럼 이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소년 마루의 도전정신과 장년 마루의 보신주의는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 융화되고 있지만 여전 한쪽 성향이 두드러지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성격이 그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기억은 착실하게 자신의 탑을 쌓아갔다. 마흔 다섯 살 마루가 가지고 있던 시간대의 기억 위에 새로운 기억이 덧씌워지고 있다. 선명히 떠올랐던 딸애의 얼굴이 흐릿해지고 그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 어떤 얼굴을 하게 되는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언젠가는 마흔 다섯의 마루가 가지고 있던 모든 기억이 무의식의 수면 아래로, 아니 그보다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때가 언제인지 아마 신만이 알테지.

기억에 의존하는 연기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이 든 건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아슴아슴한 기억의 뿌리를 붙잡아 떠올린 지식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토해내는 건 언젠가 분명 막혀버릴 것이다.

그렇기에 사전조사에 열을 올렸다. 분명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기업 간부가 어떤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지, 발표현장에서 무슨 표정을 짓는지, 인사철만 되면 하염없이 높아지던 콧대와 노골적으로 선물을 바라는 손의 모양새까지 집중하면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기억을 그대로 연기에 끌어다 쓰지 않았다.

확실히 불편한 일이었다. 당장 끌어다 쓸 수 있는 예금이 통장에 존재하는데 그걸 무시해야하니까.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조사에 나섰다. 알고 있는 사실을 덮어두고 현시대의 지식으로 탑을 쌓아나갔다. 기업 간부역의 이미지를 완성시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사견이 한 번 더해진 이미지이나 상관없었다. 아버지를 통해 들은 그 간부의 모습을 토대로 자신의 캐릭터를 구축해나갔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간부의 이미지와 아버지가 알고 있는 간부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납득할 수 없는 것들도 많았다. 인정할 수 없는 것들을 인정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기존의 것을 깨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작업을 이어갔다. 그런 과정 속에서 마루는 생각의 폭이 넓어지는 것을 느꼈다. 대조하고 받아들이고 버리고.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이 아니게 하는 일은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었다.

간부 캐릭터의 틀이 잡히는 순간 마루는 이것이야 말로 캐릭터에 개성을 부여하는 작업임을 깨닫게 되었다. 타인의 말속에서 형태를 빌려온 캐릭터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인상과 부딪히고 깨지고 다시 합쳐지는 과정에서 조금 더 깊이 있는 대상으로 바뀌었다.

안정화 과정. 성격과 성향이 중화되고 있는 것처럼 기억 역시 그와 비슷한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마흔 다섯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 남게 될 인식에 혼란이 생기지 않도록.

“없는 것들은 좀 조용히 좀 해! 거지들이 예부터 목청만 좋다고 했지.”

마루는 객석을 보며 소리쳤다. 그 후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무대 위 배우들을 훑어보았다. 몇 번의 실수가 있었지만 엎어지는 일 없이 여기까지 왔다. 극은 커튼콜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남은 대사도 몇 안 된다.

대명이 부드럽게 대화를 넘겨받는다. 확실히 안정감이 있다. 홀로 대사를 치며 무대를 종횡하는 대명을 보며 마루는 자리에 앉았다. 대명의 대사가 끝나면 차례차례 마지막 대사를 치고, 그 후에 한바탕 소란이 인 후 마무리다. 잘게 떨고 있던 1학년들도 완전히 극에 집중했는지 더 이상 떨지 않았다. 눈에 자신감이 실려 있고, 입술은 언제라도 대사를 칠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 연극, 깔끔하게 마무리 되리라.

* * *

“잘 하는데, 잘하기는 한데…….”

유진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메이크업까지 해주면서 우성고 연습을 도운 이유는 마루를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1년 사이에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를 갖춘 마루의 비밀이 궁금해서였다. 특별한 연습방법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좋은 강사님이 있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주변에 뛰어난 친구가 있어 배움의 시너지가 높아지는 건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본 마루는 모든 사항에 해당되지 않았다. 예전에 마루가 우스갯소리로 자신의 연기력의 비밀을 알고 싶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때는 농담으로 받았지만 농담이 아니라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됏다. 마루 주변에 굉장한 사람들이 포진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사람들과의 교류가 잦은 건 아니었다. 항상 좁은 연습실에 모여 실력이 조금 아쉬운 후배들과 연기연습을 할 뿐이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나날이 늘어만 가는 연기력.

정말 타고 났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상황이었다.

오싹한 연기력. 같이 대본리딩을 하던 배우들조차 무의식적으로 쳐다봤을 정도의 장악력. 그리고 나이에 맞지 않는 표현력까지. 모든 것이 자신 위에 있다고 생각했고, 탐이 났고, 욕심을 부려 따라다녔다.

“그런데 왜…….”

우성고의 연극은 매끄러웠다. 아니, 매끄러워졌다. 극 초반에 있었던 긴장감은 완화됐고 난 뒤부터 물 흐르듯이 이야기가 진행됐다. 마루와 대명은 굳건하게 자신의 역을 연기했고, 나머지 애들은 두 사람에게는 못 미치지만 나름의 연기를 펼치며 완성도를 높였다. 불평할 거리가 없는, 잘 되어가고 있는 연극이지만 유진은 점점 답답해져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루의 연기가 재미가 없었다. 리딩현장에서 보여줬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작년,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톡톡 튀었던 연기력이 어떤 식으로 변모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분명 변화가 있겠지, 뭔가 색다른 것을 보여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관람을 이어갔지만 극이 끝에 도달하고 있는 이 순간까지 마루는 특색 있는 연기를 보여주지 못 했다.

오히려 실력이 줄어버린 거 아니야?

그럴 가능성도 있다. 쟁쟁한 배우들 사이에서 송곳 같은 모습을 보였던 친구지만, 평범한 애들과 오랫동안 연습을 하다 보니 하향평준화가 되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아니지. 하향평준화는 아니다. 어쨌든 연극 자체는 흠 잡을 곳 없이 이어지고 있으니까. 실력이 모자란 것은 아니다. 다만 심심해진 것뿐이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무엇인가가 결여되었다. 이런 무대를 보려고 일요일을 반납한 건 아닌데.

심드렁해진다. 괜히 보러 왔나 싶을 정도다. 한껏 높았던 기대치가 한순간에 깎여나가니 몸에서도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내심 질투를 했던 대상이다. 그 실력을 부러워했다. 동시에 같은 촬영장에 서게 될 순간을 기대하게 만든 상대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라이벌이다. 마루가 굉장한 모습을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승부욕이 불타올랐는데, 오늘 그 활활 타오르던 승부의 모닥불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저렇게 연기하는 애는 연기학원에도 널리고 널렸다. 경쟁할 라이벌을 잃고 좋은 친구를 얻게 되는 걸까.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긴 얘도 그렇게 말했지. 잘하긴 했지만 뭔가 대단한 건 없었다고.“

유진은 옆에 앉아있는 그녀를 보았다. 마루가 드라마 현장에서 별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 했다는 말이 이제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그때의 모습은 그저 우연이었을까. 순간이 빚어낸 착각에 불과했던 것일까.

“……저렇게도 할 수 있구나.”

그때였다. 그녀가 말하는 게 들렸다. 유진은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마루, 너무 잘하는데.”

“잘한다고? 아, 잘하긴 잘하지. 하지만 난 오늘 저 모습은 별로네.”

“왜? 어째서?”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다. 유진은 설명했다. 특별할 것없는 심심한 연기라 기대에 못 미친다고.

그러자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마루의 연기는 정말 대단해. 아니, 이건 연기문제가 아닐지도 몰라. 갑자기 단어가 생각이 안나네.”

그녀는 들뜬 눈을 하며 정면을 보았다. 유진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마루의 연기 어느 부분을 봐야 대단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일까. 잘 한다는 말과 대단하다는 말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봐봐. 마루와 대사를 주고받을 때 표정을. 분명히 달라. 저 순간에 애들 표정이 더 다채로워져. 훨씬 더 생동감이 살아나. 저기, 독백할 때는 불안해 보이는 애가 마루와 호흡을 맞추면 안정적이게 변해. 아니, 안정적인 것만이 아니야. 더 잘하게 돼. 표현에 자신감이 실려. 그렇게 유도하고 있는 거야, 마루가.”

확신에 찬 얼굴을 하며 말하는 그녀였다.

유도를 한다고?

유진은 사실 마루만 보고 있었다. 전체적인 상황은 머릿속에 들어오고 있었지만 집중은 마루 개인에게만 하고 있었기에 주변 인물들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 했다.

그런데 그녀의 말을 듣고 무대를 보니 확연히 달라지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마루가 개입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의 차이가 극명했다. 하지만 그 차이 때문에 이질감이 드는 건 아니었다. 단지 활기가 돌아 보기에 더 편해지는 것이다.

“그래. 그 말.”

그녀가 까먹었던 단어가 이제야 생각 났다는 듯이 이쪽을 보며 말한다.

“마루는 지금…….”

* * *

“굉장히 노련…… 하군요.”

“노련미라고 해도 될 정돈데요.”

필현은 옆을 보았다. 노련미라. 극단대표는 이제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무대를 보고 있었다. 여교수 역시 마찬가지. 몸은 의자에 파묻고 있지만 전방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어졌다.

어제만 해도 따분한 시선과 지루한 하품을 일삼던 두 사람이었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연극은 재미부분에서 많은 점수를 주기 힘든 게 사실이니까. 사명감으로 극을 보긴 하지만 조는 시간도 많았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신경을 곤두세우며 극에 집중했다. 단 한명의 소년 때문이다.

“우성고라.”

“저 친구 이름이 뭐죠?”

“잠깐만요.”

필현은 채점지 뒤에 있는 참가학교 명단과 학생 명단을 들췄다. 위에서 아래로 쭉 훑어보던 중 우성고가 눈에 들어왔다. 담당교사의 이름과 작품이 보이고, 그 아래 참여 학생이름이 보였다.

“회사원 한마루.”

“한마루?”

“아는 이름이세요?”

“아니요. 그냥 특이해서요.”

필현은 극단대표 쪽을 보았다. 극단대표도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말했다.

“제가 청소년 연극제 심사를 꽤 오래 해왔습니다. 많은 친구들을 봐왔죠. 그 중에는 정말 그 나이라고 믿기지 않는 연기력을 선보이는 학생도 많았습니다.”

극단대표가 팔짱을 꼈다.

“그리고 저 친구도 그런 특별했던 학생들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의 느낌을 가지고 있군요. 개인이 잘하는 건 오히려 쉽습니다. 거기에 눈에 확 뛰고요. 하지만 저런 식으로 조율해서 이끌고 올라오는 건 또 다른 재능이죠. 봐보세요. 저 아이가 대화에 참여할 때와 안 할 때, 무대 공기가 달라져요. 편안 대상이라 긴장이 풀리는 수준이라면 놀라지 않았겠지만, 저 친구는 억양과 톤, 그리고 호흡으로 텐션을 조절하고 있어요.”

“단체예술이 뭔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 같네요. 원래 저 나이 때에는 튀고 싶어 하잖아요? 개인상 욕심도 있을 거고. 근데 쟤는…… 전체를 위해 맞추는 것 같아요. 하면 더 할 수 있는데 자제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렇다고 엉성하지 않아요. 밸런스가 좋아요.”

극단대표와 연영과 여교수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필현도 그 말에 공감했다. 이끌어 간다는 걸 아는 친구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에너지를 주변에 나눠줄 줄도 아는 것 같다.

배우들도 같이 촬영하기 좋은 배우가 있다고 한다. 바로 시너지효과를 내주는 배우다. 성격상 안 맞아도 같이 촬영에 들어가면 자신의 연기력까지 끌어올려주는 배우. 조연들 중에 그런 배우들이 많다.

충무로에서는 그런 조연배우들을 자신의 영화에 끼워 넣기 위해 발품을 판다. 해서 나타난 결과가 극장에 걸리는 5개의 상영영화 중 4개의 작품에 같은 조연배우가 등장하는 것이다. 농담 같지만 실제로도 있는 일이다.

‘힘을 끌어내는 친구라.’

필현은 숨을 삼키며 마지막으로 치닫는 연극을 감상했다. 양옆에 앉은 심사위원들도 숨을 죽이는 게 느껴졌다. 지루한 무대에서 발견한 재미난 물건에 대한 관심도가 더욱 높아져 간다.

============================ 작품 후기 ============================

어제는 헉헉 거리며 퇴고 없이 올렸더니 오타 투성이었네요.

올리고 얼른 수정하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 *

붕어빵 장사가 벌써 나왔네요.

조금 쌀쌀해 진다 싶더니...

팥과 슈크림.

두개의 앙상블은 가히 세계 최고 입니다.

간혹 피자 붕어빵이 보이지만 정도인 팥과 슈크림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슈크림도 정도입니다!)

곧 추워지겠네요.

군고구마도 빨리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 * *

추천, 언제나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쿠폰, 고맙습니다. 덕분에 글 씁니다.

완결작 :

인두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