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nce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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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명 빛은 꺼지지 않았지만, 마루의 할 일은 끝났다. 바닥에 엎어지는 것으로 시작해, 체포당해 끌려가는 것으로 출연씬을 마무리 지었다.

“수고했어.”

주현이 페트병을 내밀며 말했다. 보리차가 들어있다. 뚜껑을 따 한 모금 마셨다. 그제야 잊고 있었던 통증이 슬며시 올라온다. 가죽 재킷을 벗고 보호대를 풀었다. 손가락을 세워 팔뚝을 눌러봤는데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닌 것 같다. 충격에 근육이 놀란 정도라 하루 정도 지나면 괜찮아질 것 같다.

“많이 아파?”

“아니요. 그렇게 아프지는 않아요. 근데 아직 촬영 남았죠?”

“나야 남았지. 내가 택시 불러줄 테니까 먼저 가.”

주현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도로 뺀다.

“지갑 매니저한테 있네. 같이 가자.”

밴으로 가려는 주현을 마루가 불러세웠다.

“촬영장에 잠깐 있어도 될까요? 견학 좀 하다가 가고 싶은데.”

“상관없을걸? 내가 PD님에게 물어볼게. 아마 괜찮다고 할 거야.”

주현이 PD에게 다가갔다. 그동안 마루는 보호대와 재킷을 의상관리 스태프에게 반납했다. 옷을 받은 스태프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거친 바닥에 긁혀 가죽이 상한 재킷 때문이리라.

“죄송해요. 최대한 안 긁히게 한 건데 보니까 그렇게 됐네요.”

“어, 아니야. 수선하면 되니까. 고생했어.”

대놓고 짜증을 부리려던 건 아니었는지 스태프가 문제없다며 웃어준다. 고개를 꾸벅이고 돌아선 마루 귀에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냐는 호통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조금 전 재킷을 받아준 스태프가 40대 여성에게 한소리 듣고 있었다. 스태프와 잠깐 눈이 마주쳤는데 사죄하듯 맞잡은 두 손을 까닥거려 얼른 가라는 손짓을 주었다. 괜히 미안해져 재차 고개를 숙였다. 여성의 목소리는 그 뒤로도 한없이 높아져만 갔다.

“직급이 깡패지.”

보리차를 마시며 현장을 둘러보았다. 경찰 인력으로 동원된 보조출연자들을 향해 호통을 치는 반장이 보인다. 자신보다 연장자로 보이는 출연자에게도 삿대질하며 야, 너, 거기를 연발하고 있다. 병아리처럼 한곳에 뭉친 보조출연자들에게 빠르게 식사를 해결하고 오라며 30분 후 다시 모이라고 지시한다. 마루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우면산 안쪽으로 파고든 곳. 오른쪽에서는 차들의 무거운 소리가, 왼쪽에서는 산의 둔중한 침묵만이 가득한 이 외딴섬 같은 곳에 식당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나마 가까운 곳이 북쪽에 있는 예술의 전당인데, 가려면 산을 넘어야 할 판이다. 거기다 대절한 버스는 잠든 채 대기 중이다.

스태프들은 도시락을 받아먹기 시작했지만, 보조출연자들은 갈팡질팡하며 스태프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반장은 떨어진 곳에서 편하게 도시락을 먹고 있다.

쓴웃음이 나오려는 걸 보리차로 눌러 삼키고 있을 때 눈앞으로 도시락이 내밀어 졌다. 앞에 PD가 서 있었다.

“밥 먹어야지.”

“아, 예. 감사합니다.”

“촬영 지켜보고 싶다고 했지? 얼마든지 그렇게 해. 모니터 본 적 없으면 옆에 와서 구경해도 되고. 덕분에 오늘 한숨 돌렸으니까 그 정도는 해줘야지. 이 인원 오버차지 나면 안 그래도 예산 빠듯한데 큰일 날 뻔했어. 음, 그러니까…….”

PD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마루 얼굴을 쳐다본다. 마루는 그 모호한 웃음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에 먼저 말했다.

“한마루 입니다.”

“그래! 한마루. 이름을 잘 기억 못 해서 미안해. 어쨌든 편하게 구경하다가 가. 그리고 이거는 출연료. 학원 쪽에 주는 거 없이 다 주는 거니까 따로 받았다는 말은 하지 말고. 원래 3달 뒤 입금인 거 알지? 내가 신경 써준 거야.”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돌아가는 PD였다. 인력시장에 나가 일하다 보면 알게 되는 건 중간에 전화 돌리는 놈들이 알부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수업받는 학생과 현장 사이에 학원이 있다. 수업료에다가 중개료까지 걷고 있으니, 순이익이 하늘을 뚫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현장을 소개해준 최 강사 혼자 커미션을 챙기는 것일 수도 있고. 어딜 가나 손해를 보는 건 개미일 뿐이다.

도시락 뚜껑을 따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판자 위에 앉았다. 김치를 입에 넣고 씹고 있는데 저 멀리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보조출연자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씹던 김치에 모래가 낀 것처럼 깔깔해졌다.

마루는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길가에 누워 구걸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 돈을 꺼내본 적은 손에 꼽으며,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 적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현장에서 찬밥신세 받았던 한 명의 노동자로서 저들의 눈빛을 무시하고 꾸역꾸역 밥을 넘길 정도로 무정하지는 않다. 뚜껑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조출연자 수는 11명 정도. 경찰 대역이라 건장한 체구의 남자들이 대부분이지만 다른 역 때문에 왔는지 왜소한 어른도 있었다.

담당 PD에게 저들의 식사를 해결해달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해결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었으면 진즉에 밥을 대령했을 것이다. 할 의욕이 없는 사람에게 가서 도와달라고 말하는 건 눈치받는 짓이다. 마루는 PD에게 눈총을 사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 마루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중년남자에게 도시락을 내밀었다.

“드세요.”

남자가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입술을 비죽거리며 휙 낚아채 간다. 돌아서며 마루를 흘겨본 남자가 철근 위에 앉아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마루는 어깨를 으쓱이며 돌아섰다. 선의가 항상 보답 받는 건 아니다. 그러니 돕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그 순간 대가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한줄기 웃음이라도 기대하고 베푸는 순간, 나의 도움을 고마워하지 않은 상대에 대한 시기와 미움만이 남을 뿐이다.

“어, 마루 맞지?”

누군가 아는 척을 했다. 마루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사람을 보았다.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는 남자, 박우주가 있었다. ‘청춘시대’ 보조출연을 나갔을 때 만났던 사람이다.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남자가 기억에 남아있다.

“안녕하세요, 형. 보조출연 오셨어요?”

“어. 아까 연행되서 나가는 게 너였구나. 왠지 익숙하다 싶더니. 너 원래 이 드라마 출연하고 있었어?”

“아니요. 어쩌다 보니 하루 대타로 오게 됐네요.”

“그렇구나.”

“식사는 아직 못 하셨죠?”

“먹으라고 하는데 갈 곳이 있어야지. 반장님한테 말씀 좀 드려보려고.”

마루는 우주 뒤에서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보조출연자들을 보았다. 저 사람들을 대표해 우주가 나선 것이리라. 사람 착한 건 여전하네.

“뾰족한 수는 없을 걸요.”

“그렇긴 하겠지.”

쓰게 웃는 우주였다.

“도시락 고맙다. 저분 좀 차갑게 보여도 그렇게 나쁜 분은 아니야. 사정이 좀 많아서.”

“사정없는 사람 어디 있겠어요. 신경 안 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때 촬영장 안쪽으로 밴이 들어왔다. 주현의 밴이었다. 자고 있어야 할 매니저가 하품을 찍 내뱉으며 차에서 내렸다. 뒷문을 연 매니저가 종이상자를 들고 이쪽을 향해 걸어온다.

“이것 좀 들고 하세요. 성에는 안 차시더라도 허기는 가실 겁니다.”

매니저가 내려놓은 상자 안에 햄버거와 음료수가 들어있다. 보조출연자들이 다가와 고맙다고 말하며 햄버거를 집었다. 아까 도시락을 받은 아저씨도 부랴부랴 뛰어와 햄버거를 낚아채 간다.

“마루라고 했나? 너도 하나 먹어.”

“고맙습니다.”

박하지 않게 두툼한 패티가 들어간 햄버거다. 매니저도 햄버거를 물며 쭈그려 앉았다.

“주현 누님이 사주신 건가요?”

“어. 아까 전화가 와서. 저분들 식사 못 하시는 것 같다고 밥 좀 사다 달라고 하더라. 덕분에 내 잠시간이 달아났지만. 누님도 참 너무해. 자라고 했으면서 일 시키고 말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매니저는 흐뭇한 얼굴로 햄버거를 먹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주현 배우가 사는 겁니다, 라고 한마디 할법하건만 매니저는 그저 맛있게 드시라고만 연이어 말했다.

햄버거를 물며 터널 안쪽을 보았다. 대본을 들여다보며 집중하고 있는 주현이 보인다. 한창 바라보고 있으니 주현이 잘 먹으라는 듯이 손을 흔들어준다.

“안주현하고 아는 사이야?”

옆에 있던 우주가 작게 물었다. 매니저는 박스를 챙겨 차로 돌아간 상태였다.

“예.”

“진짜? 이야, 너도 배우긴 배우구나.”

“형도 배우잖아요.”

그 말에 우주가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내 작게 기침을 하며 말을 잇는다.

“사실 이번에 드라마 캐스팅됐어. 예전에 다니던 학원에서 오디션을 따로 열었는데, 원장님이 한 번 봐 보라고 해서 덕분에 응시는 했거든. 별 기대 안 하고 있었는데 연락 왔어. 됐다고.”

“축하해요. 이제 대스타 되는 일만 남았네요.”

“스타는 무슨.”

아니라며 손을 내젓는 우주였지만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떠 있다. 마루는 진심으로 그가 이번 역을 계기로 삼아 성공하길 바랐다.

“근데 어떤 드라마에요?”

“사극이야. RBS에서 다음에 방영할 거.”

“정말요? 저도 거기 나가는데.”

“진짜?”

“예. 거지 역이요.”

“그래? 잘하면 볼 수 있겠네.”

“그랬으면 좋겠네요. 잘 좀 부탁합니다. 저 좀 챙겨주세요.”

“야, 내가 뭘 챙기냐.”

서로의 얼굴을 보며 옅게 웃는 두 사람이었다. 보조출연자들이 햄버거를 다 먹어갈 때쯤 스태프가 다가와서 준비하라고 말했다. 다음 씬으로 넘어갈 모양이다.

“나 간다. 볼 수 있으면 촬영장에서 보자.”

“예, 형. 그때 전화 드릴게요.”

“그래.”

점퍼를 입고 터널 입구로 달려가는 우주였다. 마루는 보조출연자들이 버리고 간 햄버거 포장을 주워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멀리서 반장이 보조출연자들에게 손가락질하는 게 보인다. 옆을 지나다니는 스태프들은 그 광경을 보면서 별말을 안 했다.

“혼자 착한 놈 되는 순간 욕먹거든. 너만 착하냐고.”

주현의 매니저가 옆에 와 있었다.

“가자. 누님이 태워다주고 오래. 역까지면 되지?”

마루는 “예”라고 대답하면서 일어섰다. 배우들의 연기를 좀 더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이쯤에서 물러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언제쯤이면 사람 대우해줄지. 나도 저거 오랫동안 해봐서 잘 아는데, 개차반 같은 반장에 스태프들이 너무 많아. 물론 다정한 사람도 있긴 한데, 어차피 하루 보고 안 볼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 막 대하는 인간들이 더 많으니까. 스태프, 지들도 윗사람에게 깨지는 처지에 엑스트라를 갈군다니까.”

“그렇게 해서 하루를 버티는 거겠죠. 그래도 여기에는 괜찮은 분이 계신 것 같아요.”

마루는 재킷을 받아주던 의상 스태프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 괜찮지.”

매니저도 동의했다.

좋은 사람은 어디에서나 티가 나는 법이다.

마루는 차에 올라타 현장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조명이 비추는 곳 아래 스타가 있고, 그 주변에 빛을 받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이 서 있다. 드라마가 완성되고 나면 제작진 명단에 이름 석 자만 오를 사람들. 누군가에는 찬란한 촬영장이자, 누군가에게는 지겨운 일터일 그곳을 눈에 담으며 마루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입안에 맴도는 몇 마디였다.

* * * *

"눈빛 참 괜찮네."

"진짜 좋은데요."

"한 번 쓰고 버리기에는 뭔가 아까운데."

주현은 부채질을 하다가 PD와 조연출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모니터 앞에서 집중하고 있는 두 사람 뒤로 다가갔다. 카메라가 송신한 화면을 그대로 띄워주는 모니터에 아까 전 찍은 화면이 재생되고 있다. 마루가 제압당하는 장면이다. 카메라가 자신의 얼굴을 훑은 후 꺾인 팔목과 마루의 얼굴까지 느리게 담아냈다. 바닥에 엎어진 마루가 살짝 비틀린 입매를 하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황혼의 발악' 대본 리딩때도 느낀 거지만 날선 분노를 표현하는데 참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것 같다. 지금도 어떤 캐릭터인지 전혀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암살자라는 키워드 하나가지고 정말 괜찮은 그림을 뽑아냈다.

"얘 뒤에 어떻게 되는데요?"

주현이 물었다.

"대본이야 작가 양반하고 상의해 봐야하긴 하는데. 의외로 임팩트가 있단 말이지. 한번 쓰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마스크야."

"취조 씬이라도 하나 집어 넣죠?"

슬쩍 운을 띄웠다.

"그것도 괜찮네. 이 조직 배후는 아직 밝혀진 게 아니니까. 작가 양반한테 무편집본 보여주고 의견 좀 들어야겠어. 야야, 작가님한테 문자 한 통 넣어봐. 시간 좀 되시냐고."

조연출이 얼른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주현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마루에게는 도움을 받았다. 받은 이상 갚아야하는 게 사람. 스쳐 지나가버릴 기회일 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바람은 불어넣었다. 이게 마루에게 도움이 된다면 좋을 텐데.

"아, 주현 씨."

"네?"

"끝나고 회식할 건데, 갈거죠?"

"저한테 한 소리 들으실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걱정 마세요. 절대 술 안 권할 테니까."

"그럼 갈게요."

PD가 엄지를 세우며 웃는다.

============================ 작품 후기 ============================

응답하라 1988.

배우 성동일.

눈물샘에서 눈물을 모두 뽑아내는 그분의 위력이란...

덕분에 들국화 걱정말아요, 그대를 하루 종일 흥얼거리게 됩니다.

이거 한 달은 갈것 같네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함께 노래합시다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모두 편안히 주무시길

* * *

추천, 언제나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쿠폰, 고맙습니다. 덕분에 월세 냅니다.

완결작 : 인두겁

* * *

근데 조아라가 좀 아픈가 보네요.

접속이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