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nce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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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매번 설렌다. 익숙해진 세트장이지만 올 때마다 가슴이 뛴다. 방송국 로고가 찍혀있는 차량을 보고 있으면 잠깐 멍해지기도 한다. 내가 정말 시트콤을 찍고 있구나.

“토순아.”

“어. 왔어?”

그녀는 다가온 지석에게 손을 흔들었다. 토순이. 학교에서 얻은 별명인데, 어느 순간 만나는 사람마다 다들 그 별명으로 불렀다. 이름으로 불리면 어색할 정도다.

“오늘 촬영하면 당분간 안 오겠네.”

“다음 대본에 등장 씬이 없으니까. 이러다가 아예 못 나오는 거 아닐까.”

“방송 나가고 나면 저 귀여운 애 누구냐고 시청자들이 엄청 물을 테니까 그럴 염려는 없네요.”

“에이, 설마.”

"음, 이번 건 내가 말해놓고도 어처구니가 없네. 취소할게."

하하 웃으며 세트장으로 들어갔다. 입구 좌측에는 주인공 가족들의 거실이 만들어져 있다. 직각으로 놓인 소파와 가운데 자리한 좌식탁자에서 이 시트콤의 모든 것이 시작된다.

촬영이 먼저 끝나면 먼발치에서 주연 배우들의 연기를 구경하곤 했다. 소파 끝자리는 최태식 선생님 자리, 그 옆은 안정호 선생님, 이해숙 선생님은 언제나 바닥에 앉아 효자손으로 다른 사람을 콕콕 찌른다. 그리고 자신보다 서너 살 많은 배우가 대선배들 사이에서 연기하게 되는 것이다. 넉넉한 웃음이 가득한 촬영장은 정말 시트콤처럼 재미난 일들이 많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그때마다 저분들과 같이 연기를 할 수 있기를, 자신도 모르게 기도해버린다. 현장에 대한 동경은 그 현장 안에 있어도 해소되지 않는 신비한 감정이었다.

물론 그분들과 같은 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하나 존재한다.

“아이그, 태식 오빠. 나 그만 웃겨요. 자기 NG 냈다고 자꾸 나까지 NG내게 해.”

“이 사람아, 내 얼굴 보지 말라니까 그러네. 하하하.”

태식과 정답게 말을 주고받는 미윤을 보며 그녀는 작게 파이팅, 하고 말했다. 여전히 마주할 때마다 욕을 먹는다. 잔소리로 끝날 때가 있고 심한 말을 들을 때도 있다. 화가 나고 때로는 울고 싶어지지만, 그녀는 미윤에게 대들 수 없었다. 부당한 일이었다면, 괜한 트집을 잡으며 골리는 거였다면 한 번쯤은 말대꾸했을 것이다.

‘근데 틀린 말이 없는 걸.’

미윤의 말은 거칠었지만 없는 사실을 지어내 욕을 하지는 않았다. 실수할 때, 모자란 부분을 보여줬을 때 가차 없이 비아냥거렸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욕을 먹는 것보다, 미윤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오늘은 무사히 지나갔으면 좋겠다.“

“내가 잘 하면 해결될 일이야. 저분도 이상한 거로 나한테 뭐라 하는 건 아니니까.”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인데.”

“왜?”

“소문이라는 게 괜히 나는 게 아니야. 그래서 말인데, 힘들면 말해. 내가 또 욕 먹는 거 하난 자신 있으니까. 욕도 둘이 먹으면 낫다는 속담도 있잖아.”

“그런 속담 없어.”

“없으면 만들면 되지.”

윗니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환하게 웃는 지석이었다. 까불거리고 가만히 있으면 병에 걸리는 것처럼 오두방정인 애지만, 이럴 때 보면 속이 참 깊은 것 같다.

걱정해주는 마음에 그녀는 잠깐이지만 편안한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지석까지 말려들게 할 수는 없다.

“괜찮아. 나 이래 봬도 되게 굳세. 두고 봐. 이미윤 선생님이 다시 보게 만들 테니까.”

“내 눈에는 그렇게 굳세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야.”

지석이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문다.

“어쨌든 힘들면 말해. 친구 좋다는 게 뭐냐. 그리고 어지간하면 마루한테도 말하고. 걔 어느 정도 눈치챈거 같으니까.”

“힘들면 말할게, 힘들면.”

그녀는 반대쪽 세트장으로 걸어가는 지석을 지켜보다가 배에 힘을 꽉 주고 자신의 세트 쪽으로 이동했다. 자그마한 방. 침대와 옷장, 그리고 책상이 놓인 이곳이 자신의 주 무대다.

“왔어?”

“네, 언니.”

그녀는 뒤에서 다가온 박윤희에게 인사했다. 극중 윤희와 친구이며, 이 방의 주인인 윤희에게 매일 빌붙어 얻어먹는 게 자신의 캐릭터다. 100원짜리 동전 하나에 목숨을 거는, 그런 자린고비이다.

“오늘은 이미윤 여사께서 조용하네.”

윤희가 다가와서 작게 말했다.

“열심히 숨어다녔거든요..”

“고생이 많네. 우리 불쌍한 토순이.”

그녀의 볼을 살짝 잡아 비트는 윤희였다. 그녀가 처음 윤희를 보았을 때 자신보다 한 살 정도 많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인사할 때 나이를 알게 되었고, 자신보다 일곱 살이나 많다는 것에 놀라기도 했다. 정말 동안인 언니다. 교복 입고 나가면 다들 고등학생으로 볼 것이다.

죽이 잘 맞아 촬영하는 동안 금세 친해졌다. 연극무대에서 6년정도 생활했다는 언니는 새침한 고등학생 연기도 정말 잘 소화해냈다. 카메라 연기가 어색해 고민이 들 때면 가장 먼저 상담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대본 잠깐 맞춰볼까?”

“네.”

“아참, 저번 촬영 때 침대에서 막 발길질 하던 거 있잖아. 그거 좋았어. 그런 식으로 포인트 잡아서 표현하는 게 도움이 돼. 감독님이 잡아주시는 상황 폭 안에서 최대한 할 수 있는 걸 해.”

그녀는 윤희 말을 머릿속에 남기며 대본을 펼쳤다. 연극 연기과 카메라 연기는 정말 다르다. 연극에서 쓰던 악센트를 그대로 카메라 연기로 가져오면 과장된 연기가 되어버린다. 동작도 신경 써야 한다. 연극 무대에서는 내 행동이 전부 관객에게 공개되지만, 카메라 연기는 그렇지 않다.

화면에 가득 잡히는 표정에 신경을 쓰다 보면 손발이 엉성해지는데, 방향을 잡지 못해 민망해지는 손과 발 때문에 연기가 흐트러지게 된다. 무대에서는 자연스럽게 늘어트려 놓았던 손이 카메라 앞에 서면 이상하게 부자연스러워진다.

“카메라를 너무 의식하지 마. 의식해야 하는 게 맞긴 한데, 처음에는 힘들거든. 나도 그랬어. 카메라 눈은 너무 딱딱해서 힘들어. 차라리 관객들 앞에서 하는 게 편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연극 무대를 먼저 경험해보고 온 선배의 충고라 마음에 와 닿았다. 선배의 도움을 받으며 대본을 맞춰보던 중 반대쪽 세트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박수 소리도 약간 섞인 걸 봐서는 촬영이 끝난 모양이다.

"B세트 갈게요.“

카메라가 이동하는 게 보였다. 꺼져있던 천장 조명에 불이 들어온다. 미술팀이 세트장 안으로 들어와 이곳저곳 만지기 시작했다. 촬영이 임박한 것이다.

“날씨가 덥지? 촬영 쌈빡하게 끝내고 쉬러 가자고.”

PD의 가벼운 인사를 시작으로 곧바로 리허설에 들어갔다. 그녀는 집중해 PD의 말과 행동을 관찰했다. 리허설은 이정표다.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그 방향을 따라 걸어갈지, 뛰어갈지, 아니면 날아갈지 방법을 선택하는 게 배우의 몫이다.

“이해됐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이 원하는 바는 알겠다. 그걸 어떤 식으로 표현하느냐의 문제다. 물론 카메라에 담기는 건 윤희 언니다. 자신은 감초 역할. 웃음 한 번을 위해 투입되는 간단한 역이다. 편집과정에서 사라질 확률이 높은 역할이지만, 그대로 최선을 다할 것이다. 비중에 상관없이 맡은 역을 소화해 내는 게 배우의 일이니까.

자리 잡은 카메라 뒤로 미윤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다른 주연들도 보인다. 연기를 봐주는 것이다. 떨리지만 의욕이 샘솟는다.

“집중해서 한 번에 갑시다.”

PD가 박수를 치며 말했다.

* * *

“너는 염치라는 게 없는 애구나.”

조명이 희미해진 세트 옆. 그녀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린 채 미윤의 얘기를 들었다. 주변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이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공간에 놓여있는 것처럼, 당연하다는 눈으로 옆을 지나친다. 처음에는 그런 모습들을 보며 섭섭하다는 생각도 했지만, 이제는 그게 배려임을 잘 안다.

“죄송합니다.”

“말은 정말 잘해요. 근데 왜 연기는 그딴식으로 밖에 못할까? 너 누구한테 배웠니? 응?”

“죄송합니다.”

익숙해진 걸까. 기계적으로 사과하는 자신이 밉다.

“근데 너 언제까지 할 거니?”

“네?”

“언제까지 내 앞에서 연기할 거냐고. 아니지, 그런 건 연기라고 부를 수도 없지.”

어깨를 툭툭 밀며 말하는 미윤이었다. 그녀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누구 하나 도와줄 수 없는, 도와줘서는 안 되는 싸움 한 가운데 서 있다. 자신은 너무나도 미약하고 상대는 감히 대들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사정이 생겼다고 하고 도망치면 어떨까. PD님에게 울면서 빌어보면 어떨까. 분명 지금보다는 편해지지 않을까.

그녀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미윤의 눈동자가 코앞에 있다.

“계속할 거예요. 앞으로도 쭉.”

쉽게 가는 방법은 알고 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휘는 건 싫다. 차라리 부러지는 게 낫다.

“너 지금 눈을 그렇게 치켜뜨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지?”

그 말에 순간 몸이 움찔거렸다. 마음먹은 것과 몸은 반응은 별개의 것이었다.

“너, 눈빛 마음에 드네.”

따끔한 말이 날아올 줄 알았는데,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깜빡이며 미윤을 쳐다봤다. 다정한 웃음을 짓고 있다.

“이 세계가 워낙 힘들잖아. 사건도 많고. 그래서 너같이 어린 애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엄격해져. 하지만 어떤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야. 그냥, 내가 표현하는 게 서투른 것뿐이란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감싸 쥐는 미윤을 쳐다보았다. 손은 거칠었지만 보듬어주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순간 떠올랐을 정도로.

“그동안 내가 너무 험하게 대했지?”

“예? 아, 아니에요.”

“앞으로는 잘해줄게. 네 진심을 오늘에서야 알아봤단다.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상담해주렴.”

무서웠던 사람이 한순간 천사처럼 보였다. 그래, 나를 마냥 싫어하는 건 아니었어. 생각해 보면 실수를 먼저 저지른 건 자신이었다. 미운털이 박힌 애가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얼마나 신경 쓰였을까. 마음이 복잡했지만 어쨌든 잘 풀린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마음이 마냥 편치는 않았다. 잘 해결된 것 같은데, 속이 답답했다. 찝찝하고 역겨운 기분까지 들었다.

이렇게 마무리 되는 건가?

“이게 연기야. 이런 게 연기라고.”

그때 미윤이 말했다.

그녀는 멍하니 미윤을 보았다. 미윤이 잡았던 손을 거세게 뿌리치더니 비릿한 웃음을 그려냈다.

“이런 게 연기라는 거야. 어? 네가 하는 그 엉터리 손발짓이 연기가 아니라, 알겠니?”

아, 거짓말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당황한 웃음이 아니었다. 정말 좋아서 웃어버리고 말았다.

“웃겨?”

“네? 아, 아니요.”

“너 어지간히 미친년이구나.”

“저 그렇게 미치지 않았어요.”

말에 계속 웃음이 배어 나왔다.

주체할 수가 없다.

미윤이 눈을 잔뜩 찌푸리며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내 뒤로 돌아섰다.

“야야야, 너 괜찮아?”

어느새 다가온 지석이 물었다. 그녀는 지석을 보자마자 주저앉았다.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데 다리에는 힘이 풀려 있었다.

“왜 그래?”

“아니, 그냥 웃겨서.”

“뭐가?”

“저분이 미안하다고 말했거든?”

“뭐? 이미윤이 먼저 사과를 했다고?”

“어. 근데 연기였어.”

“에이, 역시나. 근데 그게 왜? 너 놀린 거잖아.”

“그게, 사과를 듣자마자 속이 이상했거든. 막 짜증나고 울고 싶고. 이제 보니까 그 이유를 알겠어. 내가 욕을 그렇게 먹었는데, 이제 와서 미안하다는 한마디로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게 화가 났던 모양이야. 근데 연기래잖아. 계속 미워하고 있는 게 맞다고 하잖아.”

“그, 그러니까 미움받는 게 확실해서 기쁘다?”

“응!”

“……야야, 너 지금 상태 이상해. 얼굴은 웃고 있는데 팔다리는 떨고 있어. 알아?”

“알아. 아는데, 진짜 잘 됐다고 생각하고 있어. 이렇게 어설프게 사과받고 끝내기 싫어. 차라리 이게 나아. 시작은 그분이 먼저 했지만, 끝내는 건 내가 할 거야.”

그녀는 매니저와 함께 걸어가는 미윤을 보았다. 저 등이 내 목표다. 언젠가 저분이 내 연기를 보고 칭찬할 때까지,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걸어가리라.

“……세상에 쌍으로 미쳤어.”

옆에서 투덜거리는 지석을 붙잡고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리지만, 기분은 이상할 정도로 상쾌하다.

"가자! 집 가야지."

"그래, 가자 가."

그녀는 씩 웃는 지석의 손을 붙잡았다.

============================ 작품 후기 ============================

1월 1일.

작심3일을 100번 반복하면 작심 300일.

일년을 순탄하게 보낼 수 있게 됩니다.

일단 전 작심1일차, 꽤 잘보냈습니다.

다들 어떠신가요?

* * *

오타, 오류는 주말에 취합해서 수정하겠습니다.

언제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 *

추천, 언제나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쿠폰, 고맙습니다. 덕분에 공과금 냅니다.

완결작 :

인두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