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mitless Dream

[336] Tidying Up Around You

「한서진 박사, 캘리포니아를 구원하다!」

「승승장구하는 SJ인더스트리! 한서진 박사의 개인 자산, 3조 달러 돌파하나?」

「밝혀진 비밀, 에테르는 모든 만물의 근원!」

「에테르 반도체에 이어 에테르 치료제!」

「장기 재생의 길이 열렸다!」

「미국, 한서진 박사와의 친분 과시! 한서진 박사는 미국 명예시민!」

「국제 의학계, 한서진과의 회동 원한다.」

「SJ인더스트리, 기업가치 측정 불가!」

푸른 바다 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지나가는 가운데, 한 청년이 의자에 앉아 태블릿의 기사를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었다.

“진현이 형, 거기서 뭐해?”

백철중의 장손, 백진현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밀짚모자를 쓴 사촌동생, 백수호가 다가오며 옆에 털썩 앉았다.

“또 한서진 기사 봐?”

“…….”

“이야, 여전히 잘 나가는구나. 이제 국내 재벌은 비교도 안 되네. 미국 대통령도 이 사람 한 마디면 벌벌 떤다지?”

“…….”

“듣자니 세완이 형은 옛날에 이 사람을 개패듯이 팼다는데, 지금 얼마나 전전긍긍하고 있을까? 언제든지 맘 바뀌면 짓밟으러 올 거 아냐? 안 그래?”

백진현은 쥐어짜내듯이 말했다.

“우리라고 처지 다른 건 아냐.”

“그냥 형도 체념하고 나처럼 맘 편히 살아. 그래도 우리가 먹고 살 재산은 남겨주신다잖아. 할아버지께서.”

태평한 말에 백진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세상이 무너질 듯이 절망했던 녀석은 지난 1, 2년 사이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재벌의 길을 포기한 사촌동생은 오히려 이전처럼 밝아졌지만, 자신은 도저히 그렇게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제주도에서의 유배 아닌 유배 생활.

조부의 허락 없이는 제주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병원 진료 등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에 한해서만 제주도를 벗어나 뭍을 밟을 수 있을 뿐이다.

심지어 해외 출국은 어림조차 없다. 그야말로 자유를 봉인당한 삶이다.

‘자유롭게 살고 싶으면 언제든지 그리 살거라. 말리거나 강제하진 않겠다.’

조부가 내지르던 차가운 일갈이 생각난다.

‘대신 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유배는 강제 사항이 아니다.

제주도를 벗어나는 것도, 해외 땅을 밟는 것도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 H그룹이 특별히 엄격하게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경우 백철중은 단 한 푼의 유산도 주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유류분 소송? 이 땅에서 재벌을 상대로 벌이는 소송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는, 그들 본인들이 더 잘 알고 있다.

지금은 내쳐졌지만, 한때는 재벌의 특권을 누렸으므로.

제주도 유배를 조건으로 조부가 약속한 유산은 상당하다. 물론 H그룹의 가치, 그리고 재벌의 신분에 비하면 보잘 것 없지만,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정도는 된다.

벌써 2년째로 접어든 생활에서 백씨 일가 중 일부는 단념했고, 일부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 백진현 역시 마찬가지, 언제고 조부의 노여움이 풀리면 다시 서울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부질없는 희망고문이야. 형, 포기해.”

“시끄러.”

“포기하면 편해져. 진짜야. 나를 봐.”

성진그룹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특히 총수의 여동생, 오수현의 그룹 내 입지는 최악이었다. 총수와 남매지간이란 메리트가 없었다면 진작 쫓겨났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백철중이 쓰러진 틈을 타 오수현이 자녀들을 이용해 H그룹을 뒤흔들려 한 것 때문에, 지금 성진그룹은 H그룹과 최악의 사이로 틀어졌다.

현재까지도 수십 개가 넘는 소송이 벌어지고,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H그룹은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없는 건수까지 만들어서 성진그룹을 물어뜯었고, 성진그룹 법무팀은 나날이 갈수록 지쳐가고 있었다.

특히 한서진이 승승장구할수록 성진그룹의 그늘은 그만큼 짙어졌다.

한서진이 H그룹과 친하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헌데 H그룹과 성진그룹의 사이는 역사상 다시없을 최악을 달리고 있다.

성진그룹은 다른 국내 기업들과 달리, 에테르 반도체로 인한 반사이익 중 조금이라도 얻지 못했다.

성진그룹 계열사는 에테르 반도체의 유통에서 제외되는 것은 물론이요, 성진전자 제품은 에테르 반도체를 탑재하지 못해 제품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미 성진폰은 시장점유율이 바닥이었고, 컴퓨터와 노트북 등도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었다.

투자자들도 그런 사실을 잘 알기에, 성진그룹의 시가총액은 예전에 절반 이하로 줄어든 상태였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성진그룹 회장은 뒤늦게 깨닫고 H그룹에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으나, 백철중은 그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성진그룹이 해체 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런 확고한 뜻을 전해 받은 성진그룹 회장은 망연자실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재벌 인사 중 한서진이 송하나와 약혼했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H그룹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성진그룹 따위 집어삼켜 버릴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다.

한서진이 직접 나서지 않는 것이 성진그룹에 있어 그나마 위안거리라고 해야 할까.

“성진그룹이 10대 그룹에서 퇴출되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50위 밖으로 밀려나는 것도 시간문제다.”

“H그룹은 성진그룹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다른 대기업들도 H그룹 눈치를 보고, 성진그룹 견제와 압박에 들어갔다.”

백철중이 혈육을 제주도로 내려 보낸 것만 봐도, 그의 노여움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오수현은 오래 전에 이혼한 사이이면서, 그가 쓰러진 틈을 타 자녀들을 이용해 H그룹을 삼키려 했다. 그녀와 성진그룹을 향한 분노가, 혈육을 향한 것보다 작지는 않을 것이다.

성진그룹은 태풍 앞의 촛불처럼, 하루하루 위태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반가워요. 잘 지냈나요?”

이서나가 웃으며 일어나 맞이했다. 한지혜는 옅은 미소를 띠며 그녀와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야말로 초대에 응해주셔서 고마울 뿐이에요. 정말 잘 오셨습니다.”

한지혜는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한지혜, 오빠 잘 만나서 참 팔자 폈다.’

진성그룹 회장.

예전이라면 언감생심 쳐다보지도 못할 사람이다. 그런 인물이 자신과 친해지지 못해 안달을 내고 있다. 초대에 응해주는 것만으로도 몹시 황송하게 여긴다.

가난하고 힘들기 그지없던 시절, 감히 꿈조차 꾸지 못했던 삶을 당연한 듯이 누리고 있으니, 신기하면서도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다.

‘당당해지되, 조심해야지.’

한지혜는 헛바람에 들뜨지 않도록 조심했다. 자신이 자만하거나 건방진 행동을 하면 오빠에게 누가 된다. 그것은 곧 한씨 가문의 명예 추락과도 직결된다.

“학교생활은 어때요? 재미있나요?”

“뭐, 나쁘진 않아요.”

“학교 친구들은 지혜 양이 누군지 모르죠?”

“일단은요. 제가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진 않으니까요.”

포탈에 한서진을 검색해도 가족관계는 나오지 않는다. 덕분에 한지혜는 한서진의 동생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냥저냥 적당히 부잣집 딸이라고만 알고 있어요.”

“한서진 박사의 동생이라는 걸 알면 아마 학교 전체가 뒤집어질지도 몰라요.”

“그리고 전 돈 빌려달라는 학과 동기들의 공세에 시달리다가 휴학계를 내겠죠.”

“설마 돈 빌려달라고 할 만큼 간 큰 친구들이 있을까요?”

“아무튼 신상 안 털리게 조심하고 있어요. 언니는 요즘 회사 경영 어때요?”

이것 봐. 한지혜 인생에서, 진성그룹 총수를 감히 언니라 부를 날이 올 거라 상상이나 했겠어?

이서나는 살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조금 어렵긴 하지만 극복해야 할 시련이라 여기고 그럭저럭 열심히 하고 있어요. 지혜 양은 H컨설턴트 경영 어때요? 경영 감각이 상당히 뛰어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에이, 경영이라고 하면 민망해요. 매일 오빠 돈만 끌어다가 까먹는 회사인데요, 뭐.”

“금전적 수익 창출보다 더 큰 무형적 이익을 창출하는 회사잖아요.”

두 여자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거리감 없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한지혜가 이서나와 친분을 쌓은 지는 제법 되었다.

먼저 다가온 것은 이서나였다. 한지혜는 처음에는 거리를 두었으나, 이서나는 포기하지 않고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덕분에 지금은 한지혜도 거리감을 두지 않고 그녀와 소탈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녀의 목적이 어떤 거래를 달성하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자신과 친분을 맺고 싶은 것에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친분 구축을 통해 거시적으로 그리고자 하는 큰 그림이 있겠지만, 그런 것까지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참, 다음 주에 제 생일인데 혹시…….”

이서나는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인터폰이 울렸던 것이다.

그녀는 짜증을 누르고,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죠? 내가 지금 한지혜 양하고 만나고 있으니 중요한 게 아니면 연락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회장님, 이재희 사모님께서 찾아오셨어요!」

비서의 다급한 목소리에 이서나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한지혜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멀뚱멀뚱 바라봤다.

“언니, 왜 그러시죠?”

“지혜 양, 미안한데 실례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몰라요. 제가 의도한 건 아니니 부디 오해는 말아…….”

그때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중년 여성이 들어섰다. 뒤에서 비서들이 붙잡으려 했으나, 미처 잡히기도 전에 그녀는 재빨리 회장실에 들어섰다.

그걸 보고 이서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무대포로 들어선 ‘방계’ 사촌언니도 문제지만, 감히 회장실에 들이닥치는데 어쩔 줄 몰라 하는 비서들이라니.

한지혜를 발견한 중년 여성, 이재희는 표정을 풀고 어색하게 웃었다.

“오랜만이야, 지혜 양.”

“…….”

“그동안 잘 지냈어? 우리 준석이하고 연락은 종종 하고? 준석이가 아직도 지혜 양 못 잊어서 비쩍 마른 거 알지? 지혜 양, 이제 그만 마음 풀고…….”

이재희, 그녀의 전 남자친구인 정준석의 모친이자, 진성그룹의 방계인 뉴월드그룹의 사모님.

한지혜는 팔짱을 낀 채 말없이 이재희를 외면하다가 이서나에게 눈을 돌렸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더니, 언니도 참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지혜 양, 우리 준석이가…….”

“일단 저 일어날게요. 나중에 연락 주세요.”

“미안해요. 못 볼 꼴을 보여서.”

“지혜 양!”

한지혜가 돌아서려 하자 이재희는 놀라서 그녀를 붙들려 했지만, 이서나가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그 틈을 타서 한지혜는 회장실을 나갔고, 이서나는 차가운 눈으로 사촌언니를 노려보았다.

“재희 언니,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서나야. 난 그저 우리 준석이 때문에…….”

“알고 있어? 언니는 지금 진성회장인 내 얼굴에 먹물을 끼얹은 거야. 그것도 한서진 박사 여동생 앞에서!”

이서나는 들끓는 분노를 가까스로 삼켰다.

한지혜가 왔다는 말에 무작정 쳐들어온 이재희나, 그것을 막아내지 못하고 뚫린 비서들이나. 그 모두가 진성그룹의 체면을 사정없이 짓밟은 꼴 아닌가.

“모시고 나가요.”

이서나는 차갑게 명령했고, 눈치만 보던 비서들이 얼른 들어와서 이재희를 잡아끌었다. 이재희는 약하게 반항했으나 결국 회장실 밖으로 끌려 나갔다.

이서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이마를 짚었다.

좌절 비슷한 무게감이 담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 년이나 저 놈이나…… 도움 되는 것들이 없어.”

회장은 고독하다.

고독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고독해야만 한다.

아버지의 그 짧은 당부가, 오늘처럼 깊이 느껴진 적이 없었다.

어느 순간 그녀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쳐낼 것들이 너무 많아.”

※ 작품 후기

연참은 기습과도 같은 것.

사양 않고 저를 칭찬하셔도 됩니다.(찡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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