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mitless Dream

[496] Another land (1)

‘레노지안은 지구 안에 있었어. 아니, 지표면이 그냥 레노지안을 가둔 벽이었던 거야.’

신살검을 통해 흘러들어온, 까마득한 고대의 기억. 그 장엄한 파노라마에 한서진은 한참이나 부르르 떨었다.

십 수억 년 전의 역사가 머릿속에 차오르다 못해 바깥으로 흘러넘친다.

레노지안이야말로 진짜 지구, 그리고 현재의 인간들이 사는 지구는 그것을 덮은 천장이었다.

‘그럼 신계는? 카드리온 왕가를 쫓아낸 신은 대체 뭐지?’

한서진은 혼란스러웠다.

검의 기억이 쏟아낸 장면 중 어느 것에도 신계나 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레노지안을 멸망시킨 막강한 힘, 굳이 따진다면 그것을 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냥 신화나 전설 같은 건가? 처음부터 신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건가?’

검의 기억 속에, 또렷한 신의 실체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늘을 뒤덮은 막강한 자연의 법칙으로서 군림했을 뿐, 이성적 의지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레노지안은 하늘을 저주했다. 자신들을 가둔 신의 감옥이라고 믿었다.

‘신……! 신이 정말 존재하기는 했어?’

모든 것이 의심스럽고, 혼란스럽다.

아무런 예고 없이 직면한 진실은 속 시원한 후련함보다는 입에 모래를 머금은 듯한 갑갑함만을 안겨 주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머리를 누르고 있던 묵직한 암담함이 어느 정도 걷혀졌다.

한서진은 손에 쥔 신살검을 가만히 들어 올렸다.

부러진 검날은 잃어버린 반쪽을 갈구하듯이 은은하면서도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찾았다.’

레노지안이 어디에 있는지.

그곳은 자신의 상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스캔 실패.」

또다시 실패 메시지가 떴다. 벌써 이천 번이 넘었던가.

타르타로스 2의 막강한 에테르 제어 능력을 가지고도, 지구 내부를 꿰뚫어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진 지구 내부까지 스캔하진 않았구나. 조금만 더 일찍 해볼걸 그랬나.’

타르타로스 2는 세상에 가득 차 있는 에테르의 흐름을 조절하여, 자신의 신경망처럼 활용한다.

인터넷 선 하나 꽂혀 있지 않으면서 자유자재로 광대역 네트워크에 접속하고, 전원이 꺼진 오프라인 컴퓨터의 자료를 해킹하며, 지구 곳곳을 쉬이 감시할 수 있는 이유다.

지구 전역을 훑어볼 때도, 해저까지만 훑어봤지 맨틀 아래까지 파고들지는 않았다.

에테르로 훑어본 지구 내부 단면은 놀라웠다.

‘상부 맨틀까지는 존재하는데, 그 아래는 볼 수가 없어.’

상부 맨틀까지는 지금까지 알려진 과학 지식과 동일했다. 하지만 그 아래는 아무리 애를 써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이론대로라면 하부 맨틀이 감지되어야 하는데, 마치 무언가가 막고 있는 것처럼 캄캄하기만 했다.

‘틀림없어. 상부 맨틀 아래 뭔가 있어.’

분명히 뭔가가 지구 내부를 둘러싸듯이 가로막고 있지만, 특별한 에너지가 감지되지는 않는다. 굳이 표현하자면 무형의 물질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물질이 에테르 스캐닝을 모조리 튕겨내고 있었다.

분명했다. 지각을 한참이나 뚫고 내려가고, 다시 상부 맨틀의 바닥까지 도달해야 하는 곳에, 또 하나의 땅을 감싸고 있는 벽이 존재한다.

이천 번의 실패, 까마득한 수치다.

언제쯤 벽을 뚫을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바닥에 수렴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 홀로 갇힌 것처럼, 아무런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서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분명히 있다.”

그 캄캄함이야말로, 레노지안이 오롯이 존재한다는 명확한 증거였기에.

* * *

“…….”

왕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갑작스러운 정지에 수행하던 시종들도 당황해서 왕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폐하. 어인 일이신지요?”

“이상한 느낌이 드는구나. 마치 누군가가 하늘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왕은 냉소적으로 중얼거리다가 피식거렸다.

“혹, 신이 지금 짐을 내려다보며 조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신.

카드리온 신을 지상으로 추방하여, 그 대신 신좌를 차지한 배덕한 존재.

까마득한 신화 속의 일이지만, 레노지안의 모든 이들은 불과 몇 년 전에 일어났던 일처럼 굳건하게 믿고 있다.

―언젠가 위대한 왕이 출연해 신계를 되찾을 그날,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찬란한 빛과 힘을 얻게 되리라. 그리하여 왕국의 모든 이들을 영원토록 번창케 하리라.

레노지안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예언의 구절 중 하나다. 그리고 레노지안인이라면 신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누구나 굳은 믿음으로 예언의 그날을 기다린다.

그리고 현 군주인 아서 왕은 역대 그 어떤 왕보다도 비교되지 않는 훌륭한 왕으로서, 예언을 현실로 만들어줄 것으로 모든 신민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경.”

“말씀하소서, 폐하.”

언제 있었는지 노신하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왕은 잠시 그에게 눈길을 주었다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까마득한 오래전에 잃어버린, 전능한 신의 힘……. 과연 짐이 그것을 되찾을 수 있겠소?”

“오래 전, 무궁무진한 에테르의 광명은 끝없이 이곳 레노지안 대륙을 비추었습니다.”

노신하가 입을 열자 왕은 침묵한 채 그에게 눈길을 주었다.

다른 수행원들도 귀를 기울이며 그의 말에 집중했다.

“그러나 왕가의 선조께서는 그 광명을 반역자에게 빼앗기고, 지상계로 추방당해 레노지안을 건립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무수한 역사 속에서, 마침내 레노지안은 하나의 통일 국가를 이루어 지금의 번영을 이뤄냈습니다.”

노신하의 숨소리가 아주 조금씩 무거워졌다.

“비록 참람한 찬탈자가 신계에서 홀로 그 고귀한 광명을 독점하고 있으나, 그 영광은 오래 가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초룡을 거두셨고, 이제는 신살검의 힘마저 깨우치고 취하실 것입니다. 역대 그 어떤 국왕도 지금의 폐하만큼 강인한 힘을 갖지 못했습니다.”

왕을 따르는 신하들의 호흡 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지며 하나의 흐름으로 맞춰지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되찾으실 겁니다! 오래전 잃어버린 에테르의 근원! 오래전 잃어버린 이름이자 전설!”

충성심에 가득 찬 눈빛을 응시하며, 왕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태양, 그 고귀한 광명을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하나 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여기저기서 만세가 터지며, 모두가 왕의 이름을 열창했다.

등을 돌리는 왕의 뒤로 망토가 휘날렸다. 신하들이 왕의 이름을 외치며 그 뒤를 따랐다.

왕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제단을 올랐다.

제단의 정상에는 한 자루의 검이 꽂혀 있었다. 검 앞에 선 왕은 잠시 숨을 고르며, 제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십만 명이 넘어가는 신하와 백성들이 제단 아래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다. 그들을 내쫓은 신을 향한 게 아닌, 살아 있는 현신인 왕을 위한 기도였다.

신살검, 신을 죽일 힘을 가진 무기.

왕가의 보물이자, 예언이 말하는 성전에 반드시 필요한 물건.

이 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이제 성전을 개방할 자격을 갖추게 된다.

‘……태양.’

가만히 입에 읊기만 해도 아찔한 그리움이 샘솟는 이름이다.

왕은 다시 한번 하늘을 들어 바라봤다. 푸른 빛에 막힌 하늘 너머에는 신이 정한 금지의 벽이 둘러싸여 있다. 다만 여기서는 보이지 않을 뿐이다.

저 천장 감옥 너머, 까마득한 먼 곳에 모든 에테르의 근원이 찬란히 빛나고 있으리라.

이 검을 뽑고 그 힘을 취하여, 성전을 열 것이다.

그리고 예언이 정한 대로 태양, 그 고귀한 신의 힘을 되찾아 왕국을 영원히 번성케 할 것이다.

막 검에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지이잉!

가벼운, 하지만 날카롭기 그지없는 두통이 머릿속을 짧게 훑고 지나갔다. 왕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왕은 홀린 듯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충성스러운 신하, 울먹이며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백성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무언가 한 명이 빠졌다. 그것이 이제야 생각났다.

하지만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하지만 잊어버리고 있던 그 사람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왕비?”

왕의 눈빛이 조금씩 꺼져갔다.

왕비라고? 내가 혼인을 했었던가?

혼란에 빠진 왕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노신하의 눈빛이 우울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 * *

한서진은 정지원을 비롯하여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이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계열을 가리지 않았다.

칼 루이스는 물론이고 심지어 제약업체인 영원그룹의 박현진 회장까지 호출했다.

이런 총집결은 전대미문의 일, 각 계열사 수장들은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바짝 긴장했다.

그들을 불러놓고 한서진이 내린 지시는 간결했다.

“미스릴을 모으세요.”

“예?”

박현진 회장이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미스릴을 모으라, 문맥의 뜻만 놓고 보면 간단하다. 하지만 이처럼 대대적으로 계열 책임자들을 모아놓고 내리기에는 뭔가 많이 부족한 지시였다.

심지어 자신은 제약업체, 미스릴 축적과는 별 관련이 없다.

“미스릴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엄청 많이요.”

“얼마나…… 대체 얼마나 필요하신 겁니까?”

정지원이 심상치 않다는 예감을 받았는지 살짝 굳은 안색을 한 채 물었다. 칼 루이스도 신중한 표정으로 한서진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아, 이 정도 표현으로는 부족할 것 같네요. 아무리 많아도 모자랍니다.”

“…….”

“그러니 여러분들 계열사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나 사업은 잠정적으로 중지하시고, 당분간은 미스릴을 끌어모으는 데 집중해 주세요. 시중의 물량을 싹쓸이하거나, 혹은 생산공장을 새로 세우거나, 아예 생산업체를 인수해 버리는 것도 좋겠군요.”

“미국에 있는 미스릴 생산공장을 전부 인수해 버릴까요?”

누군가가 농담처럼 말했고,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분위기가 그렇게 환기되는 듯했다.

그러나 한서진 혼자만 웃지 않았다.

“그것으로는 부족할 것 같네요. 전 세계 모든 미스릴 생산공장을 인수해도 모자랍니다.”

“…….”

“중요한 건 시간입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미스릴을 최단 시간 안에 긁어모은다고, 아니 빨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 일에 임해 주십시오. 당장 공장 인수가 어렵다면 공장을 무기한 빌리는 것도 괜찮습니다.”

분명히 말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미스릴을 빨아들여야 한다고.

계열사 수장들은 한서진이 범상치 않은 일을 벌이려 하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괜히 제약업체 같은, 미스릴 매입과 별로 상관없는 계열까지 호출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비용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습니까?”

“에스코너가 보유한 모든 현금, 자산을 소모해도 상관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미스릴이 있어도 부족하니, 지구상의 모든 물량을 긁어모으세요.”

“이미 생산을 완료하고 판매 중인 반도체들은…….”

“회수해서 다시 녹이세요. 당분간 반도체 판매는 없습니다. 위약금을 물어도 상관없습니다.”

진짜 보통 일이 아니구나. 그들의 낯빛에 짙은 긴장감이 드리워졌다.

정지원이 물었다.

“혹시 어디에 쓰시려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한서진은 좌우를 똑바로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타르타로스 3 제조에 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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