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rd of the Skill

Skill Emperor 44 Coins

열화검사(烈火劍士)

“뭐냐, 너.”

새하얀 빛이 사라지고 온전한 경기장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무열은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사라지고 그 혼자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하하하. 또 뵙는군요. 경기장에 진행자가 없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

이매 일족의 아콘이 그를 향해 씨익 웃었다.

녀석은 두 경기장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유일한 안내인인 것이다.

“자!! 지금부터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낮과 마찬가지로 마치 관중이 있는 것처럼 주위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이곳을 찾은 도전자에겐 또 다른 혜택이 있습니다. 바로 경기 방식을 선택하는 것!! 어떤 길을 고르냐에 따라 보상 역시 달라집니다.”

아콘은 손가락 두 개를 펼치면서 말했다.

“빠르지만 어려운 검투, 혹은 느리지만 쉬운 검투.”

드르르르르르…….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경기장 입구의 쇠창살이 서서히 올라가면서 열리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내일 출전하는 8명의 대기실.

하지만 그 안에는 무열이 처음 보는 전사들이 붉은 안광을 띠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 밤의 경기장 역시 낮의 경기장과 마찬가지로 하루에 한 번만 경기가 진행됩니다. 투사 역시 낮과 마찬가지로 무열 님을 포함하여 8명.”

저벅, 저벅.

쿵!!

쿠웅……!!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쇠창살 안에 있던 전사들이 육중한 쇳소리를 내며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번이란 규칙을 기억하십시오. 빠른 검투는 단 한 번의 경기로 마지막 관문에 도달하는 것. 그만큼 위험천만하죠.”

7명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검투.

일 대 다수의 경기.

마치 선택하지 못하게 만들어놓은 것같이 불합리한 경기.

“…….”

“반대로 느린 검투는 매일 밤 하루에 한 명씩 경기를 펼치는 것입니다. 시간은 걸리지만 낮의 경기까지 참여하는 무열 님에겐 위험 부담이 적지요.”

확실히 풍기는 느낌도 낮의 도전자들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달랐다.

“만약 내가 아침까지 승부를 못 내면 어떻게 되지?”

“상관없습니다. 밤의 경기장은 밤의 시간대가 따로 흐르니까요. 단 한 명이 무대에 서 있을 때까지. 경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군.”

무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답은 나왔다.

“빠른 길로 가겠다.”

“진심이십니까?”

아콘이 인상을 팍 구겼다.

“물론.”

“크…… 크크하……!!! 역시!! 밤의 경기장을 찾아온 도전자다운 패기!!”

그러고는 무열의 말에 엄지를 척 들면서 웃음을 터뜨리다 표정을 바꾸었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만?”

“네가 낮에 그랬지 않나. 용기 있는 자만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무열에게 말했다.

“크큭……!! 진실이라……. 이야, 그걸 기억하는 분이 계실 줄이야. 정말 감탄스럽”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조잘조잘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말에 무열은 곡도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만 떠들고 시작이나 하지?”

경기장 위로 떠 있는 별들이 쏟아질 것처럼 가득했다. 커다란 달빛이 마치 무대의 조명처럼 경기장을 밝히고 있었다.

천천히 곡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일촉즉발의 차가운 공기가 경기장 안에 흘렀다.

시작을 알리는 시끄러운 아콘의 외침 따윈 필요 없었다.

무열의 한마디.

“올라와.”

* * *

제2경기를 시작합니다!!!

하루가 지난 이후에도 남부의 낮은 뜨거운 태양으로 가득했다.

밤의 차가운 공기와는 대조되는 열기.

그리고 그 열기만큼.

“와아아아아―――!!!!

경기장의 관객들 역시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음? 이봐, 어젯밤에 뭘 했기에 얼굴이 그 모양이야?”

“…….”

경기장에 입장한 조태웅은 무열을 바라보며 말했다.

완전 엉망이었다.

시퍼렇게 멍든 눈두덩이와 여기저기 베인 상처들. 온몸엔 덕지덕지 붕대가 감겨 있었다.

“너, 설마 붕대 스킬 올리려고 자해라도 한 거야? 하하하!! 이거 골 때리는 녀석이구만!! 정상이 아냐!”

호탕하게 웃으면서 조태웅은 무열의 등을 찰싹 때렸다.

“내 상대는 누구지?”

하지만 그런 그를 상대하는 것조차 피곤한 듯 무열은 아콘을 향해 말했다.

“대전 상대는 이미 정해져 있을 테고. 순서가 상관없다면 내가 제일 먼저 하고 싶은데.”

경기장의 방식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무열의 모습에 조태웅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동의를 구하는 듯 아콘이 다른 사람들을 한 번씩 쓰윽 훑었다.

이견이 없는 모습.

그 광경에 아콘은 묘한 웃음을 띠었다.

“물론입니다. 살아남은 8인의 도전자는 부상 여하에 따라 상대를 결정하게 됩니다. 무열 님의 대전 상대는…….”

엉망이 된 무열보다 더 심한 몰골로 서 있는 한 사람. 바로 어제 경기에서 아슬아슬하게 조태웅에게 살아남은 마렉 일가 중 한 명이었다.

“크윽……!!!”

그는 무열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자신의 무기를 들었다.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했지만 그 역시 상태는 무열과 비슷해 보였다.

위협적으로 보여야 할 해머는 그 무게에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 때문에 오히려 애처로워 보였다.

“…….”

무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콰아아아앙―――!!!!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남자에게 다가가는 것을.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무열이 곡도로 있는 힘껏 내려친 뒤였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경기장 바닥이 부서지며 마렉 일가의 남자는 방어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뻗어버렸다.

“휘유!! 뭐야? 꼴은 거지꼴인데 어째…….”

조태웅은 눈빛에 이채를 띠며 그 광경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놈, 어째 풍기는 느낌은 더 강해진 것 같잖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무열은 바닥에 박힌 곡도를 뽑으면서 말했다.

“됐지?”

마치 그걸로 충분히 알 거라는 것처럼 아콘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헐거워진 붕대를 뜯어내며 경기장을 내려왔다.

“먼저 가지.”

적막(寂寞).

조태웅의 등장과 마찬가지로 경기장은 단 일격으로 시끄러웠던 경기장의 사람이 모두 무열의 등장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사람…… 뭐야?”

“실력자였어?”

“운이 좋아서 올라온 거 아냐?”

단체전에서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무열이었기에 관객들에게조차 각인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번으로 인해, 그를 모두가 주목하게 되었다.

저벅, 저벅, 저벅.

계단을 내려오는 무열을 향해 아콘이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젯밤에 하신 말씀, 정말이로군요?”

낮과 밤.

두 개의 경기장을 모두 승리하겠다는 무열의 말.

어떻게 보면 용감한 도전자의 호기어린 말로 들렸을 뿐이다. 말이 쉽지 낮과 밤 두 차례에 걸쳐 매일 검투를 벌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게다가…….’

아콘은 똑똑히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호기 어린 말로 치부할 수 없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7명의 투사가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 것을.

무열은 내리쬐는 햇빛이 귀찮은 듯 얼굴을 가리며 아콘을 지나치며 말했다.

“물론이다.”

* * *

“아저씨!!!!”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무열의 귀를 때렸다.

소속된 부족이 없는 도전자들에게 주어지는 작은 막사 안.

조금 전 일격으로 벌어진 상처에서 흐르는 피로 감았던 붕대가 붉게 변한 채로 무열은 이마의 땀을 닦았다.

“꼬마, 여기 오면 안 되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누가 보기라도 하면 엘리젤 일족과 내가 연관되어 있다고 뻔히 알게 된다는 걸 몰라?”

“쯧, 시끄럽고! 어서 상처나 봐요.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예요!!”

“…….”

무열의 으름장에도 불구하고 리앙제는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상처를 살피느라 정신없었다.

“크윽?!”

붕대를 벗기자마자 그녀가 작은 병에 든 액체를 무열의 몸에 사정없이 뿌렸다.

불에 덴 것 같은 뜨거움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뱉어냈다.

아니, 차라리 불에 데었으면 나았을 것이다.

첨탑에서 획득한 화염 내성력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건 약물에 의한 것.

“후우……. 약물 내성을 먼저 키웠어야 하나. 이거야 원…….”

“시끄러워요. 일족에 내려오는 약이에요. 잔말 말고 오늘 하루는 쉬어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감당할 수 없으니까.”

리앙제는 정말로 불에 덴 것처럼 약을 뿌린 무열의 몸에서 새하얀 증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서 살짝 긴장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보긴 뭘 보라고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했어요? 어제 경기장에서 한 거라곤 하나도 없는데 뜬금없이 상처투성이가 돼서 나타나기나 하고…….”

“훗……. 그보다 이거 반칙 아냐? 외부인이 막 들어와도 제재하지 않다니. 보안이 엉망이군.”

“상관없어요. 애초에 부족 전사들은 다 도움을 받는데, 뭐……. 내가 여기에 들어온 건 비밀이지만요.”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말하는 리앙제의 모습에 무열은 피식 웃었다.

“미안하지만 오래는 못 쉴 것 같다.”

“에? 또 뭘 하려고요!!”

리앙제가 무열의 말에 소리를 쳤지만 그는 피곤한 듯 그녀의 머리를 한 번 쓱 쓰다듬고는 막사의 침대에 누웠다.

“……으휴.”

상처투성이의 그를 보며 어린 그녀는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어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일족과의 거래로 인한 것은 알지만 어린아이의 눈으로도 무열의 부상은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다.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녀는 쓰러진 무열을 뒤로 한 채 막사를 나오려 했다.

“리앙제.”

툭.

그 순간, 팔을 이마에 걸치고 누워 있는 무열이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오르도 창이 죽었을 때…… 많이 슬펐나.”

“그걸 말이라고 해요? 가주님은 저희들의 은인인데.”

리앙제는 막사의 천막을 부여잡고 대답했다.

“쓰…… 쓸데없는 걸 물어서.”

뭔가 더 말을 하려다가 머뭇거리고는 결국 황급히 막사를 나갔다.

천막이 펄럭이는 소리를 들으면서, 무열은 피곤한 눈을 감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후우……. 그래, 죽으면 슬프겠지.”

* * *

어스름이 내린 밤.

경기장을 향해 걸어가는 무열은 피딱지가 내려앉은 상처들을 감싼 붕대를 천천히 벗겨냈다.

엘리젤 일족의 비약의 효과일까.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심하게 벌어졌던 놀라울 정도로 상처들이 아물어 있었다.

[붕대법 1 Point 상승하였습니다.]

[붕대법 : 100% (E랭크) 도달!!]

[붕대법 승급!]

[완벽한 붕대법 : 1% (D랭크)]

능숙해진 붕대법으로 앞으로는 제법 깊게 베인 상처나 옅은 화상 이외에 동상 치료에도 효과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랭크 업을 할 줄이야.’

마지막에서 그토록 오르지 않던 붕대법의 숙련도가 어젯밤 전투 이후 랭크 업에 성공했다.

“훗…….”

그만큼 치열했던 검투라는 것에 무열은 씁쓸한 듯 웃었다.

밤의 경기장.

아콘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들어오는 무열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낮의 경기. 누가 올라갔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결과도 보지 않고 돌아가셨잖아요.”

“관심 없어. 어차피 내일 되면 만날 녀석들일 텐데. 그보다 어서 시작하지.”

“왜 그렇게 서두르는 겁니까? 어제 모습을 보니 실력이야 인정하지만……. 굳이.”

아콘은 어느새 곡도를 꺼내 든 무열을 향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유? 물론 있지. 아무도 깨지 못할 기록.”

“……네?”

이강호가 죽은 이후 현재 아무 이름도 없는 서판에 처음으로 이름을 남긴다.

게다가.

‘언젠가 지워질 단순한 상위권은 필요 없다.’

오직 1위.

그러나 무슨 뜻인지 알 리가 없는 아콘은 무열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드르르르르르르…….

마치 무열의 말을 끊으려고 하는 것처럼 검투의 시작을 알리는 경기장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진실을 확인할 때이기도 하다.’

무열은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화염처럼 붉은 갑옷을 입은 남자를 바라봤다.

곡도를 바닥에 꽂으며 그는 마치 오랫동안 기다린 사람을 만난 것처럼 인사했다.

“지금부터! 밤의 경기장의 마지막 대전이 시작됩니다!!! 7명의 투사를 이기고 올라온 강무열을 상대할 경기장의 최강자!! 바로…….”

“열화검사.”

“……에?”

아콘은 자신이 호명하기도 전에 그 이름이 나오자 당황한 듯 무열을 바라봤다.

“이거야 정말……. 만나기 어려웠다고.”

이강호에게 검투사라는 직업을 갖게 해준 경기장의 주인.

같은 던전의 주인이지만 칸트나 마고우와 달리 그는 이름조차 없다.

단지, 열화검사라는 별명만으로 불릴 뿐.

“왜 오르도 창을 죽였나.”

무열의 한마디에 경기장 계단을 오르던 열화검사의 발걸음이 멈췄다.

“열화검사, 아니지……. 이렇게 다시 말해야겠군.”

살며시 입꼬리를 올리면서 무열이 열화검사를 향해 말했다.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NPC란 존재하지 않는다. 한낱 소수민족의 아이조차도 자신의 이름을 가졌다.

검무덤에서 발견했던 증거들.

그것을 조합해서 내린 하나의 결론.

“왜 죽은 척한 거지?”

순간, 투구 사이로 그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 같다는 느낌은 단순한 착각일까.

“오르도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