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E M O R I Z E

00990 Huildam (Hall Plain) – 2

눈을 한 번 감았다가 천천히 뜬다.

‘어서 오십시오.’

수백 수천 번을 봤었던 광경이 조금씩 열리는 시야 사이로 하나하나 느릿하게 밟힌다.

‘사용자 김수현.’

잿빛 벽돌,

어두운 공간,

차가운 회색 바닥,

각진 직사각형의 제단.

모든 것의 시작을 알리고, 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 소환의 방.

모든 것이 그대로 있는 소환의 방.

“세….”

아니, 정정해야겠다.

변한 것은 있다.

분명히 대부분이 그대로지만….

모든 것이 변했다고 봐도 좋을 만큼 가장 중요한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세라프.”

불러봐도,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언제나, 항상 이 장소에서 날 기다리던 천사는 여기에 없다.

오 년 전의 그 날 이후, 세라프는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차가운 암흑만이 공허하게 흐르고 있을 뿐.

“…….”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지만, 막상 현실을 마주하니 가슴 속이 휑하다.

믿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세라프는 늘 이곳에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한 내 잘못일까?

문득 눈앞에 일렁일렁하는 흰 날개가 아른거리는 듯해 나도 모르게 손을 뻗는다.

금세 도로 내리고 말았지만.

‘어째서 저를 배척하시는 겁니까? 저는 사용자 김수현의 도우미입니다.’

아,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싸웠지.

그래도 한 번쯤은 보여주고 싶었어.

네가 원한 미래가 어떤 결과로 이뤄졌는지 말이야.

날 보는 네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하지만 이렇게 텅 빈 공간은 좀 너무하지 않아?

무언가 홀린 듯한 기분에 천천히 걸음을 옮겨 제단에 앉는다.

정 중앙이 아니라, 약간 왼쪽으로.

‘오늘은 호출도 하지 않았는데, 어떤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이어서 쓰러지듯 느릿하게 제단에 몸을 기댔다.

이렇게 기대니 문득 그때의 일이 기억난다.

언제였나.

그 당시 모종의 사건으로 갈 곳을 몰라 방황하던 내 걸음의 종착역은 신전, 소환의 방이었다.

입구에 가만히 서 있던 날 세라프는 놀란 눈으로 쳐다봤었지.

그리고 아무 말도 않고 두 날개로 따뜻하게 감싸며 받아들여 줬고.

그때는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지만….

참 기분 좋았었다.

“…후유.”

지금 당장에라도 옆에 있을 것 같은데….

- 그녀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건가?

응?

이 소리는…?

- 이거 서운한걸. 고작 오 년이 지났는데 날 잊은 건가?

처음에는 화정인 줄 알았지만, 아니다.

농염한 여인의 음성 같기도 하고, 늙은 노파의 음성 같기도 하고, 굵고 정중한 남성의 음성 같기도 하고, 앳된 소년의 음성 같기도 하다.

그래, 이 종잡을 수 없는 목소리는….

- 네 바람을 이루어준 존재인데.

“제로 코드?”

적막하던 공간에 처음으로 웅혼한 음성이 흘렀다.

- 이제 알아…. 호? 그 마력은 뭐지?

“뭐가? 무슨 마력?”

- 고작 오 년 남짓 지났을 뿐인데 상당히….

“제로 코드?”

뜬금없이 등장하더니 뜬금없는 독백이다.

- 예전과 확실히 달라지기는 했는데…. 하지만 성향이 변했다고 매력이 이 정도나 상승하는 건…. 호오, 이건 거의 몽마의 왕과 필적하는…. 하지만 이상하군, 이상해….

“이상한 혼잣말은 그만해줘. 제로 코드? 너, 아직 남아 있는 건가?”

- 그렇다.

…아니, 뭐가 그렇게 당당한 거냐.

- 현재로써는 잔재, 파편에 불과하지만. 잊었나? 네 끝을 지켜보겠다고 한걸.

…스토커?

- 흠, 아무튼.

이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라는 듯 말을 끊은 제로 코드는,

- 넌 그녀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건가?

화제를 원점으로 돌리려는 듯 아까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연하지.”

그리고 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혹시 세라프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거야?”

- 어디 있는지 라기보다는, 어떻게 됐는지 라고 묻는 게 더 정확한 답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어디 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됐는지 라고…?

“그건 또 무슨…?”

- 간단하다. 십 년 전, 네가 바랐던 소원에 그녀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

한층 묵직해진 음성이 귓전을 웅웅 울린다.

- 그 결과 천사 세라프는 독자적으로 내게 따로 요청할 수밖에 없었지. 난 그녀의 두 가지 요청을 경청했고, 수락했다. 왜냐면 그녀의 바람이 네 바람에 도움이 될 거라 판단했으니까.

두 가지?

- 첫 번째는 네가 모르게 널 따라 십 년 전으로 회귀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천사, 도우미로서의 본분에서 벗어나 오로지 널 도울 수 있는 수단을 얻는 것.

전자는 나중에 알아차렸다손 쳐도, 후자는 처음 듣는 이야기다.

- 이제는 이야기해도 상관없겠지. 안솔이라고 했나?

“안솔? 안솔은 갑자기 왜?”

- 그 인간이 광휘의 사제로 각성하고, Blue Dahlia와 바라는 대로라는 말도 안 되는 힘을 얻고, 앞일을 척척 예지했던 게 누구 덕분이라고 생각하나?

“뭐라고?”

- 잘 생각해봐라. 설마 일개 인간이 진정으로 그 정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불가능하다. 아무리 사용자로서 각성했다고 해도.

“뭔 말을 하는 거야? 광휘의 사제는 일 회차에도….”

- 등장했지. 그런데 일 회차에서 활동했던 광휘의 사제 정확한 이름을 기억하나?

“그거야 솔….”

- 성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단순히 솔이었다는 이름만 기억하고 있을 뿐, 성을 포함한 정확한 이름까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잘 생각해보면 첫 만남부터 막연히 안솔일 거라고 추측했을 뿐.

- 정확하게 말해주지. 이름은 한진솔. 일 회차에서는 광휘의 사제로 각성해 오딘 클랜에서 활동했지만, 이 회차에서는 통과의례에서 사망했다. 애초 입장하는 시기도 비슷하기만 할 뿐, 너와 다르다.

“자, 잠깐만.”

머릿속이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정보가 복잡하다기보다 충격적인 내용이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 뭐, 이제 와서 딱히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 당시 자격을 갖춘 넌 날 사용할 수 있었지만….

왜일까.

제로 코드의 말이 이어질수록 까닭 모를 불안감이 샘솟는다.

- 그 천사는 아니라는 소리다. 네 소원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허락하기는 했지만, 그 내용 자체는 거래에 가까웠다. …자, 이 정도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나?

“하지만 세라프는!”

- 천사는 천사, 도우미는 도우미에 불과하다.

이미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 제로 코드는 단칼에 말을 끊었다.

- 내 힘의 발동에 간접적으로 간섭할 수는 있지만 그것뿐. 직접 관여할 수는 없다.

이어지는 말에 난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즉 어떻게 됐는지 라는 말의 뜻은, 아마 거래의 대가를 의미하는 것일 터.

- 그녀가 돌아오기를 바라는가?

이로써 세 번째 질문이다.

난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깊게 심호흡했다.

지금껏 들은 이야기는 명색이 십천(十天)의 신이 하는 말인 이상 농담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일단 제로 코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알아들었다.

또 왜 이 자리에 나타났는지 그리고 뭘 원하는지도.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내가 생각에 잠긴 걸 아는지 제로 코드의 음성도 들리지 않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난 얼굴을 감싸던 양손을 내리고 제단에서 일어섰다.

“뭐 하나만 물어보자.”

- 음.

“세라프는 아직 살아 있나?”

- 그 천사의 존재는 무(無)로 돌아가지 않았다. 우선 이 정도로 말해주지.

우선이라….

그렇다면 됐다.

- 응? 가는 건가?

바로 몸을 돌리니 묵직한 음성이 날 붙잡는다.

- 아직 우리가 할 이야기는 남은 것 같은데.

“별로. 너랑 거래하기 싫으니까.”

세라프는 자신을 제물로 바쳐 제로 코드와 거래했다.

말인즉 ‘어떻게 됐는지’라는 말은 제로 코드가 그녀의 처분을 주관했다는 소리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세라프가 돌아오기를 바라는가?’ 라는 질문은 제로 코드가 내게 원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왜 돌아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 제안을 하는지는 몰라도, 응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니 들을 필요도 없다.

- 그 말은 그녀를 포기하겠다는 건가?

역시 인정하는 건가.

어떻게 됐든 세라프를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아니.”

- 흠?

“포기는 안 해. 단지….”

- 단지?

“누구 뜻에 따라 움직이는 거, 이제 지쳤거든.”

- …….

“지긋지긋해. 정말로. 그러니까 세라프를 찾는 건 내 힘으로, 내가 알아서 하겠어.”

- 그렇다는 건 날 적으로 돌릴 수도 있다는 건데?

적이라.

솔직히 말하면 제로 코드는 적으로 돌리기 싫은 상대다.

상대의 정보가 전무하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게헨나나 화정보다 위의 존재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잖은가.

“악마 다음 상대가 제로 코드라니. 갑자기 난도가 확 올라간 느낌인데.”

이 정도면 충분한 대답이 됐을 것이다.

굳이 인사까지 할 필요는 없을 터.

그냥 잘 있으라는 의미로 손을 흔들며 포탈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

그 찰나의 순간,

- 흐.

작은 웃음이 들렸으나, 곧 사라졌다.

환청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 그런가…. 그렇다면 알겠다.

무언가 아쉽다는 투 같은걸.

“혹시….”

혹시 다른 말이 남았을까 기다렸지만, 제로 코드의 말은 더 들려오지 않는다.

“뭐야…. 돌아오자마자.”

후회는 하지 않으나 미련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뭐, 이제 이곳에 당분간 올 일은 없나.

이윽고 포탈에 한 발을 걸치는 것과 함께 난 의미 없이 한 번 더 뒤를 돌아봤다.

한때.

‘사용자 김수현에게 전해주세요.’

세라프가 언제나 날 기다리고 있던 공간은

‘정말로….’

이제 그늘진 제단만이 홀로 남아

‘정말로, 좋아했어요.’

너무나, 차갑게 굳어 있었다.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이.

*

생각보다 소환의 방에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세라프가 없다는 걸 확인한 이상 계속 있는 건 시간 낭비.

가족이 밖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보고 싶은 이들도 있다.

그럼 이만 가볼까?

“날이 춥습니다.”

확실히 새벽이라 그런지 공기가 서늘하다.

“그러게. 먼저 돌아들 갔으면 좋으련만…. 응?”

킥, 작은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시선을 돌리자,

“……!”

소슬한 복도 속, 홀로 서 있는 형상이 순식간에 시야를 점령한다.

그리고.

고요히 감은 두 눈.

흰 눈이 흐르는 듯한 살결.

달빛을 머금은 듯한 비단 같은 은발.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흔들리는 한 쌍의 날개.

설마.

“사용자 김수현.”

낯설잖은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 그녀가 있었다.

세라프가.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하는 한 천사를 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다.

여전히 그곳에 서 있는 세라프를 뚫어지라 응시한다.

그녀는 잔잔히 눈을 뜨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날 정면에서 마주한다.

“…세라프?”

“예. 수현.”

그 순간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세라프가 감았던 눈을 뜨며 날 정면에서 마주하는 순간.

“수현 덕분에 제로 코드 님께서…. 응, 아?”

왜인지는 몰라도, 돌연 날 직시하는 세라프의 얼굴에 당황이 거미줄처럼 번졌다.

무엇에 심히 놀랐는지 눈이 화등잔만 하게 떠졌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녀의 두 눈동자가 몽롱함에 젖으며 입을 살짝 벌린다.

“수…. 저, 정말 제가 아는 수현이 맞습니까?”

무언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

왜 그래, 좀 전까지 차분하더니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아, 설마 내 얼굴은 잊은 건가?

분위기가 변했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원판이 어디 간 건 아닌데.

충격이라면 충격이다.

“세라프.”

하지만 괜찮다.

제로 코드가 무슨 까닭으로 마음을 바꿨는지 알 수 없지만….

“세라프!”

지금 이 순간, 세라프는 내 앞에 존재한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폭발해 나도 모르게 그녀의 앞으로 달렸다.

하지만 그 탓에 깜빡 잊고 말았다.

백한결 사건 이후 들었던, 절대로, 함부로 미소 지으면 안 된다는 경고를.

“수, 수현? 자, 잠깐…!”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다.

그러나 감정에 충실한 입꼬리는 이미 한껏 올라가, 미소라고 보기 충분한 형태를 지은 듯했다.

거기다 한 술 더 떠, 앞으로 얼굴을 불쑥 들이밀기까지.

결국.

“신이시여!”

눈을 질끈 감은 세라프는 양손을 기도하듯 맞잡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 작품 후기 ============================

코멘트 하나하나 전부 읽었습니다.

감사하고, 또 죄송합니다. ㅜ.ㅠ

예전에 독자 분들이 보고 싶으신 외전을 코멘트에 적어주셨던 회가 기억이 납니다.

외전은 길게 끌 수 없는 만큼 그 많은 소재를 전부 적는 건 무리지만, 제가 생각하는 내용과 독자 분들이 선호하시는 내용을 우선할 예정입니다.

책임감 없는 행동으로 독자 분들을 실망시킨 만큼, 외전 연재는 최선을 다해 마무리 짓겠습니다.

_(__)_

PS. 고장난선풍기 님, 너무 늦게 말씀드리지만 고연주 일러스트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PS2. 독자님들. 저 임신하지 않았어요;;;;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