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in Character Hides His Strength

80. The Transcendent World (2)

[ 현명한 인간이군. ]

신의 글은 김성철의 손을 떠나 우로보로스를 향해 날아갔다.

우로보로스는 민트향 나는 입을 벌려 신의 글을 삼켰다.

[ 약속한 보상을 내려주지. ]

신의 글을 삼킨 우로보로스는 김성철 앞에 녹색 빛이 도는 빛나는 구체를 날려보냈다.

김성철은 양손을 모아 어린아이 머리 크기 만한 구체를 받아들였다.

청량하고 시원한 기운이 구체로부터 느껴지고 있었다.

‘이게 정령의 정수인가. 처음 느껴보는 순수한 기운이다.’

김성철은 문득 정령계에서 만날 수 있는 때 묻지 않고 청량하며 그리고 생명력으로 충만한 기운을 녹색 구체로부터 느낄 수 있었다.

[ 그럼, 나는 이만 돌아가겠다. 필멸자. 또 다른 신의 글을 발견하면 우리의 대행자를 통해 언제든 다시 여기에 오도록. ]

김성철은 우로보로스가 서두르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거대한 뱀은 할 말이 끝나자마자 칭칭 휘감았던 몸을 풀고 서쪽 공간을 향해 날아갔고 김성철이 갖고 있던 봉인은 모래처럼 흩날려 사라졌다.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홀로 남은 김성철 앞에 문이 나타났다.

김성철은 직감적으로 그 문이 현실로 통하는 문이라는 걸 느끼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일단은 돌아갈까. 저 거대한 뱀의 말에 의하면 신의 글이라는 게 있으면 다시 여기로 올 수 있는 것 같으니.’

우로보로스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김성철에겐 또 다른 신의 글이 있다.

라그란제의 카타콤에서 얻은 물건이다.

과거엔 그것을 거의 해독해내지 못했지만 읽는 자의 능력을 익힌 지금이라면 그 두루마리에 쓰인 글귀를 어느 정도 해독할 수 있으리라.

‘이왕 이렇게 된 거 시간을 들여 그것을 한 번 보던가 해야겠군.’

신의 글을 읽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읽는 자의 능력을 익혔음에도 신의 글을 보고 있으면 상당한 체력과 심력이 소모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김성철은 시간을 들여 그것을 보기로 다짐하며 문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어둠이 그를 감쌌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봉인이 없다는 점.

김성철은 동요하지 않고 느긋하게 인도하는 빛이 비추길 기다렸다.

곧 그가 기다린 빛이 나타났다.

어둠 곳곳에 반딧불과 같은 구형의 빛이 절대 암흑 속의 공간을 밝혔다.

김성철은 그 작은 빛 안에 사람의 형체가 머물러 있는 걸 알아차렸다.

각기 다른 얼굴, 복색, 그리고 자세.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들 석상처럼 멈춘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오직 단 한 명, 마지막에 스쳐 지나간 사내만이 눈을 뜬 채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30대 후반 정도는 되었을까.

수척한 얼굴과 빼빼마른 체구를 지닌 볼품없는 남자로 낡은 책상 앞에 앉은 채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김성철은 왠지 모르게 그 얼굴이 낯이 익다고 느낀 채 빛에 휩싸였다.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김성철은 은자의 탑, 재앙의 서 보관고에 있었다.

베르텔기아와 똑같이 생긴 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책은 김성철이 잘 아는 목소리로 그러나 전혀 다른 톤으로 말을 건넸다.

“위대한 지식의 뱀께서 당신을 인지하셨습니다. 앞으로 당신은 언제든 저를 통해 초월세계로 가실 수 있습니다. 단, 소각해야 할 신의 글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 하에 말이죠.”

김성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걸어오는 책을 응시하다 불쑥 물었다.

“넌 뭐냐?”

베르텔기아와 함께 있었을 때라면 결코 묻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베르텔기아에게 커다란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하지만 혼자인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김성철은 사뭇 살벌한 시선으로 책을 노려보며 다시 물었다.

“넌 뭐냐고 물었다.”

이윽고 책이 미약하게 몸을 떨며 움직임을 보였다.

“저는 베르텔기아 55호입니다.”

“베르텔기아 55호...? 그게 뭐지?”

“글쎄요. 그건 마치 당신에게 당신이 대체 뭐냐고 묻는 것과 동일한 성격의 질문이네요.”

“무어라?”

“당신이 당신의 부모님에게 생명과 이름을 받았듯이 저도 저의 아버님에게 생명과 이름을 받았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탑의 경비와 증표를 지닌 사람을 초월세계로 안내하는 것이고요.”

55호라 자신을 밝힌 책은 묻지도 않은 부분까지 차분한 어조로 물 흐르듯 이야기했다.

“…….”

김성철이 잠시 할 말을 생각하며 침묵에 잠긴 동안 책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조금은 놀랐네요. 신룡의 일족 이외의 인물이 증표를 가지고 올 줄이야.”

“신룡의 일족?”

“지식의 뱀을 섬기는 무리들이죠. 얼마 전까지 최후의 생존자가 종종 드나들곤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끊겨서 일족이 멸망한 줄 알았어요.”

그 말을 듣던 김성철은 눈을 반짝이며 작심한 듯 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거, 젊은 여잔가?”

지식의 뱀 우로보로스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김성철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한 명의 인물을 떠올리고 있었다.

라이즈 하이메르.

지금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인물이 어쩌면 초월세계의 탑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는 지식의 뱀을 섬기는 일족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불현듯 솟아나왔다.

왜냐하면 그녀는 현재까지 알려진 김성철을 제외하고 유일한 ‘읽는 자’니까.

“라이즈 하이메르라고 하는.”

이에 책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안타깝게도 저는 이름을 묻지 않아요. 제가 판단하는 건 증표를 지니고 있는지 여부, 지식의 뱀께서 허락하신지 여부, 그리고 탑의 적인지 아닌지 여부.”

“그런가? 그럼 그 여자는 어떻게 생겼지? 젊은 여잔가? 아니 더 이상 젊지 않을 수도 있겠군. 그래도 아주 늙진 않았을 것이다.”

김성철은 어딘가 필사적이었다.

아주 뜨거운 건 아니었지만 평소의 담담함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열의가 그의 태도와 목소리에 서려 있었다.

55호는 그런 김성철을 가만히 응시하다 이내 얕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당신이 찾는 사람은 아주 늙고 쭈글쭈글한 노파랍니다.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인물과는 거리가 멀어요.”

“…그런가?”

책은 그렇게 말한 후 몸을 가볍게 흔들며 김성철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조금은 풀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재밌는 인간이었죠. 저는 제법 그녀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신룡의 일족 중에 찾으시는 사람이 있나보군요?”

“글쎄. 딱히 찾진 않아. 약간 궁금해서 말이야.”

“그럼 잘됐네요.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신룡의 일족은 루테기네아라고 불리는 나라에게 멸족 당했으니까요.”

“그런가?”

그렇게 묻는 순간 김성철은 문득 자신을 둘러싼 외계에 약간의 변화를 감지했다.

그는 열린 입구를 봤다.

거의 정지 상태에 가까울 정도로 느려진 노예의 움직임이 생기를 되찾고 있었다.

“시간이 다 된 것 같군.”

김성철이 책을 보며 말했다.

책은 고개를 끄덕이듯 몸을 흔들었다.

“자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네요. 저를 만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사람이 한정되다 보니 말할 기회가 거의 없었거든요. 지난 5년 동안 유일하게 한 대화가 탑의 침입자를 향한 것이었어요. 하지만 그건 대화라고 할 수 없죠.”

“…그렇군.”

김성철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의 뇌리 속에선 수많은 생각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그의 뇌리를 지배하는 것은 이 책이 살아 있는 소녀처럼 느껴진다는 것.

‘이 녀석. 비탄의 섬에 있던 것과는 다른 녀석인가? 전혀 분위기가 다르군. 이래서는 완전 그 녀석과 똑같은...’

그 대목에서 김성철은 덜컥 겁을 느꼈다.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라도?”

책이 김성철에게 불쑥 물었다.

원상복구 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김성철은 눈을 한 차례 껌뻑이며 땅바닥을 응시했다 이내 작심한 눈빛으로 책을 응시했다.

“…너와 비슷한 녀석을 본 적이 있다.”

*

탑의 바깥엔 알록달록한 신관의 복색을 한 자들이 대거 나타나 있었다.

질서신을 섬기는 뮤라교단의 성직자들이다.

그들은 아신이 나타난 자리에 모여 여러 가지 기구를 이용해 인근 지대를 살피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치는 와중에서 분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악한 이단 놈들. 신성한 신의 탑에 상처를 입힌 것도 모자라서 대지의 기운마저 착취해버리다니.”

“바야흐로 말세라는 것이겠지요. 이럴수록 우리들은 질서신의 말씀에 엄숙하게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성직자들의 대화를 들으며 김성철은 탕그리트의 옛 저택으로 돌아갔다.

탕그리트의 저택 옆엔 마라키아와 남작, 베르텔기아가 사이좋게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응? 이제 나온 거야? 한참 동안 안 나와서 우리끼리 먼저 돌아왔어.”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을 보고 반갑게 말을 걸었다.

“그렇군.”

김성철은 모닥불 옆에 모포를 깔고 털썩 앉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베르텔기아가 김성철에게 다가와 물었다.

김성철은 베르텔기아가 다가오자 멍하니 그녀를 응시하다 이내 손을 뻗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베르텔기아가 기겁을 하며 몸을 뒤로 물리며 뾰족하게 소리쳤다.

“갑자기 징그럽게 왜 이러는 거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김성철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갑자기 왜 이러냐고? 혹시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 아니야?!”

이윽고 그는 잔뜩 경계하는 베르텔기아를 응시하며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 일 없었다. 시덥잖은 아신을 만난 것 외에는.”

“아신?”

“멀게만 느껴졌던 존재들은 의외로 가까이 있더군.”

김성철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영혼창고에서 바람정령의 정수를 꺼냈다.

남작 옆에서 꾸벅꾸벅 졸던 마라키아가 눈을 번쩍 뜨고 녹색 빛이 도는 구체를 크게 뜬 눈으로 응시했다.

“삐이...?”

부리가 살짝 열렸다.

“저것은 설마?”

마라키아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김성철 쪽으로 다가왔다.

김성철은 마라키아를 곁눈질로 바라봤다.

이윽고 김성철 옆으로 다가온 마라키아는 바로 앞에서 녹색 구체를 보며 놀라움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정령의 정수?”

“이걸 아나?”

김성철이 물었다.

“책으로만 보았다. 까마득한 과거. 세상의 절반이 정령으로 뒤덮여 있을 때, 종종 볼 수 있었다는 물건이지. 전설에 따르면 이 정령의 정수는 사용하는 이에게 영구적인 힘의 상승을 준다고 들었다.”

그렇게 말하는 마라키아의 부리에서 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베르텔기아가 그걸 보고 가만 내버려 둘 리 없다.

그녀는 즉시 마라키아를 가로막고 책 모서리고 마라키아의 겨드랑이를 푹 찔렀다.

“삐이잇! 뭐하는 짓이냐?!”

마라키아가 깜짝 놀라며 역정을 내자 베르텔기아는 크기를 축소해 김성철의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며 약올리듯 말했다.

“도둑고양이가 생선을 훔치기 전에 미리 예방을 해봤어.”

“뭐? 도둑고양이? 이.. 한심한 리빙북 따위가!”

마라키아가 역정을 내보지만 그 앞에 있는 건 다름 아닌 김성철이다.

“…….”

김성철은 단지 담담한 눈빛으로 마라키아를 노려보는 것만으로 전 멸세의 왕을 침묵시켰다.

“삐기이이이.....”

마라키아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남작 옆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냥 돌아가면 마라키아가 아니다.

“반역심이 20 올랐습니다!”

뭔가 신경 쓰이는 말을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래.”

물론 김성철과 베르텔기아는 그 말을 일언반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김성철은 신비로운 빛을 발하는 녹색구체를 손바닥 위에 올리고 얼굴에 가까이 댔다.

청량한 바람의 기운이 얼굴을 기분 좋게 간지럽혔다.

‘확실히 이건 범상치 않은 물건이군. 이렇게 순수하고 정당한 힘이 서린 물건은 보기 어렵다.’

“민첩성이 부족해서 제대로 싸울 수가 없군!”

마라키아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민첩성이 조금만 더 높았어도... 좀 더 활약할 수 있을 텐데....”

정말 눈에 보이는 일차원적인 수작이다.

하지만 김성철은 적어도 능력치 상승에 있어서만큼은 결코 양보하지 않는다.

김성철은 마라키아의 말을 철저히 무시하며 오랜만에 상태창을 떠올렸다.

[능력치]

힘 999+ 민첩 866 체력 815

마력 732 직관력 738 마법저항 632

의지 543 매력 28 운 28

“음....”

여전히 매력과 운은 절망적이지만 다른 능력치가 소폭 상승된 게 눈에 띄었다.

‘아신과의 싸움 덕분인가. 의지력이 30 가까이 올랐군.’

더 이상 올리는 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민첩성과 체력 부분도 조금이나마 상승했다.

‘하지만 이것이 있다면...?’

김성철은 손 안에 담긴 바람정령의 정수를 응시했다. 어차피 속는 셈 치고 가져온 물건이다.

김성철은 정수를 사용하기 전에 헛된 기대부터 접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는 지금 충분히 강하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눈에 띄는 장족의 발전을 한다면 분명 기분이 좋을 것이다.

김성철은 성장의 프로임과 동시에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난 방랑 세월 동안 인생의 유일한 낙은 요리와 성장 두 가지가 전부였으니.

김성철은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바람의 정수를 움켜 쥐었다.

곧 하나의 메시지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 바람의 정수를 사용하시겠습니까? ]

당연히 예스다.

“아~ 민첩성~ 민첩성만 높으면~”

마라키아의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김성철은 마라키아의 간절한 염원을 무자비하게 깨부셨다.

바람정령의 정수가 깨어지며 푸른 기운이 김성철을 향해 속속들이 흡수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마라키아는 부리를 쩍 벌린 채 망연자실한 얼굴로 지켜보다 이윽고 고개를 푹 숙였다.

[ 당신은 바람정령의 정수를 흡수했다. ]

[ 신의 숨결이 당신을 축복한다. ]

김성철은 더할나위 없는 청량한 기운을 느끼며 즉시 상태창을 다시 열었다.

[능력치]

힘 999+ 민첩 916 체력 815

마력 732 직관력 738 마법저항 632

의지 543 매력 28 운 28

“…앗싸!”

김성철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벌떡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