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star or Gaju's Regression
5. Prepare for assassination (4)
“……이제 살겠네.”
아슬아슬하게 볼일을 볼 수 있었던 뷔샤는 한결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음, 그런 상황이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어.”
그리고 설마 그녀가 그런 상황이라고 생각지 못했던 로안이 못내 민망한 얼굴을 해 보이자,
“이게 다 저 쓰레기 놈 때문이라구!”
그보다 훨씬 더 민망했던 뷔샤가 달려가 아우크스의 얼굴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퍽!
“크억!”
움직이고 싶어도 로안이 허벅지에 검을 박아 놔서 움직일 수 없는 아우크스가 괴로워하자,
“이 돼지 같은 놈! 내가 저 안에서 짐승처럼 똥오줌도 못 가리고 수치스러워하길 바랐겠지?”
몇 시간도 아니고 며칠을 참고 또 참았던 뷔샤다.
울분이 터진 듯,
“나가 죽어! 이 변태 새끼야!”
악에 받친 얼굴로 뷔샤가 다시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세게 후려쳤다.
“아악! 살려 줘! 살려 줘!”
아무리 기력을 잃었어도 기본적으로 단련이 되어 있는 뷔샤이기에, 꽤나 찰진 주먹질이 아우크스의 얼굴을 순식간에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말았다.
하지만,
“나 같아도 그런 대접은 참을 수 없지.”
로안은 별로 말릴 생각이 없었다.
아우크스는 뷔샤가 몸을 욱여넣어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저 우리 안에서 대소변을 보도록 일부러 방치시킨 것이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생리적 현상은 참을 수가 없을 것.
그를 통해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끼게 만들어서 기를 꺾으려는 짓거리였다.
지금의 뷔샤는 며칠을 버틴 끝에 치욕스러운 모습은 보이지 않고 벗어난 것 같지만, 그건 로안이 미래에 만났던 뷔샤가 모두 겪었을 고통.
그걸 생각하면 뷔샤가 아닌 자신이 아우크스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넌 죽어야 해! 여기서!”
그리고,
푸욱!
“크억!”
화를 참지 못한 뷔샤가 아우크스의 허벅지에서 검을 뽑아 들자,
“사, 살려 줘! 날 살려 주기로 했잖아! 필스타인!”
아우크스가 뒷걸음질 치며 로안을 불렀다.
“잠깐만, 뷔샤.”
하지만 심정적인 부분과 현실적인 부분은 언제나 이해가 상충하는 법.
로안이 죽이는 것만은 곤란하다고 뷔샤를 붙잡았다.
“이거 놔! 이 변태 돼지 새끼를 죽여야 한다고!”
발끈한 그녀가 로안을 뿌리치려 요동치며 소리쳤지만,
“진정해.”
정상적인 상태라 하더라도 로안을 뿌리칠 수는 없는데, 하물며 지금은 어떠하겠는가?
“잠시만 내 말 들어 봐.”
로안이 흥분한 그녀를 등 뒤에서 부드럽게 끌어안자,
“읏…….”
당황한 뷔샤가 흠칫하며 굳어 버렸다.
“아우크스가 인간쓰레기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줄이 많이 닿아 있는 녀석이라 이용가치는 충분해. 아직은 죽여선 안 돼.”
이윽고 로안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아우크스가 들을 수 없도록 속삭이고 있지만 ‘아직은’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로안도 아우크스를 언젠가는 처단해 버릴 생각인 듯 했다.
“칫…….”
그러자 뷔샤가 어쩔 수 없단 듯 치켜들었던 검을 내려놓았다.
“……저 돼지 녀석을 어떻게 이용할 작정인데?”
그리곤 부끄러웠던지 뾰족한 귀를 붉힌 채 도망치듯이 로안의 곁에서 떨어져 나와 새침한 얼굴로 물음을 던지는 그녀.
“금화 2만 개를 내게 빚졌으니 실물을 마련하든지, 그에 준하는 뭔가를 해 줘야겠지.”
미소 섞인 로안의 말에,
“음, 2만 골드면 살려 줄 만하네.”
현실주의적인 성격만은 변함없는지 금방 수긍해 버리는 뷔샤.
푹!
“끄악!”
그리고 그녀가 다시 아우크스의 허벅다리로 검을 쑤셔 넣었다.
“내, 내 다리!”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놓은 것뿐이야! 이 돼지야!”
도도하게 뒤돌아서는 그녀를 보며 로안이 그 정도는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아우크스. 뷔샤는 이제 내가 데려간다. 오늘 있었던 일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한다면 그때는 그 검이 네 목에 박혀 있을 거야. 고통의 징표를 잊지 마라.”
“그, 그럴 일 없어! 나도 창피해서 이야기하지 못할 거야!”
검이 박힌 허벅지가 너무 고통스러웠던 아우크스가 흐느끼며 목소리를 높이자 로안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뷔샤의 물건들을 다시 돌려줘.”
“아, 알았으니 제발……. 이제 다리에 감각이 없어…….”
또다시 사정하는 그에게로,
툭!
뷔샤가 발을 날려 허벅지를 찼다.
“크아악!”
그러자 침을 줄줄 흘리며 괴로워하는 아우크스!
“아직 감각 있구만! 감히 어디서 뻥을 쳐?”
예쁜 얼굴과 달리 한 성격 하는 하프 엘프의 외침에 로안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가 알고 있는 뷔샤와는 정말 180도 다른 모습이라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다리 하나 없어도 사는 데 지장은 없어, 아우크스. 깔끔하게 절단하면 죽진 않을 거야.”
그리고 로안도 이젠 아우크스에게도 당근을 내밀 때라고 다정히 웃으며 말했다.
“히익! 제발 그런 소리는 하지 마!”
하지만 당근보단 채찍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저런 소릴 아무렇지도 않게 해 대다니!
저 필스타인 놈은 필시 악마가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아우크스가 굵은 눈물방울을 흘렸다.
“그리고 이건 다시 가져가겠어.”
이내 로안은 아까 아우크스에게 건넸던 금화를 다시 빼앗았다.
“아직 1만 9999개가 남았다는 걸 잊지 마.”
아무리 그래도 계산은 정확히 해야 한다.
“……아, 알겠네.”
“뷔샤의 물건은 어디에 있지?”
“바로 이 옆방에…….”
“좋아. 남은 금화는 월마다 10%씩 복리로 계산할 테니 그런 줄 알아.”
“보, 복리라니! 잠깐만!”
“그럼 지금 처분하든가.”
“크흑!”
창조 경제의 진수를 보여 주고 있는 로안의 모습에 뷔샤도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돼지는 네가 알아서 잘 괴롭혀 줄 것 같으니까 이제 신경 끄겠어.”
그러나 아직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런데 넌 대체 누군데 날 구해 준 거지?”
로안과 함께 옆방으로 걸음을 옮기며 뷔샤가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를 본 적이 없었다.
저렇게 새카만 눈동자와 머리카락이라면 스쳐봤다 하더라도 기억에 남을 법했음에도 말이다.
기억을 더 거슬러 가, 혹시 필스타인 가문과 자신이 접점이 있었던가를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구해 줄 이유가 없는 로안이 자신을 구해 줬단 사실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우리 가문은 노예나 천민들을 암살자로 양성시키는 걸로 유명하지.”
“그건 이미 알고 있어. 혹시라도 나를 필스타인 가문의 암살자로 만들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미리 거절하겠어!”
이미 구를 만큼 굴렀다는 뷔샤가 먼저 선수를 쳤다.
남부 우림에서 해결사 노릇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진짜 암살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단호한 그녀의 말에 로안도 후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럴 생각은 없어.”
그러자 뷔샤가 더욱더 혼란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럼 대체 뭘 원하는 거야?”
곧 옆방에 당도한 그녀가 자신의 물건들을 빠르게 되찾으며 물음을 던졌다.
그가 자신을 구해 준 것에 대해서는 고마워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로안에 대해서 신뢰가 그리 깊은 모습은 아닌 것 같았다.
그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벌써 신뢰가 생길 순 없는 노릇일 테지.
“……네게 부탁할 게 있어서.”
가능하다면 뷔샤도 옆에 두고 지키고 싶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바람일 뿐이었다.
그녀가 남부 우림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한다면 그리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로안이 대답하자,
“뭘?”
파르비티와 비슷한 금발 머리카락을 가진 뷔샤가 나뭇잎 모양의 은색 핀으로 머리를 다시 정리하며 물었다.
“바실리스크를 제조해 줬으면 해.”
그 말에 흠칫하며 고개를 돌린 뷔샤.
“……바실리스크를 네가 어떻게 알고 있어?”
바실리스크라 함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맹독을 가진 전설 속의 괴물.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뷔샤가 직접 만든 무색, 무향의 치명적인 맹독.
“난 필스타인 가문이야.”
“……그렇다고 해도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텐데.”
아우크스와 달리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뷔샤였지만,
“완벽한 비밀이란 없는 법이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긴 하겠지.”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그녀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녀가 로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날 구해 준 대가가 그거야? 바실리스크의 제조법을 원하는 거야?”
그러자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딱 한 번 쓸 정도만 만들어 주면 돼.”
단호한 로안의 대답에 어느샌가 완전히 복식을 갖춰서, 화려한 장신구로 꾸민 상반신과 달리 매끈한 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남부 우림풍의 복장이 된 뷔샤가 의문 가득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 정도라면 그녀도 충분히 해 줄 수 있다.
제조법을 알려 달란 것도 아니고 한 번 쓸 정도만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이니까.
“……타깃은?”
그렇지만 문제는 저 물건을 어디에 쓰느냐는 것이다.
물론 로안 정도 되는 실력자가 걸릴 리도 없을 테고, 바실리스크라면 들킬 염려도 전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은 언제든 있는 법.
혹시라도 자신이 엮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가 물음을 던지자,
“그건 말해 줄 수 없어.”
로안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겠지.”
그렇지만 이해 못 할 것은 아니라고 뷔샤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바실리스크 1회분.
‘엄청나게 높은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거겠지.’
소드 마스터 경지에 오른 암살자가 독을 필요로 한다면 정말 위험한 상대를 암살하려 하는 게 틀림없을 것이다.
조금 망설이고 서 있던 그녀가,
“……좋아.”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로안이 자신을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굉장히 지저분한 꼴들을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소변을 우리 안에서 보는 것 정도는 우습게 여겨질 정도로.
그걸 생각하면 신세진 것은 갚아야만 했고,
“대신 내가 여기서 지낼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 줘야 해!”
어쩜 새로운 창조 경제를 이끌어 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당당한 얼굴로 새로운 요구 사항을 전달하는 뷔샤의 모습에,
“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야?”
이번엔 로안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물음 던졌다.
그러자 뷔샤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
“천하의 뷔샤가 노예상들한테 잡혀갔단 소문이 파다할 텐데 어떻게 거길 돌아가란 거야? 창피해서 못 돌아가! 어차피 좋은 기억도 없고! 거긴 썩었어!”
남부 우림이라면 진저리가 난다는 뷔샤의 말에 그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ㅡ이번 일만 끝나면 전 남부 우림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로안이 기억하는 그녀의 입버릇은 분명히 그것이었는데 말이다.
어쩜 그때의 뷔샤는…….
‘가지 마.’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말만은 로안이 끝끝내 하지 않았던 말이니까.
그리고 그녀는 끝끝내 남부 우림으로 돌아가지 않고 죽음의 순간까지 평생 로안의 곁을 지켜 줬다.
에그베르트와 이보니의 음모를 일찍 간파한 대가로 외로운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그래.”
그 생각에 괜스레 울컥해서 다시 눈가가 촉촉해진 로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대체 사람을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그게 또 어색했던지 얼굴을 붉힌 채 툴툴대는 뷔샤.
“멀리 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거든.”
곧 로안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흥, 나한테 반했나 보지?”
그러자 우쭐한 척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뷔샤.
그녀는 누가 봐도 아름다운 하프 엘프니 잘난 척을 한대도 밉지가 않았다.
아니,
“정말 그런 것 같아.”
고통과 상처로 얼룩져 망가졌던 지난날과는 전혀 다른 진짜 뷔샤의 모습이라 더 예쁘게 보일 수밖에.
그리 생각하면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그가 환히 웃음 지어 보이자,
“……나, 남자들이란!”
정말 그렇다고 대답할 줄은 몰라 당황한 듯 얼굴을 붉힌 채 쭈뼛거리는 뷔샤.
“길이나 안내하라구! 이 더러운 곳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으니까!”
평생을 혼자서 살아왔기 때문일까?
밑지기 싫어하는 뷔샤의 외침에 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아버지와 파르비티, 한스, 에밀리아, 그리고 뷔샤까지.
소중한 이들을 전부 되찾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젠 아무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로안이 마음 깊이 다짐하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뷔샤.”
*
*
*
“이따위 목걸이를 대체 왜 해야 하는 건데?”
지하도를 나서며 뷔샤는 상당히 짜증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손에 들려 있는 검은색 노예 목걸이를 굳이 차야 한다는 사실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여긴 남부 우림이 아니니까. 제국은 이민족도 차별이 심한데, 심지어 이종족이라면 정말 귀찮은 일이 벌어질 거야. 입국 허가 증명서가 없으면 포모도로 신전이 움직일 수도 있고.”
그러자 옆에 있던 로안이 어쩔 수 없단 얼굴로 설명했다.
“흐음…….”
“그러니 여기서는 우리 가문의 문양이 찍혀 있는 목걸이를 하고 있다면 함부로 손대지 못할 거야. 무서워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암살자로 착각할 테니까. 언젠가 볼로네즈를 떠나고, 제국 밖으로 나가게 되면 그때는 풀어도 괜찮아. 열쇠는 네 손에 있으니까.”
똑같은 노예라 하더라도 필스타인 가문의 노예는 대우가 달랐다.
기본적으로 암살자를 공수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노예를 구하는 것이니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을 하고 있는 만큼 필스타인 암살자들은 서로를 형제로 여기며 각별한 우정을 자랑한다.
덕분에 가주의 명이 떨어지면 돈이 되지 않아도 전원이 기꺼이 나서서 복수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귀족들도 함부로 굴 수 없는 것이 필스타인 가문의 노예다.
그러니 진짜 노예가 아니라 하더라도 볼로네즈에서 생활을 하는 이민족이나 이종족이라면 필스타인 가문의 문양이 찍혀 있는 노예 목걸이를 하고 있는 편이 훨씬 더 나을 수 있다.
노예상들은 물론이고 귀족들조차도 필스타인 가문은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기 때문에, 적어도 귀찮은 일에 연루되진 않을 테니까.
“칫…….”
마냥 싫다고 하기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달칵.
결국 인상을 찌푸린 채 스스로 목에 목걸이를 채운 뷔샤가 인상을 구긴 채 말했다.
“흥, 남부 우림이라고 다를 것 같아? 다 똑같거든?”
“그건…….”
“정말 전부 다 썩었어!”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따위가 아니라고 앙칼지게 소리치고는 입을 꾹 다물어 버린 뷔샤.
“……그럼 언젠가 다 도려내 버리자.”
나란히 옆에 선 로안이 멀리 보이는 베이커9거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뭐?”
그 소리를 들은 뷔샤가 힐끔 고개를 돌리자,
“썩은 부위 모두 도려내 버리자고.”
그녀와 눈을 맞추며 미소 짓는 로안이었다.
파르비티도, 로렐라이도, 뷔샤도.
아니, 필스타인 가문의 수하들 모두 다.
“언젠가는.”
모두 다 똑같은 사람.
단지 외형만 다를 뿐.
언젠가는 반드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 말겠노라고 그가 결의를 다지자,
두근!
왠지 모르게 쑥스러운 기분을 느껴 버린 뷔샤가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바보 아냐. 암살자 주제에 그게 가능할 것 같아?”
자신이 기억하는 모습과 정반대인 뷔샤가 여전히 신기하다 싶었던 로안이,
ㅡ왜 그렇게까지 길들임을 버틴 거지?
언젠가 자신의 물음에,
ㅡ해 보기도 전에 포기하는 건 꼴사나우니까요. 그래도 결국은 벗어나게 되었잖아요.
희미하게 웃으며 답해 줬던 뷔샤의 모습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그가 더 이상 그런 고통을 당할 일이 없게 된 지금의 뷔샤를 보며 말했다.
“해 보기도 전에 포기하는 건 꼴사납잖아.”
그러자 그녀가 흠칫하며 로안을 쳐다보았다.
그건 뷔샤의 삶의 방식!
하프 엘프로 태어나 숲의 일원으로도, 인간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그녀가 혼자서 악착같이 살아남을 수 있는 원천이기도 했다.
“칫…….”
덕분에 할 말이 없어져 버린 그녀가 뒷짐을 진 채 말했다.
“뭐, 좋아!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지켜봐 주겠어! 그리고 비웃어 줄게!”
괜스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거들고는 먼저 앞서 걸어가는 뷔샤.
그 모습 지켜보며 로안이 다시 웃고 말았다.
“솔직하지 못한 것도 여전하구만.”
그런 그의 말에 뷔샤가 뾰족한 귀를 쫑긋했다.
하프 엘프라 하더라도 보통 사람들보다 청각이 뛰어나긴 할 터.
“그런데 말이야!”
그리고 곧 발끈한 얼굴로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속이 여리다는 둥, 솔직하지 못한 게 여전하다는 둥 왜 자꾸 아는 척하는 거야?”
로안이 말하는 투를 보면 분명히 자신을 몹시 잘 알고 있는 듯 이야기하고 있다.
“날 만난 적도 없잖아!”
정작 자신은 그를 처음 보는데 그런 소릴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네가 날 그렇게 잘 알아?”
그래서 툴툴대고 있다지만 그조차도 로안에게는 귀여워 보일 따름이었다.
“응.”
그리고 그가 옅은 미소 띤 얼굴로 뒷짐을 진 채로 앞서 걸어가자,
“응? 응이라고? 네가 날 어떻게 잘 알아? 뭘? 응?”
지기 싫어하는 뷔샤는,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자존심상 그런 건 인정할 수 없노라고 따지며 그의 걸음을 따라잡아 나란히 섰다.
“모르지? 모르면서 괜히 수작 부리려고 아는 척하는 거지?”
따따닥 말을 쏟아 내며 따지는 그녀의 모습에 로안은 별다른 대답 없이 그저 느긋한 미소 걸친 채 걸음 내딛을 뿐이었다.
그러자 답답해진 뷔샤가,
“괜한 수작에 내가 넘어갈 줄 알고?”
퉁명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러자 이번엔 로안이 걸음을 멈추고 뷔샤를 돌아보았다.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도도한 얼굴로 따지고 드는 그녀에게로,
슥.
부드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듯이 부드럽게 쓸어 넘기는 로안.
결을 따라 부드럽게 움직이는 손가락에,
두근!
순간 기분이 좋아져 버린 뷔샤가,
“무, 무슨 짓이야!”
정말로 당황한 듯 뾰족한 귀를 붉히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너무 자연스럽게, 그리고 너무 다정하게 머릴 만져서 피할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누군가 자신을 만지는데 싫지 않고 기분이 좋았다는 게 더 당혹스러웠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좋아한다.”
그 모습에 로안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뒷짐을 지고 걸음을 내딛었다.
죽음의 신처럼 보일 정도로 강한 이였지만 지금은 한없이 듬직하게 느껴졌다.
세상이 모두 외면한대도 그만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지켜 줄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이 들 정도로 말이다.
“……개, 개수작 부리고 있네! 누가 좋아한대!”
그래서 더욱더 당황해 버린 뷔샤가 툴툴대며 옆으로 또다시 걸음을 따라잡자,
“거짓말을 할 때는 목소리가 커진다.”
또다시 한마디 던지는 로안.
“웃기지 마! 내가? 언제 거짓말을 했다고! 무슨 목소리가 커…….”
아니라고 부정하다 순간 뷔샤가 또다시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
자기가 생각해도 정말로 큰 목소리를 내고 있었으니까.
“으…….”
그러자 그녀가 팔짱을 낀 채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 모습 보며 여전히 말없이 미소를 머금은 채로 천천히 걸음을 내딛는 로안.
“…….”
봤지?
마치 그리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눈빛이 너무나도 얄밉다고 생각한 뷔샤가 입술을 삐죽이기 시작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그는 자신을 잘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게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왠지 기쁘기도 하고.
“아니! 거짓말을 한 게 아닌데 내가 왜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 건데?”
그러다 그녀가 말을 안 하니까 괜히 더 기분이 이상해진 것 같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내 로안이 다시 손을 뻗어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응, 안 그래도 돼. 이야기하고 싶은 만큼 얼마든지 이야기해도 괜찮아.”
불어오는 바람과 따뜻한 손끝이 어우러져 정말로 기분이 좋아져 버린 뷔샤가 고개를 슥 돌리고 말았다.
“……그냥 한번 얻어걸린 거면서.”
비록 반쪽이라지만 엘프의 피가 흐르고 있는지라 거짓말과는 인연이 참 없는 그녀였다.
머리를 쓰다듬는 걸 좋아한다는 말을 부인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그녀의 말에 로안이 후후 웃으며 말했다.
“아닌데?”
분명히 좋은 건 맞는데 묘하게 얄밉다.
그 덕분에 다시 로안을 째려보는 뷔샤.
“그럼 뭐? 다른 건 또 뭐?”
오늘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편안하게 로안을 대하고 있단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그녀가 툴툴대자 로안이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뭐?”
그가 알고 있던 뷔샤였다면 이런 모습은 절대로 보여 주지 않았을 텐데.
“이거 봐! 모르는 게 맞잖아!”
“아닌데?”
그래서 더 재미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도 덩달아 소년 시절로 돌아온 것처럼 장난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뭐가 아닌데! 그거 엄청 짜증 나거든!”
“그런가?”
“그래!”
“아닐걸?”
“짜증 난다니까, 그거!”
그렇게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며 베이커9거리로 향하는 동안.
스윽.
지하도 입구 근처에 즐비한 쓰레기 더미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풍성한 검은색 후드를 눌러쓰고 있어 도저히 정체를 가늠할 길이 없는 그가 멀어지는 로안의 뒷모습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타타그의 목걸이로 시간을 돌린 자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기이한 행보를 보인다고 했지.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그는 로안의 뒤를 계속 쫓아왔던 것 같다.
“로안 필스타인.”
그러고는 성별조차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분명히 목걸이는 네가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