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star or Gaju's Regression

34 Ch 12. Yahab (1)

오전의 이론 수업과 오후의 실전 수업.

그것이 모두 끝나고 난 아카데미는 어느 샌가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했지만,

“이제 자유 대련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교육 일정이 모두 끝난 건 아니었다.

“각 조의 조장은 조원들의 수준을 고려해서 대련 파트너를 선정하도록.”

아직까지 끝나지 않은 수업 일정에 다들 상당히 얼이 빠진 얼굴들을 해보였다.

“하루가 길어…….”

종단 베기, 횡단 베기, 사선 베기, 찌르기 등등.

인당 수천 번씩은 검을 휘둘렀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도 대련은 좀 낫겠지…….”

“맞아, 적어도 지루하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자유 대련이니 지루한 기본기 반복보단 나은 게 틀림없었다.

다들 자유 대련에 들뜬 얼굴을 하고서 각 조별로 모이자,

“드디어 때가 왔군!”

데이모스가 당당히 로안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 말이다!”

들뜬 기색 가득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로안과의 자유 대련을 고대하고 또 고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데이모스가 하위 클래스로 온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그가 상위 클래스로 간다 한들 로안이 그곳에 없다면 투쟁심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상대가 없단 건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었으니까.

덕분에 데이모스가 눈 밟은 강아지마냥 흥분한 모습을 보이자,

“데이모스 님, 보는 눈도 있는데 자중하시죠. 바보 같아 보인다구요.”

여전히 시종 역할에 충실한 포보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속삭였다.

“시끄럽다, 포보스! 특훈의 성과를 보여 줄 때가 왔다!”

입학 테스트 날 로안에게 당하고 나서 2주.

그리고 그 사이 황성의 습격 사건도 있었다.

덕분에 데이모스는 데이모스 나름대로 특훈이란 걸 한 모양이다.

“나비 공자는 기운이 철철 넘치는구만.”

“그러게!”

그 모습에 로안이 웃음을 터뜨리자 다른 이들도 비슷한 심정인지 그를 따라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그 욕구는 좀 눌러 두는 편이 좋겠어. 본격 합숙이 시작될 때까지는 전반적인 조의 질을 향상 시켜야 해. 안 그래도 페널티가 넘치는 조일 텐데 누구 하나 구멍이 되어선 안 돼.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자유 대련의 배분이 몹시 중요하단 말이지.”

그 와중에도 목적의식이 뚜렷한 한나가 냉정한 얼굴로 설명을 잇자,

“흐음…….”

데이모스도 확실히 로안 조의 실력이 몹시 들쭉날쭉하단 걸 알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시아가 체력적으로 향상되었다 해도 실력 면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에밀리아는 체력은 물론, 실력 자체가 검증되지 않은 상태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나와 데이모스가 페어를 이룬다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야. 한나도 만만치 않거든.”

곧 로안이 먼저 1 페어를 이야기하자,

“한나 폰 슈발츠라.”

데이모스가 진지한 얼굴로 한나를 쳐다보았다.

“왜? 너도 내가 여자라서 우습게 보여?”

이내 한나가 도발적인 얼굴로 응수하자,

“아니. 너와는 한번 검을 겨루고 싶었다. 검술 자체로는 분명히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라고 생각했으니까.”

입학 테스트 당시 그녀 또한 눈여겨본 상대라 대답하는 데이모스.

“나비 공자님은 꽤나 안목이 있으시네.”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봐 주고 있는 데이모스의 모습에 한나 역시 입가 가득 미소 띤 채 검을 붙잡았다.

“마침 슈발츠의 검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지금은 한나와의 대련으로도 만족하겠노라고 데이모스가 한 걸음 물러서자 로안이 흥미 가득한 얼굴을 했다.

검성 데이모스와 철의 여제 한나.

만약 한나가 검에만 매진했다면 분명히 그녀 또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을 것이라 확신할 만큼, 가지고 있는 재능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둘은 오늘 내로 승부를 내기 어려울걸.”

지금은 둘의 시작점.

그러니 분명히 좋은 라이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로안의 말에,

“그거 동의 못하겠는데?”

“이하동문이다!”

벌써부터 경쟁의식이 가득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는 데이모스와 한나.

“어쨌든 이걸로 첫 팀 완성이고.”

이어,

“그 다음은 포보스와 알리시아.”

로안이 알리시아의 짝을 지정해줬다.

“응? 나와 포보스?”

“포보스는 상당한 실력자야. 한나나 데이모스와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다고.”

포보스가 처음 만나서 보여 줬던 속검을 생각한다면 분명히 그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실제로 포보스는 드러나지 않았을 뿐, 데이모스만큼이나 뛰어난 실력자였다.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로안의 말에,

“아이고,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신 게 아닌지!”

여전히 모두에게 존대를 쓰고 있는 포보스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실력이야 어쨌든 저렇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녀석은 조심해야 한다구. 저런 타입은 겉과 속이 다르니까.”

그러자 한나가 상당히 날카로운 눈빛으로 포보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유, 그럴 리가요.”

난처한 얼굴로 그런 게 없다고 손사래 치는 포보스였지만,

‘……역시 한나의 통찰력은.’

이미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는 로안으로서는 그녀의 통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포보스가 지도 대련 형식으로 알리시아를 이끌어 준다면 알리시아의 실력 향상도 굉장히 빨라질 거야.”

“응! 포보스! 많이 가르쳐 줘!”

로안의 말에 알리시아가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으로 소리쳤다.

기본기 훈련에서도 가장 열심히 임했던 그녀이니 지칠 만도 했지만, 의욕이 피로를 완전히 눌러 버린 상황인 듯했다.

“완전 불꽃소녀시군요. 어째 낯설지 않네요.”

알리시아가 데이모스와 비슷한 성격이란 걸 느껴 버린 포보스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뭐, 아무쪼록 맡겨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포보스가 알리시아와 2 페어가 되었고,

“그럼 남은 건 우리들이네.”

마지막 남은 에밀리아가 노곤한 얼굴로 로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체력적으로 열세이기도 하고 실력 검증도 안 된 상황이라, 조절을 잘해야겠지.”

“통감하고 있어…….”

이 정도로 체력이 안 될 줄은 몰랐다고 그녀가 안타까운 얼굴을 하는 동안.

“로안 조는 모두 페어가 결정된 건가?”

교관 버넬이 로안에게 물음 던졌다.

“네, 교관님.”

“그렇다면 각 대련장에 들어가 시작하도록. 응급 상황이 발생한다면 지체 없이 교관을 불러라. 포모도로 신전의 신관들이 항시 대기 중이니까.”

링귀니 아카데미가 특별한 게 있다면 바로 이런 부분일 것이다.

신전의 신관이 항시 대기하고 있어 위험 상황에서도 응급치료가 가능하다는 것 말이다.

물론 그들도 대부분 수련 신관들이라 완숙한 수준의 회복 마법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네, 교관님.”

어쨌든 지금 로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합숙 훈련이 시작될 때까지 조원 전체의 실력을 상향시켜서 아카데미 역사상 최고점을 차지하는 것.

“스코어는 각자 체크하도록 하자고. 알리시아와 에밀리아도 어느 정도 체력이 올라오고 기본기를 갖추면 페어를 돌릴 테니까.”

마지막으로 로안이 꺼낸 말에,

“좋아!”

흥분한 얼굴로 소리치며 먼저 대련장 안으로 들어가는 데이모스.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새삼스럽게 검에 대한 데이모스의 열정에 감탄을 해 버린 로안이었다.

“우리도 들어가자.”

어쨌든 그의 감격스러운 지원사격 덕분에 더 큰 책임감 느끼고 있는 로안이 대련장 안으로 들어가 목검을 들자,

“……겨우 둘이 이야기할 시간이 생겼네.”

아카데미 입성 후 처음으로 단둘이 있게 된 에밀리아가 피로한 얼굴로 목검을 붙잡았다.

“그렇지?”

그리고 로안이 검을 겨누자,

“아직까지 루드윅의 흔적을 잡지 못한 것 같아.”

에밀리아도 숨을 가다듬으며 자세를 잡았다.

“작정하고 숨었다면 찾아내기 힘들 거야. 그리고 볼로네즈 밖으로 나갔거나, 제국에서 벗어났을 확률도 있으니까. 그 정도 굴러먹은 용병 놈이라면 분명히 은신 루트가 있겠지.”

곧 로안이 공격해 들어오라고 눈빛을 보내자,

“응!”

에밀리아가 상당히 날렵한 동작으로 검을 뻗었다.

체력 문제 때문에 상당히 둔해지긴 했지만,

“……기본기는 탄탄하네.”

동작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여기사였던 적도 있거든!”

현재 체력은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실력 면에서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의 외침에 로안이 웃으며 느긋하게 검을 쳐냈다.

“마법사, 신관, 여기사. 참 다양하구나.”

“어떻게든 그 녀석들을 막아 내고 싶었으니까!”

따악!

그리고 다시 목검끼리 부딪치자,

“검이 감정적이야. 그러면 힘을 너무 많이 낭비해.”

로안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난 원래 굉장히 감정적인 편이라!”

샐쭉한 얼굴로 에밀리아가 로안을 밀어냈다.

“흐읍!”

그녀의 힘에 밀릴 리 없는 로안이지만,

후웅!

그는 자연스럽게 백스탭으로 거리를 벌이며 에밀리아의 힘을 역이용했다.

밀려난 로안에게로 치고 들어오는 에밀리아의 목검이 닿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벌인 뒤,

척.

어느 샌가 느긋하게 목검을 에밀리아의 목에 가져다 대는 로안.

“체력이 떨어져서 한 번에 승부를 보려고 하는 바람에, 그 다음이 전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어.”

“으…….”

“기회를 억지로 만들려고 하니까 무리하게 된 거야. 이런 경우는 노림수가 성공하지 못하면 그 다음이 없는 셈이지.”

냉정함이 돋보이는 그의 지적에,

“……그건 네가 너무 강해서 그런 거야? 아니면 내가 모자라서 그런 거야?”

에밀리아가 상당히 지쳐 버린 얼굴로 물음 던졌다.

“지금은 둘 다. 조급해하지 말고 조금 더 기다렸어야 했어. 상대가 공격을 개시하면서 틈을 보이길.”

담담하게 대답하며 검을 내린 로안.

“치…….”

그러자 에밀리아가 등을 돌린 채,

“음?”

로안의 등에다 등을 기댔다.

뭔가 싶어 당황한 그가 어정쩡하게 굳어 버린 채 고개를 돌리자,

“너무 냉정하다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번엔 기댈 사람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싶어.”

지평선에 걸린 채 온 세상을 붉게 만드는 석양 덕분에 발그레해진 얼굴로 에밀리아가 미소 지었다.

“좋다…….”

많이 지치고 힘든 상황이겠지만 그래도 밝게 웃을 수 있는 것은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어쩐지 기분 좋아 보이는 그녀의 발그레한 얼굴에 로안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렇겠네.”

4번이나 회귀해 온 그녀의 고독감은 얼마나 거대했을까?

그리고 그때마다 겪었을 절망감은?

어쩜 그래서 지금의 나는 에밀리아에게 특별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까지 들어 버린 로안이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우크스는 별 말이 없어?”

이내 에밀리아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아직까지는.”

여전히 자신의 등에 기댄 에밀리아를 굉장히 의식하게 된 로안은, 어색하게 굳은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허공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정말 가까운 곳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낼 수가 없구나.”

그러자 더욱 더 그의 등에 몸을 기대어 오는 에밀리아.

두근!

순간 심장이 뛰어 버린 로안이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아, 아무튼 그놈이라면 다른 꿍꿍이가 있을지도 몰라.”

눈앞에 어른거리는 붉은 빛이 석양인지, 아니면 얼굴이 화끈거려서 그런 것인지.

순간 헷갈릴 정도로 가슴이 뛰어 버린 그에게로,

“다른 꿍꿍이?”

에밀리아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물음 던져왔다.

“2주나 지났는데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단 건, 분명히 다른 생각하고 있단 증거야.”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하려 하는 로안이었지만,

“……그놈은 믿어선 안 될 놈이니까.”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등 뒤로 닿는 에밀리아의 체온과 무게감, 그리고 좋은 향기가 코끝을 맴돌아 자꾸만 입가가 간질간질해졌다.

“흠흠.”

괜스레 헛기침을 하고 있는 그에게로,

“그럼 혹시 아우크스가 루드윅을 고용했다거나 한 거 아닐까?”

에밀리아가 뭔가 생각이 머리를 스친 듯 물음 던졌다.

“아우크스가 루드윅을?”

그리고 그녀가 꺼낸 의외의 말에 로안이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만약 루드윅이 지하도에 숨어 있다면 근위병들도 루드윅을 찾아낼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면 아우크스가 루드윅을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못 찾아서가 아니라, 알고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거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우크스는 지하도의 노예왕이다.

지하도 3대 세력이라는 아리만 교단이나 필스타인 가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약체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둠의 세계에서는 실세라 해도 무방했다.

심지어 황성에서 있었던 소드 마스터 사건을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챘을 정도로 정보력 또한 뛰어나다.

그런 그가 수배자 루드윅의 흔적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

최소한의 정보라도 가지고 오는 게 맞을 것이다.

의식적으로 루드윅의 존재를 숨기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럴 수 있겠군.”

그리고 그렇다면, 학살자란 별명이 붙은 루드윅을 통해서 로안을 제거하려는 계략을 꾸밀 가능성도 충분하다.

루드윅이 아리만 교단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아우크스에게는 그리 중요한 내용이 아닐 테니까.

애당초 돈이 전부인 인간이고, 어떻게든 로안의 마수에서 벗어나고 싶단 생각만 하고 있을 것이다.

“확실히 그놈이라면 그럴 수 있어. 자기 이득만 되면 악마와도 손을 잡을 놈이니까.”

에밀리아의 말에 루드윅이 아우크스와 함께 있을 확률이 높단 것을 생각하게 된 로안이 진지해진 얼굴로 몸을 돌렸다.

“아…….”

그러자 그의 등이 아닌 품에 기댄 모습이 된 에밀리아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몸을 뗐다.

“오늘 아우크스에게 가 봐야겠어.”

하지만 타깃을 잡은 로안의 눈동자는 더 이상 전처럼 수줍어하지 않았다.

“……흐음.”

다시 본업에 충실해진 듯 냉정하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에밀리아가 왠지 모르게 샐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갑자기 왜……?”

그러자 로안이 또 당황하고 말았다.

왜 저런 표정을 하고 자신을 쳐다본단 말인가?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아니, 그저 일밖에 모르는 남자구나 싶어서.”

이내 느긋하게 뒷짐을 진 채 에밀리아가 대답했다.

동작이나 목소리는 나긋나긋하다지만 어쩐지 심술 난 소녀 같은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그야 루드윅을 찾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니까. 아리만 교단까지 찾아내서 모두 없애 버린다면 그걸로 모든 일들을 끝낼 수 있는 거잖아.”

그게 당연한 게 아니냐고 로안이 설명했지만,

“흐으음.”

어쩐지 에밀리아의 기분은 풀리지 않은 듯했다.

그 모습에 로안이 시선을 피하며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아우크스를 언제 죽여 버릴지 고민하고 있었어. 이번 일이 사실이라면 이번에 없애 버리면 되니까.”

왜 이렇게 변명처럼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어야 하는 건지.

그렇지만 여전히 뚱한 얼굴을 에밀리아를 보고 있자니 아직 답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왜?”

아무리 시간을 거슬러 왔다고 하더라도 여자는 당최 겪어 본 일이 없는데 어떻게 알겠는가?

대체 왜 저러나 당황해 버린 그를 보며,

“큭!”

에밀리아도 결국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 평생 혼자 살았단 말이 사실이었구나.”

“갑자기 그건 또 왜……?”

평생 혼자 살았단 게 그리 자랑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첫사랑이었던 에밀리아 앞에서 말이다.

왠지 모르게 창피해진 로안이 팔짱을 낀 채 어색한 얼굴을 하자,

“그냥. 냉정한 어쌔신 마스터에게도 이렇게 귀여운 구석이 있었구나 싶어서.”

그를 놀리는 게 낙이라도 된 듯 장난스러운 웃음 짓는 에밀리아.

“……뭐.”

그 말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된 로안이 어색하게 머리를 쓸어 넘겼고,

“그래도 내가 여태 봐 온 모습들 가운데 지금 네 모습이 가장 좋아.”

이내 에밀리아가 방긋 웃음 지었다.

두근!

순간 정말로 크게 가슴이 뛰어 버린 로안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석양이 온 사방에 깔린 것이 말이다.

“……그 전에는 어땠기에.”

전에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면 이것이었을 것이다.

그 전에 에밀리아가 봐 왔던 로안 필스타인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이다.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어.”

그리고 그녀가 덤덤하게 꺼낸 말에 로안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뭐?”

“무슨 수를 써도 막을 방법이 없으니까! 진짜 로안 필스타인이 나타났다고 하면 절망 그 자체였어!”

그렇지만 그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어서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랬나.”

그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가 몸을 돌리자,

“그럼 네가 본 나는 어땠어?”

이번에는 그 차례라고 에밀리아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아마 그녀에겐 이런 물음 자체가 처음일 것이다.

그러니 더욱 더 들떠 있을 수밖에!

“……그냥.”

그 말에 로안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단 게 맞는 말일 것이다.

첫사랑.

그리고 비극적인 결말.

알지도 못할 이야기를 해서 괜히 어색해지기만 하지 않을까?

“……예뻤어.”

많은 것들을 함축한 채 로안이 툭 던진 말에,

“응?”

생각지 못한 말에 에밀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예쁘다는 칭찬이 싫을 리 없지 않은가?

입가로 미소 가득 머금은 채 그녀가 다시 물음 던지자,

“응…….”

로안이 어색하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지금처럼…….”

*

*

*

“이 빌어먹을 새끼들이!”

얼굴 군데군데 멍이 들고 엉망이 된 카펠리니는 좀처럼 화를 감추지 못했다.

어제 갑자기 나타난 데이모스가 난데없이 그에게로,

ㅡ너는 귀족의 수치다!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날렸고, 그 덕분에 본의 아니게 주먹다짐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카펠리니도 몇 차례 반격에 성공하긴 했지만, 천재라 불리는 데이모스는 주먹질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덕분에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단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런지라,

“팬드래건이고 뭐고!”

현재 카펠리니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로안 조의 머릿수가 모두 충원된 데다, 이젠 압력을 가하기도 애매한 상황이 되어 버렸으니까!

“이 빌어먹을 놈들, 둘 다 얼굴도 못 들게 해 주겠어!”

미약을 사용해서 로안이 여자 생도들과 추문을 일으키게 만든 뒤에 몰아낼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그때까지 기다려 줄 수도 없었다.

“도련님,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분노로 제정신이 아니란 게 옳을 것이다.

“어서 들여보내라!”

잔뜩 성이 난 채로 카펠리니가 목소리를 높이자,

“안녕하십니까요.”

다리를 절룩이는 거한 아우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열함 가득한 얼굴의 천민이라니!

평소의 카펠리니라면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겠지만,

“네놈이 로안 필스타인 암살 의뢰를 받아들인 놈이냐?”

상황이 이쯤 되면 평소와 같아선 안 될 일이었다.

워낙 악명 높은 필스타인 가문이라 많은 이들이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지만, 동시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어 그들과 엮이는 것을 피하고 있는 상황.

그런 와중에 ‘먼저’ 접근을 해 온 아우크스이니 카펠리니로서는 놓칠 수가 없는 대상이었다.

“하하, 정확히는 제가 아니라…….”

그리고 곧 아우크스가 고개를 슥 돌리자,

“이쪽입니다.”

검은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거한이 까딱 목례를 했다.

“그쪽은……?”

“아주 믿을 만한 실력자입니다! 그 빌어먹을 필스타인가 애송이 놈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겁니다!”

아마 로안에 대한 원한은 카펠리니보다 아우크스 쪽이 더 클지도 모른다.

그는 실제로 로안에게 많은 것을 빼앗기고 절름발이가 되기도 했으니까.

자신의 일처럼 분노하는 그 모습에 카펠리니가 조금이나마 마음이 더 풀린 건지,

“……좋아.”

이내 입가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을 죽이고, 데이모스 반 팬드래건은 불구로 만들어 버려라.”

그 말에,

“예?”

데이모스 건은 예상치 못한 듯 아우크스가 흠칫했다.

지금 팬드래건 공작가의 후계자를 불구로 만들어 달라고 했단 말인가?

그건 또 너무 위험하단 생각에 아우크스가 주저하자,

“성공하면 금화 1만 개를 주지. 네가 아무리 부유해도 이 정도 금액이라면 절대로 손해 보는 조건은 아닐 텐데.”

카펠리니가 그 못지않게 비열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이고…….”

금화 1만 개.

현재 아우크스의 모든 노예들과 재산들을 정리해야 2만 골드 정도가 나온다.

그 와중에 금화 1만 개라니!

“……못 할 것도 없지요.”

이미 루드윅은 수배자다.

여기서 무슨 죄를 더 저지른다 한들 뭐가 문제 되겠는가?

그걸 모를 리 없는 아우크스가 씩 웃으며 루드윅을 쳐다보았다.

“자신 있겠지?”

그 말에 루드윅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놈의 실력을 내가 어떻게 믿어야 하지?”

그러나 여기서 변수가 있다면 카펠리니 역시 상당한 실력자이고, 어둠의 세계에 그 정도 되는 실력자는 사실 그렇게 흔치 않단 것이다.

삐뚤어진 얼굴로 루드윅의 실력에 의문을 표하는 그를 보며 아우크스가 말했다.

“이제 곧 기사님이 되실 분이시니 직접 테스트해 보셔도 됩니다.”

“그래?”

곧 카펠리니가 검을 빼들고 기습적으로 루드윅을 베었다.

캬앙!

그러자 루드윅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검집으로 카펠리니의 공격을 막아 내고는,

번쩍!

붉은빛이 맴도는 마검 다인 슬레이브로 카펠리니의 검을 종잇장처럼 베어 버린 루드윅!

“이, 이건!”

순간 붉은 섬광과 함께 자신의 검이 종잇장처럼 베어졌단 사실에 카펠리니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루드윅을 쳐다보았다.

“소드 마스터?”

그리고 어느 샌가 다시 검집으로 다인 슬레이브를 집어넣은 루드윅이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묵묵히 서자,

“이 정도 실력이라면 가능해! 그 빌어먹을 자식을 없애 버릴 수 있어!”

금방 카펠리니의 얼굴에 희열이 차올랐다.

“허튼 소리는 하지 않습니다요.”

아우크스 역시 루드윅이라면 분명히 로안을 없앨 수 있다고 확신하는 듯 씨익 웃음 지었다.

곧 카펠리니가 손가락을 딱 하고 마주치자 그의 수하들이 금화 2천 개가 담겨 있는 상자를 들고 왔다.

“선금은 금화 2천 개다.”

“보통은 절반을 선금으로 받습니다만…….”

“천민 주제에 내 말을 끊지 마라!”

카펠리니가 그리 소리치자 아우크스의 얼굴도 뚱해지고 말았다.

재수 없는 놈이란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이거 생각보다 더 재수가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지금은 뜻을 같이 하는 인물이며, 분명히 이런 유형의 인간일수록 아우크스 무리들에겐 많은 것을 안겨다 줄 유형의 인간이다.

‘치부’를 공유하니까.

“알겠습니다, 나리.”

더구나 팬드래건 공작가까지 일에 포함되어 있으니 잔금을 모른 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 확신하며 아우크스가 고개를 숙이자, 카펠리니가 여전히 얼굴 가린 루드윅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로안 필스타인, 그놈의 목을 내게 가져와라! 그리고 데이모스 놈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