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star or Gaju's Regression

213 Ch 71. Stories I didn't know (2)

딥 원들과의 전투 이후.

“…….”

휴식을 취하던 로안이 눈을 뜬 것은,

“또야……?”

현실이 아닌 꿈속이었다.

에반젤린 영지 이후로 계속해서 이상한 꿈을 꾸고 있고,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고 완전히 자각하고 있는 만큼 이젠 그리 낯선 일도 아니었다.

“한동안 없더니…….”

하지만 네로에서 돌아온 이후로는 한동안 꾸지 않은 꿈이었다.

그런지라 상당히 오랜만에 꾸는 꿈이기에,

“후.”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돌아보는 로안.

마치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관찰자적 시점으로 돌아본 세계는,

“볼로네즈?”

바로 황도 볼로네즈였다.

꿈속에서 전혀 알지 못하는 다양한 세계들을 체험한 바 있는 로안이었지만,

“기분이 이상해.”

지금 눈앞에 보이는 볼로네즈만큼 불온한 느낌이 가득한 장소는 본 적이 없었다.

어쩜 그가 알고 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더욱 더 불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 것도 모르는 세계는 걱정을 할 겨를이 없었으니까.

“노을이…….”

그리고 그는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하늘을 쳐다봤다.

언젠가 카라와 함께 보았던 아름다운 노을과 달리, 지금 로안의 눈앞에 보이는 노을은 보는 것만으로도 끈적하고 질척한 기분이 느껴질 만큼 붉은 빛을 띄고 있었다.

저 하늘 너머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

그 너머에서 무엇인가가 놀아나고 있는 그들 모두를 지켜보며 희번뜩 눈빛을 빛내는 듯 한 느낌마저 받아 버린 로안은,

“도대체 뭘 보여 주고 싶은 거야?”

어느샌가 저도 모르게 초조해진 상태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저 가만히, 꿈에서 깰 때까지 기다릴까 싶어 그리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있기만 하면 꿈은 절대로 끝나지 않았다.

로안에게 무엇인가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는 것처럼, 그가 그것을 보지 않으면 절대 끝나지 않고서 그대로 멈춰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덕분에 그는 낮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폐허가 되어 있는 볼로네즈를 둘러봤다.

당장 날이 밝으면 세이렌의 신전으로 가서 다곤 무리들과 일전을 치러야 할 상황이기 때문에, 기왕 깨는 것이라면 최대한 일찍 깨서 조금 더 휴식을 취하는 것이 맞는 상황.

한 시라도 빨리 무엇인가를 찾아내고자 한참을 그 자리에 멈춰서 돌아보던 로안은,

“……더러운 암살자 놈.”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목소리들에 저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그건 그가 회귀 이전에 아주 많이 들어 왔던 호칭이었으니까.

“감히 그런 짓을 하다니!”

물론 꿈속에서의 로안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지칭한 건 아닐 테지만,

“……저쪽이겠지.”

그것이 그가 봐야 하는 장면과 큰 연관이 있을 게 분명했다.

무거운 마음을 뒤로한 채 걸음을 내딛은 곳에는 무수히 많은 볼로네즈의 주민들이 보였다.

분노와 절망감에 휩싸여 있는 초췌한 몰골의 사람들은 거센 홍역을 치른바 틀림없어 보였다.

초점을 잃은 눈빛에 맴돌고 있는 공허함과 분노 속에서,

“…….”

로안은 꽤나 착잡한 기분이 들고 말았다.

자신을 향하고 있진 않다지만, 그 눈빛이 그리 낯설진 않았다.

근래 들어서 자신을 향해 저런 눈빛을 보이는 사람이 없어진 게 사실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건 그가 평생 받아 왔던 시선이기도 했으니까.

덕분에 어쩜 현실이 꿈이고 꿈이 현실일지도 모르겠단 생각까지 들어 버렸다.

“쓰레기 같은 자식, 꼴좋다.”

“젠장, 마저 다 봐야 하는데!”

누군가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며 폐허가 된 터전으로 돌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스윽.

유령이라도 된 듯한 자신의 몸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

로안은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분명히 이 사람들이 있었던 곳에 무엇인가가 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그것은 그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만 같았다.

무수히 많던 사람들 모두가 그를 스쳐 지나갔을 때.

“……후.”

로안은 사람들이 있었던 지하도 근방의 폐허로 걸음을 내딛었다.

“반역자를 저리 생각하시다니…….”

“어쨌든 덕분에 황녀님이 실권을 잡을 수 있었으니 그러지 않으시겠어?”

“사실 따지고 보면 황녀님께서 내친 셈이잖아?”

그곳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

로안은 더욱 더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이 말하는 황녀님은 안젤리나가 아니라 에밀리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그 자리에서,

“……아.”

로안은 보았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손상된 시체가 묶인 형틀 앞에서,

“…….”

고개 숙인 채 무릎 꿇고 있는 에밀리아를.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서 고개를 숙인 채 울고 있는 그녀는, 분명히 뭔가를 꼭 끌어안고 있는 듯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하얀 드레스가 피로 흥건히 물든 것으로 보아서 물건은 아닌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형틀에 묶여 있는 상처투성이 시체가 목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분명히 시체의 목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고,

두근!

그 순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불안감이 로안에게 전해져 왔다.

“…….”

마침내 로안이 그녀의 등 뒤에 다다랐을 때.

“아아!”

그는 보았다.

“대체 왜!”

참지 못하고 괴로움을 토하고 있는 에밀리아가 안고 있는 것은,

“……나였어.”

바로 자신이란 것을.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이토록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이는 그밖에 없으니까.

심지어 아버지인 윌리안도 그만큼 검지 않으니까.

“…….”

에반젤린 영지에서 니알리의 공격을 당했을 때를 연상케 할 정도로 엉망이 된 자신의 몸뚱이와, 절규하는 에밀리아의 뒷모습을 번갈아 쳐다보며 로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혹시 이것이 그녀가 사라지기 직전의 광경이 아니었을까?

그 생각과 동시에,

“……반역자.”

아까 전 사람들이 했던 이야기들이 다시 머리를 스쳤다.

이곳에서 자신이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어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이유가 반역이라면…….

“……이제 그만 보내 주셔야 합니다.”

곧 그 등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형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소리에 흠칫하고 로안이 고개를 돌린 곳에는 죄책감 가득한 얼굴의 필립이 서 있었다.

일찍히 에반젤린 영지에 갈 당시 안젤리나의 호위 기사였던, 그리고 굽스로 변신했던 니알리에게 살해당한 바 있었던 바로 그가 말이다.

“……여기서 도대체 무슨 짓을 더 하겠단 거예요?”

곧 분노가 섞인 에밀리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서 도대체 무슨 짓을 더!”

그리고 그녀가 절망과 분노로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돌렸을 때.

“…….”

로안은 가슴 깊은 곳에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릿한 감정을 느끼고 말았다.

전생의 감정은 누적되어 전달된다.

피츠제랄드의 말처럼, 이것이 정말로 로안이 겪었던 일 중 하나라면…….

“에밀리아…….”

그녀의 절망감과 분노가 얼마나 거대한지, 그리고 그만큼이나 거대한 그녀의 애정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버거우시겠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사악한 이단에 물들었다 하셔도, 로안 필스타인은 폐하를 암살한 반역자입니다. 그러니 그에 준하는 형벌을 내리지 않으면…….”

곧 필립이 어쩔 수 없이 형을 더 집행해야 한다고 설명을 잇자,

“귀족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거겠죠? 그 잘난 귀족들이!”

에밀리아의 눈빛에는 더없이 거대한 분노가 차올랐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곧 병사들이 마지막 형을 집행하기 위해서 형틀에 묶여 있던 로안의 시신을 붙잡았다.

“가만 두지 못해? 그 손 치워!”

그 모습에 에밀리아가 비명처럼 목소리를 높였고,

“죄송합니다, 전하! 한시라도 빨리 끝내는 게 그를 위로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그러고자 사람들을 물렸으니 제발 이해해 주십시오!”

필립도 이젠 어쩔 수가 없다고 그녀를 붙잡고서 집행을 강행했다.

“안 돼! 이럴 순 없는 거야!”

이미 참수 당한 시신에, 한 번 더 사지를 찢는 거열형을 말이다.

“적어도 시신은 내버려 둬야지! 죽어서는 쉴 수 있게!”

죽은 그를 모욕할 수는 없는 것이라 그녀가 크게 반발했지만,

“죄송합니다, 전하!”

집행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언니는! 언니는 가만히 있던가요?”

그녀가 안젤리나를 거론하자,

“……황실 반역자에겐 그에 맞는 합당한 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난처한 얼굴로 설명을 잇는 필립이었다.

어쨌든 그는 황제를 암살한 반역자.

그러니 그에 합당한 형을 집행하는 데 안젤리나도 동의한 바 있으니 어쩌겠는가?

“……언니가.”

크게 충격을 받은 듯 에밀리아의 얼굴이 굳어 버렸고,

“속히 집행하라!”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필립은 목소릴 높였다.

곧 로안의 시체는 4마리의 말들에게 묶이고 말았다.

“……두부(頭部)는 상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전하. 제발 제 입장도 이해해 주십시오.”

그 와중 필립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그것뿐이라고, 힘겨운 얼굴로 말했다.

곧 에밀리아는 다시 한 번 더 그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던지 입술 아래로 피가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모두를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거죠?”

그리고 그녀는 물음을 던졌다.

“어째서?”

필립이 아니라, 이 상황을 만든 신에게 던지는 물음인 듯 말이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으니까.

“어서 마지막 형을 집행해라!”

곧 필립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히이이잉!

말들의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대체 왜!”

에밀리아의 피 맺힌 절규와 함께,

콰직!

섬뜩한 소리가 그 자리에 울려 퍼졌다.

차마 볼 수 없어서 로안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눈을 질끈 감은 에밀리아.

피와 눈물로 물들어 버린 성녀의 모습에,

“……죄송합니다, 전하. 저희는 그저 명령을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필립도 어쩔 수 없단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물렸대도 보는 눈이 많습니다. 아무리 전하께서 성녀 신분이라 하셔도 위험해지십니다. 아마 로안 필스타인도 그걸 원치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에밀리아는 허탈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로안도 원치 않겠죠…….”

그리고 충격을 이기지 못한 듯, 넋이 나간 얼굴로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

다시 푸른 눈을 뜬 그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 공허해져 버린 얼굴로,

“……그리고 내가 원했던 것도 이런 게 아니었어.”

눈물 흘릴 뿐이었다.

“이런 세상 따위는 구원받지 말아야 했어…….”

남아 있는 것은 세상에 대한 원망뿐.

“전하…….”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도 따라오지 마. 아무도.”

힘없는 걸음을 옮기는 그녀.

길게 늘어진 붉은 하늘을 뒤로한 채 힘없이 걸음 내딛는 에밀리아의 모습에,

“……에밀리아.”

로안은 멍한 얼굴로 그 이름을 불렀다.

자신의 부관참시 장면을 지켜보게 되었으니 개운할 리 없었다.

안젤리나가 그것을 용인했단 것 또한.

그리고 그 이후 완전히 망가져 버린 듯한 에밀리아의 모습도.

“……로안?”

곧 그녀가 그 소리를 들은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로안? 거기에 있어?”

어떻게든 그를 찾으려는 듯 애처로운 눈빛이 스쳤지만,

“거기 있으면 있다고 이야기 좀 해 줘……. 제발…….”

그녀는 결코 그를 볼 수가 없었다.

너무 충격적인 일을 당해서 정신이 나가 버린 듯 그저 공허한 푸른 눈동자만 스칠 뿐이었다.

“…….”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게 된 로안은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이것이 단순한 악몽인지, 아니면 진짜로 있었던 일인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큰 일 전의 불안감 때문에 꾼 악몽이라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게 아닐 것이다.

이건 분명히…….

‘……내가 겪은 일.’

피츠제랄드가 말해 줬던 것과 같이, 단순히 그런 일이 있었다는 느낌으로 그치지 않았다.

기억은 없지만 분명히 직접 겪었던 일임이 틀림없노라고, 목 언저리가 유난히 아려옴을 느끼며 로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리고 여전히 정신이 나가버린 듯 그를 찾아서 홀로 걸음을 내딛는 에밀리아.

“널 선택했어야 했어. 이런 더러운 세계가 아니라…….”

쉴 새 없이 눈물 흘리며 후회하고 있는 그 모습에,

“…….”

로안은 왜 그녀가 자신을 계속해서 밀어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런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 이후에 그녀가 어떤 선택을 했든지 죄책감을 전혀 떨쳐낼 수가 없을 테니까.

“……아, 그래. 다시 시작하자. 그럼 될 거야.”

곧 에밀리아는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을 늘어놓더니,

“나는 이 세계를 구하지 않을 거고, 너는 모두의 사랑을 받을 거고. 그래, 그러는 거야. 다시 시작하면 돼.”

목에 걸려 있던 타타그의 목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자, 다시 시작하자…….”

그리고 너무나도 애처로운 얼굴로 소원을 비는 그녀.

“돌려보내 줘…….”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시작하자, 다시. 다시 한 번만 더. 다시. 다시 한 번만.”

그간 그녀가 겪었던 시간 회귀는 그것으로 끝이 난 듯, 매정하리만큼 붉은 하늘만 빛을 발할 뿐.

“제발!”

결국 되돌아갈 수 없음에 눈물 흘리던 그녀는,

“……그래, 그럼 거기로 가자. 거기.”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걸음을 내딛었다.

“이런 세계는 버리고 거기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너무나도 슬퍼 보이는 그 뒷모습에,

“에밀리아!”

로안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울고 있는 그녀를 끌어안았지만,

스륵.

그는 아무 것도 안을 수가 없었다.

“에밀리아!”

허공을 가르는 자신의 손을 허무하게 바라볼 뿐.

그 순간을 마지막으로,

“필스타인 경.”

로안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건 이곳, 꿈속이 아니라.

“필스타인 경.”

바로 현실.

번쩍!

순간 환한 빛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졌단 느낌이 로안을 스쳤다.

그리고 눈을 뜬 그의 눈앞으로,

“……괜찮습니까?”

환한 아침 햇살과 함께 이미 세이렌의 신전으로 떠나갈 준비를 마친 포보스가 보였다.

“좀 늦으신 것 같아서 왔습니다만, 괜찮으신 거죠?”

넋이 나간 듯 한 얼굴 때문인지 포보스가 조심스럽게 물음을 던지자,

“아아…….”

로안은 고개를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아직까지 머릿속에서는 충격적인 장면이 잊혀 지지 않아 버겁기 그지 없었지만 말이다.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곧 포보스가 그에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음을 던졌다.

“응, 괜찮아. 요즘 밤잠을 많이 설치는 편이라서. 그래서 그래.”

이제 곧 아주 위험한 장소에 가는데, 핵심이 될 로안의 컨디션이 나쁘다면 그만큼 불안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 심정을 헤아리며 로안이 괜찮은 척 이야기하자,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오늘이 아니더라도 그 신전으로 갈 시간은 충분히 있을 테니까요.”

포보스는 그 자체가 걱정이 되는 듯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좀 더 회복할 시간을 가지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 얼굴이었지만,

“……아니. 괜찮아. 단김에 처리해야지.”

로안은 일정을 미룰 생각이 크게 없어 보였다.

‘빨리 볼로네즈로 돌아가야겠어.’

분명히 다음 재앙의 행선지는 볼로네즈가 될 것이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이 충격적인 장면을 봤던 에밀리아의 행보 또한 관련이 있을 것만 같았고.

“다른 사람들은?”

곧 로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장비들을 걸치며 물음을 던지자,

“이미 준비 끝난 상태긴 합니다.”

포보스도 차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거 면목이 없네.”

그리고 그가 준비는 끝이 났노라고 그를 쳐다보자,

“다 이해해요. 필스타인 경이라고 해서 강철인 건 아니잖아요.”

포보스가 크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다.

어제 유일하게 부상을 입은 사람이 로안이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뭐, 그렇지. 나도 죽는 건 마찬가지니까.”

다시 떠올라버린 꿈속의 장면을 애써 지우며 로안이 미소 짓자,

“아무튼 일단은 가서 다시 한 번 더 이야기하자구요.”

포보스가 먼저 문을 열고서 그를 기다렸다.

아무래도 포보스는 지금 로안의 감정 상태를 얼추 읽어낸 듯했다.

그러니 깊이 파묻지 않고서 오히려 기다려 주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부관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이는 그 모습에,

“……그래, 고마워.”

로안도 미소를 띤 채 밖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자, 이쪽으로 오시구요.”

그리고 포보스의 안내를 따라서 로안이 당도한 곳에는,

“아카데미도 매번 늦더니 여기서도 늦는 거야?”

기다리고 있던 한나가 장난스럽게 핀잔을 줬다.

“그러시게요.”

그건 메가엘라 역시 마찬가지.

“시끄러, 메가엘라. 넌 말도 안 해 주면서.”

하지만 여전히 한나가 삐쳐 있는 것을 보니, 메가엘라는 끝끝내 봉인 방법을 이야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굳이 봉인을 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겠어? 다곤을 없애 버리면 되니까.”

곧 로안이 그 말을 꺼내자,

“빙고.”

한나도 같은 생각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으로는 제니세리들이 함께 갈 거야. 우리들만으론 숫자가 너무 모자랄 수도 있으니까.”

어쨌든 이것이 슈발츠의 사활을 건 행보가 될 터.

그러니 정예 인원들인 제니세리를 모두 데리고 가겠단 그녀의 말에,

“지저라면 화약이 젖어서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 병장기도 따로 챙겨야 할 거야.”

로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세이렌의 신전에 딥 원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로안 일행의 숫자만으로는 부족할지 모르니까.

“그건 걱정 마. 원래 제니세리들은 우리 슈발츠의 정예 기사들이니까. 검술도 제법 훌륭하다고.”

그런 한나의 말에,

“신관들도 함께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젠의 전투력을 최상으로 이끌어 낼 수 있을 테니.”

아즈라드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더했다.

“맞아, 젠이 로안 다음으로 강력할 거야.”

그 말에 류시아도 동의했다.

아직도 강신 상태가 풀리지 않은 그녀는 현재 로안과 더불어 최강의 전력일 테니까.

“아아, 그 정도는 아닐 텐데…….”

어쨌든 젠이 부끄러워 머리를 긁적이는 가운데,

“그건 걱정 말아요. 제가 데리고 온 포모도로 교단의 사제들이 함께할 테니.”

함께 기다리고 있던 안젤리나가 차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세이렌 신전 행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눈으로 로안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모습에,

“네, 전하.”

로안도 목례로 인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를 본 순간 꿈속의 이야기들이 다시 한 번 더 떠올라 버렸다.

ㅡ황실 반역자에겐 그에 맞는 합당한 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안젤리나의 호위 기사였던 필립이 형을 집행했던 이유.

그리고 그가 그리 말을 전했던 것은, 그의 처형에 관여한 사람이 안젤리나란 말일 테니까.

“……로안?”

덕분에 그가 저도 모르게 안젤리나를 쳐다보고 있자 다들 흠칫하며 그를 쳐다봤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금방 고개를 흔들며 원래대로 돌아온 로안이었지만,

“……다녀와서 이야기를 나눠요.”

안젤리나도 뭔가를 눈치챈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의 말에,

“예, 전하.”

로안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모두를 돌아봤다.

포보스와 아즈라드, 류시아, 젠, 한나, 메가엘라뿐만 아니라 제니세리들과 포모도로 교단의 사제들 또한 모두 그를 지켜보며 뭔가 말을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한나가 있다고 하지만, 로제스타의 젊은 영웅이자 소드 마스터인 그가 중심이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테니까.

그가 뭔가 한마디 하길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모습에,

“모두 준비 됐습니까?”

로안은 기대에 부응하고자 모두에게 물음을 던졌다.

“예!”

그러자 다들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쩜 우리가 가는 곳은 살아 있는 지옥이 될 지도 모릅니다. 그곳에는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딥 원들이 있고, 크라켄보다 더한 괴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내 로안은 그들 모두를 일일이 살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이 절망적인 상황임을 알리고 있는 그 말에 다들 멈칫하고 말았다.

이미 그들은 딥 원의 습격을 몸으로 겪었고, 그것들이 만만치 않은 적이란 것을 알고 있으니까.

덕분에 두려움마저 스치고 있는 그들의 얼굴을 보며,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합니다. 이 지옥에서 가족들과,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해야만 합니다.”

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누군가가 해 주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다면 내가 나서야 합니다.”

그러고는 어느샌가 모두의 앞에 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는 기꺼이 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기에 왔고, 그렇기 때문에 그 괴물들을 없애는 데 가장 앞자리에 설 겁니다. 내 가족과 친구들, 내가 사랑하는 곳을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여전히 담담한 어투로 자신의 결의를 알리는 로안.

“…….”

그 말에 그곳에 모여 있는 제니세리들을 비롯한 모두가 그와 같은 뜻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감이나 두려움이 가시고 점차 비장함이 감돌기 시작하는 그들을 보며,

“준비 되었습니까?”

로안은 다시 물음을 던졌다.

“슈발츠를 구할!”

그리고 그들이 대답하기 전에 힘주어 목소리를 높이자,

“예!”

비장함을 머금은 모두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준비 되었습니까?”

또 다시 한 번 더.

“가족들의 위협하고 삶의 터전을 짓밟은 괴물들을 물리칠!”

능숙하게 사기를 끌어올리는 그의 외침에,

“예!”

다시 한 번 더 모두가 목소리를 높였다.

결연함마저 느껴지는 눈빛이 된 것은 비단 슈발츠의 제니세리들뿐만이 아니었다.

“……역시 로안은 좋은 장수야.”

엄지를 치켜든 류시아와,

“……멋지세요.”

여전히 그를 사모하고 있는 젠,

“확실히 남다른 구석이 있으시다니까요.”

“그러게요.”

끓어오른 혈기를 꾹 누르고 있는 포보스와 아즈라드,

“자, 가서 박살을 내 버리자! 인간의 힘을 보여 주자!”

더욱 더 패기만만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한나까지!

“와아아아!”

사기가 진작된 그들이 함께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로안은 힐끔 메가엘라를 쳐다봤다.

“네, 필스타인 경.”

그녀가 깊은 신뢰를 드러내며 앞장을 섰고,

“부디 무사히 돌아오길.”

안젤리나도 그들의 무운을 빌어 줬다.

“네, 황녀님.”

이내 로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럼 갑시다.”

그 뒤를 따르며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 괴물들을 막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