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얀 씨?”

“아, 네.”

레플랙사에 대한 생각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졌을 때 루피아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루피아를 쳐다보자, 그녀는 아직 해줄 말이 많이 남았는지 대장간의 이곳저곳을 가리켰다.

“저 무기들도 모두 세이언 종족이 만든 거예요. 대단하죠?”

“그렇네요. 웬만한 대장장이 장인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실력 같습니다.”

이건 빈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대장간 곳곳에 걸려 있는 무기들은 한눈에 봐도 잘 정련된 강철 무기들이다. 왕국이나 제국이었다면 최소 백인대장급 또는 기사급들이나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 높은.

“헤헤, 맞아요. 덕분에 가끔 지상에 나가야 할 때 몬스터를 상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요.”

“굳이… 밖으로 나갈 필요가 있습니까? 정령을 사용할 수 없는 엘프분들이라면 주거지가 상당히 위험할 텐데.”

“그건 맞는 말씀이지만, 저희도 정보를 얻어야 하니까요. 제가 반티가스에 있던 이유도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거든요.”

안전을 포기하고 정보를 얻는다라.

고작 수십 명밖에 안 되는 샤렌 부족이 그렇게 하면서까지 얻으려고 했던 정보는 무엇일까.

하브마임으로 떠난 엘프들에 대한 정보?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지그시 루피아를 쳐다보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뭐… 제일 큰 목적인 하브마임에 관한 거였죠. 약속한 200년이 지났으니 엘프들이 돌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그렇군요. 그럼 루피아 씨 말고도 정보를 얻으러 밖으로 나갔던 엘프들이 있습니까?”

“있었지만 다행히 저를 마지막으로 모두 돌아온 상태에요. 카르본 장로님께서 제가 너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서 찾으러 엘프들을 보내려고 하는 참이었대요.”

“그렇군요.”

루피아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 흥미를 버린 채 다시 대장간을 구경했다.

처음 그들을 찾기 전까지만 해도 호기심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나, 실제로 그들을 보니 딱히 특별한 건 없었다. 기껏해야 처음 보는 이종족이 함께 있다는 것 정도.

하지만 루피아는 나를 계속 귀찮게 할 생각인지 옆에 딱 붙어서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저…”

“무슨 할 말이라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인사라면 이미 여러 번 받았으니 이제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이얀 씨는 제게 몇 번이라도 감사 인사를 받으실 자격이 충분하세요. 몇 번이나 저를 도와주셨잖아요.”

진심이 담긴 루피아의 목소리에 돌아보자, 그녀의 두 눈에 신뢰가 담겨 있었다.

처음 루피아를 만났을 때 두 눈에 경계심과 독기가 가득 차 있던 것을 생각하면 조금 얼떨떨한 기분.

“괜찮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아닙니…”

부담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루피아의 행동에 고개를 저으려는 순간.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문제 중 한 가지가 떠올랐다.

“…루피아 씨. 샤렌 부족은 계속해서 주거지에서 생활했던 거죠?”

“네? 아, 네!”

“그럼 주거지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십니까?”

“으음… 대부분 지하에서 생활하기는 하지만 주거지를 바꿀 때마다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 정도는 알고 있죠. 왜 그러세요?”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주거지에서 200년을 보낸 샤렌 부족이라면 벤티아 보석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을까?

루칸의 후예 삼인방은 주거지에도 벤티아 보석이 없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그들이 말하길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었다.

‘벤티아가 멸종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주장일뿐.’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루피아에게 더 부담스러운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루피아 씨, 벤티아 보석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생긴 건 크리스탈처럼 생겼다고 하는데 광물이면서 생물이기도 한 보석입니다. 제게 꼭 필요한 물건인데…”

“어… 벤티아요? 저는 처음 듣는데… 제가 보석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요.”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대답은 부정적인 말.

그에 내면에서 차오르는 실망감에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세이언 종족에게 물어볼까요? 그들이라면 알고 있을 수도 있어요! 모른다고 해도 찾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고요!”

“그럼 지금 물어봐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잠시만요.”

내 부담스러운 눈빛을 받은 루피아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주변에서 우리를 구경하고 있는 세이언 종족을 향해 뛰어갔다.

[카이얀 님, 루칸의 후예들은 벤티아 보석이 멸종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주거지에 아직 있을까요?]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설사 없다고 해도 물어보는 것 정도야 나쁘지 않으니까.”

[이왕이면 있으면 좋겠어요!]

“나도 그래.”

잠시 기다리자 세이언 종족과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던 루피아가 돌아왔다.

괜스레 기대되게 매우 밝은 미소를 한 채.

“카이얀 씨!”

“네, 루피아 씨.”

“어… 우선 벤티아 보석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네요. 처음 듣는 이름이래요!”

“…그렇습니까.”

모른다는 이야기를 왜 저리 해맑게 하는지.

실망감을 담아 대답하자,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실망하기에는 일러요! 세이언 종족이 벤티아 보석을 찾는 걸 도와주겠대요!”

“예? 왜요?”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반문이 나왔다.

샤렌 부족이 도와준다면야 이해야 하겠지만, 세이언 종족이 굳이 왜 나를?

“세이언 종족이 지상에서 카이얀 씨가 자기들을 구해주셨다는데요? 그 은혜를 갚고 싶대요!”

“지상? 아, 범비알…”

지금 내게 범비알이 너무 약한 존재이다 보니 딱히 그들을 구해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애초에 내가 구하려던 대상이 세이언 종족이 아니라 엘프였던 것도 있고.

‘리에카가 아니었다면 세이언 종족이 내 손에 죽었을 텐데… 도움을 받아도 되는 건가?’

그들이 얼마나 큰 도움을 줄지는 모르는 상황이지만 양심이 찔려서 대답을 망설였다.

그에 루피아가 뭐하냐는 듯 나를 재촉했고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을 주시겠다면 받겠습니다.”

“잘 됐어요! 세이언 종족이라면 카이얀 씨께서 원하는 걸 찾아줄 거예요! 그들은 원하는 광물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요!”

실수지만 죽이려고 했던 세이언 종족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얼떨떨함도 잠시.

뒤늦게야 제일 중요한 사실을 내뱉는 루피아를 쳐다봤다.

“그게 사실입니까? 원하는 광물을 찾을 수 있다는 게?”

“네? 아, 네! 세이언 종족의 고유 능력이에요. 제가 듣기로는 원하는 광물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방향을 알려준대요. 신기하죠?”

그걸 말이라고.

지금 내 심정은 신기하다 못해 박수라도 미친 듯이 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 내 심정을 대변하듯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갔다.

“루피아 씨,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는 겁니까?”

“으음… 더 알려주실 게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정보가 구체적일수록 찾는 게 쉬울 테니까요.”

“정보라… 우선은 지금 말씀드린 게 전부입니다.”

“그래요? 그럼 세이언 부족에게 그렇게 전할게요. 그들은 희귀한 광물도 금방 찾아내는 능력자들이니까 벤티아라는 보석도 금방 찾을 거예요!”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세이언 부족에게 향하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내려 리에카를 쳐다봤다.

“이거… 잘하면 일이 쉽게 흘러가겠는데?”

[너무 기대하시는 거 아니에요? 정말로 벤티아 보석이 모두 멸종했을 수도 있잖아요. 이러다 괜히 실망만…]

“실망할 것도 없지. 이건 갑자기 생긴 선물이니까. 찾으면 좋은 거고 못 찾는다면… 계획대로 연금술사 삼인방을 잘 구슬려 봐야지.”

분명 그 녀석들은 벤티아 보석에 대해 무언가를 더 알고 있다.

어쩌면 이미 벤티아 보석을 손에 넣고 루칸의 이빨을 찾기 위해 거짓을 말한 것일 수도 있고.

“아돌프를 다시 만나러 가기 전까지는 세이언 종족을 믿어 보자. 그때가지는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까.”

[그렇게 해요! 그런데 그보다 아스티아는…]

리에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하고 있을 때,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던 파메인과 카르본 장로가 이야기를 끝내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지금 카르본 장로의 표정을 보아서는 파메인에게 모든 진실을 들은 것 같은데.’

그는 지금 어떠한 기분일까.

그래도 결국 하브마임에서 엘프들이 돌아와서 만났으니 괜찮다는 생각? 아니면 레플랙사에게 속아서 200년을 허비했다는 분노?

“카이얀 씨.”

“네, 파메인 씨.”

“카르본과 이야기는 잘 끝냈습니다. 샤렌 부족 전체를 아공간으로 이주시키고 싶은데 괜찮습니까?”

파메인의 물음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럴 계획으로 엘라인 장로가 파메인과 나를 이곳으로 보냈던 것이니.

“예, 괜찮습니다. 그럼 지금 문을 열어드릴까요?”

“아닙니다. 카르본이 아직 정리할게 남았다고 했으니 내일 이주를 시작하면 될 거 같습니다.”

“그러도록… 아! 파메인 씨, 샤렌 부족이 아공간으로 이주하면 세이언 종족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만약 세이언 종족까지 내일 이주를 하게 된다면 벤티아 보석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하지만 내 걱정은 기우였다는 듯이 파메인이 고개를 저었다.

“세이언 종족은 이곳에 남기로 했습니다.”

“네? 굳이 왜 이 위험한 주거지에…”

“그들은 유네시아 대륙의 땅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종족입니다. 정령들이 세계수가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아… 그렇군요. 그래도 굳이 주거지에 있을 필요가 있습니까? 안전하게 인간 왕국들이 있는 곳으로 가면…”

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파메인 옆에 있던 카르본 장로가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인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카이얀 씨야 그들의 목숨을 구해 주셨으니 세이언 종족이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겠지만, 다른 인간들은 다르죠.”

“종족 전쟁 때문에 말입니까?”

“예? 그게 무슨…”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카르본을 힐끔 보고 파메인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샤렌 부족과 세이언 종족은 종족 전쟁에 대해 모릅니다. 그때 당시부터 지금까지 살아 있는 엘프라고 해 봤자 저와 엘라인 장로님뿐입니다. 하지만 장로님과 저는…”

“…레플랙사 때문이군요.”

“그렇죠. 덕분에 다른 어린 엘프들은 그때 당시의 일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기억을 조작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어려서 말이죠.”

“아, 하긴… 300년이 넘은 일이니까.”

아무리 엘프들이 오래 산다고 해도 엘라인 장로를 제외하고는 종족 전쟁을 겪은 자는 없는 게 당연한 것일 수도.

거기다 파메인의 말대로 전쟁을 겪은 엘라인 장로조차 레플랙사에게 기억을 봉인당해 다른 엘프들에게 그에 대한 정보를 전하지 못했으니.

조금 의외인 것이라면 세이언 종족조차도 종족 전쟁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게 아니라면 왜 인간을 싫어하는 거지?’

당연히 종족 전쟁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의문스러운 마음에 파메인을 쳐다보자 그가 이해한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세이언 종족은 역사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명이 긴 편도 아니죠. 오래 산다고 해도 20년밖에 살지 못하거든요.”

그럼 지금 저 세이언 종족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세이언이라고 해봤자 고작 20살이라는 소리.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왠지 모르게 그들이 귀엽게 느껴졌다. 그 말은 대부분의 세이언이 나보다 어리다는 소리기도 하니까.

“20년이라… 조금 짧군요. 그런데 왜 인간을 싫어하는 겁니까? 종족 전쟁 때문이 아니라면.”

“카르본 말로는 15년 전에 주거지에 들어온 인간들에 의해 새끼 세이언이 죽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그게 이유인 거 같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하긴 주거지가 아무리 위험하다고 해도 보물이나 희귀한 약초 또는 몬스터를 얻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

제프 아저씨 또한 과거 A급 용병단으로 활동할 당시 몇 번이나 주거지에 들어왔었다고 말했었고.

‘…문제는 그 사람들이 세이언을 보고 몬스터로 판단해서 죽였을 확률이 높다는 거지. 나도 리에카가 아니었다면 세이언들을…’

루피아와 함께 벤티아 보석을 찾기 위해서인지 분주하게 움직이는 세이언들을 보니 괜스레 마음이 착잡해졌다.

외모만 보고 그들을 몬스터로 판단한 내 행동이 옳은지에 대해서 의문이 들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