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5/49]

[체력:03][근력:02][민첩:06]

[마력:08][정신:03][감각:06]

[신성:01]

[특성:이중마륜심장(S),마법천재(A),맹수의 기민함(B) 외 2종]

[기술:수인족 체술(C),기초마력연공법(D)]

[설명:만 12세, 인간족. 빼어난 재능을 지닌 흑시의 상품이다. 빛나는 미래를 꿈꾸며 칼을 갈고 있다.]

가만히 녀석의 시트를 보고 있자 점주가 입을 열었다.

“평기사 못지않게 날쌘 몸놀림과 마력을 타고난 소년입니다. 잘만 가르치면 소국의 기사단장 못지않은 수준까지 성장할 가능성도 있지요. 거기에 곱상하기까지 하니 남색을 밝히신다면···”

“그쪽에는 취미 없어.”

“실례했습니다.”

빠른 사과 마음에 든다.

나는 점주에게 물었다.

“이 녀석, 가격은?”

“전사로서 꽤 싹수가 보이는 녀석이긴 하나, 지나치게 사나운 성격 탓에 저희 쪽에서도 애물단지로 취급했다 보니··· 백금화 열 닢이면 충분합니다.”

눈치를 살피는 점주를 보며 나는 실소를 삼켜야만 했다.

40대의 잠재 레벨을 가진 캐릭터는 독자들 사이에서 흔히 ‘준십이걸’ 급이라 일컬어진다. 그리고 눈앞의 소년은 그들 중에서도 한없이 십이걸에 근접한 잠재력을 가졌다. 그런 녀석의 가치가 고작 백금화 열 닢에 지나지 않는다니.

뭐 그래도 노예가 주인 말을 듣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이 녀석이 대성하는 미래를 이미 알고 있거나, 눈에 스카우터라도 달린 게 아니고서야 이 점주처럼 가치를 낮춰 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난 양쪽 다 해당한다.

덤으로 이 녀석이 전사보단 마법사에 더 적합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구매하지. 아, 노예 인장은 찍지 말고.”

몸에 인장을 찍은 노예는 주인의 명령을 어기는 순간 크나큰 고통을 느끼게 된다. 다만 이게 그렇게 만능은 아니라서 레벨 높은 상대에겐 안 통한다.

의외의 요구였던 듯, 잠시간 나를 바라보던 점주가 물었다.

“실례지만, 상품은 어떤 방식으로 운송하실 생각입니까? 운영 측을 경유해 은밀히 자택까지 배송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크로아 왕국과 스트로크 공국에서의 인신 매매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런 귀찮은 일에 엮이지 않도록 상회 측에서 깔끔하게 일을 처리해 주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부러 배달해 줄 필요는 없고, 내가 직접 들고 갈 거야. 방음 캡슐에 담아 줘.”

“알겠습니다.”

나는 명목상 에벨 스트로크의 대리로서 흑시에 참여한 거다. 따라서 그레이 캐러밴에 일을 맡기면 리크롤의 스트로크 저택이 아니라 리페르타 국경지대로 배달이 가 버릴 거다.

이윽고 점주가 구석에 있던 청년 마법사에게 다가가 말했다.

“레비. ‘포장’해라.”

“예.”

명령을 받은 마법사, 레비가 금속 우리를 향해 다가갔다. 이윽고 그 주변으로 마력이 요동쳤다.

빼어난 감각을 지닌 소티로는 본능적으로 그가 주문을 사용하려는 것임을 느꼈다. 수인족의 육감이 보낸 경고에 따라 뒷걸음질 친다. 하지만 철제 우리 속에 갇힌 이상, 그가 도망갈 곳은 어디에도 없다.

레비가 소티로를 향해 검지를 겨냥했다.

“〈홀트니들”

“으윽!”

검지에서 쏘아진 보랏빛 섬광이 소년의 왼쪽 쇄골 부근에 꽂힌다. 그것을 맞고 부들부들 경련하기 시작한 소티로는 이내 기절하듯 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무심하게 이를 바라보던 마법사가 철창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쓰러진 소티로를 염력계 마법으로 움직여 관짝 같이 생긴 상자에 집어넣는다.

나는 마법사에게서 그 상자를 건네받았다. 가볍게 설계된 합금 재질인데다, 내부에는 부유석이 들어 있다. 그로 인해 발생한 부력 탓에 소티로는 지금쯤 둥둥 떠 있을 거다. 덕분에 별로 무겁지는 않았다.

상자에는 끈이 두 개 달려 있었다.

이를 이용해 백팩처럼 등에 멘다.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손님.”

나는 점주의 배웅을 받으며 노예 상점 컬러즈를 나섰다.

리니아가 물었다.

“아까 안내인에게 물어보신 건 정보상과 노예상의 위치가 전부였죠. 이제 용건이 전부 끝나신 건가요?”

“아니. 들를 곳이 남았어.”

흑시에 방문한 본래 이유, 소티로 위 티그리스의 신변은 성공적으로 확보했다. 하지만 이제야 뿌리를 심었을 뿐이다. 슬슬 곁가지를 그릴 차례다.

나는 어느 가게로 향했다.

일견 흑시라는 장소에는 어울리지 않는 수수한 가게였다. 하지만 거대한 이름값에는 때때로 어떤 화려함조차 가릴 정도로 대단한 파급력이 있다.

예를 들자면··· 세계 최고의 지성들이 모인 학파, 알파니움 도서관의 이름이 그렇다.

“어서 오십시오. 알파니움 잡화점 탈로스 지부의 책임자인 길버트라 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잠시 뭐가 있는지 구경 좀 해도 될까?”

“물론입니다.”

나는 전시된 상품들을 둘러 보았다.

『마력 폭주 알약(B)』

일시적으로 마력 출력 대폭 증가

※마력회로 파열 위험성 극히 높음

『고정화의 정수(A)』

타 재료와 조합시 강한 지속성 부여

※복용 시 신진대사 둔화

『알파니움 만능 물약(B+)』

장기간 복용 시 잠재 레벨 소폭 상승

복용 시 마력과 신체 회복 촉진

복용 시 미약한 질병 완···

복용 시 기맥 진정···

복용 시···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부호가 붙어 있는 물건은 통상품보다 완성도가 높다. 아예 근본부터 달라지는 건 아니고, ‘사과(D)’가 ‘잘 익은 사과(D+)’로 변하는 정도의 차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따라서 『알파니움 만능 물약(B+)』은 굉장히 솜씨 좋은 연금술사가 제작한 물건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어쩌면 알파니움 도서관의 현 수장인 ‘일레메 바일비트’나 대학자 ‘하인리히 부덴베르크’ 정도 되는 거물이 손수 제작한 물건일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진열된 물건들을 쭉 둘러본 뒤, +부호가 붙은 물건들을 우선적으로 추려 카운터로 가지고 갔다.

“다 해서 얼마지?”

“알파니움 만능 물약은 한 병당 백금화 4닢입니다. 총 다섯 병에 그 외의 상품들까지 전부 더하면 백금화 60닢 되겠습니다.”

백금화 60닢이면 어지간한 소영지의 일 년 예산이다. 새삼 이것들보다 등급이 높은 음양초를 공짜나 다름없는 값으로 대량 매입했던 게 정말 날로 먹는 짓이었음을 느낀다.

나는 잠시 고민해보았다.

솔직히 S급, A급 영약들의 위치를 달달 외우고 있는 내가 이것들을 사는 건 낭비에 가까운 짓이긴 하다.

하지만.

짤랑!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래 지식을 알고 있는 나는 돈 따위 언제든 대량으로 마련할 수 있다. 괜히 구두쇠처럼 빌빌거릴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볼 일을 전부 마친 나는 흑시를 나왔다.

남은 백금화를 세어 보니 63개였다.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지금 내가 구상하고 있는 사업의 밑천으로 삼기에는 차고 넘칠 만큼 많은 돈이다.

“흠··· 생각보다는 많이 남았군. 아예 열 닢 정도만 빼두고 싹 다 영약 사는데 쓸 걸 그랬나?”

아니면 토인족 야장들이 만든 장비를 샀어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유적지에서 구할 수 있는 전설급 무구들 만큼은 아니라도, 기성품 중에서는 가히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니까.

“세상에. 도련님께선 참 배포도 크시네요. 고작 물약 몇 병 사는데 백금화를 수십개씩 지불하셨을 땐 제 돈이 아닌데도 애가 탔을 지경이었다니까요?”

“날 따라다니다 보면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끔쩍 않게 될 거다.”

성격파탄자 티아미아가 부활하는 3부쯤 가면 좀 달라지겠지만. 얘가 그 쌍년의 실체를 알게 되면 받을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참 걱정이다. 예지몽을 팔아먹어서 미리 밑밥을 좀 깔아둬야겠군.

계단을 타고 이동도시 탈로스를 나온 우리는 바인 남작가의 저택에서 하룻밤을 묵고, 바로 다음 날 길을 나섰다.

“마음이 맞는 친구를 벌써 떠나보내려니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는군.”

“저 역시 비슷한 심정입니다, 대공자.”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 율리안이 배웅을 나왔다. 나중에 클랜 완성하고 떵떵거릴 수 있는 시기가 찾아오면, 탈로스에 들어가는걸 도와준 보답으로 이 녀석의 가문에도 좀 도움을 줘야겠다.

4.

3일 후.

거의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밤낮 없이 달려 스트로크 저택의 개인실로 복귀한 나는 운반해온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거진 반송장이 된 소년이 기어나왔다.

“으으으···”

“4일이나 굶겼더니 흑시에서 봤을 때보다 더 비쩍 곪았군. 리니아, 뭐 아무거나 먹을 것 좀 내와.”

“알겠습니다, 도련님.”

이윽고 리니아가 주방에 들러 여러 음식을 가져왔다. 호밀빵, 소시지, 훈제 생선, 포도주, 고기 수프 등에 디저트로 과일 몇 개랑 스위트롤까지 있다.

“···뭐야 이거.”

한밤중에 가져온 것치고는 놀랄 정도로 호화로운 식단이다. 나는 의아해진 나머지 그녀에게 물었다.

“주방에서 뭐라고 안 하디?”

“도련님께서는 예지몽을 꾸시기 전까지 자주 야식을 하셨어요. 그러다 보니 주방장도 간만이라고 놀랐을 뿐 그러려니 하던데요.”

이것 참, 돼지 놈의 버릇이 도움될 때도 있군. 요즘 들어 잊고 있었는데, 원판이 워낙 상망나니라 그런지 도덕적 굴레에서 살짝 벗어난 행동을 해도 관대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나는 아까부터 바닥에서 끙끙거리고 있는 소티로에게 접시를 내밀었다.

“임마. 지금까지 굶긴 건 미안하게 됐다. 얼른 이거나 주워 먹어라.”

“···!”

접시의 내용물을 본 소티로가 눈을 부릅떴다. 조금 전까지 끙끙거리고 있었던 게 거짓이었던 것처럼 번쩍 몸을 일으키더니, 음식들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우적우적!

쩝쩝!

꿀꺽꿀꺽!

파슥파슥!

소티로는 모든 접시를 깨끗이 비운 것도 모자라, 커다란 포도주병까지 단번에 마셔버렸다. 만족스럽게 배를 쓸어 만지던 녀석은 이윽고 약간의 호의가 섞인 눈빛으로 내게 묻는다.

“그 목소리··· 노예상에게서 날 산다고 이야기했던 그 사람이군?”

“네 말이 맞다. 맹호왕(猛虎王)의 사생아, 소티로 위 티그리스.”

“뭣···!”

미리 준비해 뒀던 말을 꺼내자, 녀석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야 놀랄 만도 하다.

설정상 소티로는 노예 시절 자신의 출신성분이나 이름에 관한 이야기를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런걸 이리저리 떠벌리고 다녔다간 목숨이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당신! 혹시 ‘사파리아’에서 집행부의 부탁을 받은 외부 협력자인가? 비밀리에 나를 처분하러 온 거야?”

소티로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 물었다.

녀석이 말한 ‘사파리아’란 수인족 열두 부족이 모두 모여 사는 도시다. 그리고 그곳의 집행부는 주로 높으신 분들의 뒤를 닦아주는 일을 한다.

이를테면, 어느 부족의 지도자가 인간족과의 놀음을 통해 만든 사생아가 있다 치자. 그렇다면 집행부는 지도자의 도덕적 결함이 알려지기 전에 그 ‘오점’을 처리한다.

나는 덜덜 몸을 떠는 소티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아니. 난 네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 이곳으로 데려온 거다.”

“기회··· 라고?”

“응. 마법도 배우고, 신분도 세탁하고, 덤으로 어여쁜 신부까지 얻고, 아주 잘하면 호랑이 부족을 다스리는 네 아버지에게서 인정까지 받게 될지도 모르는 기회지.”

“···믿겨지지 않는데. 내게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건가?”

바라는 거라.

매우매우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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