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Double Track Recovery Log

Episode 259. Will (2)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전서구는, 섬 어딘가로 날아갔다. 이리스는 루가그리즈에 탄 채 녀석을 따라 이동했다.

도착한 장소는 그녀에게 있어 익숙한 설산이었다.

다름 아니라 배우자의 수련장이다.

이리스의 접근을 인지한 레겐샤우어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던데, 해결됐나?”

“아아, 별거 아니었어.”

이리스는 이르모크위 분신의 전언을 간추려서 설명했다.

“그것보다··· 손에 쥔 그건 뭐야?”

“에드발이 쓴 편지다.”

“에드발? 요전번에 싸운 검성 녀석 말이구나. 그래서 무슨 내용이 적혀있는데?”

“또다시 결투를 청하려는 것 같군.”

“···뭐?”

이리스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배우자를 바라보았다. 레겐샤우어는 잠자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을 잇는다.

“마침 영웅의 숫자가 셋으로 줄었다고 하니 나쁘지 않은 시점이군. 이리스, 처음 만났을 때 한 약속 기억하나?”

“·········.”

황금색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두 사람의 첫 만남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근 30년에 달하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동년배 검사와의 결투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패배에 가까운 무승부를 거둔 직후, 레겐샤우어는 엘라노 외곽 민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크나큰 실의에 빠져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검술이라는 분야에서 습득도 이해도 남들과는 궤를 달리했던 레겐샤우어다. 심지어 몇 년 전에는 트리플 스타와의 결투에서 승리했으니, 대륙을 통틀어 적수가 될 만한 인물이 없다고 여겼다.

그런 ‘세계관’에 금이 간 것이다.

“네가 천인살 맞지?”

우연히도 이리스는 그런 좋지 않은 시기에 레겐샤우어를 찾아왔다.

“나, 이리스 빈테르라고 하는데. 이번 기회에 마음에 드는 남자를 못 찾으면 적당히 어른들이 결정한 상대랑 결혼해야 하거든. 듣자 하니 네가 바깥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전사 같던데, 배우자가 되어줄래?”

그간 대륙을 구경하며 유명한 마법사나 전사들을 둘러본 그녀다. 한동안 내키는 상대를 찾지 못했지만, 이 남자는 얼굴이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반쯤 즉흥적으로 나선 그녀는 본격적인 설득을 시작했다.

“우리 가문, 이래 봬도 대단한 비전이 많거든. 분명 더 강해질 수 있을 거야.”

“귀찮은 년이군. 꺼져라.”

“초면부터 욕지거리라니, 버릇을 고쳐줘야겠네. 나랑 싸워서 지면··· 알지?”

그날, 실금이 가기 시작한 세계는 와장창 부서졌다. 굳이 결투라고 표현할 것도 없다. 절세 검사 천인살은, 이름값도 변변찮은 아녀자에게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다.

하지만 레겐샤우어는 이 싸움에서 한 줄기 빛을 보았다.

스승에게 전해 들었던 자그마한 실마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늘이 내려준 기회다.

반드시 이 여자를 따라가야 한다.

마음으로는 그리 생각했지만, 입으로 나온 말은 달랐다.

“쿨럭··· 한 가지만 약속해준다면 제안에 응하겠다.”

“뭔데? 말해봐.”

“내가 몸담은 유파의 기술을 완성할 기회가 온다면, 그때에 한해 너와 너희 가문보다 유파의 일을 우선하겠다. 그래도 괜찮은가?”

“그거, 하루 이틀 걸리는 일은 아니지?”

이리스는 호기심 넘치는 표정으로 그렇게 되물었다.

사실상의 승낙이다.

당시의 레겐샤우어는 몰랐으나, 슈니펠트 가문은 데릴사위에게 전력의 역할 따위를 바라지 않았기에 통했던 제안이다.

과거를 떠올린 그가 피식 웃었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다만, 그건 그냥 상황에 울컥해서 뱉어본 말이었다.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 여자한테 두들겨 맞았다는 게, 참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거든.”

“·········.”

“이리스. 너와 함께한 세월에 아쉬움이 있는 게 아니다.”

처음 삭막할 거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섬에서 보낸 시간은 나름대로 즐거웠다. 검사로서도 큰 발전을 이루었고, 아이도 여섯이나 생겼다.

“그저··· 에드발, 녀석의 성취가 나의 예상을 벗어났을 뿐이지.”

먼 옛날, 레겐샤우어는 디어사이드 유파의 최종 절기가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뼈대가 되는 이론이야 그럴듯하겠지만, 이론을 세우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는 건 다르다. 만에 하나 이론에 단 하나의 구멍조차 없다고 쳐도, 완성으로 가는 길은 분명 구상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고된 일일 터다.

하지만 마침내 안개가 걷히고 그 고된 길이 드러났다.

필생의 호적수 덕분이다.

디어사이드 유파의 검술은, 두 개의 분파가 서로를 끌어올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에드발이 세상에 없었다면 레겐샤우어 역시 지금 같은 성취를 이룰 수는 없었으리라.

그는 팔을 들어 올렸다.

지지지직화르륵!

화·뇌·명, 세 개의 기운이 그가 쥔 흑단절검을 타고 얽힌다. 레겐샤우어는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예감했다.

‘다음번에 에드발과 검을 나눈다면, 이는 분명 두 분파의 합일로 이어지리라.’

결연한 표정을 살핀 이리스가 입을 열고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짝, 짝, 짝─ 박수 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과연 천인살, 멋지군.”

“···후리칸 숙부?”

긴 은발의 장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화가 늦는 슈니펠트의 피를 이었으니, 실제 연령은 겉모습보다 훨씬 늙었을 게 분명하다.

“레겐샤우어, 나를 비롯한 원로회는 그대의 선택을 적극 지지하겠다.”

이리스는 후리칸 슈니펠트의 말에 반박했다.

“이게 녀석들의 함정이면 어쩌려고?”

“역이용하면 된다. 블리스피엘과 싸움을 치르는 도중 결투를 시작하면 될 뿐인 문제지. 검성을 비롯한 디어사이드 유파 무인들을 묶어둘 수 있을 거야.”

“·········.”

“연합 역시 5영웅과의 반복된 충돌로 제힘을 낼 수 없는 상태. 때를 살펴 계의 제단을 기습하면 될 거다. 그렇게 되면 ‘유골’과 ‘눈물’도 가문의 손에 들어오겠군.”

“상대는 영웅을 둘이나 격퇴했어. 무슨 수를 쓸지 모르는데 섣불리 움직일 생각이야?”

그러자 후리칸이 피식 웃었다.

“이리스, 그 다형족 영웅의 분신은 너에게만 찾아간 게 아니란다. 우리 원로회에 찾아와 연합 측 전력에 관한 상세 역시 알렸지.”

“···!”

증언이 사실이라면 후리칸의 말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하지만 이리스는 묘한 찝찝함을 느끼며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레겐샤우어를 보았다.

그는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5.

검성과의 면담을 마친 나는 아직 제단 내부에 머무르고 있는 티시에를 찾아갔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이제 완전히 멀쩡해졌다.”

티시에가 평온한 표정으로 답했다.

나는 그간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런데 구도교회의 두 분은 어떻게 5영웅이 나타날 걸 알고 남부로 찾아오신 겁니까?”

“성황국의 정예들이 대수림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판틸리스 모넬이라는 애송이가 치밀하게 작업해 둔 덕분이지.”

“아아···.”

예전 에스트리엘을 도와 그를 살린 게 여러모로 크나큰 리턴으로 돌아온 셈이다.

만약 티시에가 없었더라도 5영웅을 상대로 후퇴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클랜은 상당한 희생을 치렀을 거다. 도망가는 벨리포트를 붙잡을 수도 없었겠지.

별안간 브루노가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 5영웅에 관한 일은 일단락된 게 아닌가? 하나하나가 핵심인 인원들을 무려 둘이나 처리했으니 말이야.”

“음··· 확실히 슈니펠트 가문 쪽으로 급격히 무게가 쏠리긴 하는군요.”

조금 다르게 생각하면 3명이 살아나간 게 다행이긴 하다. 5영웅이 전멸했다면, 아무런 외부 변수 없이 슈니펠트 가문과 일대일로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 찾아왔을 테니까.

티시에와 이지드라는 카드가 존재하는 이상 패배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지만··· 군데군데 불안요소가 남아있다.

일단, 지난 두 번의 싸움으로 두 사람의 능력이 유출되었다. 만약 5영웅 측이 이에 관한 정보를 슈니펠트 가문에게 알렸다면, 그들 역시 방비를 철저히 할 거다.

이런 상황에서는···.

“···슈니펠트 가문이 제대로 방비하기 전에 겨울이슬 섬을 기습합시다. 두 달 정도 준비한 후가 적당하겠네요.”

“제단에서 수비전을 치른다는 처음 계획과는 상당히 많이 달라졌군.”

“이게 다 5영웅의 이른 부활 때문이죠.”

정확히 말하면 언노운이라는 변수 탓이다.

그래도 이지드라는 카드를 일찍 얻었으니, 이쪽도 본전은 쳤다.

“검성 공의 확언대로 천인살이 결투 신청을 받아들인다면, 슈니펠트의 수뇌부는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겁니다. 디어사이드 유파의 발을 묶을 기회니까요.”

그리고 이리스와 가문의 다른 혈족들을 움직여 티시에와 이지드를 견제할 거다. 슈니펠트 원로회의 핵심인 후리칸의 성향대로라면 분명 이것과 비슷한 전략을 들고나오겠지.

단순하지만 대응할 방법이 마땅찮다.

지금의 우리 클랜이라면 말이다.

“티시에 님께서는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제단으로 돌아와 주십시오. 저 역시 결전에 대비해 마지막으로 전력을 정비하겠습니다.”

“알았다.”

카팔리 산으로 돌아가려는 티시에와 브루노를 배웅한 우리 클랜원들은, 곧바로 레스피넬에 탑승했다.

그리고 알파니움 도서관으로 향했다.

6.

알파니움 도서관의 총 책임자, 일레메 바일비트는 지금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저 엘더 리치의 정체는 무어란 말인가?”

말 그대로 이상 사태였다. 웬 신성력을 가진 엘더 리치와 수천에 달하는 언데드 군단이 벌써 사흘째 파르코스 학사국의 외벽을 두들기고 있었으니까.

기적적으로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외부와 통하는 길이 차단되어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당장은 버틸 수 있지만, 이 상황이 오래 지속한다면 생필품의 공급도 여의치 않으리라.

그런 와중, 한 무리가 언데드 포위망을 뚫고 도서관 내부까지 도달했다. 전 대륙에 명성이 드높은 블리스피엘 클랜원이었다.

일레메와 구면인 아이덴이 앞으로 나섰다.

“바일비트 공. 제가 학사국을 둘러싼 언데드 군단을 쫓아낼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예. 저 언데드 군단의 주인은 5영웅 지르갈 알렉시크입니다. 이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계약 마도서, 『심연흑암서(S+)』를 노리고 온 게 분명합니다.”

“···아니, 그건 오래전 마스터 스트로크가 거래 용도로 우리에게 건넨 마도서가 아니오? 지금 도서관을 기만했다고 자백하는 건가!”

“그건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저자가 성자 지르갈임은 확실합니다. 이를 증명하는 성황국의 인 역시 받아왔으니까요. 선택은 어디까지나 도서관장의 역할입니다.”

“으드득···!”

일레메는 분노로 이를 갈면서도 『심연흑암서(S+)』를 엘더 리치에게 건넸다. 책을 되찾은 엘더 리치는 놀랍게도 언데드 군단을 뒤로 물렸고 말이다.

‘꼭두각시로도 연기 잘하는군. 묵언수행 전략이 통한 건가.’

『영령강혼(EX)』을 사용해도 겉모습이나 종족까지는 변화하지 않는다. 마도서를 건네 받은 엘더 리치는 이지드에게 구현되어 권능 일부를 나눠 받았을 뿐인 인형이다. 언데드 군단과는 달리 이지드가 직접 조종한다는 차이점은 있다.

아이덴은 일레메를 비롯한 연금술사들에게서 감사와 분노가 섞인 시선을 받고는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제 행동이 그리 곱게 비치지는 않나 봅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그간 그대가 보인 행보를 살피면, 적어도 예지와 유사한 능력이 있는 건 확실하오. 아무리 봐도 우리에게 심연흑암서라는 폭탄을 떠넘긴 꼴이 아닌가.”

“음··· 예지라고 해서 만능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 말을 믿지 않으실 테니 행동으로 사죄하겠습니다.”

“행동이라고?”

“심연 도서관의 사신을 처리해 드리죠.”

그 말에 일레메가 눈을 크게 치뜬다.

7.

망자의 궤에서 얻은 S등급 물품, 『안식의 관(S)』을 개방한 레이카디는 그것을 심연 도서관의 입구에다 투척했다.

쿵!

관이 떨어지며 요란한 충돌음이 났다.

“이건, 도대체···.”

관짝 안에 봉인되어 있던 벨리포트는 그 충격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기어 나왔다.

고오오오오─

그 앞에 마도서 『타나토스(S+)』의 힘을 담은 화신··· 시계의 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