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

# 27

제27화

수혁이 본 바로 ‘판게아’는 노력의 대가가 충분히 돌아오는 게임이었다. 운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노력 역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아니, 대부분의 비중을 차지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유저마다 책의 색깔을 정해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특정 조건 달성?’

수혁은 수많은 책들을 읽었고 그중에는 게임 판타지 소설도 많았다. 모든 게임 판타지 소설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몇몇 게임 판타지 소설에서는 특정 조건을 성립해야만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 있었다. 그런 것처럼 특정 조건을 성립하면 책의 색깔이 달라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이 책.”

사내는 수혁이 생각에 잠겨 있든 잠겨 있지 않든, 당황해하든 당황해하지 않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수혁은 생각을 잠시 접고 사내의 말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하얀 책이었는데 파란 책이 됐습니다.”

이어진 사내의 말에 수혁은 확신할 수 있었다.

29.

‘조건이네.’

조건이 분명했다. 특정 조건을 달성하면 책의 색깔이 변하는 게 확실했다.

“제가 책의 색깔을 물어 본 이유는.”

그리고 드디어 사내의 입에서 본 궁금증의 답이 나오기 시작했다.

“퀘스트를 깬 이 책. 이 책의 퀘스트를 다른 사람이 또 깰 수 있나? 없나? 궁금해서였습니다.”

“아…….”

사내의 말에 수혁은 탄성을 내뱉었다. 왜 사내가 책의 색을 물어 본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나도 궁금하긴 했는데.’

수혁 역시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하얀색으로 보이신다고 하시니 아무래도 퀘스트를 한 번 깨면 다른 사람이 또 깰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사내가 말을 마쳤다.

‘그런데…….’

수혁은 사내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내의 의견이 맞으려면 전제가 하나 깔려 있어야 한다.

‘내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서 그런 걸 수도 있잖아?’

바로 수혁이 조건을 충족했느냐였다. 지금이야 하얀 책이지만 조건을 충족했을 때 파란 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제가 조건이 안 돼서 못 보는 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수혁은 자신의 생각을 사내에게 말했다.

“아뇨. 조건은 충족하셨을 겁니다. 제가 이 퀘스트를 받았던 때가 갓 마법사가 됐을 때였거든요. 레벨 10. 마법사로 전직 후 바로 왔어요.”

사내는 수혁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러면…….”

수혁은 말끝을 흐렸다. 사내의 말대로라면 수혁 역시 조건을 충족했을 것이다. 그런데 파란색이 아닌 하얀색으로 보였다.

“네, 퀘스트가 깨지면 그냥 보통 책이 되는 거죠. 물론 퀘스트 완료가 한 번인지 아니면 퀘스트를 받는 게 한 번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사내의 말에 수혁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침묵은 곧이어 어색함으로 변모하기 시작했고 사내는 어색함이 주변을 완전히 지배하기 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는 수혁에게 인사했다.

“아, 네. 안녕히 가세요.”

수혁 역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수혁의 인사를 받은 사내는 미소를 머금은 채 도서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내의 뒷모습을 보던 수혁은 왼쪽에 쌓아둔 책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퀘스트를 완료하면 다른 사람이 퀘스트를 받을 수 없다.’

사내의 말이 사실이라면 책으로 받을 수 있는 퀘스트는 단 한 번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퀘스트 완료가 한 번이었다. 퀘스트가 완료 되면 더 이상 퀘스트를 받지 못하니까.

‘선점이라는 건데.’

즉, 선점이었다.

‘그러면…….’

파란 책, 빨간 책을 읽어 받은 유산 퀘스트와 스텟 퀘스트는 완료하지 못했다. 그러나 보라 책을 통해 받은 직업 퀘스트 ‘대마도사의 후예’는 이미 완료했다. 그렇다면?

‘대마도사의 후예는 나만 될 수 있는 건가?’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다. 여러 루트가 있을 수 있다. 다른 방법으로 대마도사의 후예로 전직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특수 직업이라고 한 명만 전직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후.”

생각을 하던 수혁은 짧게 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숨을 내뱉으며 생각을 정리한 수혁은 책을 펼쳤다. 그리고 다시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여기 있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사서 NPC에게 증표를 돌려받은 왈츠는 인사와 함께 도서관에서 나왔다.

“…….”

도서관에서 나온 왈츠는 도서관을 보며 생각했다.

‘크게 될 유저 같단 말이지.’

언젠가는 사내를 다시 만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때 사내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유저가 되어 있을 것 같았다.

‘그 집중력. 거기다 파란 책을 알고 있으니.’

왈츠가 이런 생각을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말도 안 되는 집중력. 두 번째, 파란 책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파란 책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 도서관에 가는 유저도 거의 없을뿐더러 아는 유저들은 독점할 생각인지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지 않고 있었다.

물론 지인에게 말해 줬을 수도 있지만 일단 홈페이지에는 확실히 올라오지 않았다. 즉, 정보를 공유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왈츠 역시 마찬가지였다. 같이 판게아를 시작한 지인들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지도 않았다.

그런 왈츠가 사내에게 정보를 공유한 것은 어차피 사내 역시 알게 될 사실이었고 훗날을 위해 약간의 친분을 만들어 두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혹시나 사내가 더 알고 있지 않을까? 알고 있는 게 더 있다면 그걸 알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도서관을 보던 왈츠는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퀘스트 창을 열었다. 방금 전 습득한 ‘라칸의 두 번째 유산’.

라칸의 진짜 무덤이 있는 곳은 어디일까? 알테리온 산맥에 그 단서가 있다. 단서를 찾아 무덤을 찾아라!

퀘스트 보상 : ???

‘알테리온 산맥이라…….’

퀘스트 수행 장소는 ‘알테리온 산맥’이었다.

‘지금은 힘들겠어.’

넓디넓은 판게아지만 왈츠는 알테리온 산맥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최상위 랭커들이 사냥하고 있는 곳이 알테리온 산맥이었다. 레벨 300이 넘는 괴물 같은 랭커들.

그런 랭커들도 심심치 않게 사망하는 곳이 바로 알테리온 산맥이다. 아무리 트리플이라고 하나 150레벨인 왈츠가 알테리온 산맥을? 턱없는 이야기였다.

‘레벨 업이나 하자.’

왈츠는 퀘스트 창을 닫았다. 지금 깰 수 있는 퀘스트가 아니었다. 퀘스트 창을 닫은 왈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후, 오늘도 결론이 나질 않는군.”

치료의 마탑장 카츄가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벌써 회의가 시작된 지 4일이 지난 상황이었다.

‘내일까진 결론이 나야 할 텐데.’

측정불가의 재능을 가진 자는 이틀 뒤 중앙 마탑에 올 것이다. 그 전까지 측정불가의 재능을 어느 마탑에서 관리할지 정해야 한다.

‘도대체 어디서 새어 나간 거야?’

적어도 내일까지는 정해야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측정불가의 재능에 대한 정보가 퍼졌기 때문이었다.

‘페른 녀석이 정보를 접했으니…….’

페이드 제국의 황궁 마법단장 페른. 10대 마탑장들과 마찬가지로 어마어마한 마법 실력을 가지고 있으며 영향력도 마법 실력만큼 엄청난 마법사였다.

카츄와는 오랜 친구 사이로 페른 역시 마탑에 와 있었다. 원래 목적은 카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금은 목적이 바뀐 상태였다. 측정불가의 재능이 나타났다는 정보를 페른 역시 접했고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제국에 뺏긴다.’

만에 하나 제국에 빼앗긴다면? 다른 마탑이 데리고 가는 것보다 더욱 더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진다.

‘만에 하나 결판이 나지 않으면.’

카츄는 마탑장들을 하나하나 보았다.

‘밀어줘야겠어.’

측정불가의 재능에 대한 욕심은 카츄 역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욕심으로 인해 제국에 측정불가의 재능을 빼앗기는 상황이 일어나는 것을 카츄는 원치 않았다.

만에 하나 내일까지도 아무런 진전이 없다면 카츄는 다른 마탑 중 하나를 정해 밀어주기로 결정했다.

“다들 피곤해 보이는데.”

생각을 마친 카츄는 입을 열었다.

“오늘 하루 푹 쉬고 내일 보는 게 어떤가?”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좋은 생각이야.”

그렇지 않아도 4일간 이어진 진전 없는 회의에 피곤함과 지루함을 느끼던 마탑장들은 카츄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동의했다. 그리고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졌다.

카츄는 사라지는 마탑장들을 보며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치료의 마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입구에 있는 워프 마법진으로 향했다.

마법진에 도착함과 동시에 카츄는 약간의 마나를 불어넣으며 좌표를 설정했다. 이내 마법진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

그리고 그 순간 카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비앙?’

회의에 가장 늦게 도착했던 파비앙. 파비앙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파비앙은 워프 마법진으로 오지 않았다. 파비앙이 향하는 곳에 무엇이 있는지 카츄는 확인했다.

‘카코?’

파비앙이 향하는 곳, 그곳에는 대지의 마탑장 카코가 있었다.

* * *

‘역시.’

카코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파비앙을 보며 생각했다.

‘레톨의 말대로야.’

누군가 접근을 해 올 것이라던 레톨의 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독의 마탑이라면…….’

파비앙이 어떤 이유로 다가오는지 아직 듣지 않았다. 하지만 카코는 그 이유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블랙 드래곤의 정수!’

독의 마탑에 어떤 보물들이 있나 떠올리던 카코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파비앙을 보았다.

“카코.”

이내 카코 앞에 도착한 파비앙이 옆자리에 걸터앉으며 카코를 불렀다.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무슨 이야기요?”

“이미 알고 있잖아?”

“……헤헤.”

카코는 파비앙의 말에 헤벌쭉 미소를 지었다.

“뭘 원해?”

파비앙은 카코에게 물었다.

“블랙 드래곤의 정수요.”

카코 역시 파비앙과 마찬가지로 말을 빙빙 돌리지 않았다.

“……흐음.”

단번에 답이 나올 것이라 생각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블랙 드래곤의 정수가 갖는 가치 때문일까?

카코의 답에 파비앙은 침음을 내뱉으며 생각에 잠겼다. 물론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생각이었다.

“그래.”

생각을 마친 파비앙이 카코에게 말했다.

“측정불가의 재능이 우리 쪽에 온다면 블랙 드래곤의 정수 200g 줄게.”

“200g이요?”

“……왜? 적어?”

카코의 반문에 파비앙은 당황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아뇨, 생각보다 많이 주셔서요. 100g 정도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파비앙의 물음에 카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런 카코의 반응에 파비앙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럼 도와주는 거야?”

“네.”

이어진 카코의 답에 파비앙의 미소는 살짝에서 활짝으로 바뀌었다.

“단!”

하지만 아직 카코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조건 좀 바꿔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