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ord of a Thousand Lives

55,000 Revolutions

해질녘 한 잔 상단주 레프만은 상황 파악이 빠른 상인이었다.

그는 일개 뒷골목 잡화점이던 해질녘 한 잔을 포션 찌꺼기까지 팔아내며 대상단까지 키워낸 남자였다.

레프만은 눈썰미가 날카로웠고, 세상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았다.

허리를 굽혀야 할 순간에는 가장 먼저 엎드려 절을 바쳤으며, 턱 끝을 올려 자만심을 보여야 할 때는 몸소 나서 상대를 짓밟았다.

예전부터 그가 악독하고 돈에 먼 남자라는 험담이 오갔고, 실제로 레프만은 그러했다.

상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더러운 뒷거래라도 서슴지 않았으며, 황실 노리개들에게 뿌려댄 돈만 해도 평민 가정 몇십 년은 먹여 살릴 정도였다.

그 더러운 뒤 공작 덕분에 해질녘 한 잔은 수많은 위기를 딛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낯선 세계에서 도래한 여행자들이 대륙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왼팔에 단말기를 착용한 그들은 계획적이고 의뢰에 중독되다시피 열심히 해 삭막한 삶을 살아갔다.

본디 느긋한 대륙인들과 달리 레프만은 제 행복까지 잃어가며 일에 치중하는 여행자들을 보며 본능적으로 예감했다.

언젠가 여행자들의 세력이 무시 못 할 정도로 커지리라고.

그러한 레프만의 직감은 통했다.

여행자들 몇몇이 클랜을 만들이더 뛰어난 수완으로 뒷골목의 큰손으로 성장했다.

레프만은 개중 가장 큰 범죄 클랜과 손을 잡았다.

바로 흑호 클랜이었다.

흑호 클랜은 해질녘 한 잔이 뇌물을 먹이거나 탈세를 했던 행적을 깔끔하게 지워주었다.

정확히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증거 서류를 처리하거나 황실에 첩자를 심어 둔 것이 분명했다.

그 대가로 해질녘 한 잔은 약간의 금액과 소정의 포션을 제공했다.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는 레프만답게, 서로가 서로에게 이득인 완벽한 거래였다.

해질녘 한 잔은 흑호 클랜에게 사냥과 성장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했다.

생각보다 흑호 클랜의 수완이 나쁘지 않자, 레프만은 흑호 클랜 대장 유시도와 직접 접선했다.

유시도란 여행자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처음 보는 남자였음에도 레프만은 그에게서 상당한 위화감을 느꼈다.

최초로 범죄 클랜을 설립한 여행자였기 때문이었을까?

자신의 비좁았던 머릿속 너머로 그의 광기가 꿰뚫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날 유시도는 자신에게 흥미로운 제안을 해 왔고, 레프만은 고민 끝에 그 제안을 수용했다.

해질녘 한 잔은 흑호 클랜과 장기거래를 맺었다.

뒤쪽 세계를 통해 본격적으로 판을 키우기로 한 것이다.

해질녘 한 잔은 흑호 클랜과 손을 잡고 마약 판매업을 시작했다.

유시도는 마약 거래야말로 해질녘 한 잔을 더욱 크게 키울 수 있는 기회라고 주장했다.

애초에 해질녘 한 잔은 물약 거래를 주업으로 삼던 상단이니 약물을 제조하는 연금술사나 재료를 구해오는 약초꾼은 모조리 섭렵해 뒀다.

실상 마약 제조법을 구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흑호 클랜은 뒷골목의 유통을 맡았고, 해질녘 한 잔은 밤 몰래 마약을 제조했다.

마약 판매가 가져다주는 수익은 무서울 정도로 황홀했다.

이제껏 포션만 팔며 살아온 상인 경력이 허송세월로 느껴질 정도로 마약 판매업은 막대한 부를 창출했다.

뒷골목의 고객층도 다양했다.

나락까지 떨어진 노숙자부터 시작해 도박에 찌든 귀부인까지, 고객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사탕이나 과자보다 판매 계층이 넓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처음 호기심 삼아 시작했던 작자들이 나중에는 제발 마약을 달라고 애원을 해대니 마진이 안 남을 수가 없었다.

첫맛이 달콤하기 이를 데 없자 레프만은 사업을 더욱 확장했다.

해질녘 한 잔은 마약의 생산량을 대폭 늘렸고, 흑호 클랜은 수도 이외의 지방까지 마약을 유통하기 시작했다.

막대한 수익은 수사관의 눈길마저 피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뒷돈으로 나가는 지출은 상당해졌으나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자본이 풍부해지자 해질녘 한 잔은 다른 상단의 지분까지 야금야금 먹어치웠다.

뒷세계를 통해 다져진 자본을 사용해 소규모 상단 몇 개를 통합해 갔다.

소규모 상단을 흡수한 뒤에는, 중규모 상단을 목표로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해질녘 한 잔은 수도의 대상단으로 당당히 자리를 잡았다.

이젠 누구도 레프만을 악독한 사내라 욕할 수 없었다.

그는 사적인 자리에서도 쉽사리 거론을 삼가야 할 거물이 되었다.

감히 누구도 레프만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레프만은 문을 단박에 걷어차며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온 남자를 회의적인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상단에 있는 레프만의 사무실은 그 누구라도 미리 얘기를 하는 것은 물론이요, 비서라도 노크와 허락 없이 함부로 문을 열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아주 당당히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다리를 비꼰 채 가죽 소파에 눕듯이 편히 앉았다.

마치 자신의 집 안방이라도 되듯이 오만한 태도였다.

레프만은 작성하던 서류를 내려두고 물었다.

“넌 누구냐?”

강윤수는 무심히 대답했다.

“예비 살인마.”

레프만은 순간 고민에 빠졌다.

당장 경비원을 불러 이 미치광이를 쫓아낼지, 아니면 이 정신병자를 자신의 사무실에 들여놓도록 놔둔 비서와 안내원을 해고할지.

레프만은 탁자 위에 손가락을 두드렸다.

“이 앞에서 봤을 테니 말 좀 해보게. 내 비서나 안내원이 자네 같은 정신병자를 방치할 만큼 무능하던가?”

강윤수는 질문과 관계없이 본론을 말했다.

“지금 이 건물에 폭탄을 설치해 뒀다.”

레프만은 당황하지 않았다.

수십 년 상인 노릇을 해오며 이보다 더한 허언을 내뱉는 녀석들도 보았다.

레프만은 그저 평소의 인자한 가면을 벗겨내고 주름진 분노를 얼굴로 표현해 주었다.

이러는 것만으로 대부분은 기가 죽어 상대는 꼬리를 내렸다.

그러나 강윤수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레프만의 날카로운 눈매에 겁을 먹기는커녕 도리어 그를 똑바로 마주보기까지 했다.

‘이놈 봐라.’

레프만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젊은 놈이 보기보다 강단이 있군. 이쯤 봐줄 테니 어쭙잖은 담력 시험하지 말고 집에나 가라.”

해질녘 한 잔의 상단주는 그리 말하고 다시 서류 작업에 착수했다.

그때 강윤수가 창밖을 가리켰다.

레프만은 흘깃 창가를 바라봤다.

적갈색 머리칼을 늘어뜨린 여인이 여자아이의 손을 붙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너무도 일상적인 광경에 레프만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강윤수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탁.

콰가가가강-!

“꺄아아악-!”

여자와 아이의 발밑으로부터 새빨간 화염이 치솟았다.

두 사람의 몸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 * *

창밖은 혼돈의 도가니가 되었다.

거리를 가로지르던 마차는 뒤엉키고 사람들은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저, 저게 뭐람!”

불길에 휩싸인 여자와 아이는 바닥에 쓰러진 채 고통스럽게 뒹굴었다.

갑작스레 지면으로부터 솟아난 불길이 너무도 거셌던 탓에 아무도 함부로 접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젠장! 다들 비켜!”

군중이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한 중년이 겁 없이 불길로 뛰어들었다.

남자는 용맹스럽게도 불길을 맨몸으로 헤치고 두 사람을 구했다.

그는 겉옷을 벗고 두 모녀에게 붙은 불길을 털어내려 애를 썼다.

레프만은 갑작스러운 참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강윤수는 담담히 암막을 내렸다.

방이 어둠에 물들었고, 레프만은 이를 악물었다.

“네가 한 짓이겠지?”

강윤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단 지하에는 원격 마법이 걸린 폭약이 묻혀 있다. 내가 손가락만 튕기더라도 금세 폭발하지.”

“빌어먹을. 거짓말 마. 너 혼자서 그런 짓을 벌였단 말이냐?”

“뭐, 정확히는 나와 동료들이 한 짓이지.”

강윤수는 오른쪽 손등을 내보였다.

그곳에는 익숙한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사나운 흑색 호랑이.

노련한 상인의 얼굴이 순간 당황으로 물들었다.

“흑호 클랜?”

“고작 하루 새에 이 정도 짓을 벌일 수 있는 자들이 우리 외에 누가 있나?”

강윤수는 소파에 도로 앉았다.

방금 여자와 아이를 산 채로 태워버렸다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태연했다.

레프만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흑호 클랜과 거래를 해오며 레프만도 많은 클랜원들을 보았다.

뛰어난 눈썰미를 지닌 그로서도, 확실히 저 남자가 새긴 문신은 흑호 클랜의 증표의 것이었다.

저토록 정교한 흑색 줄무늬는 함부로 위조도 불가능했다.

거기다 그는 단말기를 찬 여행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흑호 클랜이 어째서 이런 짓을?

남자의 말대로 상단의 지하에 폭약이 설치되어 있다면, 그야말로 상황은 비참했다.

현 상단에 있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 자신까지 인질이 되었다는 의미였다.

무엇보다 상단 내에는 아직 손때도 묻지 않은 고급품이 가득이었다.

레프만이 사납게 말했다.

“왜 갑자기 이런 짓을 벌이는 거지? 흑호 클랜은 우리와 나무랄 데 없는 관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무랄 데 없는 관계?”

강윤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술 끝을 올렸다.

“지금 그 말을 유시도 대장님께서 꼭 들으셨으면 좋겠군. 그분이 이곳에 계셨다면 곧장 네놈의 목을 따버렸을 거다.”

“젠장, 그게 또 무슨 소리야?”

“레프만, 너는 유시도 대장님을 분노케 했다.”

강윤수는 오른손 손등의 문신을 만지작거렸다.

염색이나 물감이었다면 금세 지워져 버렸을 테지만, 흑색 호랑이 그림은 문질러도 멀쩡했다.

강윤수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백사자 클랜을 아나?”

“백사자 클랜? 여행자들이 만든 클랜 말이냐?”

강윤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존하는 여행자 클랜 중 규모가 가장 큰 곳이지. 우리 흑호 클랜과 대적할 정도의 여행자 세력은 그곳뿐이야. 그런데 누군가 백사자 클랜에게 유시도 대장님의 정보를 뿌렸다더군.”

“누가 말이냐?”

“지금 우리의 뒤통수를 친다면 가장 이득 볼 사람이 누구겠어?”

레프만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설마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냐?”

강윤수는 검지로 레프만의 가슴 정중앙을 가리켰다.

“우리 클랜 전원을 대변해 말하는데, 현재 네놈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야.”

레프만은 이를 악물더니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어이가 없군! 정말 어이가 없어! 그동안 쌓아 왔던 신뢰 관계를 이렇게 단박에 무너뜨릴 수 있나? 내 상단과 사람을 인질로 잡은 것도 모자라, 날 의심까지 한다고?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흑호 클랜과 다시는 거래하지 않을······!”

“닥쳐.”

강윤수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건너편에서 또다시 폭음이 울렸다.

콰가가강-!

레프만은 허겁지겁 창가로 다가갔다.

거리의 한 여자가 또다시 불길에 휩싸인 채 쓰러져 있었다.

레프만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강윤수는 삐딱한 자세로 깍지를 꼈다.

“앉아라. 상단 전체가 불바다 되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레프만은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보다 소름끼치는 악인을 만났음을 직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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