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ord of a Thousand Lives

Sixty-five thousand.

백사자 저택 내부는 외견과 마찬가지로 훌륭하고 깔끔한 설비였다.

왼편으로 사무 용도로 쓰이는 건물 한 채가 보였다.

“그럼 이 저택에서는 주로 숙식을 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공적치를 많이 얻은 간부만 여기서 자고 지낼 수 있죠.”

크리스가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맨 뒤쪽의 마차 문이 열리더니 클랜원 서넛이 기절한 유시도를 끌고 나왔다.

밝게 빛나는 사슬에 팔다리가 묶인 유시도는 본부 어딘가로 이끌려 갔다.

“부대장님께서 직접 신전에서 가져온 성물이라지?”

“그래, 저거 가져오느라 신탁 몇 개도 포기하셨다더군.”

강윤수 일행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친절한 아만다가 몸소 저택에서 묵을 방을 지정해 주었다.

“이따 11시에 파티가 있을 거예요. 한잔하고 싶으면 5층으로 올라와요.”

각자 방에 들어가 옷을 편히 갈아입고 휴식을 취했다.

11시가 되자 다들 방에서 나왔다.

“아이리스는?”

“깊이 잠들었어요. 그래서 그냥 안 깨우고 나왔어요.”

복도를 걸으며 샤네트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파티라면 화려하게 치장하거나 예복을 갖춰 입는 것이 예의 아닌가요?”

“뭔 상관이냐. 애초에 갈아입을 연미복도 없는데.”

헨릭이 귀찮다는 듯 말했다.

5층으로 올라가자 의외의 광경이 그들을 반겼다.

“……?”

화려한 조명이나 잔잔히 연주를 하는 음악가가 없었다.

클랜원 모두가 편한 차림을 하고 소파나 테이블에 걸터앉아 있었다.

소파에 드러누운 사람도 적지 않았고, 딱히 값비싼 안주도 없이 주류는 모두 맥주였다.

그들은 웃으며 자유로이 대화를 하거나 카드놀이를 즐겼다.

“……제가 아는 파티의 개념이 잘못된 건가요?”

“파티라면 귀족들이 고고한 체하며 춤을 추거나 와인 홀짝이는 모임 아니었냐?”

강윤수는 무심히 말했다.

“여긴 다들 여행자니까.”

그러고 보니 정말 모두가 손목에 단말기를 착용하고 있었다.

고풍스런 분위기의 사교장을 예상한 샤네트와 헨릭은 낯설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그들을 발견한 크리스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 강윤수 씨! 이쪽입니다!”

강윤수는 멀뚱멀뚱 서 있는 샤네트와 헨릭을 돌아봤다.

“이 파티는 격식이 없어. 편히 돌아다니면서 마셔.”

그렇게 말하고 강윤수는 크리스가 있는 자리로 합석해 버렸다.

헨릭은 눈알을 굴리더니 테이블에 놓인 흑맥주 한 병을 날름 챙기고 아무 자리나 앉았다.

홀로 남은 샤네트는 괜스레 눈치를 보다가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이쪽이 한세현 대장이 그렇게 칭찬하던 남자야?”

서양인 여성이 호기심 담긴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흘러내린 연노랑 머리칼과 파란 눈동자, 그리고 잘빠진 몸매를 가진 여성이었다.

상당히 얇은 민소매를 입은 탓에 가슴골이 드러나 보였다.

“아, 이쪽은 마가리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출신이죠.”

크리스가 소개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마가리타가 그를 은근한 눈길로 살피며 손을 내밀었다.

강윤수는 가볍게 악수했다.

“강윤수.”

테이블에는 크리스, 마가리타 말고도 아만다랑 파스초도 앉아 있었다.

강윤수는 병맥주를 집어 능숙한 손길로 마개를 땄다.

다들 병맥주를 부딪치고 시원하게 들이켰다.

“푸하아! 이게 대체 얼마만의 맥주야!”

크리스가 입술에 묻은 맥주 거품을 핥으며 입맛을 다셨다.

파스초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정확히는 스무 날 하고도 반나절만이야.”

“윽! 누가 모범생 아니랄까봐 계산 한 번 철저하다, 야.”

“그냥 네 머리가 부족한 거겠지.”

“죽고 싶냐?”

크리스와 파스초는 형제처럼 투닥 거렸다.

테라스를 타고 무더워지는 공기가 스며들었다.

“그런데 강윤수 씨는 언제 대장이랑 만났습니까?”

크리스가 묻자 아만다도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맞아요. 보통 대장이 친절한 성미긴 해도 자기 이득이 없으면 오래 관계를 유지하지 않죠. 오늘처럼 대장이 살갑게 구는 건 처음 봤어요.”

“힐레단에서 봤어.”

“흐음? 꽤나 외지인 곳에서 만나셨네요.”

“그냥 반말 써. 그게 편해.”

“앗, 그래도 돼?”

아만다가 손뼉을 딱 치며 웃었다.

그러자 파스초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울리지 않게 웬 애교야?”

“애교는 무슨!”

아만다가 얼굴을 붉히며 항의했다.

안주를 곁들여 맥주를 들이켰더니 적당히 취기가 올랐다.

크리스가 대뜸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늦둥이 막내랑 영상통화 한 번 해봤으면 소원이 없겠네, 자식. 학교는 잘 다니고 있나?”

“영상통화? 그래도 팔자 좋네. 나는 가족들이랑 무조건 노트북으로 영상채팅이었는데.”

아만다가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의외로 마가리타가 픽 웃었다.

“난 노트북만 켜면 무조건 월드 오브 라크래프트였어.”

“아! 월드 오브 라크래프트! 페페로니 피자 한 조각 씹으면서 레이드 한 번 돌면 소원이 없겠다.”

크리스가 안타까워하자 아만다가 물었다.

“왜? 이젠 현실이 게임처럼 변했는데. 여기도 레이드는 있잖아.”

“젠장! 그거랑 이거랑 비교가 되겠어? 여긴 지옥이야!”

크리스가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켰다.

마가리타가 체리 하나를 삼키며 강윤수를 지그시 바라봤다.

“강윤수는 현실에서 어떤 사람이었어?”

조용히 술만 들이키던 강윤수가 입을 열었다.

“사회인이었겠지.”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기억이 안 나.”

“뭐?”

마가리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윤수는 나지막이 말했다.

“원래 세상은 기억이 잘 안 나.”

부모가 있었고, 외동이었다.

대학은 가지 않았다.

원래 있던 세계의 기억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친구가 있었는지, 꿈이 무엇이었는지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강윤수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정말 소중한 기억이었다면 아직까지 머릿속에 있었겠지.’

“기억이 안 난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눈살을 찌푸린 마가리타를 크리스가 말렸다.

“괜히 캐묻지 마. 강윤수가 현실에서 뭘 했든지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잖아. 실례라고.”

그때 흥겨운 하모니카 소리가 들려왔다.

소파에 편히 누운 한세현이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다.

“‘Happy Day’잖아.”

“이거 오랜만에 듣는데!”

Happy Day는 인기 가수 퀴렐의 히트곡이었다.

빌보드 차트 1위에도 올랐던 곡으로, 당시 유투브 20억 조회 수를 기록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모인 이곳에서도 누구나 흥겹게 즐길 만한 노래였다.

그러나 이 파티의 유일한 대륙인인 두 사람만은 아무것도 즐기지 못했다.

헨릭이 다가와 샤네트의 옆자리에 앉았다.

“쟤네들 지금 뭔 이야기를 하는 거냐?”

샤네트는 마가리타, 아만다와 동석한 강윤수를 보며 우울히 말했다.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그러게. 내가 왜 그걸 너한테 묻냐?”

“아저씨, 취하셨죠?”

“내가 취하긴 뭘 취해? 그런데 왜 나한테 오빠라고 안 불러!”

샤네트는 한숨을 쉬었다.

노트북이니, 월드 오브 라크래프트니, 그녀로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샤네트는 소외감을 진하게 느꼈다.

여행자들끼리 앉은 강윤수를 보자니 그와의 거리가 훨씬 멀어진 것만 같았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어린애도 아니고.’

한편 마가리타는 건너편에 앉은 샤네트를 흘깃 바라봤다.

“그런데 강윤수는 왜 대륙인들이랑 같이 다니는 거야?”

“맞아. 나도 실은 그게 궁금했어.”

아만다도 동조했다.

“보통은 여행자들끼리 다니잖아. 왜 굳이 대륙인들을 달고 다니는 거야?”

“따지고 보면 NPC 같은 것들이잖아. 차라리 우리 클랜에 들어오지 그래? 공감대 형성할 것도 많고,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다고.”

NPC.

다른 세계에서 살아와 들러리에 불과한 엑스트라들.

이들을 포함해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대륙인을 생각하는 관점이었다.

강윤수는 처음으로 마시던 술병을 내려놓았다.

그가 무어라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자, 다들 주목!”

한세현이 벌떡 일어나더니 이목을 끌었다.

“오늘 우리의 기습은 성공적이었어. 흑호 클랜의 핵심 전력은 전부 우리 손에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다들 느꼈을 거야. 왠지 일이 너무 잘 풀렸다고. 맞는 말이야. 원래라면 유시도가 이렇게 쉽게 당할 리 없지.”

클랜원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한세현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오늘 흑호 클랜 기습을 수월히 이뤄낸 것은 나 혼자 이뤄낸 공로가 아니야. 그 공로는 강윤수. 전적으로 이 남자가 우리에게 정보를 준 덕분이었지.”

한세현이 가리키자 모두의 시선이 강윤수에게로 향했다.

“흑호 클랜 본부의 위치. 잠입하는 루트. 시기적절한 기습 시기. 강윤수가 없었다면, 오늘 작전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겠지.”

의례적인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한세현은 싱긋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오늘의 공로를 미뤄 나는 강윤수를 우리의 일원이자 백사자 클랜원 간부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앞으로 우리랑 활동하고, 같이 생활하게 되겠지.”

샤네트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녀는 불안한 눈길로 강윤수를 살폈다.

행여나 그가 제안을 수락할까 염려되어 참을 수 없었다.

“초반부터 간부로 활동한단 말입니까?”

한 클랜원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한세현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기에 그 정도 가치는 하는 녀석이다. 실제로 그만한 공로를 남기기도 했고. 혹시 불만 가진 자 있나?”

불만스런 표정을 짓는 클랜원이 몇몇 있었으나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클랜 대장의 결정인데 무어라 반박을 하겠는가.

그러나 한 사람.

무심히 손을 든 남자가 있었다.

“안 해.”

강윤수는 덤덤히 말했다.

저택에 침묵이 흘렀다.

크리스가 놀라 허둥지둥 속삭였다.

“이봐, 강윤수. 네가 모르는 것 같은데 이건 정말 파격적인 제안이야. 원래는 간부까지 올라오려면 공로를 세워야 하는 사냥이 최소 쉰이 넘어. 백사자 클랜 간부면 이득 보는 것도 많아. 이건 정말 대단한 특혜라고.”

“안 한다고.”

한세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클랜에 넣을 순 없지. 하지만 이유를 묻고 싶다. 너는 왜 그렇게 나와 함께하길 싫어하는 거냐? 여행자들끼리 협력하면, 너의 지식은 우리 클랜에 분명 큰 도움이 될 거다.”

강윤수는 샤네트와 헨릭을 힐끗 보았다.

그는 낮고 진중히 대답했다.

“나에게는 일행이 있으니까.”

샤네트는 불현듯 손을 꽉 쥐었다.

헨릭은 입가에 술잔을 대고 있었으나 눈빛만은 빛났다.

“왜 같이 다니느냐고?”

강윤수는 마지막 잔에 술을 채웠다.

“저들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

* * *

새벽녘이 되었다.

강윤수는 자신을 바라보는 클랜원들의 시선이 싸늘해졌단 걸 알았다.

그러나 그는 별 감흥을 느끼지 않았다.

클랜원들은 널브러져 자거나 각자의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헨릭은 고주망태로 취해 있었고, 샤네트도 과음했는지 몸을 제대로 가누질 못했다.

강윤수는 얼굴이 새빨개진 샤네트에게 다가갔다.

취중 그녀가 자신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강윤수 님…… 강윤수 님…… 정말 다행이에요. 우리랑 항상 같이 있어줘요. 떠나지 말아줘요. 나랑 같이 있어줘요. 계속 이렇게 함께해요.”

강윤수는 두 사람을 동시에 부축해 방에 데려다 주었다.

샤네트는 침대에 부드럽게 눕히고, 헨릭은 방바닥에 집어던졌다.

그는 복도로 나가 발소리를 낮추었다.

지하로 가는 계단을 계속 걸어갔다.

“무슨 볼일이십니까?”

감시를 서던 클랜원이 냉철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기절해.”

“예?”

“그게 지금 네 역할이야.”

강윤수는 검을 꺼내 칼등으로 휘둘렀고, 쓰러진 감시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되었다.

지하 끝에 다다르자 수어 개의 자물쇠로 얽힌 철문이 보였다.

강윤수는 주머니에서 핀셋을 꺼내 자물쇠에 넣고 돌렸다.

달그작…… 달그작. 철컥……!

능숙한 손놀림 몇 번에 자물쇠가 가볍게 열렸다.

강윤수는 순식간에 마지막 잠금장치까지 풀어버리고 문을 열었다.

끼익…….

두꺼운 창살 너머로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여전히 빛나는 사슬에 몸이 묶여 있었다.

벌거벗은 등 위로 커다란 흑호랑이 문신이 꿈틀거렸다.

“유시도.”

“……자는데 왜 불러.”

유시도가 말했다.

정말 막 깨어났는지 목소리가 쉬어있었다.

“지금 너를 풀어주겠다.”

유시도는 짧게 대답했다.

“미친 새끼.”

“그 대신, 너는 나를 따라 황궁으로 가야 한다.”

“이 후덥지근한 밤에 거긴 뭣 하러?”

정확히 두 가지 목적이었다.

아이리스를 창조한 연금술사를 찾아가 흰 그림자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

그리고…….

“오늘밤, 황제를 암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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