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ord of a Thousand Lives

80,000 Revolutions

엘프와 트롤들은 무너진 화단을 메우고 있었다.

파이어 트롤들이 식물이 자랄 만한 토양을 퍼오면, 엘프들이 모종을 심었다.

“엘프와 트롤이 사이가 좋으니 뭔가 이상한데. 왠지 의무적으로 저 둘 사이를 갈라놓아야 할 것 같지 않냐?”

헨릭은 넓적한 나무 걸상에 걸터앉아 말했다.

샤네트가 그의 곁에 앉았다.

“전혀요. 엘프들도 그런 말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걸요?”

“어째 엘프랑 살아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한다?”

“화재로 가족을 여의었을 때 저를 거두어주신 영주님이 엘프셨어요. 이분들이랑은 조금 분위기가 달랐지만요.”

“하기야 나도 술집에서 알게 된 엘프들이 몇 있는데 그놈들은 자유분방해서 전혀 엘프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말이야.”

“엘프 같은 느낌이요?”

“왜 있지 않냐. 자연을 가꾸고, 신비롭고, 때 묻지 않은 분위기.”

“음. 예전에 헤르미야 영주님이 말씀해 주셨어요. 엘프들은 사막에 남은 자들과 대륙을 방랑하는 자들로 나뉜다고 해요. 멸망사막에 남은 엘프들은 우리가 평소 아는 느낌과 비슷하고 대륙을 떠도는 엘프들은 격식이 자유롭다고 하더라구요.”

그때 아이리스가 다가왔다.

그녀는 풀이 죽은 채로 한숨을 쉬었다.

“왜 그러세요, 언니?”

“이곳엔 호밀빵이 없다는구나.”

“그냥 주는 대로 처먹어라, 좀.”

샤네트의 팔꿈치가 헨릭의 옆구리를 휘갈겼다.

헨릭은 얼굴을 구기며 곡소리를 냈다.

“너 요즘 완력이 점점 세진다. 알고 있냐?”

샤네트는 못 들은 척하고 커다란 천막을 바라보았다.

“강윤수 님은 지금 뭘 하고 계실까요?”

“뭘 새삼스럽게 궁금해하냐. 그놈이라면 셋 중 하나지. 기행, 사기, 음주. 어째 말하고 보니 죄다 양아치 짓이네.”

“나는 강윤수가 나름대로 잘 설득하고 있을 거라 믿는단다.”

***

“뭘 마시나? 나도 좀 달라!”

“물이야.”

강윤수는 음주를 하며 사기를 치는 기행을 벌였다.

천막 안에는 엘프 촌장, 야나크, 그리고 강윤수가 마주 앉아 있었다.

“전쟁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막을 숲으로 재건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강윤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멸망할 겁니다. 당신들이 가꾸는 숲마저도.”

“적이 누구기에 그렇습니까?”

“고대왕 카르테온. 고대의 제왕이 세월을 뛰어넘어 되살아났습니다.”

분위기가 진지하게 변했다.

멸망사막에서 살아온 자라면 고대왕 카르테온의 전설을 모를 리 없다.

고대왕국 샤르샤논의 제왕이자 지금껏 누구도 범접하지 못했던 지도자.

그런 자가 되살아났다고?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지요?”

강윤수는 신탁의 검을 테이블 위에 꽂았다.

“여신께서 신탁을 내려주셨습니다.”

“거짓말이군요. 실피아 여신께서 전쟁을 조장하실 리 없습니다.”

엘프 촌장은 불신했다.

그러자 야나크가 덧붙였다.

“헤론! 이자는 여신의 신랑이다!”

“여신의 신랑이요?”

헤론이라 불린 엘프 촌장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신관에게 선택 받은 여신의 신랑은 간혹 신탁을 받는다.

신탁은 대륙의 일어나는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미래의 일을 예언했다.

“당신이 여신의 신랑이라면 확실히 신빙성은 생기는군요.”

일단 들어보겠다는 듯 헤론이 한숨을 쉬었다.

“고대왕 카르테온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대륙을 멸망시켜 카르테온 본인이 회귀하는 것입니다.”

“회귀? 카르테온이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대륙을 멸망시키려 한다고요?”

야나크와 헤론은 둘 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강윤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왕 카르테온은 시간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놀랐다.

야나크가 기겁하며 물었다.

“시간을 다룬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카르테온은 생명을 죽일 때마다 시간의 힘을 얻습니다. 강한 생명을 죽일수록 그는 더 많은 시간의 힘을 얻습니다. 그의 목적은 대륙의 모든 생명을 멸하고 본인이 과거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카르테온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단 말입니까?”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하지만, 그는 시간을 멈출 수도 있습니다.”

야나크와 헤론은 서로를 마주보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을 다루는 제왕이라니.

그런 강자가 대륙을 멸망시키려 한다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으리라.

“그럼 카르테온을 막기 위해 전쟁을 벌여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강윤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론은 턱을 짚더니 깊이 고민했다.

“시간을 다룰 수 있는 고대의 제왕이 깨어났다면, 우리가 그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투항하거나 그를 설득하는 편이 더 좋은 수일지도 모릅니다.”

“헤론! 그게 무슨 소리인가! 우린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놈과 싸워야 한다!”

“하지만 카르테온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적군을 섬멸했을지라도, 그가 시간을 하루 전으로 되돌린다면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고 역습하는 일도 가능할 것 아닙니까?”

야나크는 말문이 턱 막혔다.

시간을 다룰 수 있는 능력 앞에선 모든 전술이 무의미했다.

그때 강윤수가 말했다.

“아니요, 카르테온은 아직 그만큼의 시간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지금은 기껏해야 30~40초를 되돌릴 수 있습니다. 또한, 한 번 일정 시간을 되돌리면 그 동안은 다시 시간을 되감지 못합니다.”

“아직이라니요?”

“오랜 세월을 딛고 부활한 탓에 그의 육체는 쇠했습니다. 카르테온의 기력이 회복되면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의 양도 늘어납니다. 그러니 그가 모든 힘을 되찾기 전에 서둘러 기습해야 합니다.”

헤론은 그래도 의문을 거두지 않았다.

“만일 그가 시간을 멈춘다면? 그러면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습니다.”

“카르테온은 시간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것으로 인한 부작용이 얼마나 큰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요.”

“여신께서 굉장히 많은 신탁을 내려주셨군요.”

헤론이 의구심 담은 눈길을 보냈다.

신탁이라고 하기엔 그가 아는 것이 너무 많았다.

강윤수는 그 시선을 무시하며 말했다.

“어찌 됐든 한시가 급한 사항입니다. 서둘러 멸망사막의 모든 엘프와 트롤을 응집해 세력을 편성해야 합니다.”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일단 그 많은 인원을 모았다고 한들, 누가 지휘자를 맡겠습니까?”

“제가 맡겠습니다.”

헤론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단아한 머릿결의 엘프 여성이 천막에 들어왔다.

“촌장님, 북서쪽 은방울꽃 부락에서 전서구를 보냈어요!”

헤론은 쪽지를 받아들고 펴보았다.

섬뜩하게도 쪽지에는 군데군데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글귀를 내려읽던 헤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서쪽의 엘프 부락들이 몰살당했다고 합니다. 이건 피신 중인 촌장이 보낸 쪽지군요.”

“몰살당했다고? 누구에게 말인가!”

야나크가 격노하며 소리쳤다.

“수천 마리의 미라가 부락을 덮쳤다고 합니다. 아이, 여성할 것 없이 모조리 죽이고 주민 하나 살려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개중 지도자로 보이는 자에겐 ‘제왕’이란 호칭을 사용했다는군요.”

“카르테온!”

야나크가 어금니가 부러질 듯 이를 갈았다.

대기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강윤수는 진중하게 말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우리도 서둘러 세력을 조직해 고대의 제왕과 맞서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당신의 말이 못 미더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일이 벌어지니 믿을 수밖에 없군요. 불가피한 싸움이라면, 희생자가 더 나오기 전에 끝내야 합니다.”

헤론이 씁쓸히 말했다.

“일단 저는 모든 엘프 부락에 지금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전서구를 보내겠습니다. 가장 빠른 독수리를 보낼 테니 최소 사흘 안에는 집결할 수 있을 겁니다.”

“파이어 트롤들도 금방 모일 거다! 우리의 친우인 엘프가 죽임을 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트롤은 그 어디에도 없다!”

강윤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일단 전투 세력이 집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두 사람은 그것에 최우선으로 초점을 맞춰주십시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천막을 나섰다.

샤네트가 다가와 가장 먼저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전쟁을 준비해.”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헨릭도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항상 그래 왔듯, 말 좀 해봐라. 이길 자신 있냐?”

“글쎄.”

“뭐?”

헨릭이 얼굴을 구겼다.

“인마, 너 설마 승산 없는 전쟁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강윤수는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번 상대는 미묘해.”

“뭐가 말이냐?”

“내가 죽여도 기억에 없을 테니까.”

“그게 뭔 소리야?”

“적이 시간을 조종해.”

헨릭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모래 바닥에 호밀빵을 그리던 아이리스가 갑작스레 고개를 들었다.

“강윤수.”

“왜.”

“우린 살아남을 수 있느냐?”

“너흰 아무도 안 죽어.”

강윤수는 확고히 말했다.

아이리스는 다시 한 번 물었다.

“강윤수는?”

강윤수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살 거야.”

“그거면 됐단다.”

아이리스는 싱긋 웃었다.

강윤수는 어느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디 가세요?”

“새로운 무기 찾으러.”

“그쪽은 마을 밖인데요?”

“알아.”

강윤수는 홀로 부락을 벗어났다.

그는 오른팔을 내뻗었다.

“백랑괴수 화이트 소환.”

“카르르릉-!”

은빛 털을 지닌 웨어울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윤수는 화이트 위에 탑승했다.

“달려.”

“카루고르-!”

화이트는 모래사막 위를 매섭게 질주했다.

사막을 복잡하게 달리고 나자 검은색 동굴이 보였다.

강윤수가 동굴 어귀로 걸어가자 오른편의 전사 석상이 움직였다.

“멈춰라! 이곳은 고귀의 궁사 나힐렌의 휴식처이다.”

“알아.”

“이 주변에는 무수한 모래 구덩이 함정과 끝이 없는 폭풍이 분다. 이곳까지 무사히 당도했다는 것은 네가 멸망사막에 흩어진 9개의 수수께끼를 풀고 올바른 길을 찾아왔다는 거로군?”

“어.”

“굉장하군! 나는 지혜로운 사람을 좋아한다. 빌어먹게도 날 무식한 전사로 조각한 제작자 놈을 찾으면 죽여 버리고 말거다.”

전사 석상은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

석상은 강윤수를 살피더니 칼을 드리웠다.

“이곳에 출입하기 위해선 세 종류 이상의 최상급 궁술 비기를 익히고 있어야한다. 그러나 넌 궁술에 대한 조예가 없군. 너에겐 출입 자격이 없다.”

“널 지혜로운 마법사로 만들어주겠다.”

“뭣이라? 그게 정말이냐! 나를 조각해 주겠다고?”

전사 석상이 혹한 듯 딱딱한 몸을 흔들었다.

강윤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돌려.”

“좋다! 나는 예전부터 이 등딱지 같은 갑옷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

전사 석상은 순순히 등을 내보였다.

강윤수는 칼을 들고 힘껏 내질렀다.

“심연의 검술.”

콰직-!

“역시 이럴 줄 알았다! 배신자 놈! 그딴 허약한 몸놀림이 내 앞에서 통할 줄 알았더냐!”

전사 석상이 강윤수가 내지른 검을 꽉 붙잡았다.

그러나 강윤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앞을 봐.”

검의 끄트머리가 벽면을 조금 부쉈다.

갈라진 벽면 너머로 바위로 제작된 지팡이와 큼지막한 로브가 보였다.

“이게 무엇이냐?”

“널 제작한 나힐렌은 네 성향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입구 근처에 돌로 조각된 지팡이와 로브를 숨겨 두었다. 행여나 궁술 비기를 익히지 않은 친우가 이곳에 들릴 것을 배려해서.”

“굉장하군!”

전사 석상의 모든 관심이 지팡이와 로브에 쏠렸다.

그사이 강윤수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잡다한 화살과 공예품 따위가 널려 있었다.

‘나에게 필요한 무기는 저것이다.’

어두운 동굴 끝자락에 불타는 십자궁이 보였다.

강윤수는 그것을 집었다.

불을 감싼 볼트를 장전하는 독특한 십자궁이었다.

‘카르테온은 이 십자궁을 가장 싫어했지.’

시간을 다루는 제왕을 죽이기에 가장 알맞은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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