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주변 정찰부터 해보죠.”

얀이 떨어진 작살을 줍고서 말했다.

섬의 사방은 기슭과 거리가 멀었다.

폭우가 내리고, 물살이 거세 도저히 수영으론 육지에 도달할 수 없을 듯했다.

“나 참, 강가의 섬에서 조난이라니. 여기가 무슨 바다도 아니고.”

헨릭이 투덜거렸다.

그러자 얀이 덧붙였다.

“의외로 강에서 표류되거나 조난되는 사람은 많습니다. 케멘 강처럼 거대한 강줄기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죠.”

“댁 아버지처럼?”

퍽-!

얀은 눈을 크게 떴다.

헨릭은 얼굴을 찌푸리고 샤네트에게 맞은 배를 쓰다듬었다.

“오냐. 방금 건 맞을 만했네.”

“입조심 좀 하세요.”

그때 뤽이 고개를 올렸다.

“나도 헨릭을 때리고 싶어.”

“뭐?”

헨릭이 눈썹을 찡그리며 뤽을 내려 봤다.

소녀인형의 눈동자가 불길하게 빛났다.

뤽은 헨릭의 복부로 조그만 손을 뻗었다.

“너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만질 테야.”

“……미치겠구만.”

헨릭은 재빨리 뤽을 인형소환상자에 넣었다.

뤽의 정신이 무너지고 있었다.

헨릭이 턱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이거, 잘못하면 인형한테 내가 살해당하는 것 아니냐?”

“뤽의 정신을 안정시켜.”

강윤수가 충고하듯 말했다.

헨릭은 입가를 매만졌다.

“내 말투는 정신안정보단 정신교란에 의의를 두는 데 말이다. 뤽의 정신은 어떻게 안정시키냐?”

“자장가.”

“그거 말고 딴 방법은?”

“사랑.”

“왜 이렇게 극단적이냐.”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어도 돼.”

뤽은 강한 인형이지만, 맨 정신을 유지시키기 어렵다.

정말 자식을 키우듯, 보듬고 정성껏 다루어도 뤽은 기분에 따라 미칠 수 있다.

어찌 보면 헨릭과는 그리 맞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었다.

“실은 예전부터 묻고 싶었어요. 아저씨는 뤽을 잘 보살필 자신 있으세요?”

“그놈이 무슨 내 딸이냐? 뭘 보살펴.”

“그래도 잘못하면 미치잖아요. 딸 키우듯 봐주세요.”

“진정한 부모는 어릴 적부터 자식 을 강하게 키우는 법 아니겠냐.”

“말도 안 돼. 대체 누가 그래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

“…….”

“훌륭한 부모님을 둔 덕분에 대륙 유랑은 어려서부터 실컷 해봤지.”

얀은 그런 일행을 신기해하며 바라봤다.

“독특하게 대화하시네요. 적어도 여행 다니면서 지루하진 않으시겠습니다.”

“너무 지루하지 않아서 탈이지.”

섬에는 조그만 숲이 있었다.

흙바닥에는 이끼가 덮여 있었고, 곳곳에서 고사리가 자랐다.

얀은 솔잎 무더기를 뒤지더니, 파랗고 동그란 열매를 찾아냈다.

“이건 공기방울열매군요. 꽤 보기 힘든 건데.”

“공기방울열매요?”

얀은 고개를 끄덕이고, 파란 열매를 지그시 눌렀다.

쉬이익-!

과육이 터지며 흘러나온 것은 과즙이 아니라 세찬 바람이었다.

크기가 제법 작은데도, 열매에선 바람이 오래도록 흘러나왔다.

“열매에서 바람이 나오네요?”

“조그만 열매인데도 신기하게 과육에 많은 공기를 축적하죠. 그래서 잠수부들에게는 황금열매나 다름없어요. 이걸 물고 잠수하면 꽤 오래 숨을 쉴 수 있거든요.”

얀은 높은 곳을 가리켰다.

까마득한 나무 위로 공기방울열매가 수북이 달려 있었다.

올려다보느라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얀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희귀한 열매지만, 너무 높은 곳에 달렸군요.”

강윤수는 옆의 흰자작나무에 손을 짚었다.

그는 기둥에 칼을 박으며 나무를 순식간에 올라갔다.

그러더니 높은 나무로 뛰어 안착한 뒤 공기방울열매를 따 배낭에 담았다.

“저분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얀이 황당해 물었다.

그러나 헨릭이 대답했다.

“시시각각 바뀌지. 음주중독자, 사기꾼, 납치범, 도둑, 검사, 세공사, 마법사, 대장장이, 낚시꾼, 뱃사공, 격투가 등등. 음……. 지금은 나무타기명인이려나.”

“……다재다능하신 분이시군요.”

그들은 섬을 계속 정찰했다.

낯선 숲은 조그만 동물들도 많이 살고 있었다.

화사한 얼레지 꽃들 사이로 너구리들이 알뿌리를 캐먹고 있었다.

“이 섬, 생각보다 평화로운데? 처음 보는 몬스터라도 튀어나와서 대판 싸워야 할 줄 알았구만. 저 너구리들 뱃살 나온 것 좀 봐라.”

반면 아이리스는 통통한 너구리들을 보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녹두가 걱정되는구나.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헨릭이 질린다는 듯 핀잔을 줬다.

“인마, 그 자라는 너 없이도 잘 산다. 어차피 데리고 가지도 못할 텐데, 적당히 잊어라.”

“흥. 헨릭은 뤽이나 간수 잘하렴.”

“어쭈. 말솜씨가 제법 늘었다?”

“다 헨릭한테서 배웠단다.”

“거, 뿌듯하네. 나중에 술이나 한 잔 하자.”

“과음은 싫단다.”

“애주의 묘미를 모르는구만.”

비는 그칠 새를 몰랐다.

사방이 빗소리로 에워쌌다.

아이리스가 멈춰선 것은 그때였다.

“녹두?”

“또 자라 타령이냐?”

헨릭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어디선가 녹두의 울음소리가 들린단다.”

아이리스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일행들은 잠시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잠시간 걷자,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쿠롹! 쿠롸아악!”

숲이 걷히고 조그만 샘이 나왔다.

살집이 비대한 녹색 자라가 땅으로 엉금엉금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아이리스가 가장 먼저 달려갔다.

“세상에. 녹두야!”

“크롸아악.”

“나를 따라 여기까지 와줬구나!”

그녀는 기뻐하며 녹두를 끌어안았다.

녹두는 짧은 다리를 휘적거리며 높게 울었다.

헨릭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놈은 또 어떻게 따라온 거야?”

샤네트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희가 나룻배를 타고 올 때까지만 해도 곁에 없었잖아요. 설령 몰래 따라왔다고 해도 피라냐 떼는 어떻게 무사히 지나왔을까요?”

그때 강윤수가 말했다.

“수중동굴.”

“네?”

그는 샘물을 가리켰다.

“저 샘과 이어져 있는 수중동굴이 있어.”

“수중동굴을 타고 왔다고? 허, 이 자라, 보기보다 영리한데?”

“나를 닮아서 그렇단다.”

아이리스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녹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헨릭은 헛웃음을 지었다.

“퍽이나.”

샘물은 맑고 투명했다.

겉보기에 좁은 틈새와 달리 깊어질수록 넓어지는 모양새였다.

녹두는 샘물을 바라보며 울었다.

“크락! 콰라아악!”

“저놈, 갑자기 왜 저래?”

“녹두야, 왜 그러니?”

아이리스가 걱정스러운 시선을 흘렸다.

녹두는 아랑곳 않고 샘물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곤 짧은 다리를 샘물에 담고 휘적거렸다.

“콰락! 크롸아아악!”

얀은 녹두를 바라봤다.

“꼭 자길 따라오라는 것 같군요.”

“맞아.”

강윤수는 배낭을 풀어 파란 열매를 꺼냈다.

샤네트가 물었다.

“공기방울열매는 왜 꺼내세요?”

“수중동굴로 가야 해.”

순간 모두가 강윤수를 바라봤다.

샤네트가 입을 벌렸다.

“거길 어떻게 가요?”

“수영해서.”

헨릭은 한숨을 쉬었다.

“이젠 일일이 놀라기도 지겹다. 우리가 또 거긴 왜 가야 하는데?”

“그곳에 섬의 주인이 살고 있어.”

“섬의 주인이 누군데?”

“넬을 잡아간 거대 어류.”

얀은 깜짝 놀랐다.

“아버지를 잡아간 생물이 이 섬의 주인이란 말입니까?”

“어.”

강윤수는 샘물을 내려 봤다.

투명한 샘물은 깊었다.

바닥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섬의 주인은 수중동굴에 살아. 그러니 그곳으로 가야만 해.”

“하지만 오늘 같은 폭우 속에서 수영은 위험합니다. 물살이 거세 잘못하면 휘말릴 수 있어요. 수심이 깊은 곳은 유독 더 그렇고요.”

“그 수중동굴에 넬이 있어.”

얀은 작살을 세게 쥐었다.

“당장 갑시다.”

“……저놈은 참 말투랑 다르게 설득의 귀재야.”

헨릭이 씨부렁거렸다.

샤네트는 샘물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하지만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닐까요? 점점 날이 어두워지고 있어요. 밤중에 강에 들어가는 건 위험하다고 들었거든요.”

“내가 앞장설게.”

“누군가 뒤처지거나 물살에 휘말리면요?”

강윤수는 턱짓으로 녹두를 가리켰다.

녹두는 염려 말라는 것처럼 크게 울었다.

“크롸아악.”

“뒤쳐진 사람이 있다면, 녹두가 구해줄 거란다.”

아이리스는 녹두의 살갗을 매만졌다.

녹두는 기분이 좋은지 높은 소리로 울었다.

헨릭은 자라를 의구심 담긴 눈빛으로 봤다.

“아무리 그래도 야생동물한테 목숨을 담보하긴 좀 그렇지 않냐?”

“저 자라는 믿어도 돼. 수중동굴까지 같이 가게 될 거야.”

강윤수가 덧붙였다.

그제야 헨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냐? 뭐, 네가 그렇다면야. 여기서 수영 자신 없는 사람?”

아이리스가 손을 들었다.

헨릭은 마나의 실을 손아귀에서 뻗어 그녀의 허리에 감았다.

그리곤 녹두의 등껍질과 연결해 실을 질끈 묶었다.

“이게 뭐 하는 거니?”

“혹시라도 네가 수영을 못해서 대열을 못 따라오면, 저 자라가 대신 수영해 줄 거다. 내가 마나 공급을 끊어버리면, 곧바로 실이 사라져. 그러니 실이 엉키거나 자라가 이상한 데로 가면 내 쪽의 실을 당겨라.”

“고맙구나.”

아이리스는 마나의 실을 잡았다.

그녀는 긴장하기보단 설레고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헨릭은 영 못미덥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영 불안하네. 살아서 뭍으로 올라올 수 있겠지?”

“어.”

강윤수가 확정짓듯 말했다.

물에 들어가기에 앞서 샤네트는 적갈색 머리칼을 가지런히 묶었다.

그러곤 머리끈을 꺼내 아이리스의 머리칼도 포니테일로 묶어줬다.

“왜 머리를 이렇게 묶느냐?”

“이래야 물에 들어갔을 때 머리칼이 시야를 안 가리거든요.”

일행은 각자 공기방울열매를 입에 물었다.

“정말 숨이 쉬어지네요?”

샤네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파란 열매를 세게 물수록 더 많은 공기가 흘러나왔다.

헨릭도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숨 막혀 죽을 일은 없겠구만.”

얀이 덧붙여 설명했다.

“코보단 입으로 숨을 쉬고, 절대 열매를 입에서 놓지 않게 조심하세요. 호흡에 집중하지 않다가 열매를 놓치면 큰일 납니다.”

날이 점차 어두워져갔다.

그들은 차례대로 샘에 뛰어들었다.

풍덩-

물속은 깊고 어두웠다.

앞장선 강윤수가 단말기의 플래시를 켰다.

지이잉-

단말기로부터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눈앞이 희미하게 밝혀졌다.

그들은 흙과 돌이 뒤섞인 구덩이를 뒤척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물속은 시끄러웠다.

돌덩이 발에 차이는 소리.

물살이 주변을 휘젓는 소음.

왠지 모를 심장의 고동.

어두운 물속에선 소리가 증폭되었다.

그것이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늘려줬다.

사방은 어두웠고, 뭔지 모를 소음은 귓가를 사납게 간질였다.

심장 뛰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

앞뒤 모르고 나아가다간, 그대로 물속의 낙오자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길은 있었다.

강윤수가 앞장서 나아가고 있었고, 모두가 그 뒤를 따랐다.

단지 진로를 정해 나갈 사람이 있단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밤중의 물속을 헤쳐 나갈 의지가 생겨났다.

한참 동안 물속을 헤매자 좁았던 굴속이 여럿이 양쪽으로 가도 될 만큼 너비가 넓어졌다.

종종 갈림길이 나왔고, 그때마다 강윤수는 고민 없이 나아갔다.

곧이어 문구가 떠올랐다.

「심연의 수중동굴에 진입합니다.

수십 개의 작고 큰 수로가 연결되어 있어 길을 잃기 쉽습니다.

수중탐험가에게 탐색을 요청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주의! 섬의 주인이 서식하는 위험지역입니다.

난폭한 섬의 주인은 눈앞의 생물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웁니다.

섬의 주인과 조우하면, 필연적으로 전투를 벌여야만 할 것입니다.」

일행은 수중동굴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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