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는 다급히 차를 내왔다.

그러나 강윤수는 고개를 저었다.

“술.”

“그런 건 없네.”

사서장이 밤을 새워 갖춘 채비를 도로 풀며 대꾸했다.

그러자 강윤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찻장을 열었다.

찻잎을 보관한 상자를 열자 조그만 술병이 딸려 나왔다.

사서장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몰래 꿍쳐둔 술인데 어떻게 알았나?”

강윤수는 대꾸 없이 찻잔에 술을 따랐다.

그 무례한 태도에 사서들은 화가 났지만 사서장은 손을 휘저었다.

사서들이 물러나고 사서장은 소파에 마주 앉아 그를 봤다.

“그 책, 우리에게 주게.”

“싫습니다.”

“원래 장서관 소유의 서적일세.”

“지금은 제 소유입니다.”

사서장은 책 보는 눈과 사람 보는 눈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야 책 보는 눈이 월등히 발달하고, 사람 보는 눈은 약하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묘했다.

그토록 사람 보는 눈이 쇠퇴한 그조차 눈앞의 청년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이놈은 골칫덩이다.

사서장은 눈주름을 깊게 세우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책의 귀퉁이에도 적혀 있질 않나? 고대영웅둘의 서사시 제17권은 학식의 장서관 소유일세. 괜히 공공물에 개인 소유권을 주장했다간 엄벌에 처할 수 있네. 최소 10년은 옥살이를 해야겠지.”

강윤수는 곧바로 대답했다.

“제국법상 분실된 지 20년 이상 지난 공공물은 그 효력을 잃습니다. 비록 길에서 주운 사람일지언정,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만일 억지로 제게서 책을 가져간다면 사서장님께 절도죄가 부과될 겁니다.”

사서장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보통 이렇게 으름장을 놓으면 기가 죽거나 책을 넘기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데 이 청년 여행자는 기가 죽기는커녕 물 흐르듯 법적 절차를 또박또박 지적하지 않는가?

일단 사서장은 한 수 접기로 했다.

“그럼 얼마에 팔 건가?”

“돈은 필요 없습니다.”

이 말 또한 의외였다.

돈이 목적이 아니라면 어째서 계속 책을 넘기지 않고 있단 말인가?

곧 사서장의 의문은 풀렸다.

강윤수가 거래 조건을 제시했다.

“제게 비밀서고의 입장 권한을 주십시오. 그럼 책을 드리겠습니다.”

“비밀서고?”

사서장은 흠칫했다.

그러나 곧바로 침착한 태도로 돌아와 차갑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다 알고 왔습니다.”

이번에는 강윤수가 으름장을 놓았다.

사서장은 발뺌했다.

“비밀서고라니?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군.”

“대륙에 현존하는 고서와 가장 위험한 마법스크롤을 보존한 서고.”

사서장은 입을 다물었다.

이 청년이 그걸 어떻게?

강윤수는 술을 삼킨 뒤 말했다.

“평화로운 학식의 장서관이 실은 내일이라도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무기보존고로 밝혀진다면 사람들의 이목이 어떻게 집중될지 궁금하군요.”

이쯤 되면 협박이었다.

그러나 사서장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담긴 웃음을 지었다.

“비밀서고 얘기를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네만, 설령 그곳에 들어간다고 한들 자네는 단 한 권의 서적도 가져갈 수 없을걸세.”

“상관없습니다.”

사서장은 강윤수의 건방진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게.”

* * *

크나큰 장서관은 서재로만 가득 찬 것이 아니었다.

비밀서고나 사서들의 방처럼 아는 자만 출입할 수 있는 구역이 몇 군데 숨겨져 있다.

이외에 얼마나 많은 비밀의 방이 숨겨져 있는지는 장서관을 건립한 현자 아케닐만이 알고 있으리라.

“비밀서고의 입장은 1시간만 허락해 주겠네.”

사서장은 열쇠 꾸러미를 지니고 장서관 지하로 내려갔다.

그는 서재 한편 작은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그러자 서재들이 갈라지며 조그만 틈새가 열렸다.

사서장은 램프 불빛을 휘저으며 앞장섰고 강윤수는 그 뒤를 따랐다.

어둡고 먼지 쌓인 책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자. 이곳이 바로 비밀서고일세.”

사서장이 램프를 내려놓고 말했다.

그러나 주변은 책 한 권 찾아볼 수 없는 어두운 장소였다.

눈앞은 낭떠러지처럼 바닥이 보이지 않았고, 꼭대기부터 아래층까지 텅 빈 서재만 보였다.

서고(書庫)라는 명칭이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강윤수가 한 발 앞으로 내딛는 순간이었다.

파르륵-!

새의 날갯짓 소리였다.

아니, 비슷했으나 조금 달랐다.

이 경우에는 날아오른 것이 새가 아니라 책이었다.

파르르르르륵-!

강윤수는 뒤로 물러났다.

수많은 서적이 눈앞의 공간에서 솟아올랐다.

페이지를 너풀거리며 책들은 ‘날고 있었다.’

사서장은 통쾌하게 웃었다.

“자. 책을 가져갈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가져가보게.”

날아다니는 책들의 종류는 다양했다.

백과사전처럼 두툼하거나, 얇고 가벼운 스크롤도 보였다.

그러나 모든 서적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벌새처럼 빠르게 날아다녀 시선으로조차 따라잡기 힘들었다.

“장담하는데, 기사단장이 와도 책 한 권 잡지 못할걸세.”

사서장이 강윤수를 순순히 비밀서고로 데려온 것도 이유가 있었다.

확실히 비밀서고는 위험한 파괴마법을 담고 있는 마법스크롤을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크롤을 포함한 고서들은 빠르게 날아다닌다.

어찌나 빨리 나는지 책에 손가락 하나 스치지 못할 정도다.

보통은 책을 잡으려고 뛰다가 지하로 떨어져 크게 다치곤 했다.

사서장은 우쭐한 표정으로 회중시계를 꺼냈다.

“정확히 1시간일세. 시간이 지나면, 비밀서고에서 퇴장은 물론이고 내게 고대영웅들의 서사시 제17권을 넘겨줘야겠네.”

“10분이면 됩니다.”

“……지금 뭐라고 했나?”

사서장의 눈빛에 불안이 스쳤다.

강윤수는 덤덤히 배낭을 뒤져 긴 자루를 꺼냈다.

바로 넬의 낚싯대였다.

「넬의 낚싯대를 착용했습니다.

현재 낚시스킬레벨보다 약간 훌륭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 낚싯대를 쥐고 있는 동안 운이 아주 좋아집니다.」

강윤수는 낚싯줄을 길게 풀고 날아다니는 책을 향해 바늘을 던졌다.

그러자 곧바로 입질이 왔다.

그는 능숙히 낚싯대를 당겨 바늘에 걸린 서적을 낚아냈다.

「초대형 재앙마법스크롤을 낚았습니다.

낚시스킬의 숙련도가 크게 증가합니다.

낚시의 스킬레벨이 올랐습니다.

진귀한 아이템을 낚을 확률이 높아집니다.」

낡아 보이는 마법스크롤에는 무시무시한 마법이 보존되어 있었다.

「메테오 스톰」

무수한 운석 폭풍이 내리친다. 무차별 파괴마법이며, 목표를 지정할 수 없다. 그 일대는 초토화되고 사용자의 목숨 또한 보장할 수 없다.

사서장의 눈알이 뒤집어졌다.

“초, 초대형 재앙마법 스크롤!”

마법 스크롤은 찢는 것만으로도 잠재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저 스크롤에 담긴 메테오 스톰은 보통 마법이 아니었다.

그 일대를 파괴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형마저 바꿔 버릴 극악의 재앙마법!

강윤수는 아랑곳 않고 연속해서 마법스크롤을 낚았다.

「유성 충돌」

「멸망의 날」

「지옥 소나기」

「사력폭주」

“어, 어어어억!”

사서장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강윤수는 얄밉게도 경악스러운 재앙마법 스크롤만 낚아댔다.

어느 것 하나만 사용하더라도 장서관 일대를 통째로 날려 버릴 만한 마법스크롤이었다.

낚아 올린 마법스크롤만 20장이 넘어갔다.

그제야 사서장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그는 자존심을 접었다.

사서장은 강윤수의 바짓단을 붙들고 통곡했다.

“미, 미안하네! 내가 잘못했네! 앞날 창창한 젊은이들과 귀한 책들에게 죽음이란 상상 속 이야기여야만 하지 않겠나! 그 끔찍한 재앙들을 대체 어디에 쓰려고 그러나!”

한편 강윤수는 덤덤히 마법스크롤을 챙겼다.

총 24장의 재앙마법 스크롤을 낚았다.

비밀서고에서 얻을 만한 아이템은 모두 얻었다.

나머지는 쓸모없는 고서들뿐이다.

‘하나같이 끔찍한 재앙들이지.’

그도 마법스크롤에 담긴 마법이 얼마나 강력한지 잘 알았다.

이 중 하나만 사용하더라도, 사용자는 반드시 재앙에 휘말려 죽는다.

그러나 강윤수는 담담히 말했다.

“이곳에서 모든 마법스크롤을 사용할 겁니다.”

사서장은 정신을 잃었다.

* * *

강윤수는 기절해 버린 사서장을 근처 바닥에 눕혔다.

그는 사서장 옆에 고대영웅들의 서사시 제17권을 내려놨다.

그리고 자신은 계단을 올라갔다.

마법이 걸린 계단은 일정시간마다 엇갈리는 경우가 달랐다.

강윤수는 가장 왼쪽 계단을 선택해 이용했다.

계단을 오르고 나자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듯한 낡은 서재가 보였다.

‘이 근처였지.’

그는 가장 외진 곳에 꽂힌 책 한 권을 뽑았다.

그러자 조용히 서재가 갈라지며 비밀의 방이 드러났다.

강윤수는 숨겨진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 중앙에는 탁상이 있었고 두꺼운 서적이 올려져 있었다.

그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게 없는 공허한 방이었다.

강윤수는 두툼한 서적을 집어 들었다.

「참혹의 역사서」

백과사전만 한 두께의 역사서였다.

동시에 단말기가 진동했다.

지이잉-!

「경고합니다!

참혹의 역사서를 펴는 순간 잔혹한 시련이 펼쳐집니다.

용기 없는 자라면, 지금 당장 책을 내려놓으십시오.」

강윤수는 별 감흥 없이 참혹의 역사서를 펼쳤다.

그러자 페이지 중앙으로부터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방이 순백으로 물들며 끝이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변했다.

‘이제 시작이군.’

강윤수는 몸을 가볍게 풀었다.

단말기에 문구가 올라왔다.

「실제 역사 속으로 들어가 잔혹한 시련을 겪게됩니다.

시련의 결과는 현재에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총 다섯 가지의 시련이 존재하며, 하나의 시련을 완수할 때마다 진귀한 보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시련을 실패할 경우, 다시는 도전할 수 없으며 30일간 혼수상태에 빠집니다.」

강윤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혹의 역사서로부터 주어지는 시련.

무척 어려운 시련이지만 그만큼 보상도 좋았다.

‘반드시 모든 보상을 얻고, 장서관에서 그녀를 만나야 한다.’

순백의 공간이 다시금 변화했다.

「역사 속 인물이 되어 소지품을 제외한 모든 스킬, 장비, 능력치가 사라집니다.

실제 역사인물의 스킬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능력치도 그에 따라 다르게 주어집니다.

해당된 역사인물의 능력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에 따라 시련의 결과가 결정될 것입니다.」

순백 공간에 새로운 환경이 들어찼다.

이곳은 더 이상 방이 아니었다.

더러운 쓰레기 냄새, 시끌벅적한 소음이 들려왔다.

이곳은 대낮의 뒷골목이었다.

대뜸 커다란 고함이 들려왔다.

“잡아라!”

강윤수의 어깨를 한 남자가 사납게 쳤다.

그는 땀범벅이 된 죄수였다.

“이봐, 오르콘! 멍하니 서서 뭐 하고 있어? 살고 싶으면 어서 달리라고!”

강윤수 역시 허름한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체격은 평소보다 훨씬 좋았고, 신장은 2미터가 넘어갔다.

얼굴의 생김새도 평소와 달리 험상궂고 사나웠다.

또한, 양손에 채인 수갑 탓에 활동이 어려웠다.

단말기에 새로운 문구가 떠올랐다.

「레오르칸 제국력 173년 시작의 달 23일.

이날은 제국에 반역을 시도했던 사형수 다섯이 도주한 날입니다.

사형수들은 각기 반란군의 수장으로서 강력한 무력과 기술을 겸비했습니다.

당신은 사형수이자 서북구역 반란군 수장 오르콘입니다.

해가 지기 전까지 반란군의 거처로 도주하십시오!

단, 죽거나 체포되면 시련은 실패하게 됩니다.」

복면을 착용한 사형집행인들이 할버드를 내세우며 달려왔다.

“저기다! 저곳에 사형수들이 있다!”

“젠장! 벌써 냄새를 맡고 여기까지 쫓아왔군! 살아서 만나자고, 오르콘!”

어깨를 두드렸던 남자가 입술을 씹으며 재빠르게 도망쳤다.

그러나 강윤수는 멈춰 서서 사형집행인들을 바라봤다.

“뒈져라!”

사형집행인이 할버드를 휘둘렀다.

강윤수는 살짝 몸을 숙여 피했다.

그러곤 달려 나가 수갑으로 사형집행인의 목을 졸랐다.

“커, 커헉!”

“이놈이 어디서 반항을!”

강윤수는 사형집행인을 움직여 다가오는 할버드를 모조리 막아냈다.

“끄어억!”

애꿎은 사형집행인만 몸이 갈라지고 핏물을 쏟아냈다.

개중 할버드 창날 하나가 실수로 그의 수갑을 내려쳤다.

쩌적!

수갑이 깨져서 떨어져 나갔다.

강윤수는 곧바로 할버드 한 자루를 낚아채 휘둘렀다.

“끄아아악!”

“뭐, 뭐야! 살려줘!”

뒷골목에 들어온 사형집행인 전원이 사망했다.

핏물을 뒤집어쓴 강윤수는 손을 가볍게 풀었다.

시련은 도주가 주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는 시키는 대로 시련을 통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전부 죽여야겠군.’

강윤수는 복면을 쓰고 할버드를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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