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ord of a Thousand Lives

211 Revolutions

마탑은 검고 곧은 건축물이었다.

지상에서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게 치솟은 거대한 탑.

강윤수는 그 탑을 올려다봤다.

‘마탑은 99층까지 존재한다.’

과거 고대영웅들에 의해서 무너졌던 마탑은 거신들에 의해 재건됐다.

그리고 현재 마탑은 완공되었다.

하늘까지 치솟은 마탑은 부수지 못할 장벽처럼 굳건히 서 있었다.

‘마탑을 오르는 것은 쉽지 않다.’

층마다 험한 시련이 기다린다.

장서관에서 도전했던 역사서 속 시련과는 위험도의 수준이 달랐다.

마탑에 진입하면 시련에 성공할 때까지 결코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러나 각층의 시련을 깨면 보상을 얻고, 크게 성장할 수 있다.

그렇게 마침내 마지막 층에 도달하면 그 남자와 마주하게 된다.

‘만물의 왕 시리안.’

마탑을 재건한 장본인.

그가 꼭대기에서 기다리고 있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일행은 마탑 앞에 도달했다.

마탑의 입구는 저승의 문턱처럼 싸늘하고 섬뜩한 분위기를 풍겼다.

강윤수는 마탑에 진입하기에 앞서 모든 소환수를 소환했다.

샐리는 높은 마탑을 까치발까지 해서 올려다보다가 뒤로 넘어졌다.

“아이코! 와아. 무지무지 커. 샐리는 저렇게 큰 탑 처음 봐.”

화이트는 마탑의 불길한 기운을 눈치채고서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우르노크라.”

아클은 팔짱을 끼고 마탑을 거만하게 올려다보며 말했다.

“야, 멍청한 리치. 저 탑을 오르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냐?”

“탑의 면적과 높이로 봐선 못해도 수십 일은 소요될 게 분명하다.”

“흥. 그렇게나 오래? 나는 저깟 탑쯤은 나흘이면 오르고도 남겠다.”

“엄청난 만용이다. 아클.”

꼬마 리치가 우려를 표했다.

샤프는 라이트 곁에서 우물 쭈물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라, 라이트……. 저, 저기…….”

“드래곤 분신을 만들어주느라 지쳤어. 나한테 말 걸지 마. 샤프.”

라이트는 환한 미소도 지어주지 않고 고개를 싸늘하게 휙 돌렸다.

소녀의 차가워진 태도에 샤프는 한껏 풀이 죽은 기색이었다.

헨릭도 소녀 인형 뤽을 꺼냈다.

“준비해라. 탑 오른다.”

“사람도 죽여?”

“글쎄다. 어쩌면 저 탑에 그런 끔찍한 시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찢어버리는 시련이 있었으면 좋겠어.”

“어련하겠냐.”

천사 유리엘만은 타락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았기에 소환하지 않았다.

강윤수는 일행에게 마탑에 관해 대략 설명한 뒤 미리 경고했다.

“마탑에 한 번 들어가면 시리안을 죽이기 전까지 나올 수 없어.”

샤네트는 사슬낫을 꽉 쥐었다.

“99층의 시련. 쉽지 않겠네요.”

아이리스가 마른 침을 삼켰다.

“저 높은 탑을 다 오르려면 정말 목숨을 걸어야겠구나.”

헨릭은 눈살을 찌푸리며 턱을 긁적였다.

“그냥 비행 몬스터를 언데드로 만들어서 꼭대기까지 날면 안 되냐?”

“못 해.”

강윤수가 짧게 대답했다.

마탑을 부숴버리거나 비행, 벽면을 타고 오르는 기행은 불가능했다.

그는 이전 삶에서 탑을 편히 오르려고 온갖 수를 썼지만 실패했다.

‘마탑에선 전력을 쏟아야만 한다.’

그때 바닥에 큰 울림이 느껴졌다.

쿵……! 쿠웅……! 쿠우웅……!

“서둘러 놈들을 쫓아라!”

“왕의 동업자 외엔 그 누구도 마탑에 가게 둬선 안 된다!”

네버데드 드래곤의 분신을 파괴한 거신들이 접근해 오고 있었다.

시간을 더 이상 지체할 순 없다.

강윤수는 마탑의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새카만 문이 열렸다.

끼이이익……!

일행은 마탑 1층에 진입했다.

일단 마탑에 들어온 이상 외부에선 거신들이라도 간섭할 수 없었다.

「마탑의 내부에 들어왔습니다!

층마다 위험한 시련과 몬스터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침입자는 마탑의 주인을 죽이기 전까진 탑에서 나갈 수 없습니다.

차원이 불안정한 마탑 안에는 특수한 아이템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마탑 내부에선 주인의 허락 없이 소환수를 소환할 수 없습니다.」

「마탑에 진입해 【전설 의뢰-마탑의 주인】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설 의뢰-마탑의 주인】

어렴풋이 재건되고 있을 거라 추측되던 마탑은 이미 완공된 직후였다. 마탑을 완공한 주인은 판데모니엄과 대륙을 이으려는 위험한 목적을 품은 것이 분명하다.

이를 저지할 방법은 단 하나뿐. 마탑의 주인을 찾아내 죽여라.

+마탑의 주인의 정체는 수수께끼로 둘러싸여 있다.

+마탑을 오르다 보면 주인에 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헨릭이 세밀히 주위를 살폈다.

“생각보다 안은 환한데?”

마탑의 어두운 외견과 달리 내부엔 간간이 촛불이 켜져 있었다.

고풍스러운 양식과 설계는 심지어 안락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긴장을 풀어선 안 돼요. 자칫 방심했다간 죽게 될 거예요.”

샤네트가 전투태세를 갖추고 말했다.

꼬마 리치가 두개골을 끄덕였다.

“스승이 시리안의 힘으로 멸망룡을 죽이는 것을 본 적 있다. 만물의 왕은 멸망룡보다도 훨씬 강하다.”

샐리는 떨면서 망설이다가 아클에게 다가가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아클이 곧장 얼굴을 찡그렸다.

“윽. 망할. 뜨겁게 뭐하는 짓이야? 당장 손 안 치워?”

샐리는 불안해하며 울먹였다.

“아빠가 여기엔 만물의 왕이 산댔어. 분명 엄청 세고 잔인할 거야. 하지만 샐리는 누가 죽는 게 싫어.”

“흥. 겁쟁이. 그깟 놈이 뭐가 무섭다고? 한심해 죽겠군. 이러니까 내가 널 누나라고 안 부르는 거다.”

아클은 차갑게 쏘아붙이며 샐리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줬다.

한편 샤프는 용기를 쥐어짰다.

“라, 라이트…… 우, 우리도…… 예전처럼…… 손을…….”

“샤프, 네가 제대로 말해주지 않으면 난 알아들을 수 없어.”

라이트는 딱 잘라서 말하자, 샤프는 기가 죽어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마탑 1층은 넓었고 대리석이 고급스럽게 깔려 있었다.

강윤수가 앞장선 일행은 조심스레 마탑 내부를 걸어갔다.

‘1층의 시련은 간단하다.’

해당 층에 있는 짐승형 몬스터 100마리를 모두 학살하는 것.

신의 직업까지 손에 넣은 강윤수에겐 그다지 어려운 시련이 아니다.

그러나 높이 올라갈수록 시련의 난이도는 높아지고 위험해진다.

‘그 대신 보상의 질도 좋아진다.’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에 탑을 오를수록 더욱 성장할 수 있다.

99층의 시련이 위험해도 강윤수는 이전에 올라본 경험이 존재한다.

‘신이 되어 그리 큰 의미는 없겠지만 보상을 얻어서 나쁠 건 없다.’

자신뿐만 아니라 일행도 성장할 발판을 얻을 수 있으리라.

그는 최대한 빠르게 탑을 오를 작정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화이트가 털을 꼿꼿이 세웠고 아이리스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카미르토르.”

“피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구나.”

강윤수는 멈춰 섰다.

피 냄새?

……1층에서 피 냄새가 난다고?

그럴 리가 없다.

‘설마.’

“강윤수 님, 왜 그러세요?”

샤네트가 물었지만 그는 정신이 팔린 것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강윤수는 무언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매섭게 뛰기 시작했다.

헨릭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놈 갑자기 왜 저러냐?”

꼬마 리치는 진지하게 말했다.

“볼일이 급한 게 틀림없다.”

“그건 아니라고 본다. 인마.”

“아무튼 빨리 따라가 봐요!”

일행은 서둘러 강윤수의 뒤를 쫓아갔다.

드넓은 1층 끝 편에 넓적한 방의 입구가 놓여 있었다.

강윤수는 그 방에 들어갔고, 일행도 그를 뒤따랐다.

아이리스가 코끝을 찡그렸다.

“몬스터 시체들이 아주 많구나.”

짐승처럼 보이는 몬스터들이 사방에 육편처럼 쪼개져 흩어져 있었다.

본래 1층의 시련으로 출현했을 몬스터들이 틀림없었다.

죽인 지 꽤 오래되었는지 시체들은 악취를 풍기며 부패되어 갔다.

샤네트가 의아해했다.

“누가 몬스터들을 죽인 걸까요?”

그 의문은 곧 해소되었다.

달리던 강윤수가 갑자기 멈췄다.

헨릭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너, 왜 갑자기 뛰어갔냐?”

강윤수는 말없이 눈앞을 가리켰다.

한 사내가 피범벅으로 물든 시체 더미들 사이에서 졸고 있었다.

참으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사내 주위로 족히 일백은 되는 몬스터 시체 더미가 원을 그리고 있었다.

이런 장소에서 잠드는 것도 흔치 않은데 그 자세마저 묘했다.

사내는 창을 바닥에 내리꽂고선 창대에 뺨을 기대어 졸고 있었다.

샤네트가 의아해했다.

“저 사람은 누구죠? 마탑에 우리 외에 다른 사람도 왔었나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서 사내가 흠칫 뺨을 떨며 깨어났다.

그는 침이 묻은 뺨을 손바닥으로 닦고서 기지개를 켰다.

“아, 왔어?”

사내가 순진하게 웃어 보였다.

마치 그들이 올 것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말투였다.

샤네트는 왠지 그를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나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저희처럼 마탑에 오르려고 오신 모험가신가요?”

“그건 저 친구가 잘 알걸?”

사내가 빙긋이 웃으며 창을 뽑아 강윤수를 가리켰다.

강윤수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리안.”

침묵이 맴돌았다.

고요함은 오래 유지됐다.

헨릭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저놈, 뭐라고 했냐?”

“시리안…… 이라고 하셨어요.”

“시리안이라면……. 마지막 층에 있다던 그 만물의 왕이로구나.”

일행의 표정이 점차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눈앞의 사내가 시리안이라고?

고대부터 살아와 멸망룡보다 강인한 힘을 지닌 그 만물의 왕?

샤네트가 그제야 확신했다.

“이제야 알겠어요. 예전에 강윤수 님이랑 적색바위 발굴지에서 석판을 깨고서 공백의 역사를 본 기억이 있어요. 바로 저 사람이 시리안이에요. 영웅들을 배신하고, 판데모니엄의 문을 열려고 했던 만물의 왕.”

“용케도 내 낯부끄러운 과거를 보셨군. 아가씨.”

시리안이 뺨을 긁적였다.

다들 충격적인 사실에 전투태세를 취하는 걸 잠시 잊어버릴 정도였다.

“우르노크라-!”

화이트는 세차게 울부짖으며 발톱을 날카롭게 내세웠다.

“꺄아아악……!”

샐리는 새하얗게 질려서 아클에게 기대어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일행은 긴장하며 경계를 했지만 감히 먼저 덤비진 못했다.

그러나 눈앞의 시리안에게선 아직 어떠한 위압감도 느껴지질 않았다.

“흐음. 개성적인 친구들이야.”

샤네트가 날카롭게 물었다.

“어째서 당신이 1층에 있죠?”

시리안이 시체에 주저앉은 채 강윤수 일행을 바라봤다.

“너희가 1층부터 올라오면 시련을 깨고서 훨씬 강해지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마지막 층에서 나 혼자서 기다리는 것도 꼴이 우습더군. 그래서 내가 1층으로 몸소 내려왔지. 그편이 좀 더 빠르고 좋지 않겠어?”

만물의 왕 시리안.

본디 마지막 층에 있어야 할 최악의 적이 1층으로 내려와 있었다.

강윤수가 칼을 뽑았다.

“넌 원래 마지막 층에서 내려오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이번만은 예외야. 마지막 삶이니까 내가 몸소 손님을 맞아야지.”

시리안은 천천히 일어섰다.

강윤수가 한 걸음 나아갔다.

두 남자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널 죽이기 위해 왔다. 시리안.”

“공교롭게도 나랑 같군. 나도 널 죽이려고 여기서 기다렸으니.”

만물의 왕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술잔을 마시는 시늉을 해 보였다.

“오래 기다렸더니 목이 타. 서로 죽이기 전에 술잔부터 나눌까?”

“어.”

“…….”

일행은 두 남자의 비상식적인 대화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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