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ord of a Thousand Lives

Book of Genesis 217

싸움은 예고 없이 시작됐다.

시리안은 곧장 매서운 눈빛으로 창대를 굳세게 쥐고서 질주해 왔다.

이제까지의 몸놀림과는 달랐다.

순식간에 그가 그 자리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일 수준이었다.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새에 강윤수의 코앞에 창날이 다가왔다.

챙-!

번개 같은 빠르기로 올라간 강윤수의 칼이 시리안의 창을 쳐냈다.

검붉은 기운에 휩싸인 칼날과 창날이 부딪쳐 대기에 격동이 일었다.

순수한 힘의 충돌!

시리안은 곧바로 한 발을 뒤로 뺀 뒤 다시 한번 창을 내뻗었다.

강윤수도 칼을 휘둘러 받아쳤다.

채앵-!

멸망룡조차 제압하는 만물의 왕과 파괴신의 격돌은 재앙과도 같았다.

바닥이 울리고 탑이 흔들렸다.

주위의 일행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둘의 싸움은 압도적이었다.

강윤수가 칼에 집중하며 말했다.

“너흰 피해 있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샤네트가 곧장 반박했다.

그러나 강윤수는 단호히 말했다.

“지금은 방해만 돼.”

시리안은 일행을 힐끔 봤지만 강윤수와의 싸움에 집중하느라 그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었다.

결국 일행은 아래층으로 물러났고 강윤수는 온건히 싸움에 몰두했다.

시리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회귀한 지 고작 1년일 텐데 꽤 강해졌군. 무슨 수를 쓴 거지?”

강윤수는 그 질문을 무시했다.

“착각하지 마라. 너와 싸우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시리안.”

그는 칼을 휘두르는 동시에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곧바로 고귀의 궁사 나힐렌이 활의 시위를 크게 당겼다.

피이이이이잉-!

질풍의 연쇄사격!

수십의 마법화살이 시리안을 향해 절묘한 궤도를 그리며 날아갔다.

시리안은 민첩히 화살을 피하고 강윤수의 칼을 창으로 받아냈다.

“제기랄…….”

시리안은 활을 쏜 나힐렌을 향해 창날을 돌렸다가 결국 거두었다.

그가 이글거리는 눈길로 말했다.

“네가 나보다 더하군. 나보고 저들을 또 내 손으로 죽이란 건가?”

“네가 할 수 있다면.”

강윤수는 방심하지 않았다.

눈앞의 적은 만물의 왕 시리안.

과거의 삶에서도 그를 압도하거나 일격으로 죽여 버린 적은 없었다.

줄곧 꼭대기에서만 싸웠기에 시리안을 마탑 밖으로 떨어뜨려서 수명을 다하게 만드는 전술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곳은 탑의 중앙이다.’

만물의 왕 시리안은 마탑 내부에서 불사(不死)를 취할 수 있다.

그를 유일하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은 탑 밖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마탑에서 추락시키면 세월에 역류해 죽고 말지만 이곳은 탑 중앙.

침입자는 마탑에서 나갈 권한이 없고 바깥과 연결된 창도 없었다.

따라서 이곳에선 그를 탑 밖으로 떨어뜨리는 전술은 쓸 수 없었다.

‘영웅들의 능력을 활용해야 한다.’

고대의 영웅들!

과거 판데모니엄을 막아낸 그들은 각 분야의 정점을 찍은 최강자였다.

강윤수는 격노한 시리안과 공격을 주고받으면서도 영웅들을 조종했다.

무한의 차원술사 세피아가 양손을 쥐고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강윤수 주위의 광경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멸살의 참격.”

강윤수는 칼을 아래로 내려쳤다.

그러나 주위가 비틀리며 칼날의 궤도가 반대로 뒤바뀌었다.

시리안은 위로 치솟은 칼날을 재빠르게 막아내고 공격해 왔다.

그러나 싸움은 어려워졌다.

강윤수가 휘두르는 칼날은 물리법칙과 시공을 완벽히 무시해 버렸다.

앞에서 찌른 칼은 시리안의 뒤를 노렸고 초반에 내찌른 일격이 갑자기 끊어졌다가 후반에 나왔다.

시리안은 인간을 초월한 창술로 예측 불가한 공격들을 막아냈다.

그러나 공격에 소홀해져 버렸다.

그에 반면 강윤수는 점차 몸에 흐르는 힘이 강해짐을 느꼈다.

「파괴신의 힘에 적응했습니다.

파괴력을 100% 개방합니다.

태산을 가르고 전성기의 드래곤을 일격에 분쇄해버릴 수 있습니다.」

파괴신의 힘은 막강했다.

시리안과 비등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음에도 능력이 더욱 올라갔다.

본래 시리안을 기절시켜 꼭대기로 데려가 그를 떨어뜨릴 작정이었다.

‘이쯤이면 전략을 바꿔도 되겠군.’

강윤수는 더욱 강력해진 힘으로 시리안을 몰아붙였다.

동시에 나힐렌, 미네르바, 나크론을 조종해 그를 공격하게 만들었다.

나힐렌이 대륙 최강의 마법화살을 쐈고 미네르바는 최상급 용암 골렘 군단을 소환했으며 나크론은 고대부터 내려온 온갖 저주를 내렸다.

사방에서 사중 공격을 해오자 마침내 시리안은 방어를 포기했다.

“나는 반드시 널 막아서겠다.”

시리안은 마탑에선 죽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영웅의 능력은 불사의 몸에도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마법화살이 몸에 파고들고 저주가 회복력을 더디게 했으며 골렘은 불 가루가 되어서도 전투를 방해했다.

죽진 않아도 몸은 삐걱거리고 휘두르는 창날도 느슨해져 버렸다.

그러나 시리안은 그 위험을 감수하고서 오히려 전투력을 불태웠다.

그가 방어를 포기하고 공격에 치중하자 창의 움직임이 거세졌다.

쉬이이이익-!

창날이 휘둘러질 때마다 풍압만으로도 탑이 매섭게 격동했다.

칼과 창이 부딪치면서 대기가 찢어지고 진동이 크게 울렸다.

주위에서 다가오던 용암골렘들이 충격파만으로 바스러질 수준이었다.

칼과 창이 맹렬히 부딪치는 와중.

두 남자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혼신의 일격을 주고받았다.

채앵-!

강윤수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시리안은 뼈가 녹아내리는 충격에도 굳건히 창을 쥐고서 다가왔다.

“우린 운명을 받아들여야 해.”

“내가 그 운명을 부술 것이다.”

그 순간 고대영웅들이 다시금 무기를 들어 만물의 왕을 노렸다.

그러나 시리안은 몸을 돌려 영웅들을 향해 힘껏 창을 휘둘렀다.

콰가가가각-!

고대영웅들의 죽음.

그의 공격에 되살아난 동료들이 육체가 갈아지고 사망해 버렸다.

시리안은 정신적 충격을 이기려는지 눈을 감고 얼굴에 손을 비볐다.

“하아아……!”

만물의 왕은 숨을 헐떡였다.

그의 뺨에는 핏물이 흥건했다.

갈라지는 목소리가 사나웠다.

“이제 그만 받아들여라!”

시리안의 발이 그의 가슴을 짓밟았다.

강윤수는 피와 숨을 토해냈다.

창날이 목을 겨누어왔다.

“포기하란 말이다. 마황에게 대륙이 멸망하는 것이 정해진 운명이야. 그 누구도 그걸 거부할 수 없어.”

시리안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일만 번을 회귀한 흰 그림자조차 마황을 자력으로 죽일 순 없었다.

만물의 왕은 순리를 지켜서 모든 세상을 지켜내고자 했다.

그러나 강윤수 역시 지켜야 할 것이 존재했다.

챙강-!

바로 그때 시리안의 뒤통수에 타오르는 사슬낫이 꽂혔다.

그러나 그는 아픈 기색도 없이 바로 낫을 뽑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래층으로 피신했던 강윤수의 일행이 돌아와 있었다.

샤네트가 차갑게 소리쳤다.

“강윤수 님한테서 떨어져요.”

시리안은 화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정색하며 말했다.

“왜 다시 돌아왔지?”

시리안은 피에 젖은 얼굴로 일행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너희 힘으론 날 죽일 수 없어. 너희가 범접할 수 없는 싸움이다. 다시 와봤자 금세 죽을 테고. 그런데 왜 나한테 다시 왔지?”

“거, 몰라서 묻냐?”

헨릭이 턱 끝으로 강윤수를 가리켰다.

“저놈 혼자 죽게 두면 나중에 원혼 돼서 복수하러 올까 봐 그런다.”

“계속 생각해 보니 강윤수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단다.”

아이리스가 날개를 활짝 펼쳤다.

소환수들도 전투태세를 갖췄다.

샤네트가 확고히 말했다.

“우린 저분을 결코 버릴 수 없어요. 설령 우리가 죽게 되더라도.”

시리안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일행을 오래도록 주시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자신이 죽인 옛 동료들의 시체를 바라봤다.

시리안은 피가 묻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우습군. 정말 우스워. 너무 머저리 같아서 웃음이 다 나온다.”

바로 그때 뒤편에서 강윤수의 힘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모든 것에 관심을 잃었다. 오래 살았고 날 위한 숙원도 없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러나 저들만은 지켜야 한다.”

불현듯 창대를 감싸 쥔 시리안의 손이 떨렸다.

강윤수는 칼을 들어 올렸다.

“그래서 마황을 죽여야만 한다. 그것이 아무리 불가능할지라도.”

강윤수의 전신을 감싼 검붉은 기운이 눈부시게 달아올랐다.

「모든 것을 초월한 파괴력!

파괴력을 10,000% 개방합니다!

천지를 가르고 부술 수 없는 것을 파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창을 세운 시리안이 뛰어들었다.

강윤수는 세차게 칼을 휘둘렀다.

파괴신의 일격은 시리안을 나가떨어지게 했고 벽면을 부숴버렸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각-!

탑이 거세게 흔들렸다.

벽면이 파괴력을 감당 못 하고 마탑의 중간이 매섭게 깨져버렸다.

중심이 무너진 마탑은 산산이 조각나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누구도 깰 수 없었던 마탑이 한 남자의 손에 의해 부서져 갔다.

강윤수는 마탑을 절단 내버렸다.

* * *

마탑이 붕괴됐다.

바닥에는 거대한 탑 파편이 너저분했고 일행들은 쓰러져 있었다.

“콜록! 콜록! 다들 괜찮아요?”

일행은 몸을 일으켰다.

그때 탑 파편 사이에서 고통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제발 날 살려 줘라……!”

“세상에! 꼬마 리치구나!”

아이리스가 탑의 잔해를 들춰서 너덜너덜한 꼬마 리치를 데려왔다.

리치라서 죽진 않았지만 온몸의 뼈가 깨져서 활동이 힘들었다.

샤네트는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데 강윤수 님은 어디에 계시죠?”

“일단 찾아보자.”

일행은 주위를 배회했고 강윤수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강윤수는 몸의 절반이 찢겨버린 시리안의 앞에 걸터앉아 있었다.

“참혹한 몰골이구만.”

헨릭이 눈살을 찌푸렸다.

강윤수는 쓰러진 시리안을 봤다.

시리안은 마탑에서 벗어나 신체가 부서지며 생명력을 잃고 있었다.

“마황은 어느 시기에 나타나지?”

“마탑을 파괴해 버렸으니…… 조금 뒤…… 여기로 넘어오게 될 거다.”

일행은 경악했다.

마황.

수백 번이나 대륙을 파괴하고 강윤수를 회귀시킨 절대적 존재.

그런 마황이 조금 뒤에 나타난다.

그러나 강윤수는 놀라지 않았다.

세상의 규칙은 복구했으나 마황이 나타날 시기는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파괴신이 된 지금 나타난다면 더없이 최고의 기회였다.

“난 이 세상에서 ‘없어야 할 자’를 죽였다. 그래도 이번 삶이 마지막인 것은 그대로겠지?”

“물론…… 그것만은 바꿀 수 없지…….”

시리안은 죽어가며 미소 지었다.

“꼴이 말은 아니지만…… 이렇게 되니 오히려 후련하군……. 이젠 기대되기까지 해……. 네가 마황을 죽여 버릴지…… 아니면 그대로 실패해 절망에 빠질지…… 말이야.”

강윤수는 그를 말없이 바라봤다.

시리안은 최후에 웃음을 거뒀다.

죽음 앞에서 그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순수한 슬픔이었다.

“아아…… 단 한 번이라도…… 동료들에게 사과할 수 있다면…….”

그 말이 최후의 한마디였다.

시리안은 바스러지고 말았다.

「만물의 왕 시리안 란체카스타를 죽였습니다!

【전설 의뢰-마탑의 주인】을 완수했습니다.

막대한 경험치를 얻었으나 완전한 신이기에 레벨이 오르지 않습니다.

차후 만물의 왕으로 전직하는 전설에 관해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마탑을 파괴해 탑을 재건한 거신들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전설 의뢰가 최종장으로 이어집니다.」

강윤수는 만물의 왕의 마지막 한마디를 머릿속에 새겨들었다.

그리고 손에 찬 생명억압반지를 그가 사라진 자리를 향해 들었다.

반지에 영혼을 봉인할 기회가 단 1회 남아 있었다.

“영혼채집.”

검게 변색된 시리안의 영혼이 그의 반지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바로 그때였다.

벼락같은 고함이 들려왔다.

“마탑이 무너져 버렸다!”

“저들이 만물의 왕을 죽였다!”

“침입자들을 척살하라!”

바닥이 매섭게 울렸다.

네버데드 드래곤에게 쏠렸던 수십의 거신이 뛰어오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어, 어떻게 해! 거신들이 우릴 죽여 버릴 거야!”

샐리가 울먹였지만 아클이 코웃음을 쳤다.

“무슨 상관이야? 우리한테는 만물의 왕도 죽인 괴물이 있는데.”

아클의 말은 옳았다.

거신들은 질기고 강력하지만 파괴신 상태면 상대 못 할 것도 아니다.

‘좀 오래 걸리긴 하겠군.’

강윤수가 칼을 쥐었을 때였다.

끔찍한 단말마가 사방을 울렸다.

“크허허헉!”

“끄아아아악!”

일순간 이쪽을 향해 달려오던 거신들이 모조리 죽어버렸다.

온몸이 찢어지는 것도 모자라 박살 나고 부서져 시체조차 안 남았다.

파괴신조차 저렇게 거신들을 가차 없이 학살해 버릴 순 없었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죠?”

샤네트는 순식간에 학살당한 거신들을 보며 당황해 버렸다.

그때 아이리스가 하늘을 가리켰다.

“저길 보렴!”

잿빛 하늘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하늘이 갈라진 형세는 문과 흡사했고 저편에 또 다른 세상이 보였다.

어둡고 차가운 악마들의 세계.

저것은 판데모니엄의 문이었다.

과거 고대영웅들이 막아냈던 그 문이 다시금 그들 눈앞에 나타났다.

끼이이이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를 전조로 판데모니엄의 문이 활짝 열렸다.

갈라진 하늘 사이로 형용할 수 없는 존재가 내려왔다.

세상으로 넘어온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일행은 얼어붙고 말았다.

‘저것’은 죽음이었다.

영원한 휴식을 뜻하는 평온한 의미가 아닌 진정으로 악독스러운 죽음.

손톱 하나하나에는 세상마저 찢어버릴 공포가 담겨 있었고 몸체는 근본적인 물질로부터 일탈해 있었다.

눈동자를 바라보면 뒤통수가 얼어붙고 온몸이 타버려 잿더미가 되어버릴 것만 같은 불안에 휩싸였다.

‘저것’ 앞에서 칼을 뽑는 자는 바로 목이 떨어질 것이고 도주하는 자는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갈 것이다.

‘저것’은 모든 걸 뭉개고 세상의 색채를 공포만으로 물들일 것이다.

모두가 ‘저것’ 앞에서 전의를 상실했다.

거신들조차 일순간 뭉개버린 존재가 하늘에 강림해 있었다.

수없이 많은 삶에서 마주한 숙적.

강윤수는 칼을 꽉 쥐고서 일어나 이를 악물었다.

“마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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