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알았던 자가

이젠 모든 것을 잊어버렸구나.

-아이리스

사내의 일상은 단조로웠다.

그는 하루 4시간만 활동했다.

그 외의 일상은 수면 시간이었다.

그렇게라도 자두지 않으면 머리가 아파 견딜 수 없었다.

‘아침이다.’

사내는 자신의 이름을 잊었다.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도, 누구와 어울렸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삶의 규칙을 정해뒀고 항상 그에 따라 생활했다.

“산책 가시려구요?”

사내가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침대에서 적갈색 머리칼의 미인이 눈을 비비며 자신을 바라봤다.

그녀는 몹시 아름다웠으나 얼굴에 약간의 화상 자국이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그것이 흠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같이 가드릴까요?”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끼이익.

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몹시 추워서 입김이 다 나왔다.

사내는 잠시 집을 돌아봤다.

낡지도 크지도 않은 거택.

‘오늘은 어디로 가지?’

스스로에게 되물었으나 평소처럼 그저 걷기로 했다.

사내는 하루에 깨어 있는 4시간을 대부분 산책으로 활용했다.

어느 곳이든 걷다 보면 왠지 잊었던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았다.

정처 없이 걸으니 어느새 그는 시장을 배회하고 있었다.

“이보게. 거기 청년. 여기 맛좋은 석류 좀 보고 가.”

시장 한복판에 좌판을 깐 노점상이 그의 이목을 잡았다.

“한겨울인데도 아주 새빨간 알갱이가 보석 같지? 흐흐. 이게 바로 겨울에만 나는 희귀품종이야. 딴 데선 사고 싶어도 없어서 못 산다고.”

사내는 집에 있는 화상 자국의 여인이 떠올랐다.

자신을 보살펴주는 그녀에게 선물을 하고 싶었다.

“얼마…… 입니까.”

사내의 목소리는 쇠를 긁는 것처럼 힘겨운 음색이었다.

노련한 상인은 사내의 눈치를 슥 살폈다가 재빨리 말했다.

“흐음. 이게 보통 귀한 석류가 아니라서 말이야. 거기다 겨울철은 원래 과일값이 금값 아니겠나. 석류 세 개에 은화 두 닢은 줘야겠네.”

사내의 품에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준 돈주머니가 있었다.

주머니에서 은화 두 닢을 꺼내려고 했으나 손이 떨렸다.

“허이고. 어찌 된 게 그 나이에 자기 돈도 제대로 못 꺼내나.”

상인이 안타까운 눈초리로 혀를 찼다.

사내는 은화 두 닢을 꺼내려다가 손이 떨려서 모두 떨어뜨렸다.

그리고 다리를 부르르 떨다가 쓰러져서 구토하고 말았다.

“아이고! 이게 뭔 일이야!”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사내는 쓰러져서 입에 거품을 물며 경련했다.

상인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곧 얼굴을 굳혔다.

“다들 뭘 그리 열심히들 보고 있어? 좋은 구경이라도 났나! 응?”

사람들은 그제야 딴청을 피우며 제 갈 길을 갔다.

상인은 청년을 이목이 끌리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 눕혔다.

숨쉬기 좋게 눕혀놓자 사내는 곧 있어 정신을 차렸다.

“감사…… 합니다.”

사내는 하루 4시간을 깨어 있으나 고통에서 자유롭진 못했다.

간혹 두통뿐만 아니라 격렬한 구역질까지 그를 괴롭혔다.

상인은 사내를 보다가 한숨을 쉬고 더럽혀진 옷을 닦아줬다.

그리고 조그만 바구니에 석류를 주섬주섬 담아서 줬다.

사내가 의아스러워하자 상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이 멍청한 친구야. 사실 이거 석류 열 개에 은화 한 닢도 하지 않아. 자네가 정신이 박약해 보여서 가격 좀 후려치려고 했던 거라고. 몸이 아프면 집에서 좀 쉬어. 괜히 나 같은 놈한테 당하지 말고.”

사내는 감사 인사를 하고 오른팔로 석류가 담긴 바구니를 들었다.

사내의 오른팔은 의수였지만 자기 신체처럼 자유롭게 움직였다.

그러나 자신이 왜 오른팔이 없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녀오셨어요?”

사내는 집에 돌아왔다.

화상 자국 여인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른 한 사람도 집에 와 있었다.

화상 자국 여인과 마찬가지로 빼어나게 어여쁜 미인이었다.

그녀는 탁상에서 글을 쓰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강윤수가 오늘은 일찍 돌아왔구나!”

그녀가 이름을 불러줘도 사내는 낯설 뿐이었다.

강윤수.

그것이 자신의 이름인가?

그녀가 사뿐사뿐 걸어와 사내를 꼭 끌어안아 줬다.

“오늘 하루도 즐거웠느냐?”

사내는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석류 바구니를 내밀자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강윤수는 화상 자국 여인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었다.

세 사람은 간략한 식사를 마쳤다.

사내는 두통이 시작됨을 느꼈다.

“괜찮으세요?”

화상 자국 여인이 물었다.

사내는 고개를 억지로 끄덕였다.

침대로 다가가자 옅은 술 냄새가 풍겼다.

“…….”

화상 자국 여인은 언제나 침대맡에 술을 한 잔 떠놓았다.

향기만 맡아도 속이 느글거릴 정도로 독주였다.

사내는 그녀에게 언제나 고마웠지만 이런 면으론 짜증이 났다.

“싫어한다고…… 했잖아.”

사내는 술을 마시면 머리가 지독히 아파왔다.

거기다 씁쓸한 맛이 그다지 취향에 맞지도 않았다.

어지간히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런 걸 좋아할 리 없었다.

그녀는 어째선지 슬프게 미소 지었다.

“……맞아요. 그랬었죠.”

사내는 침대에 누웠다.

벌써부터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아직 해가 중천이었다.

모두가 활발히 움직일 시간.

사내는 홀로 고통스럽게 잠에 들었다.

* * *

한밤중.

중년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어떻게 되셨어요?”

“말도 마라. 마법학회, 각종 의사, 암시장 세 군데를 쭉 돌아다녔는데 기억 찾는 방법은 전혀 없더라.”

헨릭은 무척 피곤했는지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젠장. 정말 답이 안 나오는군. 저놈 상태는 좀 어떠냐?”

그가 턱 끝으로 침대에서 잠든 사내를 가리켰다.

“여전해요. 항상 구토랑 경련이 잦아요. 하루 대부분은 잠을 자고 있구요. 그리고 아무리 설명해도 저희를 기억하지 못하세요.”

마황이 죽고서 20일이 흘렀다.

일행은 강윤수의 기억을 되찾기 위한 방법을 수소문하고 있었다.

소환수들도 함께하고 싶어 했지만 그건 너무 눈에 띄는 일이었다.

일행은 산맥에서 황실의 제5기사단을 몰살한 전적이 있었다.

물론 기사단이 먼저 그들을 죽이려 했지만 범법행위를 한 것이다.

함부로 주의를 끌었다가 황실의 표적이 되어선 곤란했다.

“싫어! 아빠랑 같이 있을 거야!”

“그래도 안 돼. 샐리.”

“히잉……. 훌쩍!”

소환수들은 우선 소환계로 돌아갔고 네 사람은 거처를 잡았다.

레오르칸 제국의 수도 데페론.

강윤수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선 수도를 뒤져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이 수소문하고 다녀도 지금까지 소득은 없었다.

아이리스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강윤수를 바라봤다.

“강윤수가 요즘 혼자 자주 나갔다고 들어오곤 한단다. 그러다 황실에 붙잡히면 어쩌느냐?”

“그건 걱정 마라.”

헨릭이 까칠하게 자란 턱수염을 긁적였다.

“뤼미에르가 죽은 다음 키시프란 여제도 사라졌다고 한다. 아무래도 가짜를 세워뒀던 모양이지. 그래서 지금 황실은 혼란 그 자체다. 두 번씩이나 권력자를 잃었으니까. 귀족들이 권력 싸움하는 데만 온 신경이 쏠려 있지.”

헨릭은 목이 탔는지 품에서 술을 꺼내서 벌컥 들이켠 뒤 말했다.

“하여간 요새 범죄자는 늘어나고 경비대는 눈에 띄게 줄었어. 그리고 제5기사단 관련으론 이미 적당한 사람을 포섭해 놨다.”

“누구 말이니?”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헨릭이 몸을 일으켰다.

“아주 딱 맞게 왔군.”

그가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한세현.

백사자 클랜 대장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너무 늦게 찾아와서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군요.”

“거, 엄청나게 실례요. 그러니 빨리 들어오기나 하쇼.”

샤네트가 의자를 내주었다.

한세현은 감사 인사를 한 뒤에 의자에 앉아서 말했다.

“본론부터 얘기하죠.”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백사자 클랜의 정보망을 통해 입수한 사실입니다만, 제5기사단장 소든은 케르바스 산맥에서 돌아온 직후 은퇴했다고 합니다. 제5기사단도 제4기사단과 마찬가지로 사고사로 처리되었더군요. 죄목을 걱정하실 필요는 없으실 것 같습니다.”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세현은 미소 지었다.

“그리고 부탁하신 기억을 되찾는 방법에 관해서입니다.”

“어떻게 됐나요?”

샤네트가 간절히 물었다.

한세현은 자세히 설명했다.

“고대서적에서 기억에 관한 내용을 찾긴 했습니다. 오랜 경험이 담긴 물건에 접촉하면 기억을 일시적으로 되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고대에 있던 드래곤 멸망룡도 수면기에 들었다가 깨어나면 과거 자신이 그렸던 그림을 보고서 기억을 되찾았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오랜 경험이 담긴 물건’의 정의도 불확실하고 확정되지 않은 방법입니다.”

한세현은 담담히 결론지었다.

“그 외엔 소득은 없었습니다. 어떤 서적에서도 기억상실을 완전히 회복하는 방법은 찾지 못했습니다.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샤네트가 망설이다가 말했다.

“어쩌면…… 기억을 찾지 않는 게 강윤수 님을 위한 걸지도 몰라요.”

“그게 무슨 소리냐?”

헨릭이 얼굴을 구겼다.

그러나 샤네트는 점차 확신하며 의견을 표출했다.

“생각해 보세요. 강윤수 님은 그동안 천 번이나 살아오셨어요. 2만 년이 넘는 아득한 세월이에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정도 기억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미쳐버리고 말아요.”

그녀는 잠에 든 강윤수의 손을 매만졌다.

“그러니…… 어쩌면 이대로 두는 게 강윤수 님을 위한 걸지도 몰라요. 물론 몸은 괴롭고 힘들지만 이제야 모든 걸 잊고서 평범한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잖아요.”

침묵이 감돌았다.

누구도 감히 샤네트의 말에 반박하진 못했다.

그때 한세현이 침묵을 깼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샤네트가 한세현을 바라봤다.

그는 헨릭을 통해서 강윤수가 회귀했단 사실을 예전에 알고 있었다.

모두가 그에게 집중했다.

“대륙에 왔을 당시에 여행자들의 단말기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습니다. ‘마황을 죽이면 현실로 귀환할 수 있다.’ 실제로 마황이 죽고 난 뒤 여행자들 대부분이 사라졌습니다. 각자의 현실로 돌아간 것이죠. 그러나 우리처럼 대륙에 남은 여행자들도 분명 존재합니다.”

한세현은 빙그레 웃었다.

“마황이 죽었는데도 저나 유시도 같은 자들은 원래 살던 세상으로 귀환하지 못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모르겠어요.”

샤네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세현은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에겐 이곳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샤네트가 손을 불현듯 떨었다.

“대륙에 남은 여행자들은 이곳을 선택한 겁니다. 원래 세상이 아닌, 실피아 대륙을 말이죠.”

한세현은 확고히 말했다.

“나에겐 제국의 황제가 되고자 하는 숙원이 있습니다. 유시도 그 미친 녀석은 어째서 실피아 대륙에 남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륙을 현실로 받아들인 자들은 합당한 이유를 가졌어요.”

한세현은 곤히 자는 강윤수를 가리켰다.

“그에게도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대륙에 남아야만 하는 이유가.”

샤네트가 강윤수의 손을 꽉 쥐었다.

한세현은 분명히 말했다.

“저라면 절대 잊고 싶지 않을 겁니다. 설령 기억을 잃었더라도, 반드시 다시 떠올리고 싶을 겁니다.”

모두가 깨닫는 것이 있었다.

한세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를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천만에요. 저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빚은 톡톡히 받아낼 겁니다.”

한세현은 싱긋 미소 지었다.

“클랜원들 대부분이 원래 세상으로 귀환해서 백사자 클랜은 대륙인들과의 연줄로 버티고 있지요. 이젠 제 인내심도 바닥입니다. 언젠가 강윤수가 기억을 되찾으면 제게 말하세요. 당장에라도 멱살을 붙잡고 날 황제로 만들라고 윽박지를 테니까.”

그는 헤어지는 인사를 건넨 뒤 집에서 나갔다.

* * *

시간이 흘러간다.

죄목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져 모두가 정보를 찾아서 수소문했다.

그러나 결실은 오지 않았다.

모두가 지쳐 갔고 강윤수의 몸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경련은 잦아졌고 구역질도 하루에 네 번으로 늘어났다.

어느 날 아침이 밝았다.

모두가 피곤해서 늦잠을 잤다.

특히 아이리스는 탁상 위에 고개를 처박고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질질 흐른 침이 쓰다만 잉크와 뒤섞여 탁상을 물들였다.

누군가 그녀의 필기장을 들었다.

그것은 일기였다.

다소곳한 필체로 쓰인 줄글.

그녀가 정성 들여 쓴 여행의 기록은 누가 봐도 훌륭했다.

독특한 문체와 명료한 묘사로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빨라졌다.

한 글자씩 읽을 때마다 일기에 담긴 경험이 머릿속에 빨려들었다.

그들이 헤쳐 온 여정.

끝이 보이지 않았던 고통.

그가 대륙에 남아야만 했던 이유.

머릿속에 떠오른 생생한 경험들이 사라진 공백을 채워줬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일기장을 덮었을 때였다.

“꺄아아악!”

아이리스가 비명을 질렀다.

샤네트와 헨릭이 깜짝 놀라며 깨어났다.

“무, 무슨 일이에요?”

“젠장. 아침 댓바람부터 웬 비명이냐?”

아이리스가 뺨을 붉히며 달려들었다.

“강윤수가 내 일기를 읽었단다!”

그러나 사내는 아이리스의 돌진에도 불구하고 일기장을 지켜냈다.

심지어 그녀가 다가올 궤도를 읽어내고 미리 피하기까지 했다.

샤네트, 헨릭은 물론이고 벽면에 머리를 부딪친 아이리스도 놀랐다.

“강윤수 님……? 설마……?”

사내는 침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침대맡에 놓인 술잔을 들었다.

강윤수는 술을 마시고서 말했다.

“기억 돌아왔어.”

세 사람은 눈을 크게 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샤네트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제, 제가 누구인지 아세요?”

강윤수는 세 사람을 천천히 가리켰다.

“샤네트 엘로그란. 헨릭 엘리커슨. 아이리스.”

“몸은 괜찮으신 거예요?”

“평소대로야.”

그 이상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샤네트가 그를 껴안았다.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어요. 제발 걱정 좀 끼치지 마세요.”

강윤수도 나지막이 말했다.

“고마워.”

아이리스가 훌쩍이면서 강윤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강윤수가 기억을 되찾아 정말 기쁘단다!”

“숨 막혀.”

그제야 두 여자가 그에게서 떨어졌다.

헨릭은 픽 웃었다.

“이제야 좀 늘어지게 자겠구만. 그런데 기억은 어떻게 되찾았냐?”

“아이리스의 일기를 읽었어.”

“신기하군. 과거를 얘기해 줘도 기억은 못 찾지 않았냐? 그런데 일기장으론 기억을 되찾았다고?”

강윤수는 일기장에 손가락을 뗐다가 금방 다시 잡았다.

“그 대신 일기장을 놓아버리면 기억이 희미해져.”

한세현은 말했다.

오랜 경험이 담긴 물건에 접촉하면 기억이 일시적으로 돌아온다고.

줄곧 여행해 오며 매일 애정을 담아 정성껏 여정을 기록한 책.

그래서 아이리스의 일기에 기억을 보존하는 힘이 생긴 것이다.

아이리스가 발개진 얼굴로 울먹였다.

“앞으로도 강윤수가 그 일기장을 계속 갖고 있어야 한다는 거구나.”

“제가 나중에 파이를 구워드릴게요, 언니.”

샤네트가 위로했다.

“그게 정말이니?”

상심해 있던 아이리스가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그럼 이제 강윤수가 일기장의 새로운 주인이구나. 그러니 그 일기장에 이름을 지어주렴.”

“인마, 뭔 일기장에 이름을 짓냐?”

헨릭이 어이없어했다.

그러나 아이리스는 단호했다.

“이름은 몹시 중요하단다.”

“그래서 동물들한테 백설이나 녹두 같은 이름을 지어줬냐?”

아이리스는 빈정거리는 헨릭을 째려본 다음 강윤수에게 말했다.

“강윤수가 내게 아이리스란 이름을 지어줬듯 일기장에게도 좋은 이름을 붙여줬으면 좋겠구나.”

강윤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합한 이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반복된 회귀 끝에 맞이한 일천 번째 삶에 관한 기록.

그 자신만을 위한 일대기.

환한 햇빛을 받으며 글씨가 빼곡히 적힌 페이지가 넘겨졌다.

“일천회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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