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Instruction Manual

247. regression manual

박물관 관리인 막스(3)

“뭘 또 못 들은 척하고 그러시나…. 박물관이라니까.”

-어… 어어?

“이 박물관. 내놔.”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박물관, 같이 한번 운영해 보자니까. 뭐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니고….”

-네, 네가 관리인에 자리에 들어선다고 해도 저장되어 있는 물건을 가져가는 것은 시스템이 허락하지 않아. 그건 허락되지 않은 일이야.

“그건 나도 알아. 여기 오는 도중에 몇몇 개는 여전히 보호 받고 있다는 걸 확인했거든. 탐험을 완료해야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게 여기 규칙이니까. 그 규칙은 깨부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고. 내가 필요한 건 아이템이 아니야. 아! 내 정신 좀 봐. 일단 그전에 고립된 이들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들어야지.”

-…….

“참고로… 걔들 가지고 되지도 않는 거래할 생각은 하지도 마. 수 틀리면 진짜 전부 박살내 버릴 거니까. 나도 대륙이 붕괴하는 건 가슴 아파. 제발 나를 나쁜 길로 이끌지마. 응? 나 얌전하고 착한 사람이야.”

고립된 이들의 위치를 물어보자 눈알을 굴리는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조금 거친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지사.

아마 현재 박물관에 있는 인간들을 상대로 거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택도 없지.’

검은백조를 생각하면 당연히 고립된 이들의 구출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 작업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거래의 여지는 없다는 걸 못 박아 둬야 한다는 거다.

심사가 뒤틀리면 정말로 모든 걸 뒤 엎을 정도로 사이코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게 중요했다.

-그렇지만… 그건….

“표정이 조금 불편해 보이네.”

-어….

“이거 아무래도 내가 우리 박물관 관리인 막스를 불편하게 한 모양이네. 그렇지?”

-아니 그런게 아니라….

눈깔을 희번뜩 하게 뜬 것은 당연지사.

정하얀이 화가 났을 때의 표정을 최대한 유지하자 정말로 나를 사이코 바라보듯 쳐다보는 놈의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아까도 나를 미친놈 보듯 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직접적이다.

“내 부탁이 너무 무리한 요구였던 모양이야. 내가 아주 크은 실수를 할 뻔했어. 그렇지 않습니까? 디아루기아?”

“그게….”

“정말로 그런 모양이네! 내가 박물관 관리인 막스를 불편하게 했어! 내가 잘못했네! 격 떨어지는 필멸자가 잘못했어! 내가 감히 균열을 수호하는 박물관 관리인을 화나게 만들다니! 내가 아주 큰 실수를 했구만!”

화가 났다는 듯 옆에 있는 벽면을 몽둥이로 두들기기 시작.

콰직! 쾅!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솔직히 위력도 형편없다.

팔도 뒈지게 아프고 벽면은 부서지지 않았지만 효과는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다.

“아주 다 하지 마! 박물관 운영도 하지 말고! 탐험도 하지 말고! 봉인도 하지 마! 아무것도 하지 마!”

콰직!

쾅!

혼자서 하려니까 조금 힘들다. 역시나 이럴 때는 합을 맞춰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리라.

안기모나 박덕구라도 불러오고 싶었지만 디아루기아의 표정을 보니 외부의 도우미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 역시 막스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정신 나간 사이코패스를 바라보는 듯한 표정.

‘이거 연기야, 이 여편네야. 오해하지 마….’

‘이런 게 내 아이의 아빠라니’라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디아루기아의 얼굴에 수심과 걱정이 드리우고 있었다.

디아루기아가 최근 조금 이상해진 것도 사실은 나 때문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

오해를 풀고 싶기는 했지만 금발 머리의 꼬맹이를 보니 이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디아루기아의 표정을 보고, 이게 연기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솔직히 이제는 숨이 차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자 부들부들 떨리는 동공으로 나를 바라보는 관리인 막스와 디아루기아가 시야에 비친다.

조금 무기력한 모습으로 보일 줄 알았는데 저들의 눈에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미친놈으로 비치는 모양.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후우… 후우… 후우….”

-…….

“막스 씨, 이런 이야기 들어봤어요?”

-무슨… 소리를….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는 거…. 내가 지금 당신에게 큰 호의를 베풀고 있다 이 말입니다, 관리자 씨. 아주 좋은 제안이라니까. 모두가 행복해지는 엔딩이라고….”

타이밍 좋게 입을 열어오는 디아루기아.

“수락하세요.”

-당, 당신까지….

“어서요. 빨리요. 저 인간은 진심입니다.”

말을 애써 속으로 집어 삼키는 막스를 보니 굉장히 재미있었다.

디아루기아의 목소리에서 엄청난 신뢰감을 느낀 모양인지 박물관 제어 장치와 내 쪽을 번갈아 보는 게 시야에 비쳤다.

솔직히 내 돌발 행동이 결정적이었다기보다는 디아루기아의 어시스트가 결정적이었던 것 같은 느낌이다.

그녀 역시 대륙이 온전한 걸 기원하고 있는 만큼 최대한 막스가 거래를 받아들이기를 원하고 있을 것이다.

똘똘이를 인질로 잡고 있었던 내 모습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질린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표정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다.

‘그때가 진짜 쓰레기 같았지….’

그나마 지금은 양호한 편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후우… 후우….”

“빨리 수, 수락하세요. 저 인간의 성향은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수락한다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겁니다. 제가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렇게까지….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 있기는 하지만 저 역시 대륙이 붕괴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네. 절대로요.”

-끄으으으으윽….

디아루기아에게 제압당한 채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관리인 막스의 모습은 피해자 그 자체다.

조금 미안해지기는 했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다.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막스 씨. 제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세요.”

결국에는 부들부들 몸을 떨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

‘해냈어.’

다른 관리인을 들여올 권한이 녀석에게 존재했던 모양이다.

사실은 방법이 없다고 잡아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는 했지만 어찌됐든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사실상 박물관 자체는 거의 모든 기능을 정지한 상태.

메인 회로에 남겨져 있던 마력을 예비 프로그램에 모조리 돌렸으니 이전과 같이 던전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미안하긴 하네.’

사람 하나 잘못 들였다가 사랑스러운 보금자리가 완전히 풍비박산이 난 셈이다.

자랑하던 전시관들은 박살이 났고 그 안에 있던 물건들도 대부분 허망하게 부서졌다.

이곳에 들어온 첫 날 자신감 있게 박물관이 보유한 콜렉션을 자랑하던 녀석의 모습이 눈에 훤하다.

자랑스러워하던 박물관이 순식간에 쓰레기장이 되어 버렸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내가 마치 역병처럼 느껴지리라.

눈물을 훔치며 입술을 꽉 깨물고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은 가관.

디아루기아는 왠지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녀석을 포박하고 있던 손을 풀었고 녀석이 잠깐 마법진을 만지작거리자 곧바로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균열 박물관의 5등급 관리자 막스가 균열 박물관 관리인의 자리를 제안하셨습니다.]

[승낙하시겠습니까? 직업은 변경되지 않습니다. 승낙 시 칭호가 생성됩니다.]

[균열 박물관 5등급 관리자]

[균열 박물관의 관리자 5등급으로 열람할 수 있는 정보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5등급 관리자의 기본적은 권한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좋네.’

여러모로 천천히 살펴봤지만 문제되는 점은 없다.

노예 계약 같은 형태도 아니었고 디아루기아 때처럼 목숨을 공유하는 스타일도 아니다.

가볍게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이건 타이틀 같은 거구나.’

혹시라도 전직을 하게 되면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도 있었지만 칭호가 생성된다면 환영이다. 곧바로 승낙을 선택하자 다시 한번 메시지가 들려왔다.

[칭호가 생성됩니다.]

[균열 박물관 5등급 관리자]

[마력이 +1 올라갑니다.]

‘나이스!’

그 와중에 들려오는 기분 좋은 소식에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

예상은 했지만 타이틀이 있는 칭호.

겨우 1밖에 올려주지 않았지만 더 이상 마력의 성장이 불가능한 나에게는 이 정도도 감지덕지다.

동시에 여러 가지 정보들도 상태창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균열 박물관 관리인의 권한과 책무 같은 게 적혀 있기는 했지만 자세하게 읽어보지는 않았다.

어차피 책무는 막스가 전부 하게 될 테니까.

나는 권한만 누리면 된다.

그렇지만 머릿속에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내린다.

순간적으로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들인 덕분인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 였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오?’

가장 신기했던 건 마음의 눈으로도 전부 확인할 수 없었던 제어 장치들이 눈에 보였다는 것이었다.

5등급 관리자가 된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자세한 정보들을 마음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됐다.

간단한 설명은 물론, 조작법과 매뉴얼까지 모조리 눈에 보인다.

마치 누군가가 이 사태를 수습해 달라고 부탁까지 하는 것같이 느껴질 정도로 친절하다.

‘그래도… 쉬운 작업은 아닐 것 같은데….’

매뉴얼이 있음에도 이건 쉬운 작업이 아니다.

관리자의 시점에서 해결책을 그리며 바라보니 지금 현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더 잘 알 수 있게 됐다.

만약 내가 저 몽둥이로 제어 장치를 후려치기라도 했더라면 정말로 박물관이 붕괴할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수습할 수 있겠어.’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도 질질 짜며 혼잣말을 하고 있는 막스가 눈에 들어온다.

-끄으으으윽. 박물관은 끝났어…. 끝났다고…. 수호자님… 메텔 수호자님…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아이 또 왜 울고 그러십니까. 관리자님. 직장 동료가 들어왔는데 기뻐하지 않으시고….”

“끄어어어어엉…. 끄으으윽….”

“거, 잠깐 자리 좀 비켜 보세요. 밖에 있는 원정대원한테 생존자 위치 전달해 주시고요.”

-또,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무슨 짓을 하긴 또 무슨 짓을 합니까. 이제는 내 박물관인데. 저 발광하는 고대신을 수습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잠깐만! 그건 함부로 만지면 안 돼!

“당신이나 잠깐만 나와 보세요. 처음이라 잘 될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으니까.”

-네가 뭘 알아!?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네. 아니, 근데 왜 자꾸만 반말이야? 어?”

-뭐, 뭘 알아요?

“나도 내가 뭘 아는지 몰라. 눈에 보이니까 아는 거지. 왜, 너는 안보여?”

-안 보입니다….

“그것밖에 안 되니까 박물관을 개판으로 운영하지. 쯧.”

-…….

“박물관이 이 지경이 됐는데 4지구 보조 전력은 왜 안 돌리고 있었던 거야? 매뉴얼에도 나와 있구만….”

-어?

“메인 프로그램은 손상이 아니라 다운된 것 같은데… 예비 프로그램에 마력을 끝까지 때려 박지 않은 건 다행이네. 그리고 어? 쓰지도 않는 네 더미는 왜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건데? 당장 해체하고 그것도 마력으로 돌릴 거야. 저런 마력이라도 아쉬운 타이밍이니까.”

일을 하려니 조금 걸리적거린다.

“좀 옆으로 비켜. 그리고 메인 전력으로 유지되고 있는 전시품들에 들어가고 있는 마력 공급 전부 차단한다. 몇 개라도 살리는 게 낫지…. 이대로 갔으면 내가 박살 내기 전에 봉인이 완전히 풀렸겠네.”

-어어어어?

“어우…. 이거 정말 큰일 날 뻔했네. 디아루기아, 고립된 검은백조 원정대원은 5지구 32구역에 있을 겁니다. 생각보다 상태가 좋아 보이는 것 같은데 안심하라고 전해주시고 안내해 주세요. 그리고 막 사원.”

슬쩍 이름을 부르자 바짝 긴장한 것 같은 얼굴이 눈에 보였다.

-네? 뭐, 뭐 도와드릴 거라도… 있습니까? 뭘 할까요? 지금 당장 옆에서 보조를!!

“커피 좀 타와.”

이 한 몸 희생해 대륙을 지켜야 한다는 감정이 무럭무럭 샘솟기 시작한 바로 그때였다.

[전설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전설 등급 퀘스트-대륙 구원(0/1)]

[보상-(칭호) 대륙 수호자]

[대륙 수호자]

[대륙의 붕괴를 막은 원정대원에게 내리는 칭호입니다. 모든 스텟이 +1 영구적으로 올라갑니다.]

화로에 장작이 들어간 것.

‘소중한 후손들이 살아갈 대륙을 붕괴시키는 건 절대 용납 못 하지.’

그림으로 그린 듯한 태세전환이었다.